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 교회 목양 칼럼입니다

바자회를 통한 기쁨과 위로 그리고 은혜

그 동안 교회는 일 년에 두세 번 주기적으로 여전도회가 주최하는 바자회를 가져 왔습니다.

바자회를 개최하기 위해선 준비 기간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여전도회는 한두 달 전부터 판매할 물품을 모으고 판매할 목표액을 정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교우들에게 동참을 호소합니다.

바자회를 개최하는 날은 토요일 오전 교회 앞마당입니다. 큰길가에 교회가 자리하고 있어서 장터를 마련하면 오가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바자회가 있는 날은 잔치하는 날과 같아서 봉사할 교우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자회를 통하여 그 동안 받은 기쁨과 위로뿐 아니라 은혜가 많았습니다.

평소 교회에선 볼 수 없는 성도들의 진면모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자회를 하는 동안 동참한 모든 교우님들은 한 마음이 됩니다. 나이를 잊고 동심으로 돌아갑니다. 처음부터 마치는 때까지 웃음꽃이 떠나지 않습니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는 필자도 기쁨으로 봉사하는 교우님들의 손길을 보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바자회가 모두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은 평소에 보지 못하던 특별한 음식들이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필자가 바자회를 좋아하는 것은 함께 수고하며 음식을 나무면서 오가는 대화 속에서 다른 곳에선 들을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성도들의 참 모습과 은혜로운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개최한 바자회를 통하여 M집사님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M집사님은 50 중반의 나이에 금년에 생에 처음으로 집사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바자회를 개최하는 기간에 여행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자회에 동참하기 위해서 여행일정을 며칠 늦춘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비행사에 170불의 추가비용을 지불하셔야 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권한 것도 아닙니다. 본인 스스로 결정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집사님의 헌신과 희생이 더 귀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집사님을 교회로 인도하신 권사님이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누면서 들려주신 M집사님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가정의 달 5 월의 큰 수확이었습니다.

집사님은 5남매의 장녀로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야 했습니다. 40에 홀로되신 어머니가 어린 자녀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너무도 험하고 힘든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각종 궂은일을 하시는 어머니를 곁에서 도우며 눈물겨운 고난의 삶을 온 몸으로 격어야 했던 것입니다. 다행이 어머니와 집사님의 큰 희생으로 4명의 동생들은 학교도 다니며 잘 성장했습니다. 집사님의 어머니는 평생 몸으로 일하며 사셨기에 건강이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는 너무나 행복하고 꿈같은 삶을 사시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홀로되신 어머니에게 30여 년 전에 재혼을 청혼한 분이 계셨답니다. 어머니의 사정과 형편을 잘 아는 분의 청혼이었음에도 당시 쉽게 허락하지 못한 것은 5 자녀들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게 청혼을 거절하고 자녀들만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오셨습니다.

그러다가 70살이 되시던 해였습니다. 어느 가정에서 가정부를 구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일하러 가셨다가 30여 년 전에 청혼을 하셨던 분을 극적으로 다시 만나신 겁니다. 다시 강력한 청혼을 받으시고 더 이상 거절하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늦었지만 자녀들의 축하 속에 새 가정을 이루신 겁니다.

그런데 새 아버님의 어머니 사랑은 정말로 흔히 볼 수 없는 그런 사랑이셨습니다. 평생을 몸으로 살아오셨는데 재혼하신 이후로는 손에 물을 대지 못하게 새 아버지가 하신다는 겁니다. 그 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편하게 살라며 젊은이 부럽지 않는 남편의 꿀 같은 사랑을 받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 고국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를 할 때면 가끔 어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신다는 겁니다. “이런 줄 알았으면 진작 재혼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행복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새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존경을 가지게 되며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부모님을 모신 것에 늘 기뻐하시며 감사하면서 인생 후반기에 비록 늦기는 했지만 돌고 돌아 만난 주님의 교회 안에서 성실한 믿음으로 이민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시는 M집사님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에서 우리 모두의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게 하는 가정의 달 5 월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4641

