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 교회 목양 칼럼입니다

목양칼럼 # 233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하는 봄!

말라 죽은 가지 같았던 과실 수들이 하나 둘씩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펴면서 푸른 새 순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봄이 온 것을 가장 먼저 알린 것은 오렌지 꽃과 복숭아꽃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살구와 사과나무에서 꽃이 피기 시작했으며 지난 주간에는 감나무에서 새 순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체리와 대추가 뒤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나무들이 계절이 바뀜을 자신들의 변화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성이 무딘 필자와 같은 사람도 자연의 변화를 가까이서 보면서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생동하는 계절의 변화를 통하여 자연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같은 땅에서 같은 햇빛을 받으며 자라는데 모두가 하나같지가 않습니다. 나무마다 같은 꽃이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각기 자기의 이름대로 다른 모양의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각기 다른 모양의 잎이 돋아나게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왜 각기 다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아는 것은 살아 있는 나무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잎이 피고 꽃이 피며 때에 맞게 열매를 맺습니다. 왜 나무들이 종류대로 열매를 맺는 것일까요? 심는 이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보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일하는 농부들에게 결실의 기쁨을 안겨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보면서 사도바울이 왜 성도들을 향하여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 하셨는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은 내가 기쁘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대접과 환영을 받습니다. 사람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기쁨의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된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기쁘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기쁨은 나만의 기쁨이 아닙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며 이웃의 기쁨이 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슬픔을 가진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항상 기뻐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선 좋은 땅에 심기어져야 합니다. 물이 마르지 아니하는 시냇가에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땅에 심기어질 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축복의 땅에 뿌리를 내리도록 허락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사람마다 세상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복 있는 사람은 룻처럼 보아스의 땅에서 이삭을 줍도록 허락 받는 것입니다, 첫 결혼에 실패한 룻이 보아스의 땅에 들어가 이삭을 주었습니다.

이삭을 줍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알의 이삭을 줍기 위해서 허리를 굽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허락하신 교회 안에서 한 알의 이삭을 줍는 것 같은 믿음의 행동을 지켜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땅의 주인인 예수님의 그림자 보아스인 것입니다.

이방의 실패한 여인 룻이 보아스의 땅에서 이삭을 줍는 일로 보아스의 마음에 들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길 원하노라”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로인하여 가장 천하고 멸시 받으며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룻이 하루아침에 신분의 변화를 받아 그 땅에서 가장 존중히 여김을 받는 축복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생각과 걸음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무엇을 위하여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 가를 불꽃같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하루하루의 우리의 삶이 주님의 마음에 감동과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아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021년 3월 14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우리의 소망과 자랑(살전 2장 19 – 20절) / 여전도회 총회 개회설교

사람마다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에 소망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소망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씨앗과 같아서 정한 때에 심어야 합니다. 아무 때나 심는 것이 아닙니다. 심는 장소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 심어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심는다고 다 결실하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양분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누가 그것을 해야 합니까? 내가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나의 행복, 나의 기쁨은 남이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본문에도 우리의 소망, 우리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기쁘지 아니하면 남에게 기쁨을 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기쁘지 아니하면 주님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전도회를 섬겨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입니까?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교회에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소망과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성령님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소망을 가지되 예수안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기쁨이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세상이나 물질이나 가문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의 사람이 된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교회 여전도회는 주님이 인정하시는 여전도회인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수고한 모든 수고를 다 기억하시고 하늘의 상급으로 예비하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힘을 모으고 여전도회 총회로 모인 것은 목적이 하나입니다. 누구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함입니까?

주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런 여전도회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상기 목사
2021년 3월 14일 / 친교실에서

목양칼럼 # 232 교회 뜰에 심은 튤립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는 봄이 왔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가는 세월 막지 못하고 오는 세월 막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세월을 역행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의 법칙과 정하신 순리에 복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해 말 교회를 섬기는 부목사님이 꽃씨를 뿌리면서 튤립 씨앗도 40개를 사 오셨습니다. 생김새가 작은 양파처럼 생겼으며 모양도 그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30센티미터 간격으로 땅을 파고 심을 때 곁에서 지켜보면서 과연 이것이 3-4개월 후 어떤 모양의 꽃을 피울까에 대하여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는 지난 서너 달 동안 튤립을 심었던 기억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서너 주일 전부터 대지를 뚫고 푸른 잎을 세우며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오늘은 그 중 하나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한 번도 튤립을 심어보지 못했고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고 신비로우며 아름다운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하나님의 솜씨를 새삼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 어느 누가 만물을 소생케 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만물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솜씨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름답게 피어나는 튤립 꽃을 보면서 갈라디아 6장 7절의 말씀이 기억되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렇습니다. 심지 아니했으면 기쁨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심을 것을 먼저 생각하고 필요한 양을 계산한 후 정해진 장소에 가서 값을 지불하고 사다가 땅을 파고 거름을 덮으며 때마다 필요한 물과 양분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그 일을 누가 해야 합니까? 나의 기쁨 나의 행복은 남이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126편의 기자는 5–6절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행복하길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우연하게 오지 않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아픔의 눈물, 하늘과 땅의 풍성한 축복을 보상하는 희생과 헌신의 씨앗을 뿌리고 또 인내로 뿌리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결실할 때 비로서 감동과 감격의 기쁨과 행복을 내가, 우리가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 않고는 거둘 것이 없습니다. 돌보지 않고는 내게 돌아올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5장 7–8절에서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운동장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구경하는 사람과 경기하는 선수들 그리고 경기를 진행하는 심판이 있습니다. 구경꾼에겐 상이 없습니다. 아무리 여러번 경기장에 들어가도 상이 없습니다. 경기를 운영하는 위원이나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선수에게는 상이 있습니다. 언제 상이 주어집니까?

경기에 이긴 자입니다. 세상에 쉬운 경기는 없습니다.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선 많은 연습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경기하는 동안 잠시도 방심하거나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때로는 죽기를 각오하고 경기에 임하지 아니하면 적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늘의 상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2021년 3월 5일
이상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