목사님은 P K 교회 목사님과 같아야 되는 거야!

10 여 년 전에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한 때 중고등부 학생을 담당하셨던 1.5세의 S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S 목사님의 부인은 학교 교사로 슬하에 아들과 딸을 두고 있습니다. 아들은 나면서부터 장애아로 태어나 일반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장애아를 위한 특수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가족이 한 교회에 다니지 못하고 부인과 아들은 장애아를 위한 예배 시설이 있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S 목사님은 항상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딸과 함께 교회를 오는 것입니다. 딸은 초등학교 1-2학년 생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활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당 안에서도 조신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기웃 거리며 매사에 참견하기를 좋아합니다. 필자가 사용하는 목자 실에도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듭니다. 다른 아이 같으면 어려워서라도 목사님 방에 들어오길 꺼려하는데 교육목사님의 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아버지 목사님은 마땅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어린 딸을 자주 핀잔을 주며 활동에 제재를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딸과 아버지 목사님이 교회 안에서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다툼이라고 보다는 충돌이라고 할까요? 모르기는 해도 둘의 관계는 교회 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집안에서부터 벌이진 일로 생각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버지 목사님이 어린 딸에게 그렇게 큰 소리로 야단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필자가 있는 주변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러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어린 딸을 야단치는 목사님이 한편으로는 안 되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빠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으면 저러실까?

그러면서도 그렇게까지 역정을 내는 것은 과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딸이 무리한 행동을 해도 교인 중 누구하나 어린 아이를 미워하거나 야단치는 분은 없었습니다. 어린이는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육목사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딸답게 얌전하길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목사님이 딸을 훈계하는 큰 소리를 여러 번 교회 안에서 들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은 아빠의 계속되는 꾸지람에 대하여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빠 목사님은 더 큰 소리로 역정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야단치는 음성으로 보아선 금방 매를 들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그 정도 되었으면 보통 아이라면 기가 죽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향하여 책망하는 아버지 목사님을 향하여 누구도 생각지 못한 충격적인 말을 아버지 얼굴을 향하여 두 눈을 부릅뜨고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평강교회 목사님과 같아야 하는 거야!] 그 말은 목사로서 자격이 미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로서는 그럴 수도 있지만 교회 안에서 목사로서는 아무리 딸이라도 자기에게 그래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격한 언행, 지나친 분노, 관용과 사랑이 없는 목사라는 말로 들려졌습니다.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목사님이나 함께 듣고 있던 교우나 필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놀라움이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아야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 목사님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10여년의 세월이 지나갔지만 지금도 종종 귓전에서 어리아이가 불을 토하듯 쏟아낸 그 말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그런 감정이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런 표현 능력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후부터 아이들을 보는 나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섬기고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알게 하신 겁니다. 수년 전 3 명의 딸을 가진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큰 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잘 해 주려고 하다가도 가끔 화를 내고 매를 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빠는 어떻게 자신들을 길러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기억하기로는 두 딸과 아들에게 매를 가한 적이 없으며, 너희들이 화를 내지 않도록 잘 자라주어서 늘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상처가 되는 꾸지람이나 야단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당부의 말을 했습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501

40여 년 전 K 장로님과의 약속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의 교차로에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니 한동안 잊고 지내던 K 장로님과의 약속이 되 살아났다.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74년 가을의 어느 날로 기억이 되었다. 필자가 1973년 11월 미국에 처음오기 전 한국에서 어려운 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으로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의학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미국의 큰 병원에서 치료 받을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수단으로 택한 것은 당시 서울시청 뒤에 위치한 영자신문인 Korea Herald 신문사였다.

수원에서 신촌의 세브란스 병원으로 치료를 받기 위하여 한 달에 서너 차례 올라갈 때마다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면 곧바로 신문사로 달려간 것이다. 신문사는 2층에 있어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당시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한 걸음을 옮기고 쉬었다가 다시 걸어서 10여분이 걸려할 정도로 위중했다.

당시 헤모글로빈의 수치가 심할 때는 3-4까지 내려 갈 정도로 앉고 서는 것도 힘이 들었던 때였다. 계단을 올라가 편집국 문을 열고 들어가면 편집국에서 일하는 분들을 향하여 허리를 굽혀 크게 인사하며 “안녕하세요! 수원의 이상기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선 곧바로 뒤돌아 나오길 6개월을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김경해 기자로부터 전보가 왔다. 내일 아침 8시 반까지 조선호텔 4층 207 호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당시는 조선호텔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해서 이른 아침 첫 차를 타고 신문사로 향했다. 신문사에 도착해서 김경해 기자님과 사진기자 그리고 당시 하와이에 있는 영자신문의 미국인 교환기자와 함께 조선호텔로 향한 것이다.

