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인의 축제인 제 23회 동계올림픽이 고국 평창에서 성대하게 개최되고 있습니다. 우려와 기대 속에 기다려왔기에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TV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오프닝에서 감동의 장면이 연출될 때마다 입가에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경기가 시작이 되면서 관심은 커가고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촌각을 다투는 스피드 스케이트 한국여자의 릴레이 예선 경기는 손에 땀이 나게 할 정도였습니다. 이어지는 경기에선 스키 점프의 메달이 결정되었습니다. 독일 선수가 금메달을 땃습니다. 경기 후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우승 한 것을 알고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진한 감동이 필자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 순간의 영광을 위해서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반복되는 훈련과 절제된 생활, 땀과 희생이 있었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혹독한 고독의 시간과 부상 등으로 수많은 아픔을 견디어 왔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한 것은 없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도 없습니다.
운동 경기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업도 그렇게 직장도 그렇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마다 반복되는 노력과 자기희생이 없이는 지금의 자리를 유지하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다르지 않습니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기도를 잘하지 못하나요? 왜 나의 믿음은 성장하지 아니할까요?
교인들로부터 가끔 그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신앙 성장을 마음으로만 바란다고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원한다고 되지도 않습니다. 국가의 명예를 걸고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이 되는 것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운이 좋아서 선발이 되어도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자기를 깎는 인고의 노력이 없이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결국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하는 곳을 지옥 훈련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힘이 든다는 것이겠지요! 그런 과정이 없이는 누구도 승리의 기쁨과 영광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받는 면류관도 기쁘고 자랑스러우며, 가문의 영광이요, 나라의 자랑이지만,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면류관은 올림픽에서 받는 것 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며 더 영원한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 5장 4 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여 자녀 삼으심은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가 되게 하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싸워 이겨야할 세상의 적은 무엇일까요? 믿음의 적, 신앙의 적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 이겨할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의 세력입니다. 나를 죄악으로 이끌고 나아가게 하는 악한 영입니다. 이것을 싸워 이기지 아니하고는 마음의 평안을 이룰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 1 장 22절에서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변에서 도박으로 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약, 음주로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봅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죄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올림픽에 임하는 선수들이 철저하게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를 악물고 인내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군사로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반복되는 행동을 쉬지 않고 계속해야만 합니다. 예배도 일 년에 한번만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 주일 주님의 전에 나아가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찬송도 반복해서 해야 하고, 기도도 반복해서 해야 하며, 성경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런 행동이 반복되어야할까요? 주님께 부르심을 받는 순간까지 이런 믿음의 행동은 중단 없이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일 전 어느 분과 전화로 대화를 하다가 서로 한바탕 웃었던 일이 있었다.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우리 나이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70이라니 그 나이는 남의 나이인줄로만 알았는데 한 해가 지나면 내 나이가 되네요! 나보다 서너 살이 위이신 분이시다. 그 말에 저도 100%공감한다고 화답했다.
60, 70, 80은 한 번도 나의 나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나이는 나와 상관이 없는 나이로만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나이가 남의 나이가 아니라 이제는 나의 나이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어느새 검었던 나의 머리는 파 뿌리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지나간 세월은 젊어서 풍성했던 나의 머리카락을 가을 낙엽처럼 소리 없이 사라지게 해 이전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보기 좋았던 주변머리와 소갈머리는 여기저기 빠져나가 보기가 흉할 정도가 되었고, 팽팽하던 피부는 주름이 늘어만 갔고 검게 변해있었다.
집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흰머리가 보이기전에 염색 할 것을 항상 권했다. 그래서 주변에서 내 머리가 얼마나 변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몇 달 동안 머리에 염색을 하지 않았다. 그런 백발의 나의 모습을 본 주변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염색을 왜 하지 않느냐고 하시면서 염색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시는 분과 그대로도 보기에 좋다고 말씀을 하시는 분도 있었다. 권하는 분도 그렇고, 그렇지 않는 분도 나름대로 나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기에 고맙게 받고 있는 것이다.
변하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종합 검사를 받고 보니 속도 성한 곳이 없었다. 위장과 내장을 검사 후 치료 받았고 간도 지속적인 검사를 받아오고 있으며 지난 두 주 동안은 심장을 검사 받았다. 검사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것이 발견 되었다. 심장에서 밖으로 나가는 혈관 두 곳 이 막혀있어 다음 주에 병원에 입원을 해서 막힌 혈관을 뚫는 치료를 받게 된 것이다.
