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하지 마! 이것을 하려면 많이 울어야 해” 이 말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필자의 손녀가 두 살 아래 동생에게 오래 전에 한 말입니다. 큰 딸의 세 손녀들이 지금은 8학년 5학년 3 학년 학생이 되었습니다. 셋 모두 방과 후 특별활동으로 무용을 배우고 있습니다. 일 년에 두 번 정기적으로 발표회를 하고 있습니다.
셋째 손녀가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았을 때 둘째 손녀가 극장에서 발표회를 했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공연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어린 셋째 손녀가 두 살 위 언니에게 나도 언니가 하는 그 무용을 배우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둘째가 동생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배우려면 많이 울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필자는 많은 것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둘째 손녀가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마지막 경선에 올라 정해진 장소에서 실수 없이 공연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인 나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시간 속에서 구술 같은 땀만 흘린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좌절과 절망을 극복하고 이겨온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지도하시는 선생님으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책망을 받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넘어져 몸에 일부가 손상을 당했던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지난해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전국 경연대회에서 둘째 손녀가 4등을 했을 때 같은 지역, 같은 학원에서 손녀보다 2년 이상 더 무용을 연습해 왔던 언니들이 크게 울었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어떤 일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절로 되거나 거저 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비단 어른의 세계만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의 세계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음악에 맞추어 몸을 뒤집고 구르고 높이 솟아오르며 쉬지 아니하고 이어지며 반복되는 여러 가지 동작들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반복되는 훈련과 연습 그리고 이어지는
경연에서 수많은 도전자들을 이기지 아니하면 그 자리에 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남이 하지 아니하는 아픔을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다른 아이들처럼 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계속되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아니하면 다른 경쟁자들과 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 손녀이지만 그런 모습이 너무나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랜 동안 언니가 어떻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계속해서 무용을 해 온 것을 지켜본 셋째 손녀는 언니의 충고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곤 뒤를 따라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지난여름 방학 때 다우니 시립 극장에서 처음으로 셋째 손녀의 무용 발표회가 있던 날 응원과 격려차 발표장을 방문했습니다. 모든 학원생들이 다 발표회에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정한 수준과 경지에 이른 자만이 발표회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어린 막내 손녀가 큰 단상에 오르게 되었을 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행여 실수를 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첫째와 둘째 손녀들의 발표회 장에 참여했을 때에는 그런 느낌과 감정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손녀가 발표하는 때에는 긴장이 되었습니다. 실수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가 절로 되었습니다. 발표가 끝났을 때 셋째는 위 두 언니들보다 더 많은 박수를 받았으며 더 큰 상을 받았습니다. 염려가 기우에 지난 것입니다. 이제 세 손녀들은 이전 보다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여 강도 높은 훈련 과정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연말이 되면 다시 저들의 명단이 공연 순서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어린 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2-07 00:29:092020-02-08 00:10:08너는 하지 마, 이것을 하려면 많이 울어야 해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생애 처음으로 강원도 오대산의 전나무 숲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로 알려진 산책로를 걸을 때 다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함과 상쾌함이 눈으로 보는 즐거움 이상으로 기쁨을 더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전나무에서 뿜어내는 아름다운 향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계절 늘 푸른 잎을 자랑하는 전나무를 한 장소에서 그렇게 많이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마침 큰 비가 오고 난 후라 골짜기에는 맑은 물줄기가 세차게 흐르고 있어서 듣는 즐거움 속에 전나무 숲길을 걷는 행복을 더해주었습니다. 등산길 좌우로는 40여 미타 이상 되어 보이는 전나무들이 곧게 하늘로 치솟아 해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전나무 숲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내리막길 왼편에서 외롭게 자리하고 있는 아카시아 나무 한 구루를 발견했습니다. 함께 동행한 친구 목사님과 그 나무 앞에서 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나무 숲에 둘러싸인 곳에서 아카시아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방이 전나무로 둘러싸인 곳이지만 아카시아 나무는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고 자기 자리를 당당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아카시아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흔히 마을 뒷산에서 보아오던 아카시아 나무는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아오던 아카시아 나무는 곧게 자라지 않았고 휘어지거나 삐뚤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기에 좋지도 않고 사용되는 용도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오대산의 전나무 숲에 홀로 선 아카시아 나무는 자기의 본분을 잃은 듯 모양은 아카시아 나무가 분명한데 외모는 전나무를 닮았습니다.