그곳에는 Tulsa, Oklahoma에 본부가 있는 선교단체인 David Livingstone Missionary Foundation의 회장인 Dr. Pedigo 박사가 머물고 있었다. 선교단체는 한국에서 어린 아이들을 미국인 가정에 입양을 하고 한국의 여러 곳의 고아원을 돕고 있었다. 김 기자는 Pedigo 박사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의 기관에서 고아들을 입양해주고 여러 곳의 고아원을 지원해주는 일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그동안도 좋은 일을 해 오셨지만 이번에 Korea Herald 영자신문사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은 이상기군을 살려 달라고 한 것이다. 이후 영자신문에 Pedigo 박사님과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미국에서 치료 받게 되었다는 기사가 보도 되었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 선교단체의 초청으로 UCLA 대학병원으로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도 치료 방법은 없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필자가 앓았던 병을 치료하는 약이나 수술방법은 아직도 없는 것이다. 당시 필자의 주치의는 Dr. Nicolas Costea 박사로 혈액학 주임 교수였다.

이듬해 7월 이었다. Costea 박사는 반복되는 골수 검사의 결과에 대하여 놀라운 사실을 말했다. 그동안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던 병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는 것이다. 왜 나앗는지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완전하게 나았다는 것이다. 이제후로는 정상적인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 무엇이든지 다 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죽을 사람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틈틈이 의학 서적을 통하여 병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치 진단을 받은 후 그해 여름에 귀국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귀국을 하고나서 불안해 지기 시작한 것이다.

재발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의 공포에서 보름간을 지내다가 다시 미국으로 가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 싶은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비자를 내준 Dean Martin 영사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신기한 것은 1970년 당시 해외 방문 후 귀국하는 단수 여권은 공항에서 회수 했는데 나의 것은 그대로 있었다.

당신의 나라의 도움으로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 난치병에서 살아나 귀국하였는데 한국에 오고 나서 재발에 대한 두려움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미국에 가서 완전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길 원한다는 내용과 함께 여권을 동봉해서 등기우편으로 보냈다. 그로부터 2주후 Dean Martin 영사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대사관 내에는 이상기군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다시 미국에 가길 원하면 이 편지를 가지고 대사관을 방문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보냈던 여권을 다시 보내온 것이었다. 그 편지를 가지고 대사관을 방문해 미국 비자를 다시 받을 수 있었다.

곧바로 김포공항으로 달려가 출입국 관리에게 문의 했다. 이 여권과 비자를 가지고 미국으로 갈수 있냐고 했더니 안 된다는 것이었다. 비자는 살아있지만 여권은 단수여권이기에 유효기간이 만료 되었다는 것이다.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시 인근 우체국으로 가서 청와대 영부인 육영수여사님께 그간의 상황을 담은 도움을 구하는 속달 편지를 올렸다.

그런 다음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수원 집으로 3시간 후에 도착하니, 청와대의 전보가 먼저 날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 오전 8시 반 외무부 제2여권 과장을 만나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중앙청에 도착하여 외무부 여권과로 가니 담당부서의 여직원이 문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권 과장님은 연락을 받았다고 하면서 나의 여권을 달라고 하더니 그 여권 앞 페이지에 이 여권은 유효함이라는 큰 사각형의 인장을 찍어 주면서 미국을 잘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청사를 나오면서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서소문)십자군연맹을 방문해 다시 미국에 가게 된 것을 감사하는 인사를 하기 위해 김득황 회장님을 찾아간 것이다.

(김득황 장로님은 내무부차관을 역임하셨다)십자군연맹은 미국의 선교본부를 돕는 한국내 기관으로 미국의 선교기관이 한국의 십자군연맹을 통하여 초청장을 보내왔으며 그 동안 나에 대한 여행 서류를 도아 왔기에 다시 미국에 가는 것에 대해서 김득황(장로)회장님도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에 인사차 방문한 것이다.

처음 미국행 비자를 얻기 위해서 십자군연맹에서 두 번이나 비자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세 번째는 김득황 장로님이 직접 대사관의 담당 영사를 만났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이유는 십자군연맹의 직원으로 미국에 들어가서 체류기간을 넘기고 귀국하지 않은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군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고 설명했으나 받아드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김득황 장로님은 당시 나의 여권을 돌려주면서 미국 가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담당 영사와 격한 다툼을 벌였기에 비자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혼자 미 대사관을 방문해 비자 신청을 하고서 인터뷰를 거쳐 비자를 받은 것이다.

당시만 해도 미국행 비자 받기가 쉽지 않았을 때였던 것이다. 이런 것을 잘하는 김득황 장로님은 귀국한지 두 달 만에 그것도 단수비자가 아닌 복수비자를 받은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생각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감사의 인사차 방문한 필자를 향하여 김 장로님은 어떻게 어려운 미국 비자를 다시 받았으며 단수여권(유효기간이 지난 여권)을 어떻게 다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아해 하면서 여권을 보자고 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여권을 드렸다. 그러더니 자세히 살펴본 후 여권을 돌려주지 않고 당신이 앉은 책상의자 왼편 서랍을 열더니 그곳에 넣고는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여권은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미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고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 장로님을 향해 이 여권이 어떻게 유효여권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육영수여사님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권 돌려주시지 않으면 이대로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회장실 문을 박차고 나오자 김 회장이 따라 나와 나의 팔을 잡으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네가 미국에 다시가면 선교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는데 그리되면 한국으로 오는 재정 지원이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하나만 약속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미국에 들어가도 선교본부에는 알리지 않고 더 이상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 때문에 지원이 줄어든 다는 말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서 김 장로님으로부터 여권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올 때는 선교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비행기 표를 구입해서 들어온 후 지난 40여 년 동안 미국 선교본부에는 지금까지도 나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물론 한국의 김득황 회장이나 십자군연맹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생명을 구해주신 고마운 마음에 몇 번이고 선교본부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고 개인적으로는 Dr. Pediego 박사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수도 없이 전하고 싶은 마음이 이었지만 김득황 장로님과의 약속 때문에 마음으로만 항상 감사를 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의 가슴에 고마운 마음을 새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459

눈물로 고백 받은 집사님이 지은 죄!

