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떻게 해”

가정적인 일로 지난달 초 한국을 잠시 방문했습니다.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늘 만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1월에 고국을 방문하기는 36년만에 처음이었습니다. 저녁 식사자리에 보여야할 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83세 되신 친구 어머니가 아주대학병원에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입원실 안에는 장남인 친구와 형제자매 가족 등 15·16명이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담당의사의 말로는 그 밤이 마지막 밤이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는 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시골교회 집사님으로 교회를 섬겼지만 죽음을 앞두고 몹시 불안해하고 계셨습니다. 왼쪽 눈에서 시작한 흑생종 암이 간과 폐 등 장기 전체에 퍼져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고단위 진통제만 의지한 채 임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인사만 하고 돌아서려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밤 9시부터 찬송으로 시작한 임종 예배가 3시간여 지나 늦은 밤 12시반에 끝났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아니하던 어머니가 간간히 찬송가를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은 무엇인가? 믿음의 사람들에게 임하는 죽음은 절망과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마치 해산을 앞둔 산모가 아기를 낳기 위하여 육체적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천국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인내하고 참아야만 하는 것임을 설명했습니다.

예배를 마치니 그렇게 절망으로 어둡던 어머니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제는 내가 살았다”며 “나를 살리기 위해 미국에서 목사님을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보니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불안해 하셨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불안과 초조함에서 벗어나 마음에 평안을 회복한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본 친구 오 교장이 어머니의 가족들, 그리고 나의 앞에서 이런 선언을 했습니다.

“어머님! 나도 어머니가 믿는 예수를 이제부터 믿겠습니다.” 40여년 동안 친구로 지내던 그였습니다. 특별히 종교문제에 대해선 조금도 틈을 주지 않던 친구였습니다. 그런 친구가 나를 놀라게 했으며 그를 가장 잘 아는 어머니를 놀라게 했습니다.

나와 어머니께 큰 기쁨의 선물을 준 것입니다. 은혜의 시간은 계속됐습니다. 온 밤을 지새우며 찬송을 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찬송을 합니다. 늦은 밤 고요한 시간에 입원실에서 터져 나오는 찬양소리는 간호사들을 놀라게 해 저들의 요구대로 찬송소리를 줄여야 했습니다.

이제까지 목회자로 살아오면서 밤 시간에 이렇게 많은 찬송과 설교를 연속적으로 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물론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게 긴 밤이 지났습니다. 어머니는 다음 날부터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머무는 9일 동안 매일 병상을 찾아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처음에는 가족의 부축으로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수일이 지나면서는 부드러운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담당의사는 다시 치료 계획을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9일 만에 돌아오기까지 어머니는 한 순간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친구 오 교장은 늦게 되었지만 누구보다도 빠르게 믿음이 성장할 것을 나는 압니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 날, 친구는 어머니의 장례를 의논했습니다.

집안에서 기독교식으로 장례식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유언이기에 기독교식으로 한다고 선언하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4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