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4-29 폭동

이번 주간은 한인 이민사 110여년 만에 가장 뼈아픈 고통을 당했던 4-29폭동 21 주년이 되는 주간입니다. 1991년 4월 29일 오후 5시부터 흑인 밀집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방화와 약탈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면서 성난 파도와 같은 폭도들은 더욱 가공할 위력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폭동 두번째 날 흑인 중심지역에서 대형 마켓을 운영하던 권사님 가족이 폭도들에게 습격을 받고 마켓이 불에 탔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교통이 두절되 사건 현장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4-29 폭동으로 2천여개의 업소가 피해를 당했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우리 교포가 당한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 부시 대통령이 폭동 3일째인 토요일 새벽 7시에 남가주 캠프 팬들턴의 해병대와 주 방위군을 신속하게 투입하여 더 이상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긴박했던 순간이 지나고 첫 번 맞는 주일이었습니다. 교인 중에도 피해당한 가정들이 있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예배 중 성가대원으로 수고하시는 K 권사님이 앉은 자리에서 코피를 흘리고 계셨습니다.

권사님은 지난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시고 충격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폭동이 일어나는 날 흑인 중심지역에서 대형 마켓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마켓이 폭도들에게 제 1차 공격 목표가 되어 물건을 강탈당하고 건물은 불에 타 전소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한인들이 그러했듯이 사업 보험을 들어 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피해를 보상 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후일에도 그 일로 힘든 삶을 사셔야 했습니다. 예배 중 코피를 흘리시는 권사님을 보면서 미국에 대한 분노와 배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 제일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땅에 사는 동안은 그런 일 당하지 아니할 것으로 알고 열심히 살아 왔는데 미국에 대한 치안, 경찰력에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권사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 교단 실무자들에게 긴급제안을 했습니다. 폭동피해 대책위원회를 소집했습니다. 지금은 본국 교단과 행정이 중단된 상태였지만 당시는 교단 총회 안에 미국 대회가 있어서 대회 산하 L A 지역에 3개 노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필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미주대회 서기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폭동 피해지역 3개 노회장과 서기들을 소집하여 폭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필자에게 총무 일을 맡겨달라고 자원했습니다. 그러면 곧 바로 한국에 나가 우리가 섬기는 교단 총회에 피해 당한 가정들을 위한 재정지원을 요청하겠다고 했습니다. 경비는 누가 책임을 지느냐고 하기에 일이 성사되지 아니하면 필자가 부담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분은 총회가 미주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무슨 지원을 하겠느냐고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분도 있었지만 결국 피해대책위원회가 결성 되었습니다. 그 밤을 새워 본국 총회에 보고할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폭동의 배경, 원인, 피해복구 전망 등 나름대로 서너 페이지의 보고서를 만들어 피 눈물 흘리시는 권사님을 생각하며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총회 임원들을 면담하고서 총회 산하 미주 교회 120여 가정의 피해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왜 피해당한 교우들의 가정을 신속히 돕지 않으면 아니 되는지를 가슴으로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총회 임원회가 즉석에서 미주교회들을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전국교회 앞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모금을 해 주기로 한 것입니다. 필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폭동으로 인하여 평생 쌓아온 K 권사님의 삶의 터전을 일순간에 잃어버리고 큰 절망에서 고통당하시는 아픔의 감동이 필자에게 각인 되어 마침내 교단 산하 교회에 속한 120여 가정의 피해 교인들이 한 가정 당 $1,000 불의 본국 교회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1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