선 자태가 전나무처럼 보기에 좋을 정도로 하늘을 향하여 곧게 뻗었고 조금도 휘어지거나 삐뚤어지지 않았습니다. 크기도 일반 아카시아 나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지금까지 그런 아카시아 나무를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이유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은 이러했습니다. 나무도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카시아 나무가 전나무를 닮아서 하늘을 향하여 바르고 곧게 그리고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나무 숲에 둘러 싸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른 장소에서 다른 나무들 틈에서 자라났다면 전나무를 닮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카시아 나무가 전나무처럼 성장하여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전나무들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나무들이 자리한 자리에 심겨졌기 때문에 아카시아 나무가 전나무의 특권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전나무들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받고 닮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예수를 믿어야 하고 예수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랑할 것 없고 보기에 흠모할 것 없는 죄인 된 우리지만 주님과 동거하며 동행하는 삶을 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주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아카시아 나무를 변하게 한 것은 주변의 전나무인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변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복을 말할 때에 만남의 복을 말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세 가지를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을 아시지요? 첫째는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면 인생의 반은 성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잘 만나야 하는 것은 종교와의 만남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어느 종교와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며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2-07 00:25:302020-02-08 00:10:00전나무 숲에 둘러싸인 아카시아 나무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기억에 새로워지는 분들이 계십니다.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분도 있는가하면 생각이 될 때마다 나쁜 감정을 가지게 하는 분도 있습니다. 표기봉 목사님은 전자에 해당하는 분이십니다. 표 목사님과는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습니다.
같은 지역에 살면서 한 교단에 속해있기에 서로 이름 정도는 알고 있으며 매년 총회 때가 되면 만나서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로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대도 그 분의 이름이 가끔 뇌리에 반복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교단 개혁을 위하여 함께 일하던 지역 노회 대표들이 집단으로 소송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단 신학교문제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교단 산하 5개 노회가 본국 총회에 신학교 책임자를 처벌해 달라는 헌의안을 올리게 되자 당사자인 C 목사가 해임 안을 총회에 상정한 5개 노회의 노회장과 서기 10인을 상대로 4천만 불의 손해배상 소송을 한 것입니다. 소송을 당한 10분의 목사님들은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소송을 당한 10명 중에 필자도 속해 있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러한 문제로 세상 법정에서 그렇게 엄청난 액수인 4천만불짜리 소송을 당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생전 처음 당해본 일이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며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한 때에 표기봉 목사님이 소송 당한 10분을 좋은 식당으로 초대했습니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고급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만 해도 그런 비싼 음식을 접하기 어려운 때였습니다. 귀한 식사를 대접한 후 같은 자리에서 표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교단을 위한 일로 어려운 문제를 당한 것을 진심으로 위로 하신 후 이어서 하는 말이 우리 모두를 놀라고 화나게 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은 이러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번 소송에서 여러분은 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드시 집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맛있게 먹었던 입맛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놀란 눈으로 표 목사님을 응시하면서 왜 우리가 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듣기 위해 귀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금번 소송에서 여러분이 질수 박에 없는 이유는 여러분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것만 아니라 재판에 필요한 가짜 서류도 얼마든지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가 당한 일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싸워서 이기지 아니하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당한 소송은 다른 사람이 대신 싸워주지도 아니하며 우리 스스로 싸워 이기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는 각오를 가지게 했습니다.
너는 하지 마, 이것을 하려면 많이 울어야 해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너는 하지 마! 이것을 하려면 많이 울어야 해” 이 말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필자의 손녀가 두 살 아래 동생에게 오래 전에 한 말입니다. 큰 딸의 세 손녀들이 지금은 8학년 5학년 3 학년 학생이 되었습니다. 셋 모두 방과 후 특별활동으로 무용을 배우고 있습니다. 일 년에 두 번 정기적으로 발표회를 하고 있습니다.
셋째 손녀가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았을 때 둘째 손녀가 극장에서 발표회를 했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공연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어린 셋째 손녀가 두 살 위 언니에게 나도 언니가 하는 그 무용을 배우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둘째가 동생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배우려면 많이 울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필자는 많은 것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둘째 손녀가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마지막 경선에 올라 정해진 장소에서 실수 없이 공연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인 나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시간 속에서 구술 같은 땀만 흘린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좌절과 절망을 극복하고 이겨온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지도하시는 선생님으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책망을 받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넘어져 몸에 일부가 손상을 당했던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지난해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전국 경연대회에서 둘째 손녀가 4등을 했을 때 같은 지역, 같은 학원에서 손녀보다 2년 이상 더 무용을 연습해 왔던 언니들이 크게 울었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어떤 일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절로 되거나 거저 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비단 어른의 세계만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의 세계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음악에 맞추어 몸을 뒤집고 구르고 높이 솟아오르며 쉬지 아니하고 이어지며 반복되는 여러 가지 동작들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반복되는 훈련과 연습 그리고 이어지는