지금으로 20여 년 전에 장성한 두 아들과 두 딸을 둔 가정의 가장이었던 K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한 동안 필자가 섬기는 교회를 잘 섬기시다가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교회로 옮겨 가신 후 일 년에 한 두 번씩 전화로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로 인연의 끈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로 안부를 물을 때 교통사고를 당하여 다리가 부러져 몇 달 동안 문밖출입을 하지 못하고 침대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곧 바로 자동차로 한 시간을 달려 집사님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부인 집사님이 2층 남편이 계신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병원 침대에 오른 쪽 다리를 공중에 매어 단채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K 집사님은 부인에게 부탁 했습니다. 내가 목사님하고 조용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문을 닫고 아래층에 내려가 있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집사님은 필자의 손을 부여잡고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주님이 정말로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면서 눈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집사님 부부는 오랫동안 수입이 좋은 가게를 운영하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으셨습니다. 좋은 지역에 좋은 집을 사시어 여섯 식구가 남부럽지 않은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4명의 자녀들이 이곳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세 자녀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있을 때 였습니다.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부부가 심각한 싸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2년 동안 한 집에 살면서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사셨다고 했습니다. 남이 볼 때는 행복한 가정이었지만 당사자인 부부는 지옥 같은 삶을 사신 겁니다.

각방을 쓰는 것은 물론이요 함께 식탁에 앉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K 집사님에게 대화의 상대자가 생겼습니다. 말이 대화의 상대이지 여자가 생긴 것입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지금의 아내와는 더 이상 가정을 이루며 살 수 없다고 판단을 하고서 새로운 삶을 새 여인과 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부인에게는 아무런 통보도 상의도 하지 아니하고 새 여인과 타주로 출발하여 새 가정을 만들려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타고 갈 자동차의 오일체인지를 평소와 같이 집에서 하였던 것입니다. 집사님의 집에는 자녀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까지 여러 대가 있지만 매번 오일체인지는 정비소에서 하지 않고 집 마당에서 해왔습니다.

미국에 사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늘 해오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날 이른 아침에 평소처럼 자동차 밑으로 들어가 오일을 교환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일을 마치면 오전 11시에 약속한 장소에서 여인을 만나 네바다 주로 출발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고가 났습니다.

자신의 자동차가 뒤로 굴러 그 밑에 있던 집사님의 오른쪽 허벅지 다리를 넘어간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오른쪽 허벅지 다리뼈가 부러진 것입니다. 사고로 지난 6개월 동안 죽게 고생을 하는 동안 크게 깨달았습니다. 부인과 가정을 버리고 도망가서 새사람과 행복한 삶을 계획한 것이 큰 죄인 것을 안 것이었습니다.

부인과 자녀들에게 죄가 될 뿐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서 교회와 하나님께 큰 죄가 되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나의 범죄 계획을 하나님이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다리를 부러뜨리지 아니하시면 죄악의 구렁텅이로 내려갈 것이기에 불쌍히 여기시고 자신의 다리를 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자신을 사랑하시는 줄 몰랐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에 이민 와서 산 것이 나의 노력과 열심히 살았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고백을 하는 동안 집사님은 뜨거운 눈물을 반복해서 흘리시면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이런 내용은 목사님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내도 모르고 자녀도 모르고 주변 어느 누구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서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집사님의 진실한 회개의 고백을 듣고서 우리는 함께 기도 했습니다. 집사님을 그토록 사랑해주신 주님의 은혜와 멸망의 직전에서 구원을 허락하심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 남편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성심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섬기시던 교회에서 장로가 되셨고 부인은 권사님이 되셨습니다. 지금은 먼 곳으로 농장을 사서 이사 가시어 무너진 가정을 회복하고 충실한 믿음의 종으로서 아름다운 노후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431

목사님은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2 년 전 어느 주일에 낮 예배를 마치고 2 층 친교실에서 점심 식사가 끝나갈 즈음에 권사님 몇 분이서 둘러 앉아 심각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대화의 내용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얼굴 표정으로 보아서 매우 심각한 내용의 말이 오고 간 것으로 짐작이 되었습니다.