이번 일을 당하면서 집 사람이 생전에 자주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여보! 당신은 내가 죽기 전에 아프면 안 돼요! 내가 먼저 가야지 당신이 나보다 먼저가면 나는 어떻게 해요” 오랜 세월 동안 어려운 병으로 투병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불편한 몸이었기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집 사람은 원했던 대로 5 개월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이제 나의 몸을 돌보게 될 여유가 생긴 것이다. 막힌 심장 혈관을 뚫는 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권사님 한분이 전화를 주셨다. 목사님! 어떠세요! 얼마나 걱정이 되세요! 괜찮으세요! 겁은 나지 않으세요! 심장의사가 몇 칠전 내게 한 말이 있었다.
‘선생님은 Lucky 하다’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병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시기를 놓치므로 위험에 빠지는데 나의 경우는 치료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장에 이상이 있다든지 아니면 치료가 어려운 병이라면 염려도 되고 걱정도 되겠지만 심장이 아니라 혈관이 막힌 것은 치료가 되는 병이기에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치료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의사가 곁에 계시고 좋은 병원에서 시술을 하게 되므로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두는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이며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 나아가는 것임을 깨닫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 가는 세월을 막을 자가 있을까? 누가 오는 죽음을 피할 자 있을까? 세상 누구도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거스를 자가 없는 것이다. 인생 누구도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가는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죽음의 문을 통하여 영생으로 들어가는 영원한 나라를 예비하셨습니다.
나를 향하신 사랑을 알기에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내가 거할 영원한 처소를 아버지의 나라에서 지금도 쉬지 아니하시고 아름답게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을 기쁘게 찬양할 수 있으며 큰 소리로 경배와 영광을 돌리길 원하는 것입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1-31 00:34:042020-01-31 00:34:04말도 안 돼요 어떻게 우리 나이가 이렇게 되었나요!
얼마 전 필자는 27-8년 동안 쌓아온 두터운 신뢰의 관계를 맺어온 여러 사람들과 나의 잘못된 판단과 부주의로 한 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을 뻔한 일로 마음을 졸여야 했던 일이 있었다. 지난 두 달 동안 25년을 넘게 살던 집을 리모델링을 하던 때였다. 공사를 맡은 책임자는 이곳에서 태어난 멕시코계 사람이었다.
공사를 그 사람에게 맡긴 이유는 신뢰를 받은 만큼 나도 그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Cali 이었다. 오래전에 이름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California에서 태어나서 Cali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그를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은 그가 섬기는 교회가 우리 교회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한 지붕 아래 두 교회, 한인교회와 멕시칸 교회가 시간을 달리해서 예배당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31년 전에 교회당을 구입하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멕시칸 목사님이 찾아 오셨다. 예배 처소를 구하고 있는데 우리가 사용하지 아니하는 시간에 교회당을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한인교회가 다른 인종의 교회와 교회당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흔치 아니하던 시절 이었다. 37년 전에 우리도 교회를 처음 시작하면서 예배 처소를 구하지 못해서 두 달 동안 공원에서 야외 예배를 드리다가 어렵게 허락 받은 곳이 흑인 교회당이었다. 그곳에서 5 년 반 동안 셋방살이를 해본 경험이 있어서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려웠던 시절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우리가 생각지 못한 일들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지 아니할까하는 염려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예배당 사용을 허락한 것이다. 처음에는 잠시 우리 교회를 사용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함께 교회당을 사용해 오고 있는 것이다.
멕시칸 교회가 재정실력이 약해서 정한 헌금을 매월 이행치는 못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보다 교회 건물을 너무 잘 관리해 주기 때문이다. 교회 건물이 90여년이 넘은 극장 건물이기에 시도 때도 없이 수리를 해야 할 일들이 많았었다. 그럴 때마다 멕시칸 교인들이 밤을 새워가며
몇날 며칠씩 자비량으로 교회당을 수리하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항상 Cali가 있었고 그가 모든 공사를 진두지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모습에 우리는 큰 감동을 늘 받고 있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주중에는 서너 명의 여성 교인들이 와서 예배당 구석구석을 말끔하게 정리 정돈을 하는 것이다.
우리보다 저들이 더 교회를 아끼고 돌보는 것이다. 그런 저들을 보면서 평강교회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멕시칸 교인들이다 라고 교인들 앞에서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이 시대 그런 사람, 신실한 믿음의 사람을 어디에서 볼 수 있겠는가? 어느 날 Cali에게 예수를 언제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를 물어 보았다.