경연에서 수많은 도전자들을 이기지 아니하면 그 자리에 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남이 하지 아니하는 아픔을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다른 아이들처럼 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계속되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아니하면 다른 경쟁자들과 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 손녀이지만 그런 모습이 너무나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랜 동안 언니가 어떻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계속해서 무용을 해 온 것을 지켜본 셋째 손녀는 언니의 충고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곤 뒤를 따라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지난여름 방학 때 다우니 시립 극장에서 처음으로 셋째 손녀의 무용 발표회가 있던 날 응원과 격려차 발표장을 방문했습니다. 모든 학원생들이 다 발표회에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정한 수준과 경지에 이른 자만이 발표회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어린 막내 손녀가 큰 단상에 오르게 되었을 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행여 실수를 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첫째와 둘째 손녀들의 발표회 장에 참여했을 때에는 그런 느낌과 감정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손녀가 발표하는 때에는 긴장이 되었습니다. 실수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가 절로 되었습니다. 발표가 끝났을 때 셋째는 위 두 언니들보다 더 많은 박수를 받았으며 더 큰 상을 받았습니다. 염려가 기우에 지난 것입니다. 이제 세 손녀들은 이전 보다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여 강도 높은 훈련 과정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연말이 되면 다시 저들의 명단이 공연 순서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어린 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5570
전나무 숲에 둘러싸인 아카시아 나무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생애 처음으로 강원도 오대산의 전나무 숲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로 알려진 산책로를 걸을 때 다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함과 상쾌함이 눈으로 보는 즐거움 이상으로 기쁨을 더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전나무에서 뿜어내는 아름다운 향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계절 늘 푸른 잎을 자랑하는 전나무를 한 장소에서 그렇게 많이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마침 큰 비가 오고 난 후라 골짜기에는 맑은 물줄기가 세차게 흐르고 있어서 듣는 즐거움 속에 전나무 숲길을 걷는 행복을 더해주었습니다. 등산길 좌우로는 40여 미타 이상 되어 보이는 전나무들이 곧게 하늘로 치솟아 해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전나무 숲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내리막길 왼편에서 외롭게 자리하고 있는 아카시아 나무 한 구루를 발견했습니다. 함께 동행한 친구 목사님과 그 나무 앞에서 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나무 숲에 둘러싸인 곳에서 아카시아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방이 전나무로 둘러싸인 곳이지만 아카시아 나무는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고 자기 자리를 당당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아카시아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흔히 마을 뒷산에서 보아오던 아카시아 나무는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아오던 아카시아 나무는 곧게 자라지 않았고 휘어지거나 삐뚤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기에 좋지도 않고 사용되는 용도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오대산의 전나무 숲에 홀로 선 아카시아 나무는 자기의 본분을 잃은 듯 모양은 아카시아 나무가 분명한데 외모는 전나무를 닮았습니다.
선 자태가 전나무처럼 보기에 좋을 정도로 하늘을 향하여 곧게 뻗었고 조금도 휘어지거나 삐뚤어지지 않았습니다. 크기도 일반 아카시아 나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지금까지 그런 아카시아 나무를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이유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은 이러했습니다. 나무도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카시아 나무가 전나무를 닮아서 하늘을 향하여 바르고 곧게 그리고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나무 숲에 둘러 싸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른 장소에서 다른 나무들 틈에서 자라났다면 전나무를 닮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카시아 나무가 전나무처럼 성장하여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전나무들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나무들이 자리한 자리에 심겨졌기 때문에 아카시아 나무가 전나무의 특권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전나무들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받고 닮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예수를 믿어야 하고 예수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랑할 것 없고 보기에 흠모할 것 없는 죄인 된 우리지만 주님과 동거하며 동행하는 삶을 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주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아카시아 나무를 변하게 한 것은 주변의 전나무인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변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복을 말할 때에 만남의 복을 말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세 가지를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을 아시지요? 첫째는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면 인생의 반은 성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잘 만나야 하는 것은 종교와의 만남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어느 종교와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며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5550
표기봉 목사님을 생각하면서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기억에 새로워지는 분들이 계십니다.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분도 있는가하면 생각이 될 때마다 나쁜 감정을 가지게 하는 분도 있습니다. 표기봉 목사님은 전자에 해당하는 분이십니다. 표 목사님과는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습니다.
같은 지역에 살면서 한 교단에 속해있기에 서로 이름 정도는 알고 있으며 매년 총회 때가 되면 만나서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로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대도 그 분의 이름이 가끔 뇌리에 반복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교단 개혁을 위하여 함께 일하던 지역 노회 대표들이 집단으로 소송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단 신학교문제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교단 산하 5개 노회가 본국 총회에 신학교 책임자를 처벌해 달라는 헌의안을 올리게 되자 당사자인 C 목사가 해임 안을 총회에 상정한 5개 노회의 노회장과 서기 10인을 상대로 4천만 불의 손해배상 소송을 한 것입니다. 소송을 당한 10분의 목사님들은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소송을 당한 10명 중에 필자도 속해 있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러한 문제로 세상 법정에서 그렇게 엄청난 액수인 4천만불짜리 소송을 당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생전 처음 당해본 일이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며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한 때에 표기봉 목사님이 소송 당한 10분을 좋은 식당으로 초대했습니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고급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만 해도 그런 비싼 음식을 접하기 어려운 때였습니다. 귀한 식사를 대접한 후 같은 자리에서 표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교단을 위한 일로 어려운 문제를 당한 것을 진심으로 위로 하신 후 이어서 하는 말이 우리 모두를 놀라고 화나게 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은 이러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번 소송에서 여러분은 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드시 집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맛있게 먹었던 입맛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놀란 눈으로 표 목사님을 응시하면서 왜 우리가 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듣기 위해 귀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금번 소송에서 여러분이 질수 박에 없는 이유는 여러분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것만 아니라 재판에 필요한 가짜 서류도 얼마든지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가 당한 일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싸워서 이기지 아니하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당한 소송은 다른 사람이 대신 싸워주지도 아니하며 우리 스스로 싸워 이기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는 각오를 가지게 했습니다.
이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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