무슨 내용이기에 둘러앉은 권사님들의 얼굴이 그토록 심각하였을까를 생각하면서 오후 예배를 준비하기 위하여 아래층 예배실을 향하여 계단을 내려오는데 뒤이어 권사님 중에는 나이가 가장 젊은 권사님이 뒤따라 내려오더니 필자를 향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것이 무엇인 줄 아세요”

갑작스런 질문을 받고서 잠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목회 경험으로 보아서 돌발적인 질문에는 반듯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권사님의 삶이 힘들어 보이더니 필자가 알지 못하는 어려운 일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묻는 질문에 곧 바로 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만일 질문하신 권사님이 원하는 답을 드리지 못했다가는 권사님이 힘들어 하는 상처를 더 아프게 건드릴 수 도 있고 더 힘들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묻는 말에 즉시 대답하지 못하고 도리어 권사님을 향하여 그게 뭔데요 하면서 질문하신 권사님이 스스로 말씀하기를 유도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서럽고 힘든 것은 그 어떤 아픔보다도 과부의 서러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날 그 자리에서 권사님들이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었습니다.

어느 권사님은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탄식하는 말을 하신 것이고 다른 권사님은 자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그 문제로 아픔을 호소하신 것이며 다른 권사님은 고부간의 갈등으로 한탄하신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K 권사님은 30여 년 전 젊은 나이에 교회에 출석하시어 지금까지 변함없이 섬기고 계십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남편이 오랜 병상에서 투병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남편 생전에는 생업을 위해서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남편의 직업이 비교적 좋은 보수를 받는 직장이었기에 부인은 일을 하지 않고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주부로서 주위의 부러움을 사며 부족함이 없이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건강하던 남편이 뜻하지 않은 폐암 선고를 받고 이어지는 수년간의 병원과 가정에서의 길고 지루한 투병 생활로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어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권사님의 기억에서 지금 과부로서 힘들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그래도 병든 남편이 곁에 있을 때가 더 좋았던 때인 것을 알기 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가진 문제가 가장 크고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며 호소 하셨지만 K 권사님이 연로하신 권사님들의 하소연을 들을 때에 그런 문제는 자신에게 비하면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지난 십여 년 동안 남편 없이 철없는 딸을 부양하며 젊은 과부로 힘겹게 살아온 것을 연로하신 권사님들에게 하소연 한들 누가 알아주겠으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필자에게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K 권사님에게 그 말을 듣기 전 까지는 이 땅에서 과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우리가 미처 알 수 없는, 아니 알지 못하는 어려운 삶인 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혼자만의 몸도 아니고 다른 두 명의 가족을 돌보며 사셔야만 하는 권사님의 고단한 삶을 생각하면서 정말로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K 권사님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얼마나 피곤하게 사셨을까? 몸도 아프고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하나 뿐인 딸과 외손자의 양육을 책임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 식구의 생계를 위해서 오늘도 두 일터를 오가며 열심히 일하시는 권사님을 존경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권사님의 가정에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411

“목사님은 나의 엄마를 아시나요?”

얼마 전 고 최순일 박사의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장례식 전에 고인의 아들과 두 번의 만남을 가졌었습니다. 어려서 본 후 20여 년 만에 처음 만난 것입니다. 장례 절차를 의논하던 중 고인의 외아들인 33살의 Alex가 갑자기 뜻밖의 질문을 필자에게 이렇게 했습니다. “목사님은 나의 엄마를 아시나요?”

고인을 필자가 처음 만났을 때 부인의 존재는 없었습니다. 교회에 올 때도 항상 아버지와 아들만 왔었던 것입니다. 이혼을 했는지 사별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본인들이 말하지 않는 가정 사에 대해서 아무리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라도 부인의 존재와 아이 엄마에 대해선 물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엄마의 존재를 묻는 아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지구상에 홀로 남아 있다는 생각과 오랫동안 엄마를 그리워하며 살아온 지나온 삶이 아픔으로 그를 더 슬프게 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머니의 존재를 몰라도 이 목사는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엄한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 때문에 감히 엄마의 존재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같은 질문을 아들에게 했습니다. 너는 너의 엄마에 대해서 얼마나 기억을 하고 있느냐고 했더니 자신도 엄마에 대해서 아무런 기억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헤어져서 엄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수일 후 장례식 날 예식을 마치고 조객들과 고인과의 작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유가족이 외아들 혼자여서 너무 쓸쓸해 보여 순서를 맡았던 목사님들이 아들 옆에 나란히 서서 조객들과 인사를 하고 있을 때 한 나이 드신 여자 분이 Alex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내가 너희 엄마 친구다. 네가 태어날 때 내가 거기 있었다”라면서 울음을 보였습니다.

