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그런 슬픔 없기를!

교회를 섬겨오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24년 전의 일로 교회를 설립하고 7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교우중 천사의 성품을 지니신 C 간호사님이 계셨습니다.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시다가 미국으로 가족이민을 오신 분이십니다. C 간호사님을 만난 것은 환자와 목사로 만났습니다.

필자가 어려운 혈액 난치병에서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로 나음 받은 것을 알고서 찾아온 것입니다. 필자는 C집사님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 집사님도 살려 주세요”라고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점점 병세가 악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세상을 떠날 때가 임박한 어느 날 중환자실에서 C 집사님은 나의 손을 잡으시고 힘이 없어 개미 같은 소리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하고 계셨습니다. “목사님! 날 살려주세요! 나는 더 살아야합니다. 이대로는 죽을 수가 없어요! 어린 두 아들을 남겨두고 갈수가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집사님의 병상을 방문할 때마다 안쓰러움과 답답함을 느껴왔는데 이런 애원을 듣고서 필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고 도와 드리고 싶었습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위해서 피가 필요하다고 해서 교회에서 광고를 하고 교우와 함께 집사님을 위해서 헌혈을 했습니다.

피를 나누기는 했지만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아픔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수도 없었습니다. C 집사님이 임종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하나님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단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의 생명을 2 년만 끊으시어 집사님의 생명을 5년 더 연장해 주세요”

가슴을 도려내는 듯 간절한 눈물의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필자의 기도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로부터 수일 후 집사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교회를 설립하고서 두번째 해본 장례식이었습니다. 교회 묘지에서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한없이 나약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목사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가 이렇게 큰 어려움을 당할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아파해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의 눈물은 필자가 목회하는 지역에서 발생한 4-29 흑인 폭동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흑인 지역에서 사업을 하던 K 집사님의 대형 마켓을 시작으로 불붙기 시작한 폭동으로 놀람과 두려움 뿐 아니라 분노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것은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미국 경찰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습니다.

K집사님의 부인 권사님이 이틀 동안 밤을 새우고 주일예배에 참석했다가 창백해진 얼굴로 코피 흘리는 것을 보면서 함께 울어야 했습니다. 폭동이 일어난 초기에 막강한 힘을 가진 경찰이 효과적으로 적절한 대응을 했더라면 그렇게 큰 피해로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폭동이 일어난 곳이 백인 지역이나 부유층이 사는 지역이었더라면 경찰이 그토록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민자의 아픔을 탓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필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성난 폭도들이 상점을 약탈하는 모습을 TV를 통하여 보면서 미국에 대한 분노를 느껴야 했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질서 없는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법이 가장 잘 지켜지는 나라이며 개인의 재산과 생명이 잘 보존되며 교육과 국민들의 윤리의식이 으뜸이라고 믿어왔었는데 4-29를 당하고서 그런 기대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폭동을 딛고 재기한 교우도 있지만 아직도 그 때의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을 볼 때마다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