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전 K 장로님과의 약속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의 교차로에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니 한동안 잊고 지내던 K 장로님과의 약속이 되 살아났다.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74년 가을의 어느 날로 기억이 되었다. 필자가 1973년 11월 미국에 처음오기 전 한국에서 어려운 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으로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의학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미국의 큰 병원에서 치료 받을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수단으로 택한 것은 당시 서울시청 뒤에 위치한 영자신문인 Korea Herald 신문사였다.

수원에서 신촌의 세브란스 병원으로 치료를 받기 위하여 한 달에 서너 차례 올라갈 때마다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면 곧바로 신문사로 달려간 것이다. 신문사는 2층에 있어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당시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한 걸음을 옮기고 쉬었다가 다시 걸어서 10여분이 걸려할 정도로 위중했다.

당시 헤모글로빈의 수치가 심할 때는 3-4까지 내려 갈 정도로 앉고 서는 것도 힘이 들었던 때였다. 계단을 올라가 편집국 문을 열고 들어가면 편집국에서 일하는 분들을 향하여 허리를 굽혀 크게 인사하며 “안녕하세요! 수원의 이상기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선 곧바로 뒤돌아 나오길 6개월을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김경해 기자로부터 전보가 왔다. 내일 아침 8시 반까지 조선호텔 4층 207 호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당시는 조선호텔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해서 이른 아침 첫 차를 타고 신문사로 향했다. 신문사에 도착해서 김경해 기자님과 사진기자 그리고 당시 하와이에 있는 영자신문의 미국인 교환기자와 함께 조선호텔로 향한 것이다.

그곳에는 Tulsa, Oklahoma에 본부가 있는 선교단체인 David Livingstone Missionary Foundation의 회장인 Dr. Pedigo 박사가 머물고 있었다. 선교단체는 한국에서 어린 아이들을 미국인 가정에 입양을 하고 한국의 여러 곳의 고아원을 돕고 있었다. 김 기자는 Pedigo 박사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의 기관에서 고아들을 입양해주고 여러 곳의 고아원을 지원해주는 일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그동안도 좋은 일을 해 오셨지만 이번에 Korea Herald 영자신문사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은 이상기군을 살려 달라고 한 것이다. 이후 영자신문에 Pedigo 박사님과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미국에서 치료 받게 되었다는 기사가 보도 되었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 선교단체의 초청으로 UCLA 대학병원으로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도 치료 방법은 없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필자가 앓았던 병을 치료하는 약이나 수술방법은 아직도 없는 것이다. 당시 필자의 주치의는 Dr. Nicolas Costea 박사로 혈액학 주임 교수였다.

이듬해 7월 이었다. Costea 박사는 반복되는 골수 검사의 결과에 대하여 놀라운 사실을 말했다. 그동안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던 병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는 것이다. 왜 나앗는지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완전하게 나았다는 것이다. 이제후로는 정상적인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 무엇이든지 다 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죽을 사람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틈틈이 의학 서적을 통하여 병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치 진단을 받은 후 그해 여름에 귀국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귀국을 하고나서 불안해 지기 시작한 것이다.

재발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의 공포에서 보름간을 지내다가 다시 미국으로 가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 싶은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비자를 내준 Dean Martin 영사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신기한 것은 1970년 당시 해외 방문 후 귀국하는 단수 여권은 공항에서 회수 했는데 나의 것은 그대로 있었다.

당신의 나라의 도움으로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 난치병에서 살아나 귀국하였는데 한국에 오고 나서 재발에 대한 두려움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미국에 가서 완전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길 원한다는 내용과 함께 여권을 동봉해서 등기우편으로 보냈다. 그로부터 2주후 Dean Martin 영사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대사관 내에는 이상기군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다시 미국에 가길 원하면 이 편지를 가지고 대사관을 방문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보냈던 여권을 다시 보내온 것이었다. 그 편지를 가지고 대사관을 방문해 미국 비자를 다시 받을 수 있었다.

