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 교회 목양 칼럼입니다

37년 목회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

아들이 필자가 살고 있는 지역의 Medical magnet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안 것이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내에는 두 곳 밖에 없는 특수학교인 것이다. 그 곳에 들어가고 나서 제일 먼저 통보 받은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학교에서 지정해준 대형 병원에서 500시간 이상의 자원 봉사를 해야만 졸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지정해준 종합병원에서 자원 봉사자가 되기 위해선 먼저 그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건강에 이상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절차에 따라 아들은 건강 검사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알았던 아들에게 건강상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 발견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병원으로 급하게 연락을 받고 가서 보니 아들의 간에서 cooper가 발견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병원 담당자의 설명에 의하면 아들의 수명이 몇 년 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뇌의 신경에 문제가 있어서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당장 학업을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간 전문 의사를 소개하면서 속히 만나 보라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 가정에 있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아내의 유방암으로 인하여 온 가족이 힘들어 할 때에 아들에 대한 소식은 글자 그대로 청천병력이었다.

누구의 죄 때문인가? 내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과연 나는 주님이 인정하시는 목사인가? 이러고도 내가 교회를 계속 시무할 수 있을까? 자신이 서지 않았다. 무슨 낯 무슨 명목으로 강단에서 설교 할 수 있단 말인가? 가족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조차 민망해 했다. 특히 아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 볼 수가 없었다.

아들 또한 나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정말로 견딜 수 없는 아픔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기도가 되지 않았다. 기도해야 하는 것은 아는데 아무리 기도를 해려해도 기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에게만 말하고 기도원으로 홀로 행했다. 언제 내려온다는 기약도 없이 그냥 무작정 떠난 것이다.

그러면서 작정하길 이제 나의 목회는 이것으로 끝이다. 그런 생각에 장로님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주일 예배를 마친 후 기도원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도원에 머무는 동안에도 기도가 되지 않았다. 성경도 읽혀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이게 뭡니까?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쉬지 않고 반복되는 탄식과 한탄만 나올 뿐이었다. 3일 째 되는 수요일 오후였다. 갑자기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David 가 누구의 아들이냐는 것이었다. 그 음성이 나의 뇌리를 강하게 충격을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David가 나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세미한 음성을 듣는 순간에 나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이 있었다. 내 아들이 아니니까? 알아서 하세요! 알아서 하세요! 알아서 하세요! 그 소리만 반복해서 부르짖고 있었다. 그 시간 이후 이상하게 마음의 평안이 찾아 왔다.

그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산에서 내려와 수요 저녁 예배를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문 의사를 소개받고 진료를 시작하기 까지는 약 2개월의 시간이 소요 되었다. 그 동안 아들은 학교 수업을 중단해야 했다. 소개 받은 의사는 여자 의사였다. 의사의 지시로 곧 바로 병원에 2주간 동안 입원을 해서 간 조직 검사를 반복해서 해야 했다.

기가 막힌 것은 미국의 병원은 어린 환자에게도 병에 대해서 숨김없이 알려 주는 것이다, 그로인하여 아들은 자신의 죽음을 응시하고 있어야 했다. 자신의 병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이 나만 아니라 가족 모두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이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일주일 후 간 조직 검사 결과를 통보 받기 위해서 병원을 찾았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설 때 담당 의사를 만났을 때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했는데 그런 나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 순간 아! 틀렸구나! 아들이 살 희망이 없다고 낙심하며 기다려야 했다. 진료실 안으로 두 딸과 집 사람 그리고 아들이 함께 들어갔다. 그 때 까지도 의사는 굳은 표정으로 우리에게 미소를 주지 않고 있었다.