그 말을 바로 곁에서 듣던 나는 귀를 의심해야 했습니다. 즉시 그 분을 옆으로 모시고 엄마의 존재를 물었습니다. Alex 엄마가 살아 있습니까?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엄마를 만나게 해주어야겠습니다. 그러자 친구 분이 차분하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Alex 엄마가 만나려 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천륜인 엄마와 아들이 왜 만나지 못합니까? 그러면서 나의 명함을 주면서 제게 전화를 꼭 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엄마의 친구 분의 남편 되시는 분이 필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Alex 엄마의 이름과 성씨 그리고 일하는 직장의 회사와 전화번호를 알려준 것입니다. 본인들이 Alex 엄마에게 전화를 하는 것보다는 목사인 내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곧바로 전화를 했습니다. 고인의 사망 소식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내가 네 엄마 친구’라는 말을 듣고서 Alex가 크게 흐느껴 울었던 내용을 전하면서 아들과 만나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마음에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엄마와 아들이 만나는데 무슨 준비가 필요합니까? 이산가족도 만나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들의 소식을 전해주면 기뻐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순간 Alex 엄마도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평생 힘들게 살아 오셨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들의 근황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했습니까? 직업은 무엇입니까? 사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러면서도 아들의 전화번호를 달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속히 만나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했더니 마음이 정리가 되면 필자에게 전화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둘은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아직은 Alex에게 엄마의 존재를 이야기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어떤 사정이 있기에 그런 것인지!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언제쯤이나 마음을 정리하고 아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인지? 그럴 날이 오기는 할 것인지?

그토록 그리워하던 엄마가 살아서 같은 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기뻐할 터인데 하는 생각에 오늘도 전화를 기다렸지만 벨은 울리지 않았습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355

고 최순일 박사의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로스앤젤레스 한인사회의 올드타이머 중 한 분이셨던 고 최순일 박사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은 인터넷 신문을 통하여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서너 시간 후 고인의 외아들이 필자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장례식을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장례식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전화로 간단하게 절차를 설명하고 한국장의사에서 이틀 후 만나서 장례절차를 상의하기로 한 것이다. 고인의 아들에게 전화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고인과 아들은 한 때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였었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에 교회를 떠나 있었다.

아들과 약속한 날 장의사에 도착하니 장례절차를 의논하기 위해서 나와 있는 분이 미주주부클럽연합회 강금자 회장과 아들이 살고 있는 집 주인이 나와 있었다. 두 분 다 가족관계는 아니었다. 도움을 주기 위해서 나온 것이다. 넷이 머리를 마주 대하고 앉아서 먼저 아들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남기신 유언과 재산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남기신 재산이 하나도 없고 지난 수년 동안 혼자 아파트에 사시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자신도 아버지 장례식을 치를 경제력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필자에게 전화할 생각을 했느냐고 했더니 일을 당하면 이상기 목사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장례식을 위해선 묘지 구입비용을 포함해서 대략 2만 달러의 경비가 소요되는데 변변한 직장을 가지지 못한 아들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에게 아버지의 장례를 간단하게 치를 것을 제안하기에 이른 것이다. 화장을 권한 것이다. 지금까지 35년 동안 한 교회를 섬겨오면서 이런 권면은 처음 이었다.

화장을 해서 바다에 뿌리자는 필자의 말에 아들은 당황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설득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갑을 열어 필자의 시신 기증 카드를 보여주면서 이해를 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는 5년 전에 의과대학에 시신을 기증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면 한 두 시간 이내에 시신이 의과대학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에게 필요로 하는 장기를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빠른 이송을 하기에 가족이나 교회 교인 누구도 시신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세 자녀들도 알고 동의하고 함께 사인을 했으며 교회에는 [이런 장례식을 원합니다]라는 내용의 문서를 당회에 비치하게 한 것이다.

내가 원하는 나의 장례는 1)신문에 부고를 내지 마시고 2)조화와 조의금은 사양해 주시고 3)예배는 한 번만 감사예배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4)그리고 매년 추도예배도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면서 나의 신앙고백으로 이렇게 써 놓은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나는 성경을 믿습니다. 나는 부활을 믿습니다. 나는 천국을 믿습니다. 나는 사도들이 고백한 사도신경을 믿습니다. 나의 몸은 죽었지만 나의 영혼은 살아서 주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시신을 감사함으로 주신 하나님께 돌려 드립니다. 이 일을 성실이 이행해 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2010년 1월.

이런 내용을 고인의 아들에게 설명하면서 나의 시신도 의과대학에서 필요한 부분을 사용하고 나면 화장을 하고 남가주 해안에 나의 가족도 모르는 장소와 시간에 뿌려진다는 것을 설명하므로 비로소 아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고 필자의 의견에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지라도 소요되는 경비가 6천 달러가 필요합니다.

이 때 함께 자리한 강금자 회장이 한국장의사 사장님께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한인 사회를 위해서 오랫동안 크게 헌신하신 고인과 불쌍한 외아들을 위해서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우리가 원한 것은 다만 1,000달러라도 깎아 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장의사 제임스 안 회장님이 무료로 봉사해 주기로 하신 겁니다.

너무 뜻밖의 귀한 선물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야 했습니다. 고인이 지난 수년간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아오셨지만 그 동안 한인 사회를 위하여 크게 섬기신 것이 이런 감동으로 이어진 것임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고인이 교회에 남기신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25년 전 어머니 주일이었습니다. 공원에서 야외예배를 드릴 때 보물찾기 선물로 25인치짜리 컬러 TV를 기증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웬만한 가정에선 그런 TV를 가지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온 교인이 그 선물 받기를 소망했습니다.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은 주일학교 학생의 친구가 처음 데리고 나온 학생이었습니다. 교인이 아닌 아이에게 선물을 줄 수 없다는 일부의 말에도 주었던 것은 그럴 경우 교회를 평생 떠나 살 것 같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2015년 10 월 20일 새벽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318

누가 ‘청아제’를 아시나요?