20살 이었을 때에 사거리 큰 길을 건너다 마주 오는 자동차에 치어 20여 미터 거리로 날아가 던져 졌다는 것이다. 그 일로 전신 마비가 되어 수년 동안 고생을 하다가 신유 은사를 행하는 목사님에게 기도 받은 후 걷게 되어 그 때부터 지금까지 주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충성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이기에 교회 건물에 문제가 생기면 우선적으로 그와 상의하여 그가 지시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오곤 했었던 것이다. 금번에도 집을 보수하려고 하는데 와서 보고 조언을 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자기가 그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할 것에 대해서 묻지도 않았는데 방법을 말하는 것이었다.
공사를 전체 맡기면 큰돈이 들어가므로 공사에 들어가는 재료비만을 지불하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당으로 지불하라는 것이었다. 서너 명이 일을 했다. 저들이 하나 같이 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이기에 나도 최선을 다하여 일하는 동안 저들을 섬기며 기뻐했다. 점심을 제공하고 수시로 음료수와 다과를 대접했다.
그러다가 한 달여 만에 집안 공사가 끝나갈 때 부엌에서 아끼던 냄비 두 개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늦게 발견한 것은 그 동안 부엌을 사용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나름대로 저들을 정성으로 섬겼는데 나에게 이런 배신을 때릴 수가 있을까? 일하는 서너 명의 사람 중 누가 이런 일을 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한 사람이 지목되었다. 틀림없이 그 사람이 가져갔을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그 사람에게 가져간 냄비를 가져오라고 말을 하려고 하다가 몇 번을 참았다. 그냥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자! 그러다가도 다시 말을 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 주고 싶었던 것이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한 주 일 후 그 냄비가 구석진 곳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참치 못하고 성급하게 생각한대로 지목한 사람을 향하여 책망하며 냄비를 가져오라고 했더라면 그 일로 저들이 받아야 했던 충격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수십 년 쌓아온 신뢰가 살아져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님 나의 섣부른 잘못된 판단을 용서해 주세요! 잠시나마 애매한 사람을 죄인으로 지목하고 정죄하며 속으로 비난했던 잘못된 나의 속단이 저들 앞에서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라며 주님께 용소를 구해야 했던 것이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1-30 02:23:152020-01-30 02:23:15수십 년간 쌓아온 신뢰를 한 순간에 잃을 뻔하다!
평창올림픽이 보여주는 감동의 눈물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전 세계인의 축제인 제 23회 동계올림픽이 고국 평창에서 성대하게 개최되고 있습니다. 우려와 기대 속에 기다려왔기에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TV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오프닝에서 감동의 장면이 연출될 때마다 입가에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경기가 시작이 되면서 관심은 커가고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촌각을 다투는 스피드 스케이트 한국여자의 릴레이 예선 경기는 손에 땀이 나게 할 정도였습니다. 이어지는 경기에선 스키 점프의 메달이 결정되었습니다. 독일 선수가 금메달을 땃습니다. 경기 후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우승 한 것을 알고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진한 감동이 필자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 순간의 영광을 위해서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반복되는 훈련과 절제된 생활, 땀과 희생이 있었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혹독한 고독의 시간과 부상 등으로 수많은 아픔을 견디어 왔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한 것은 없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도 없습니다.
운동 경기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업도 그렇게 직장도 그렇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마다 반복되는 노력과 자기희생이 없이는 지금의 자리를 유지하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다르지 않습니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기도를 잘하지 못하나요? 왜 나의 믿음은 성장하지 아니할까요?
교인들로부터 가끔 그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신앙 성장을 마음으로만 바란다고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원한다고 되지도 않습니다. 국가의 명예를 걸고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이 되는 것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운이 좋아서 선발이 되어도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자기를 깎는 인고의 노력이 없이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결국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하는 곳을 지옥 훈련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힘이 든다는 것이겠지요! 그런 과정이 없이는 누구도 승리의 기쁨과 영광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받는 면류관도 기쁘고 자랑스러우며, 가문의 영광이요, 나라의 자랑이지만,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면류관은 올림픽에서 받는 것 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며 더 영원한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 5장 4 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여 자녀 삼으심은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가 되게 하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싸워 이겨야할 세상의 적은 무엇일까요? 믿음의 적, 신앙의 적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 이겨할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의 세력입니다. 나를 죄악으로 이끌고 나아가게 하는 악한 영입니다. 이것을 싸워 이기지 아니하고는 마음의 평안을 이룰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 1 장 22절에서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변에서 도박으로 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약, 음주로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봅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죄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올림픽에 임하는 선수들이 철저하게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를 악물고 인내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군사로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반복되는 행동을 쉬지 않고 계속해야만 합니다. 예배도 일 년에 한번만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 주일 주님의 전에 나아가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찬송도 반복해서 해야 하고, 기도도 반복해서 해야 하며, 성경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런 행동이 반복되어야할까요? 주님께 부르심을 받는 순간까지 이런 믿음의 행동은 중단 없이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5163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우리 나이가 이렇게 되었나요!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수일 전 어느 분과 전화로 대화를 하다가 서로 한바탕 웃었던 일이 있었다.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우리 나이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70이라니 그 나이는 남의 나이인줄로만 알았는데 한 해가 지나면 내 나이가 되네요! 나보다 서너 살이 위이신 분이시다. 그 말에 저도 100%공감한다고 화답했다.
