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녀들이 모이면 저희들끼리 주고받는 말 가운데 할아버지가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는 것을 큰 딸이 전화로 알려주었습니다. 손·자녀들 가운데 둘은 고등학생이고 둘은 중학생이며 둘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삶을 돌아볼 때 그 정도의 어린 나이에 그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20대에 미국에 건너와 50년 가까이 이곳에 살아왔기에 필자도 조부님의 사랑을 크게 받지 못하고 자랐을 뿐 아니라 이곳에서 태어난 두 딸과 아들도 조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모르고 성장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반하여 이민 3세로 이곳에서 태어난 손·자녀들이 할아버지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감사하며 자랑스러워 한다는 말에 놀라움과 함께 고마운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그러하듯 필자도 손·자녀들을 사랑하면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젊어서는 의식주 걱정 없이 사명자로 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인줄 알았는데 70을 바라보는 인생 후반기에 접어 들면서 알게 되는 것은 세상에 사는 동안 받는 복중의 복은 자손들이 번창하며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고 행복이라는 것을 생활 속에서 느끼며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손·자녀들을 더욱 사랑하며 관심을 가지게 되기에 저들을 향하여 축복의 디딤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들이 거두어들일 수 있도록 축복의 씨앗, 믿음의 씨앗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좋은 땅에 뿌리는 일에 열심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필자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오래전입니다. 불신 가정에서 성장하여 교회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청소년 시절 난치병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나서 교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변에 믿음의 부모와 조상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이렇게 귀하고 좋은 것을 부모로부터 전수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4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겨오면서 보아온 것이 있습니다. 가정의 복, 자손의 복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희생과 사랑으로 자손들이 축복의 열매를 누리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나 하나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따라서 자손들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하며 살게 됩니다. 내가 죄에 무너지면 그 죄 값이 나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손들까지 고통 받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126편 5-6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위의 말씀은 비단 씨앗의 법칙에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전반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어느 특별한 사람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종교의 유무를 떠나서 신앙의 크고 작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중 어떤 삶도 의미가 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아무리 지치고 힘들고 어려워도 쉽게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주어진 삶을 감사함으로 인내하며 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갈 때에 반드시 복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기쁨으로 보상하신 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종의 어린 여러 자손들이 주의 축복 가운데 성장케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인생은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주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받은 것처럼 나의 자손들도 같은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오늘도 마음의 옷깃을 조이며 기쁨으로 주 앞에 더욱 가까이 달려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6661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8-10 13:16:522020-08-10 13:16:52할아버지가 우릴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을 알아요
지난 7 월 26일은 7 월의 마지막 주일이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 입안에 혓바늘이 생겨서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음식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물을 마실 때도 약간의 통증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말을 길게 하면 불편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남은 알지 못하는 나만의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것을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기도 그래서 나만이 간직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통증이 하루 이틀 지나면 가라앉으리라고 기대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지난 달 받은 수술 후유증으로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주일이 가까워 오면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주일을 맞으면 설교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요일까지 기다려도 회복이 되지 않거나 더 증세가 악화가 되면 주일 설교를 다른 목사님에게 부탁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혓바늘이 시간이 지나도 더 악화가 되지도 않고 더 나아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주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주일 아침 예배 시간이 가까워 오면서 약간의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이 런 몸 상태로 설교하기엔 무리가 될 것 같아서 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에서 설교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때는 늦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에게 혀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전달함에 있어서 발음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용하게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힘주어 설교를 하게 되면 혓바늘로 인한 통증이 가증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때에 설교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 시작 30분 전에 주님께 간절하고도 진실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상태로 말씀을 전할 수 없습니다. 부족한 종을 도우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님이 허락하신 말씀을 잘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오늘의 예배가 하나님 기뻐 받으시는 영광스러운 예배가 되게 하시고 전하는 사람이나 말씀을 듣는 모두에게 은혜와 축복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드디어 예배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 나의 생각과 마음에 부담을 주어 왔던 혓바늘로 인한 고통이 예배 시작과 함께 나의 생각에서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예배드리는 한 시간 동안 조금도 고통을 느끼지 아니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면서 나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를 도우셨습니다. 성령님께서 나의 불편함 몸을 만져 주셨습니다. 그로인하여 예배하는 동안 지난 일주일 동안 혓바늘로 고통스러워하던 아픔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은혜 가운데 예배를 인도할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 중 누구도 이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은혜와 도우심의 손길을 체험했기에 주님을 향한 무한한 감사와 신뢰가 되었던 것입니다.
1년 여 전에는 따발총 기침을 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1-2분 간격으로 기침이 쉬지 아니하고 연달아 자동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배에 참석한 성도님들께 기도해 주실 것을 요청했었습니다. 온 교우님들이 필자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설교하기 위해서 강단에 서자마자 따발총 기침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가 설교를 마치고 나서 다시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예배 참석자들 모두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는 무엇일까요?