주일에 행한 어느 특별한 결혼식 주례

지난 4월 9일은 종려주일이었다. 주일 오전 오후 예배를 마치고 교회에서 한 시간 반 거리에 떨어진 야외 예식장에서 오후 4시에 개최되는 결혼식 주례를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목회를 해오면서 여러 번의 결혼식 주례를 해 왔었다. 그러는 동안 결혼식을 요청하는 예비 신랑 신부들에게 주례자로서 지켜온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로 주일에는 결혼식을 주례하지 않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세례 받지 않은 자의 주례는 사양하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결혼식을 하기 전 적어도 두 세 번의 만남을 통하여 결혼의 중요성과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성경이 제시하는 비결을 나누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리허설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번의 결혼식 주례는 이러한 원칙에도 없는 특별한 결혼식이 되고 말았다. 결혼하는 신부를 결혼식 전에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을 뿐더러 신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세례는 받았는지 묻지도 못했다. 사진으로도 보지 못했다. 보통 결혼식을 하는 주간에 가지는 리허설도 하지 못했다.

예비 신랑과 신부가 한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주례요청을 받으면 일자와 시간 그리고 장소를 의논하게 되는데 이번 경우는 그러지 못했다. 집례자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못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주례를 부탁하기 전 이미 일자와 장소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런 예는 없었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례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신랑이 될 청년이 옛 교인이었으며 생애 처음으로 필자에게 하는 부탁이었기 때문이었다. 청년 시절 수년 동안 교회에 다녔다가 대학을 타 도시로 가면서 교회를 떠난 지가 벌써 십 수 년이 지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번 직장을 구한 것이 서울의 대형 은행이어서 6-7년 전에 미국을 떠난 것이다. 그러는 동안 한 번도 소식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잊혀 가는 줄만 알았던 K 군이 약 두 달 전 결혼식 주례를 요청하는 국제 전화를 받고서 망설임이 있었던 것은 고난 주일 오후에 결혼식 주례를 요청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거절하지 않고 주례를 허락한 것은 청년의 인품과 신앙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주례를 부탁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한국에서 결혼을 하면 미국의 가족들이 참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구나 신랑 신부도 결혼식을 위해 정해진 날짜 이틀 전에 미국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결혼식을 마치면 곧 바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례를 허락하긴 했지만 지난 두 달여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그것은 지금까지 목회자로서 주님 앞에 지켜오던 주님의 날에 대한 예배와 주님을 섬김에 대한 나의 원칙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오랜 동안 목회를 해 오면서 내가 정한 원칙을 스스로 포기해 버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주님 앞에 죄송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번이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일에 주례하는 결혼예식이 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식장을 향하여 달려간 것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된 결혼예식이었지만 온 마음과 정성으로 혼인예식을 인도하며 복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새 가정을 크게 축복하시길 진심으로 기도를 했던 것이다.

혼인예식을 진행하는 동안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마음에 샘솟길 시작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결혼식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기뻤던 것은 신부의 가족 모두가 예수를 잘 믿는 신실한 믿음의 가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하객이 모인 성대한 결혼식은 아니었지만 혼인식을 통하여 신랑신부가 크게 기뻐하고 양가의 부모님들과 가족 그리고 모인 축하객들이 하나 같이 축하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K 군의 결혼 주례를 허락하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식장을 떠나 먼 길을 운전하면서 주님께 감사드리는 기도를 이렇게 드렸다. 주님! K 군의 결혼예식을 축복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목회자로서 주님께 지켜온 예배와 주일 섬김에서 다시는 이 같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례한 주일의 혼인예식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부족한 종을 도우시고 축복하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립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4605

6.25 참전 어느 간호장교의 눈물의 편지

얼마 전 40여 년 동안 인연을 이어온 87세 고령의 6.25 참전 간호장교이셨던 분으로부터 가슴이 저린 여러 장의 두툼한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와이오밍 주에서 홀로 사시는 한국의 육군 소령 출신의 L 여사님이 자신의 장례식을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아직은 건강하셔서 누구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지만 가까운 시일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었다. L 여사님은 평생을 전문 의료인으로 살아오셨던 분이시다. 필자가 여사님과 인연을 가지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이었다.