‘청아제’는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에 있는 한의원의 이름입니다. 필자가 ‘청아제’를 알게 된 것은 5년 전이었습니다. 집 사람이 치료 받으러 다니던 병원의 매니저 이셨던 이 여사님의 인도로 소개 받아 간 곳입니다. 당시 집 사람은 백혈구 급강하로(백혈구수치가 900까지 내려감) 인하여 치료를 거의 포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처음에는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만 인도하신 매니저 선생님이 지난 10여 년 동안 집 사람을 위하여 너무나 헌신적으로 섬겨 주셨기에 그 분을 믿고 한의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매니저 이 선생님은 집 사람을 위하여 그 동안 많은 눈물을 흘려주신 분이십니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서 제일먼저 만나는 분은 언제나 매니저인데 그 동안 그 분의 얼굴만 보아도 집 사람의 병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집 사람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분의 얼굴은 언제나 우리에게 집 사람의 건강을 읽을 수 있는 거울과 같았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만났을 때 웃음을 보이면 우리는 즉시 희망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 분의 얼굴에 수심이 있거나 집 사람을 대할 때 눈물을 보일 때는 함께 울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 분의 인도를 따르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 ‘청아제’에서 진료를 시작했을 때 진료비를 담당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곳에 다니고 나서부터 집 사람에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백혈구의 수치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잃었던 입맛이 돌아와 밥을 잘 먹기 시작하면서 다시 키모테라피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이후 지금까지도 치료를 중단하지 아니하고 계속하고 있는 것은 ‘청아제’의 도움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기적이 있습니다만 집 사람의 건강이 ‘청아제’를 통하여 놀라울 정도로 회복 되어가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 내외에겐 기적 중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청아제’를 운영하시는 원장 장 박사님은 한국에서 해병대 군 법무관 및 검사로 한 때 일 하셨던 법조인이셨습니다.

이 후 법대 교수를 하시다가 콜로라도 주에 있는 미 공군 사관학교 교환교수로 오셨습니다. 당시 중학생과 초등학생 이었던 두 아들이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예일대학과 프린스턴대학에 들어가므로 두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 교수직을 포기하셨습니다. 두 아들은 지금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아들은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으며 큰 아들은 외과의사 수련을 받고 있는 레지던트로 동부에서 의대를 다니고 있습니다. 아들의 장래를 위하여 자신의 전공 분야를 포기하고 새로운 직업을 위해서 한의사가 된 것입니다. 현재 한의과대학 박사원 교수(한의학 박사학위 3개를 받으셨고 지금은 또 다른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계십니다)를 담당하고 계십니다.

‘청아제’의 치료는 강화도에서 양질의 쑥을 들여와 당일 사용할 재료를 원장 부부가 밤마다 손수 만들어서 사용하는 쑥뜸과 침 치료에 있습니다. 필자가 ‘청아제’를 소개하는 것은 아름다운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소속해 있는 남가주목사장로부부찬양단 단원이신 C 목사님의 사모님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외아들을 두고 있습니다.

3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으셨는데 지금은 온몸에 암이 번져서 병원에서 더 이상의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합창단의 여자 목사님이 강권하여 C 사모님을 ‘청아제’로 모시고 온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님의 사모도 ‘청아제’를 통하여 다시 힘을 얻고 지금까지 병원 치료를 잘 받아오고 있다고 소개한 것입니다.

처음 ‘청아제’에 왔을 때 도수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음이 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강제로 끌려오는 듯 했습니다. 자신의 몸의 상태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C 사모님이 치료에 더 적극적이지 못하셨던 것은 치료비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개척교회를 담임하시는 이민교회 목사님의 형편으로는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청아제’로 인도하신 목사님이 10회분의 진료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서너 번 치료를 받는 동안 사모님에게도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입맛을 잃고 식사를 하지 못하였는데 밥을 먹기 시작하신 겁니다.

다시 살 소망의 줄을 놓고 있었는데 이제는 다시 살 희망이 생기셨다고 말을 하시는 겁니다. 지금까지 감사하는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못해왔는데 요즘에는 사람과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불 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나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모님의 변하시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다른 환자분이(그분도 유방암 환자) 10회 분의 진료비를 선납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아니하고 또 다른 무명의 권사님이 C 사모님을 위해서 10회분의 진료비를 대납하셨습니다. 작은 돈이 아닙니다. 요즘과 같이 각박한 이민의 삶에서 아름다운 이 소식을 함께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더불어 지금까지 집 사람의 ‘청아제’ 진료비의 많은 부분을 담당해 주신 무명의 성도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297

목사장로부부찬양단 정기공연을 준비하면서!

오는 11월 29일 저녁 7시에 윌셔연합감리교회당에서 남가주목사장로부부찬양단 제8회 정기공연이 개최됩니다. 정기공연을 앞두고 40여명의 단원들이 온 마음과 정성을 모아서 매주 월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영락교회 소망관에서 연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본 찬양단 창립단원으로 지금까지 10년 여 동안 합창단을 섬겨오고 있습니다.