아들을 진료 대에 눕히고 진찰을 한 후 검사 결과 차드를 읽고 나서 의사는 우리를 향하여 간단하고 짧은 말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It’s normal” 죽을병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난 2달 동안 우리 가족을 두렵고 힘들게 했던 사망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집 사람은 진료실 바다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기쁘기보다도 너무 냉정하고 너무 침착한 의사를 향하여 주먹으로 세차게 치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던 것이다. 이유는 의사는 이미 검사 결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대할 것이 아니라 환한 미소로 맞아 주었더라면 극도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예방 주사의 효과라고 할까? 아들은 그 과정을 통하여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아들은 학교에 돌아가서 열심히 공부하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 아들이 George town 대학을 졸업하고 Stan Ford 대학원에서 국제정치경제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4917

결혼 43년 만에 다시 끼어본 결혼반지

43년 동안 함께 살아온 집 사람이 한 달 전 세상을 떠나고 나서 집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귀중품을 담아둔 작은 보석 상자를 열고서 결혼반지를 찾았습니다. 상자속의 다른 것들은 딸들에게 주고 그 중 하나만 내가 택했습니다. 결혼반지였습니다.

그 동안 아내의 요청으로 특별한 행사에 참석을 할 때 몇 번 끼웠던 기억이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와선 곧 바로 빼서 아내에게 돌려주곤 했습니다. 평소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도 불편해하는 까닭에 반지를 끼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의 결혼반지는 오랜 시간 동안 늘 상자 속에 있어왔습니다.

결혼 초창기에 반지를 끼지 아니한 것은 당시는 막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기에 결혼반지를 끼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작은 다이아가 박힌 백금반지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손가락에 잘 들어갔습니다. 기억하기로는 지금까지 결혼반지를 3주간 이상 계속 끼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마음 같아선 3-4년은 끼고 싶은데 앞으로 얼마나 오래 동안 간직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도 나는 당신의 사람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가까운 주변 분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셨으니 이제는 좋은 분 만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니어서 그럴 때마다 일일이 대꾸하기도 그래서 손에 낀 결혼 바지를 보여주며 미소로 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 끼지 아니하던 결혼반지를 끼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돌이켜 보니 지나온 43여년의 결혼 생활이 얼마나 큰 은혜였고 축복이며 행복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집 사람을 사랑한 것보다도 집 사람에게 받은 사랑이 너무도 컸습니다. 집 사람과의 행복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너무 크게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어서 쉽게 지워지지 아니할 것 같습니다. 다시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랑을 할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당분간은 그 아름다운 추억들로 오는 세월을 견뎌 나갈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아내는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분에 넘치는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아내의 희생, 헌신 그리고 기도로 오늘의 내가 있었으며 자녀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부족하지만 주의 종으로 지금까지 사역을 지속할 수 있는 것도 아내의 내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것은 다 아내로 말미암은 선물이며 축복인 것입니다. 집 사람이 남긴 흔적을 지난 한달 동안 정리하면서 안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아니한 것을 알고서 두고 가는 나를 위하여 크고 작은 일을 다 정리하고서 떠난 것입니다.

그런 당신에게 미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의 결혼반지를 내가 해 주지 못했습니다. 나의 결혼반지도 당신이 해온 것이고 당신이 지금까지 간직하던 결혼반지도 내가 선물한 것이 아니고 당신이 직장 생활을 해서 번 돈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당신과 나만이 아는 것으로 아이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까? 먼 훗날 큰 다이아가 박힌 반지를 선물 하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지 못했습니다. 무능한 남편을 용서하기 바랍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나를 용서하기 바랍니다. 당신의 몫까지 살아서 다시 주님의 나라에서 기쁨으로 만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4854

어느 목사 사모님의 아름다운 고백

얼마 전 집사람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어느 목사님의 사모가 방문을 했었습니다. 그 사모님과 같은 지역에서 인연을 맺어온 지는 30여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넉넉지 못한 이민교회의 설립 목회자로 살아오신 C 목사님과 사모님은 동역 자들 사이에서도 신실한 목회자로 인정받으시는 이 시대에 보석같이 귀하신 목사님 가정이십니다.

