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바 같은 장로님과 함께한 25년

이제 10여일 후면 평강교회 설립 25주년을 기념하게 된다. 29살이 되던 1980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미주서부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당시만해도 로스앤젤레스에는 한인교회가 지금처럼 많지않아 청빙하는 교회도 없었다.

가야할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에 K 장로님으로부터 교회설립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제의에 쉽게 동의하지 못한 것은 교회를 설립하면 매 주마다 정기적으로 4-5편의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부족하지만 당시 실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수 없을 것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님의제의를 거절치 못한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필자는 서류 미필자로 7년여 동안 불법체류 중이었다.

12월 31일 밤에 교회명칭을 정하고 첫예배는 1981년 1월 4일 주일부터 드리기로 했으나 처소가 준비되지 못해 우선 다저스 야구장이 있는 엘리시안 공원에서 2달간 야외예배를 드리고 그 후 흑인 침례교회를 빌려 오후 1시반에 예배드리게 되었다.

교회개척 1년 만에 장로님의 안내로 교회를 통해 4가족이 영주권을 받게되었고 변호사 비용까지도 장로님이 담당해 주셨다. 그러던 중 설립 5년만에 큰 위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90여만 달러의 교회당 구입을 위해 건축 헌금을 하기에 이르자 믿었던 교인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남은 교인보다 떠난 교인이 더 많았다. 미국교회에 사정을 말하고 계약을 파기해야 했다. 정말로 낙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평강교회가 문을 닫았다고 하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어디론가 피하고 싶었고, 도망가고도 싶었다. 이런 나에게 K장로님은 다시 일어날 용기와 힘을 주셨다. “목사님! 우리 다시 개척하는 겁니다” 그때 그 한 마디가 아니면 오늘의 나와 평강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난 25년 세월은 빠르게 지나갔다. 부부간에도, 형제간에도, 부모와 자식간에도 오랜 시간 보내다 보면 얼굴 붉혀야 할때가 있는 것인데 장로님은 지금껏 단 한번도 내게 얼굴붉히신 적이 없다. 돌이켜 보건대 지금껏 교회를 섬겨오면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수가 있었음을 고백하지않을 수 없다. 그런 나를 지금의 자리까지 서게한 것은 장로님의 희생과 사랑의 결과인 것이다.

장로님은 섬김의 도를 내게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셨다. 교회설립 25주년을 기념해 당회가 K 장로님께 장기근속기념패를 드리고자 했으나 조용히 사양하셨다. 지난 25년간 모든 공식예배 즉 주일새벽기도회와 주일낮예배와 오후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등에 100% 출석하셨다.

몸이 아파 일어서지 못할때에도 죽을 힘을 다해 예배에 참석하셨다. 언젠가는 새벽기도회에 늦게 일어나, 교우들이 돌아가는데 도착하신 장로님 부부는 닫힌 교회문을 열고 들어 가시는 것이었다. 장로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위로하셨고, 방패가 되어 주셨으며 한번도‘아니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했다. 주의 일에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계획하셨다.

혹자는 교회부흥은 목회자의 능력에 따라서라고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목회자의 실력과 자질이 충만해도 좋은 장로님을 만나지 못하면 날개 잃은 독수리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교회부흥은 목회자의 자질 못지않게 좋은 장로님과의 만남에 달려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이민목회 25년간 한 길로만 달려 올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축복이지만 바나바 같은 믿음의 장로님이 곁에 계셨기 때문이다. K 장로님은 이제 80을 행해 달려가고 계시다. 바라기는 오래도록 건강하시어 지금처럼 평강교회의 힘있는 울타리가 되어 주시길 기도하는 것이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7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