곧바로 김포공항으로 달려가 출입국 관리에게 문의 했다. 이 여권과 비자를 가지고 미국으로 갈수 있냐고 했더니 안 된다는 것이었다. 비자는 살아있지만 여권은 단수여권이기에 유효기간이 만료 되었다는 것이다.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시 인근 우체국으로 가서 청와대 영부인 육영수여사님께 그간의 상황을 담은 도움을 구하는 속달 편지를 올렸다.

그런 다음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수원 집으로 3시간 후에 도착하니, 청와대의 전보가 먼저 날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 오전 8시 반 외무부 제2여권 과장을 만나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중앙청에 도착하여 외무부 여권과로 가니 담당부서의 여직원이 문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권 과장님은 연락을 받았다고 하면서 나의 여권을 달라고 하더니 그 여권 앞 페이지에 이 여권은 유효함이라는 큰 사각형의 인장을 찍어 주면서 미국을 잘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청사를 나오면서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서소문)십자군연맹을 방문해 다시 미국에 가게 된 것을 감사하는 인사를 하기 위해 김득황 회장님을 찾아간 것이다.

(김득황 장로님은 내무부차관을 역임하셨다)십자군연맹은 미국의 선교본부를 돕는 한국내 기관으로 미국의 선교기관이 한국의 십자군연맹을 통하여 초청장을 보내왔으며 그 동안 나에 대한 여행 서류를 도아 왔기에 다시 미국에 가는 것에 대해서 김득황(장로)회장님도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에 인사차 방문한 것이다.

처음 미국행 비자를 얻기 위해서 십자군연맹에서 두 번이나 비자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세 번째는 김득황 장로님이 직접 대사관의 담당 영사를 만났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이유는 십자군연맹의 직원으로 미국에 들어가서 체류기간을 넘기고 귀국하지 않은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군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고 설명했으나 받아드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김득황 장로님은 당시 나의 여권을 돌려주면서 미국 가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담당 영사와 격한 다툼을 벌였기에 비자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혼자 미 대사관을 방문해 비자 신청을 하고서 인터뷰를 거쳐 비자를 받은 것이다.

당시만 해도 미국행 비자 받기가 쉽지 않았을 때였던 것이다. 이런 것을 잘하는 김득황 장로님은 귀국한지 두 달 만에 그것도 단수비자가 아닌 복수비자를 받은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생각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감사의 인사차 방문한 필자를 향하여 김 장로님은 어떻게 어려운 미국 비자를 다시 받았으며 단수여권(유효기간이 지난 여권)을 어떻게 다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아해 하면서 여권을 보자고 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여권을 드렸다. 그러더니 자세히 살펴본 후 여권을 돌려주지 않고 당신이 앉은 책상의자 왼편 서랍을 열더니 그곳에 넣고는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여권은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미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고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 장로님을 향해 이 여권이 어떻게 유효여권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육영수여사님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권 돌려주시지 않으면 이대로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회장실 문을 박차고 나오자 김 회장이 따라 나와 나의 팔을 잡으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네가 미국에 다시가면 선교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는데 그리되면 한국으로 오는 재정 지원이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하나만 약속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미국에 들어가도 선교본부에는 알리지 않고 더 이상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 때문에 지원이 줄어든 다는 말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서 김 장로님으로부터 여권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올 때는 선교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비행기 표를 구입해서 들어온 후 지난 40여 년 동안 미국 선교본부에는 지금까지도 나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물론 한국의 김득황 회장이나 십자군연맹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생명을 구해주신 고마운 마음에 몇 번이고 선교본부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고 개인적으로는 Dr. Pediego 박사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수도 없이 전하고 싶은 마음이 이었지만 김득황 장로님과의 약속 때문에 마음으로만 항상 감사를 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의 가슴에 고마운 마음을 새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