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지난 해 나성영락교회당에서 어느 권사님의 장례식이 있었다. 권사님은 6∙25전쟁으로 이북의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셨다가 오래전에 미국으로 가족이민을 오셨다. 권사님의 사망 원인은 교통 사고였다.

장례식에는 많은 조객들이 넓은 교회당을 가득 채웠다. 사람의 평가는 얼마나 잘 살고 얼마나 크게 성공했느냐를 말하지 않는다. 장례식을 보아서 그 사람이 생전에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권사님의 지난 삶은 아브라함처럼 고향을 떠나 낮선 타향살이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도 평탄치 않으셨다. 그럴 때마다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했다. 이런 권사님의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권사님이 가는 곳마다, 행하는 사업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어려서부터 전쟁으로 겪어야 했던 가난과 피난살이의 삶은 평생 동안 권사님이 절약하고 검소하게 사는 방법을 갖게 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으나 불행한 이웃을 위해서는 늘 베푸는 삶을 살아오셨다. 특별히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많은 희생과 헌신을 하셨다.

유가족을 대표해서 고인의 아들이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가 홀로 되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53세 되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사고를 당하시고 나서 누님과 함께 어머니의 살림을 정리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세 번이나 필사한 수십 권의 노트를 발견한 것입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바르고 깨끗하게 써내려간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어머니에 대하여 불효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제 나이가 55세인데 만일 내가 이 나이에 혼자되었다면 그 긴 세월을 혼자서 지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 여년이 지나도록 어머니에 대하여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어머니는 그렇게 사셔도 되는분으로 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어머니는 언제나 교회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예배 중심의 삶을 사셨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찬송하셨으며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한 번도 자녀들 앞에서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왜 어머니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으셨겠습니까?

왜 낙심되는 일이 없었겠습니까? 왜 화나는 일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자녀나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사람이나 하나님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감사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항상 밝은 미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위로하시고 칭찬하시며 용기를 주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고독할 틈도 시간도 없는 줄 생각한 것입니다. 밤 시간이 얼마다 길고 지루하셨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성경을 필사하셨던 것입니다. 어머님에게 예수님은 위로자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예수님은 동행자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예수님은 행복 그 자체셨습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을 말씀 안에서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그 어머님의 믿음을 우리 자손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 드립니다.”

유 권사님의 아들은 벨리서 목회하는 나성북부교회 유영기 목사입니다. 또 고인은 저의 큰 딸의 시어머니의 어머니로 나성영락교회 창립교인이었습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7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