60, 70, 80은 한 번도 나의 나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나이는 나와 상관이 없는 나이로만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나이가 남의 나이가 아니라 이제는 나의 나이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 앞만 보고 달리다보니 어느새 검었던 나의 머리는 파 뿌리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지나간 세월은 젊어서 풍성했던 나의 머리카락을 가을 낙엽처럼 소리 없이 사라지게 해 이전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보기 좋았던 주변머리와 소갈머리는 여기저기 빠져나가 보기가 흉할 정도가 되었고, 팽팽하던 피부는 주름이 늘어만 갔고 검게 변해있었다.
집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흰머리가 보이기전에 염색 할 것을 항상 권했다. 그래서 주변에서 내 머리가 얼마나 변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몇 달 동안 머리에 염색을 하지 않았다. 그런 백발의 나의 모습을 본 주변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염색을 왜 하지 않느냐고 하시면서 염색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시는 분과 그대로도 보기에 좋다고 말씀을 하시는 분도 있었다. 권하는 분도 그렇고, 그렇지 않는 분도 나름대로 나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기에 고맙게 받고 있는 것이다.
변하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종합 검사를 받고 보니 속도 성한 곳이 없었다. 위장과 내장을 검사 후 치료 받았고 간도 지속적인 검사를 받아오고 있으며 지난 두 주 동안은 심장을 검사 받았다. 검사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것이 발견 되었다. 심장에서 밖으로 나가는 혈관 두 곳 이 막혀있어 다음 주에 병원에 입원을 해서 막힌 혈관을 뚫는 치료를 받게 된 것이다.
이번 일을 당하면서 집 사람이 생전에 자주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여보! 당신은 내가 죽기 전에 아프면 안 돼요! 내가 먼저 가야지 당신이 나보다 먼저가면 나는 어떻게 해요” 오랜 세월 동안 어려운 병으로 투병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불편한 몸이었기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집 사람은 원했던 대로 5 개월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이제 나의 몸을 돌보게 될 여유가 생긴 것이다. 막힌 심장 혈관을 뚫는 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권사님 한분이 전화를 주셨다. 목사님! 어떠세요! 얼마나 걱정이 되세요! 괜찮으세요! 겁은 나지 않으세요! 심장의사가 몇 칠전 내게 한 말이 있었다.
‘선생님은 Lucky 하다’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병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시기를 놓치므로 위험에 빠지는데 나의 경우는 치료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장에 이상이 있다든지 아니면 치료가 어려운 병이라면 염려도 되고 걱정도 되겠지만 심장이 아니라 혈관이 막힌 것은 치료가 되는 병이기에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치료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의사가 곁에 계시고 좋은 병원에서 시술을 하게 되므로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두는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이며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 나아가는 것임을 깨닫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 가는 세월을 막을 자가 있을까? 누가 오는 죽음을 피할 자 있을까? 세상 누구도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거스를 자가 없는 것이다. 인생 누구도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가는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죽음의 문을 통하여 영생으로 들어가는 영원한 나라를 예비하셨습니다.
나를 향하신 사랑을 알기에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내가 거할 영원한 처소를 아버지의 나라에서 지금도 쉬지 아니하시고 아름답게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을 기쁘게 찬양할 수 있으며 큰 소리로 경배와 영광을 돌리길 원하는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5122
수십 년간 쌓아온 신뢰를 한 순간에 잃을 뻔하다!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얼마 전 필자는 27-8년 동안 쌓아온 두터운 신뢰의 관계를 맺어온 여러 사람들과 나의 잘못된 판단과 부주의로 한 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을 뻔한 일로 마음을 졸여야 했던 일이 있었다. 지난 두 달 동안 25년을 넘게 살던 집을 리모델링을 하던 때였다. 공사를 맡은 책임자는 이곳에서 태어난 멕시코계 사람이었다.