평소 음악에 대해서 달란트가 부족한 것을 알기에 필자가 찬양단 단원이 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교회 성가대원으로도 활동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찬양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필자가 지금까지 합창단을 섬겨온 것은 특별한 은혜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합창단에 들어오게 된 것은 친구 목사님의 강력한 권고를 뿌리칠 수가 없어서였습니다. 두 달 동안 계속되는 강요에 이끌려 합창단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찬양이 좋아서였습니다. 잘 따라하지는 못해도 찬양단에서 단원들과 함께 존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동안 평소 다른 곳에서 느끼지 못하던 은혜가 있었습니다. 찬양을 통한 위로가 좋았습니다. 찬양을 통한 기쁨을 알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찬양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반 찬양단과 목사장로부부찬양단이 다른 것이 있습니다. 목사장로부부찬양단은 성가곡만 찬양합니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며 모일 때마다 시작부터 마치는 시간까지 성가만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매주 월요일 저녁이 기다려지게 되었습니다. 필자가 비록 소리로는 찬양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단원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며 자리를 지켜온 것입니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 목사님이 언젠가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장로부부찬양단 단장도 하셨고 오랫동안 단원으로 수고하셨으니 이제는 졸업 할 때가 되신 것 아닙니까? 햇수가 더하여 가면서 오래된 단원과 새로운 단원들이 자리가 바뀌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때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필자가 지금까지 합창단 단원으로 자리를 지키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찬양이 나에게 은혜가 되기 때문이며, 둘째 이유는 역대 합창단 단장으로 크게 활동하셨던 증경 단장님들이 하나같이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합창단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책임을 맡은 동안에는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하여 합창단을 위해서 크게 헌신하셨습니다. 그런데 임기를 마침과 동시에 그토록 변함없이 충성하리라 믿었던 합창단을 냉정하게 떠나게 될 때에 그런 모습이 너무나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위한 충성이었고 누구를 위한 충성이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한 충성이요 희생이었다면 책임을 맡았을 때나 그 후에라도 변함없이 충성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역대 단장들이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일로 남은 단원들에게 마음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매해 반복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작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내가 합창단을 위해서 큰 힘은 되어주지 못하지만 울타리가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버팀목이 되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바람막이가 되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합창단에는 필자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여러분이 계십니다. 언제나 말이 없으십니다. 변함없이 어떠한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시는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계시는 동안 남가주목사장로부부합창단은 계속해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단원 중에는 성악을 전공하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믿음만 좋은 것이 아니라 찬양의 실력도 뛰어나십니다. 찬양단의 자랑이 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신 지휘자 전중재 교수님과 박헬렌 집사님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매년 정기공연을 통하여 경험한 것처럼 금번 제8회 정기공연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의 고백과 곡조 있는 기도의 찬양을 통하여 큰 영광 받으실 것을 믿으며 온 마음과 정성을 모아서 성심으로 준비하는 단원들뿐 아니라 함께하는 모든 청중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큰 감동과 은혜가 넘쳐날 것을 믿습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269

양심이 살아있는 현장을 체험하다!

지난 8월 말 한국교회의 은인이라 불리는 고 사무엘 휴 마펫 선교사님의 하관식을 참여하기 위해서 12인승 교회 차량으로 10여분의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장지가 있는 곳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장지까지는 평소 같으면 한 시간 십여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프리웨이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3시간 이상 길에서 지체해야 했던 것입니다. 당시 동승했던 목사님 한분이 계속되는 더위와 교통 체증을 이기지 못하고 멀미를 시작하시더니 결국에는 달리는 차 안에서 구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비닐봉지에 실례를 하셨지만 더 이상 견디지 못했기에 프리웨이에서 급하게 내려야 했던 것입니다.

Thousand oaks city 지역의 쇼핑센터로 가서 차에서 내리기 쉬운 가까운 곳에 위치한 멕시칸 음식점으로 들어가 급한 일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 때 곁에 계신 다른 목사님 한분이 뒤 따라가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일행은 프리웨이를 달려서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멀미하던 목사님을 따라 차에서 내렸던 목사님이 자신의 가방을 잃어버린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입니다. 작은 손가방에는 여러 개의 크레딧 카드와 현금이 담겨있는 지갑과 그리고 최신 전화기 등 목사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장에라도 가방을 잃어버린 곳으로 가보고 싶으셨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곧 행사가 시작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함께 한 일행 모두가 무거운 마음으로 걱정 하면서도 아무런 도움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방을 두고 내린 멕시칸 음식점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식당의 전화번호도 없었고 정확한 위치를 기억하는 분들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찾아 헤매야 했던 것입니다. 몇 번의 실수가 있었습니다. 프리웨이를 타고 내리길 몇 번 하다가 그러는 동안 가방을 잃어버린 목사님이 “이제는 포기하고 그냥 돌아갑시다”라고 말을 하신 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오전에 가방을 두고 내렸던 식당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아니하고 힘없이 걸어 들어가신 목사님이 10여분 후 밝은 얼굴로 다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손에는 검은색 작은 손가방을 들고 나오시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신기하고 너무도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일행 중 한 분은 “지갑부터 열어보세요? 현금과 크레디트카드는 있습니까?”