기도는 막힌 담을 여는 축복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23-24에서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믿으시고 살아가면서 여러분이 만나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소원을 주의 이름으로 구하시어 응답 받으시므로 기쁨이 충만한 삶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예배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지도 6개월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놀라우리만치 과학만능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때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미세한 바이러스가 현대과학과 의학을 무색케 할 정도로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특별히 필자는 미국의 힘과 국방력, 부와 의술을 믿어왔기에 이 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세상 모든 나라가 다 어려움을 당해도 미국에 사는 사람은 그런 공포와 두려움에서 당연히 벗어 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다른 나라들보다 코로나 19의 피해가 더 급속하게 번져가는 것을 보면서 놀라움과 함께 우리가 사는 미국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지도자들에 대한 믿음도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난 7월 13일에 발표된 캘리포니아 주 지사의 두 번째 Stay at Home 명령으로 코로나 19의 위험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주변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이상 먼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아는 주변의 지인들이 코로나 19에 걸렸다는 소식을 자주 듣고 있습니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로서 이제는 교인들을 향하여 교회 나오라는 권면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교우님들 중에는 전화로 “목사님! 교회 나가지 못해서 미안해요” 라고 연락을 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전화를 받으면 전과 같으면 교회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를 물어야 했습니다. 어떤 일로 왜 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지 알아야 위로도 하고 기도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전화를 받을 때면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잘 하셨습니다” “조심하면서 건강을 챙기시기 바랍니다.” 코로나19의 위험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교인들과 대화를 이어갈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로서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보실까?
그러나 때가 때이니 만큼 예배에 참여하라 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코로나 19는 신자나 불신자를 가리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큰 자나 작은 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코로나 19는 신앙과도 상관이 없고 믿음과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의 지침대로 따라야 하고 자기를 보호해야 합니다.
같은 지역에서 목회하시는 친구 목사님이 행정명령에 따라 당분간 교회 예배를 중단하기로 했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필자가 섬기는 교회도 예배를 중단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으셨습니다. 당연히 행정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래도 예배를 중단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안 전 교인이 예배에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지난 수개월 동안 교역자 중심으로 소수의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유튜브TV방송을 통하여 주일 설교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교인들을 향하여 가정으로 송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가 언제 우리 곁에서 떠나갈지 모르지만 만일 지금보다 큰 위력을 발휘하여 우리 에게 더 강력한 행정명령이 발동하여 예배드리는 것을 금한다 할지라도 나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떤 위험과 협박이 주어져도 두 세 사람이 모여서라도 주일 예배는 반드시 지켜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7-29 05:35:032020-07-29 05:35:03다시 멀어져 가게 하는 교회를 향한 발걸음
할아버지가 우릴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을 알아요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손·자녀들이 모이면 저희들끼리 주고받는 말 가운데 할아버지가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는 것을 큰 딸이 전화로 알려주었습니다. 손·자녀들 가운데 둘은 고등학생이고 둘은 중학생이며 둘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삶을 돌아볼 때 그 정도의 어린 나이에 그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20대에 미국에 건너와 50년 가까이 이곳에 살아왔기에 필자도 조부님의 사랑을 크게 받지 못하고 자랐을 뿐 아니라 이곳에서 태어난 두 딸과 아들도 조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모르고 성장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반하여 이민 3세로 이곳에서 태어난 손·자녀들이 할아버지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감사하며 자랑스러워 한다는 말에 놀라움과 함께 고마운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그러하듯 필자도 손·자녀들을 사랑하면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젊어서는 의식주 걱정 없이 사명자로 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인줄 알았는데 70을 바라보는 인생 후반기에 접어 들면서 알게 되는 것은 세상에 사는 동안 받는 복중의 복은 자손들이 번창하며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고 행복이라는 것을 생활 속에서 느끼며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손·자녀들을 더욱 사랑하며 관심을 가지게 되기에 저들을 향하여 축복의 디딤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들이 거두어들일 수 있도록 축복의 씨앗, 믿음의 씨앗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좋은 땅에 뿌리는 일에 열심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필자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오래전입니다. 불신 가정에서 성장하여 교회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청소년 시절 난치병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나서 교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변에 믿음의 부모와 조상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이렇게 귀하고 좋은 것을 부모로부터 전수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4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겨오면서 보아온 것이 있습니다. 가정의 복, 자손의 복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희생과 사랑으로 자손들이 축복의 열매를 누리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나 하나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따라서 자손들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하며 살게 됩니다. 내가 죄에 무너지면 그 죄 값이 나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손들까지 고통 받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126편 5-6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위의 말씀은 비단 씨앗의 법칙에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전반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어느 특별한 사람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종교의 유무를 떠나서 신앙의 크고 작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중 어떤 삶도 의미가 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아무리 지치고 힘들고 어려워도 쉽게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주어진 삶을 감사함으로 인내하며 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갈 때에 반드시 복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기쁨으로 보상하신 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종의 어린 여러 자손들이 주의 축복 가운데 성장케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인생은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주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받은 것처럼 나의 자손들도 같은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오늘도 마음의 옷깃을 조이며 기쁨으로 주 앞에 더욱 가까이 달려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6661