같은 이민교회 동역자로서 그 동안 서로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만날 때마다 꾸밈이 없는 솔직한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그런데 그 날 만난 사모님은 우리가 알았던 이전의 사모님의 모습이 아니셨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사모님의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우리가 당황해 하는 것을 눈치 채신 사모님이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딸하고 좀 놀았습니다”라고 하시며 큰 소리로 객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셨습니다. 사모님은 아들과 딸을 두고 있으십니다. 모두 다 이곳에서 좋은 대학을 나왔고 딸은 명문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주입니다. 그런 딸의 성품도 어려서부터 보아왔기에 ‘사모님과 딸이 좀 놀았다’는 말이 우리에게 통할 리가 없습니다.

결국 사모님은 묻지도 않았는데 우리 앞에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신실한 권사님 중 한 분이 시간을 정하고 어느 장소에서 꼭 만나길 원한다고 하셔서 아무런 생각 없이 약속 장소에 가셨습니다. 그곳은 쇼핑센터 내에 자리하고 있는 네일 삽이었습니다. “왜 이곳에서 만나자고 하셨어요” 초청하신 권사님은 그제서 말을 하셨습니다.

사모님에게 작은 선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네일 값을 지불했으니 자리에 앉아서 서비스를 받으시라는 것입니다. 극구 사양을 했지만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나는 이것보다도 정말로 나를 기쁘시게 해 주시려면 같은 건물 내에 있는 식당에 가서 맛있는 식사나 사달라고 했지만 그것 역시 거절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네일 서비스를 생에 처음 받아 보신 것입니다. 그렇게 강권적이지 않으면 사모님께 그런 선물을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사전에 네일을 선물하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모님이 받으신 네일은 빛이 나는 은빛 색깔이었습니다. 일반적인 네일은 마음에 들지 않지 않으면 씻어 지을 수 있지만 사모님이 받으신 네일은 70불짜리 고급 네일 이기에 씻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손톱이 자라서 깎아 버리기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일로 교회 성도들과 만날 때마다 “사모님 웬일이세요!”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사모님의 돌발적인 행동에 모든 교인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교인들이 “어떤 연유로 그렇게 하셨어요?”라고 물을 때마다 어느 권사님이 해 주셨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딸과 좀 놀았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사모님의 열 손가락을 다시 보니 처음보다 더 아름답고 예뻐 보였습니다. 은빛으로 빛나는 사모님의 열 손가락보다 더 아름다운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그런 선물을 하신 무명의 권사님의 아름다운 헌신 때문이었습니다.

사모님은 이렇게 말을 이어 가셨습니다. 네일 값이 그렇게 비싼 줄 모르셨다는 것입니다. 팁까지 포함하면 그 이상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보다 나에게 더 필요한 것은 Cash를 선물 받는 것인데 하면서 웃음을 지어 보이셨습니다.

선물하신 권사님이 왜 그런 사모님의 마음을 모르셨겠습니까? 누구보다도 사모님의 그런 마음을 다 아시면서도 그 선물을 하신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평생 한 번도 그런 서비스를 받아 보시지 못하실 것을 알기에 그리하신 것입니다. 사모님은 목회하시는 목사님을 돕기 위해 환갑을 바라보시는 지금까지도 직장을 계속해서 다니고 계십니다. 사모님의 고정 수입이 없으면 가정 뿐 아니라 교회에도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고한 몸이지만 주중에는 직장에 매이고 주말이면 교회를 섬기느라 잠시도 쉴 시간이 없으셨습니다. 그런 사모님에게 작은 위로를 드리기 위해서 무명의 권사님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그 일로 사모님은 주변으로부터 많은 인사를 받으며 그럴 때마다 웃음을 지어 보이시는 것이었습니다. 병석에 누워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집 사람도 잠시 아픔을 잊고 그 말에 감동을 받아 말하길 “아니 그렇게 사려 깊으시고 훌륭하신 권사님이 사모님 교회에 계셨군요” 하면서 함께 기뻐했습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47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