공사를 그 사람에게 맡긴 이유는 신뢰를 받은 만큼 나도 그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은 Cali 이었다. 오래전에 이름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California에서 태어나서 Cali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그를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은 그가 섬기는 교회가 우리 교회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한 지붕 아래 두 교회, 한인교회와 멕시칸 교회가 시간을 달리해서 예배당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31년 전에 교회당을 구입하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멕시칸 목사님이 찾아 오셨다. 예배 처소를 구하고 있는데 우리가 사용하지 아니하는 시간에 교회당을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한인교회가 다른 인종의 교회와 교회당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흔치 아니하던 시절 이었다. 37년 전에 우리도 교회를 처음 시작하면서 예배 처소를 구하지 못해서 두 달 동안 공원에서 야외 예배를 드리다가 어렵게 허락 받은 곳이 흑인 교회당이었다. 그곳에서 5 년 반 동안 셋방살이를 해본 경험이 있어서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려웠던 시절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우리가 생각지 못한 일들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지 아니할까하는 염려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예배당 사용을 허락한 것이다. 처음에는 잠시 우리 교회를 사용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함께 교회당을 사용해 오고 있는 것이다.
멕시칸 교회가 재정실력이 약해서 정한 헌금을 매월 이행치는 못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보다 교회 건물을 너무 잘 관리해 주기 때문이다. 교회 건물이 90여년이 넘은 극장 건물이기에 시도 때도 없이 수리를 해야 할 일들이 많았었다. 그럴 때마다 멕시칸 교인들이 밤을 새워가며
몇날 며칠씩 자비량으로 교회당을 수리하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항상 Cali가 있었고 그가 모든 공사를 진두지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모습에 우리는 큰 감동을 늘 받고 있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주중에는 서너 명의 여성 교인들이 와서 예배당 구석구석을 말끔하게 정리 정돈을 하는 것이다.
우리보다 저들이 더 교회를 아끼고 돌보는 것이다. 그런 저들을 보면서 평강교회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멕시칸 교인들이다 라고 교인들 앞에서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이 시대 그런 사람, 신실한 믿음의 사람을 어디에서 볼 수 있겠는가? 어느 날 Cali에게 예수를 언제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를 물어 보았다.
20살 이었을 때에 사거리 큰 길을 건너다 마주 오는 자동차에 치어 20여 미터 거리로 날아가 던져 졌다는 것이다. 그 일로 전신 마비가 되어 수년 동안 고생을 하다가 신유 은사를 행하는 목사님에게 기도 받은 후 걷게 되어 그 때부터 지금까지 주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충성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이기에 교회 건물에 문제가 생기면 우선적으로 그와 상의하여 그가 지시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오곤 했었던 것이다. 금번에도 집을 보수하려고 하는데 와서 보고 조언을 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자기가 그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할 것에 대해서 묻지도 않았는데 방법을 말하는 것이었다.
공사를 전체 맡기면 큰돈이 들어가므로 공사에 들어가는 재료비만을 지불하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당으로 지불하라는 것이었다. 서너 명이 일을 했다. 저들이 하나 같이 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이기에 나도 최선을 다하여 일하는 동안 저들을 섬기며 기뻐했다. 점심을 제공하고 수시로 음료수와 다과를 대접했다.
그러다가 한 달여 만에 집안 공사가 끝나갈 때 부엌에서 아끼던 냄비 두 개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늦게 발견한 것은 그 동안 부엌을 사용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나름대로 저들을 정성으로 섬겼는데 나에게 이런 배신을 때릴 수가 있을까? 일하는 서너 명의 사람 중 누가 이런 일을 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한 사람이 지목되었다. 틀림없이 그 사람이 가져갔을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그 사람에게 가져간 냄비를 가져오라고 말을 하려고 하다가 몇 번을 참았다. 그냥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자! 그러다가도 다시 말을 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 주고 싶었던 것이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한 주 일 후 그 냄비가 구석진 곳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참치 못하고 성급하게 생각한대로 지목한 사람을 향하여 책망하며 냄비를 가져오라고 했더라면 그 일로 저들이 받아야 했던 충격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수십 년 쌓아온 신뢰가 살아져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님 나의 섣부른 잘못된 판단을 용서해 주세요! 잠시나마 애매한 사람을 죄인으로 지목하고 정죄하며 속으로 비난했던 잘못된 나의 속단이 저들 앞에서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라며 주님께 용소를 구해야 했던 것이다.
이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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