급한 기도에 대한 신속한 응답을 감사드립니다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지난 7 월 26일은 7 월의 마지막 주일이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 입안에 혓바늘이 생겨서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음식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물을 마실 때도 약간의 통증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말을 길게 하면 불편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남은 알지 못하는 나만의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것을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기도 그래서 나만이 간직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통증이 하루 이틀 지나면 가라앉으리라고 기대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지난 달 받은 수술 후유증으로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주일이 가까워 오면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주일을 맞으면 설교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요일까지 기다려도 회복이 되지 않거나 더 증세가 악화가 되면 주일 설교를 다른 목사님에게 부탁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혓바늘이 시간이 지나도 더 악화가 되지도 않고 더 나아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주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주일 아침 예배 시간이 가까워 오면서 약간의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이 런 몸 상태로 설교하기엔 무리가 될 것 같아서 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에서 설교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때는 늦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에게 혀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전달함에 있어서 발음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용하게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힘주어 설교를 하게 되면 혓바늘로 인한 통증이 가증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때에 설교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 시작 30분 전에 주님께 간절하고도 진실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상태로 말씀을 전할 수 없습니다. 부족한 종을 도우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님이 허락하신 말씀을 잘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오늘의 예배가 하나님 기뻐 받으시는 영광스러운 예배가 되게 하시고 전하는 사람이나 말씀을 듣는 모두에게 은혜와 축복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드디어 예배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 나의 생각과 마음에 부담을 주어 왔던 혓바늘로 인한 고통이 예배 시작과 함께 나의 생각에서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예배드리는 한 시간 동안 조금도 고통을 느끼지 아니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면서 나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를 도우셨습니다. 성령님께서 나의 불편함 몸을 만져 주셨습니다. 그로인하여 예배하는 동안 지난 일주일 동안 혓바늘로 고통스러워하던 아픔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은혜 가운데 예배를 인도할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 중 누구도 이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은혜와 도우심의 손길을 체험했기에 주님을 향한 무한한 감사와 신뢰가 되었던 것입니다.
1년 여 전에는 따발총 기침을 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1-2분 간격으로 기침이 쉬지 아니하고 연달아 자동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배에 참석한 성도님들께 기도해 주실 것을 요청했었습니다. 온 교우님들이 필자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설교하기 위해서 강단에 서자마자 따발총 기침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가 설교를 마치고 나서 다시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예배 참석자들 모두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었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는 무엇일까요?
기도는 막힌 담을 여는 축복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23-24에서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믿으시고 살아가면서 여러분이 만나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소원을 주의 이름으로 구하시어 응답 받으시므로 기쁨이 충만한 삶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6650
다시 멀어져 가게 하는 교회를 향한 발걸음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예배를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지도 6개월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놀라우리만치 과학만능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때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미세한 바이러스가 현대과학과 의학을 무색케 할 정도로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특별히 필자는 미국의 힘과 국방력, 부와 의술을 믿어왔기에 이 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세상 모든 나라가 다 어려움을 당해도 미국에 사는 사람은 그런 공포와 두려움에서 당연히 벗어 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다른 나라들보다 코로나 19의 피해가 더 급속하게 번져가는 것을 보면서 놀라움과 함께 우리가 사는 미국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지도자들에 대한 믿음도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난 7월 13일에 발표된 캘리포니아 주 지사의 두 번째 Stay at Home 명령으로 코로나 19의 위험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주변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이상 먼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아는 주변의 지인들이 코로나 19에 걸렸다는 소식을 자주 듣고 있습니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로서 이제는 교인들을 향하여 교회 나오라는 권면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교우님들 중에는 전화로 “목사님! 교회 나가지 못해서 미안해요” 라고 연락을 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전화를 받으면 전과 같으면 교회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를 물어야 했습니다. 어떤 일로 왜 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지 알아야 위로도 하고 기도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전화를 받을 때면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잘 하셨습니다” “조심하면서 건강을 챙기시기 바랍니다.” 코로나19의 위험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교인들과 대화를 이어갈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로서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보실까?
그러나 때가 때이니 만큼 예배에 참여하라 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코로나 19는 신자나 불신자를 가리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큰 자나 작은 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코로나 19는 신앙과도 상관이 없고 믿음과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의 지침대로 따라야 하고 자기를 보호해야 합니다.
같은 지역에서 목회하시는 친구 목사님이 행정명령에 따라 당분간 교회 예배를 중단하기로 했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필자가 섬기는 교회도 예배를 중단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으셨습니다. 당연히 행정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래도 예배를 중단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안 전 교인이 예배에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지난 수개월 동안 교역자 중심으로 소수의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유튜브TV방송을 통하여 주일 설교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교인들을 향하여 가정으로 송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가 언제 우리 곁에서 떠나갈지 모르지만 만일 지금보다 큰 위력을 발휘하여 우리 에게 더 강력한 행정명령이 발동하여 예배드리는 것을 금한다 할지라도 나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떤 위험과 협박이 주어져도 두 세 사람이 모여서라도 주일 예배는 반드시 지켜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6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