남가주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인 Long Beach에서 살던 어느 날 오후에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고운 한복을 입으시고 흰색의 고무신을 신으신 채 머리에 무거운 보자기를 이고 걸어가시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한 눈에 보아도 한국 할머니였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이민자가 많지 않았을 때였다. 공식적인 집계로 LA 카운티에 한국인이 3-4천명이 살았던 때였던 것이다. 더구나 LA에서 멀리 떨어진 Long Beach 시에선 길을 가다가 교포를 만나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가던 길을 돌아서 할머니에게 간 것은 머리에 올린 물건이 너무 무거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할머니는 버스도 타실 줄 모르는 분이셨다. 물론 영어도 한 마디도 하시지 못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가지고 계속 걸어야 하셨던 것이었다.

70년 대 초 혼자 사시는 딸의 초청으로 이민을 오셨다. 집에만 계시기엔 너무 답답하셔서 가끔 홀로 있을 때는 길을 따라 걸으셨던 것이다. 그 날도 갔던 길을 되돌아 큰 길을 따라 같은 방향으로 걸으면 집이 나온다는 것만을 아시고 앞을 향하여 걷고 계셨던 것이었다.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은 평소 오가면서 눈여겨 보아오던 넓은 공터에 무성하게 돋아난 봄나물을 뜯어가지고 가시는 길이었던 것이다. 만났던 곳에서 집까지 가려면 4-50분은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걸어야 하는 길이었기에 차를 타고 가시는 동안 고맙다는 말을 반복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다.

집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나를 그대로 보내지 않으셨다.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 정성스런 식사를 대접하셨던 것이다. 그때 먹었던 닭 미역국은 평생의 기억에 남을 정도로 특별한 맛이었다. 그 후로 할머니의 가족과 필자는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할머니 댁을 고향의 어머니 집처럼 드나들었다. 할머니는 특별한 음식을 만드는 날이면 부르시는 것이었다.

그 인연이 발전하여 할머니 가족과 지금까지도 인연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속담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모래알 하나를 드리고 할머니와 그분의 딸 L 여사님으로부터 지금까지 받아온 사랑과 축복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던 것이다.

자신의 장례식을 말과 글로만 부탁한 것이 아니었다. 필자가 L 여사님의 부음 소식을 들으면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세세하게 준비를 해 놓으신 것이다. 장례식을 위해서 누구에게 무엇을 부탁하고 누구에게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깨알 같은 글씨로 남기신 것이다. 평소와 같이 자신의 사후 문제에 대해서 생각의 생각을 하고서 한 치의 실수가 없이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문서로 해 놓으신 것이다. 자신이 어느 순간에 운명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갈 곳은 와이오밍의 어느 장의사이며 그곳에서 친지들과 가족들이 모이면 장례식을 필자가 인도한 후 시신은 곧 바로 화장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화장이 완료되면 필자가 고인의 유골을 한국으로 모시고 가서 국립묘지에 안장을 할 수 있도록 절차와 처리에 대해서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받은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생을 조국 대한민국과 남을 위해서 희생하시며 사셨던 분이셨다. 국가를 위해서 청춘을 바친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셨던 분이셨다.

이민자로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도 자신의 행복보다는 이웃의 행복을 위하여 섬김의 본을 보이셨던 분이셨다. 십 수 년 전 필자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L 여사님이 사용하는 화장품을 보고서 놀란 일이 있었다. 여인으로서 기초적인 화장품도 가방 속에 지니고 다니시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양발은 구멍 뚫린 것을 서툰 바늘 솜씨로 이리저리 얽어 맨 것을 신고 계셨던 것이다. 그 때 필자가 드린 말씀이 생각이 났다. 이제는 그만 하셔도 됩니다. 이제는 본인을 위해서 사셔도 됩니다. 어려서 너무 가난하게 사셨던 것이 습관화 되셔서 먹는 것 입는 것까지도 절약하며 사셨던 것이다.

불현듯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면서 그 날을 준비하신 여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얼마나 기가 막히고 슬퍼하였을까를 생각할 때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꼈던 것이다. L 여사님! 자랑스럽습니다. 멋있게 사셨습니다. 아름답게 사셨습니다. 존경스럽습니다. 우리의 곁에 지금까지 계셔 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45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