목사님이 식당에 들어갔을 때는 오전에 만났던 직원들이 교대가 되어서 없었는데 그중 한 여자 직원이 오전에 보았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녀에게 다가가 5-6시간 전에 가방을 두고 갔는데 혹시 아느냐고 했더니 안다고 하면서 즉시 사무실에 보관해둔 가방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입니다.

고마운 마음에 약간의 팁을 주려고 했지만 극구 사양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차 안에 잃어버렸던 가방을 들고 들어오신 목사님을 향하여 일행은 뜨거운 박수를 했으며 잃어버린 물건을 찾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한 일행 중 누구도 잃어버린 가방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가방을 잃어버린 목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자고 말하신 것입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차에서 내려 가방을 잃어버린 목사님을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가 이름 모를 손님의 잃어버린 가방을 안전하게 보관해 두었다가 돌려드린 양심적인 직원의 밝은 얼굴을 보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을 가져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야 말로 보통 미국인의 살아있는 양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방을 잃어버리셨다가 찾은 목사님이 일본인 친구 목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에서 열사람이 지갑을 길에서 잃어버리면 몇 개나 주인에게 돌아가겠느냐는 물음에 8-9개는 주인에게 돌아간다고 서슴없이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하여 한국에서 지갑을 잃어버리면 5-10% 정도만 주인에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기독 인구는 1%인데 비하여 한국의 기독 인구는 25% 이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여자 직원의 작은 행함이 여러 사람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었듯이 우리의 삶도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241

만날 때마다 마음이 즐거워지는 사람

필자가 30여 년 동안 단골로 다니는 식당이 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그리 크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화려한 건물을 자랑하는 식당도 아닙니다. 우리말로 설명하자면 작은 마을 식당이라고나 할까요? 특별하지도 않고 음식이 다른 식당보다 맛이 있어서 그곳을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점심때가 되면 교회 인근에서 식사할 만한 다른 식당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는 다른 식당이란 한국 음식점을 말합니다. 미국 생활이 한국에서 산 것보다 두 배 이상이나 되었을 정도로 고국을 떠나 이민자로 이곳에서 산지도 40여년의 긴 세월이 지나갔지만 아직도 미국 식사에 익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빵 보다는 밥과 국이 더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두세 번 많이 갈 때는 일주일에 한두 번 번씩 그 식당을 가는 것은 그곳엔 나를 반겨주는 매니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음식 맛보다도 그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주 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유명한 식당에서 느끼지 못하는 인간미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종업원 중에 한국인은 없습니다. 모두가 영어보다는 스페니시를 더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은 6-7명이 됩니다. 그 식당이 특별한 것은 일하시는 분들이 모두 오래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매니저 말고도 30여년 이상 그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또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단골로 다니는 식당이지만 아직도 매니저와는 서로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고 그도 역시 내게 이름을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가 식당 근처에 있는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식당 매니저를 처음 만났을 때만해도 젊고 건강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때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허리는 약간 구부정해졌고 머리는 희어졌습니다. 그 분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변함 모습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내가 식당에 들어서면 다른 손님이 있거나 말거나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Hi my boss” 그러면 식당에 있는 모든 손님들이 다 고개를 돌려 나를 주목합니다. 마치 식당에 사장이 나타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my boss’라는 말을 식당 매니저에게서 30여년을 들어오면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싫지 않은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식당 매니저의 말이 왜 내게 거부감이 없으며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른 종업원들은 나에 대하여 그런 인사를 왜 한 번도 하지 않는 것일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그런 인사를 다른 종업에게서 받지 못하는 것은 내가 저들의 상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식당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잠시도 내가 저들의 상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매니저의 인사가 싫지 않은 것은 그 분의 진정성 있는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가식 없는 따뜻하고 정겨운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대화는 오고 가지 못해도 짧은 한 두 마디의 말이 서로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속담에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듯이 식당 매니저에게 그런 대접을 받다 보니 주변에 많은 다른 식당으로 발걸음이 쉽게 옮겨지지가 않는 겁니다.

30여 년 동안 변함없이 그 식당을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것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식당을 나설 때는 내가 먼저 매니저를 향하여 인사를 합니다. “Thank you my boss” 그러면 그는 오른 손을 높이 들고 흔들어 인사에 답합니다. 그 분과 나는 이제 남남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장소에서 만나서 대화를 나누지도 못합니다. 그와 만날 수 있는 곳은 식당에서 매니저와 손님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대도 나의 마음에 늘 식당 매니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길을 오고가다가도 그 분의 얼굴, 행동, 말씨가 생각이 날 때마다 미소 짓게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식당을 또 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식당을 가게 될 것입니다. 매니저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나의 발걸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칼럼을 쓰는 것은 매니저를 통하여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의 겸손한 자세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당에 오래된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아니하는 것이 손님을 대하는 매니저의 정성된 자세 때문인 것처럼 교회를 섬기는 목자의 자세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는 목자의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