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 월 1 일 오랜 인연을 맺어온 H 장로님의 부인 권사님의 장례식이 있어서 장지에 참석 해 대표기도를 했습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장로님은 아니시지만 제가 아는 교회 밖에서 만나는 장로님들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장로님의 부인 권사님이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시다가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오랜 시간 고인과 관계를 이어오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로인해서 행복했었던 기억들이 생각나 장로님으로부터 권사님이 부르심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먹먹해 지는 아픔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길고 슬펐던 질병의 사슬을 끊어주신 은혜를 감사드리며 권사님의 영혼을 받아 주심을 기뻐했습니다.
H 장로님을 필자가 크게 존경하는 것은 십 수 년 째 교제를 이어오면서 단 한 번도 말이나 행동에 실수가 없으실 뿐 아니라 매사에 본을 보이시는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 하거나 비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으시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높이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장로님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케하는 성품을 느끼곤 했습니다. 진실한 주님의 제자요,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장로님을 존경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내가 어려운 병으로 힘들어 할 때 끝까지 곁에서 아내를 위해서 크게 헌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아내가 그런 병에 걸려야 합니까? 평생 주님을 위하여 충성한 결과가 이게 뭡니까? 하나님을 원망 하실 수 있으십니다. 사람을 원망할 수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그 힘든 상황에서도 이웃이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병든 아내를 돌보는 것이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요즘 코로나 19로 병든 아내를 수발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평소보다 몇 배나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로인하여 육신적으로도 감당하기 힘들고 어려웠지만 끝까지 인내로 최선을 다해서 병든 아내를 사랑과 지극한 정성으로 섬겨주시어 곁에서 지켜보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시었습니다.
요즘 코로나 19로 장례 문화가 이전에 생각지 못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번 장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장의사에서 입관예배나 발인예배를 드리지 아니하고 장지에서 한 번의 예배(하관예배)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 헌화의 순서가 이어지려고 하는데 한 분이 나타나 잠시 특별한 순서를 가지겠다고 안내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얀 네모난 나무 사장에 담겨진 흰색의 비둘기 20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안내자의 지시에 따라 고인의 딸이 상자안의 갇힌 문을 열고 한 마리의 비둘기를 두 손에 잡고 하늘로 날려 보냈습니다. 이어서 비둘기 상자의 문을 열자 나머지 19 마리의 백색의 비들기가 맑고 푸른 하늘을 떼 지어 힘차게 날아올랐습니다.
갇힌 상자 안에서 자유로운 넓은 세계를 향하여 힘차게 날아가는 모습에서 육신의 장막에서 오랜 시간 병으로 고통 받으셨던 고인의 영혼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올라가심을 상징하는 것 같아 이를 보는 모두에게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장례식을 보았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습니다.
산 물고기를 물가나 바다에서 놓아주는 것은 보았지만 장례식장에서 새장에 갇힌 잘 훈련된 백색의 비둘기를 떼 지어 날려 보내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존경하는 H 장로님! 아내를 보내시는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아프시겠습니까? 세상 누가 장로님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주님만이 장로님을 위로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 장로님을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이제부터 둘이 아닌 홀로 90을 향하여 외롭고 힘든 삶을 사셔야 하는데 도와주시길 원하며 장로님의 남은 생애가 주 안에서 더 기쁘고 행복하시며 하늘의 상급을 크게 예비하시는 삶이되시길 원합니다. 하늘에서 다시 기쁨으로 만나실 때까지 건강케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미국 생활 반세기 만에 추수감사절에 터기 고기 없이 명절을 보냈습니다. 추사감사절에 각 가정에서만 터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터기를 먹어 왔습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는 다음 달이면 교회 설립 40주년을 맞이합니다. 40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추수감사절에 터기를 먹지 아니한 때는 단 두 번뿐이었습니다.
금년과 그리고 지난 해였습니다. 금년은 코로나 19 때문에 교회에서 모임과 식사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난해에 터키를 먹지 아니한 것은 어느 교인 중 한 분이 추수감사절 때마다 먹는 터기 음식이 입에 맞지 아니한다며 차라리 닭고기를 교회에서 만들어 먹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그 분의 의견을 여전도회 회원들이 듣고서 지난해에는 교회 마당에서 터키 고기를 대신하여 양념 닭고기를 현장에서 버무려 기름에 튀겨 맛있게 먹은 일이 있습니다. 필자도 오랜 이민 생활을 하면서 추수감사절 때마다 터키 고기를 먹는 것에 익숙지 못했습니다. 근 30여년이 지나오는 동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터기 고기가 입에 맞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매년 추수감사절이 되면 터기 고기가 기다려졌습니다. 누군가 옆에서 이런 나의 변한 입맛을 향하여 말하길 이제야 비로서 미국 사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 고기가 없는 추수감사절은 생각할 수 없는 음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명절에는 교회에서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터키를 먹지 못했습니다. 전 같으면 식당에 가서라도 사 먹을 수 있지만 지금은 식당도 영업을 하지 않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집에서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할 분이 계시지만 아직 나의 실력으로는 터키를 요리할 정도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매년 추수감사절 때마다 가까이 사는 딸 가정에서 모임을 갖고 잔치 음식을 나누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번에도 딸이 초청을 했지만 처음으로 딸의 잔치 초대에 거절을 했습니다. 이유는 코로나 19 때문이었습니다. 최근 코로나 19 사태가 필자가 사는 대도시에 갑자기 빠르게 확산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하여 시 행정 당국의 책임자가 명절 기간 동안 가족 모임을 자제하라고 강력하고 권고하고 있기에 이를 거역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서로를 위해서 모임을 갖지 아니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서운하며 안스러움이 가시지 아니했습니다.
코로나 19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우리 삶의 여러 영역에 엄청난 변화와 충격을 계속해서 주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런 일이 우리 시대에 일어날 것에 대하여 예상한 과학자나 정치가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로 앞으로 어디까지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할 지에 대해서도 아는 자가 없습니다.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의 시작은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에 온 청교도들에 의해서 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미국 동부 프리므스 항에 도착한 저들을 맞은 것은 기쁨과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혹독한 추위와 질병 굶주림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항해 중 잃는 슬픔과 눈물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일 년 만에 첫 수확을 거둔 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청교도들이 드린 감사는 풍성한 가운데 드린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행복해서 드린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아픔과 고난 절망과 좌절 속에서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면서 드린 믿음의 감사이며 하나님께 감동을 드린 눈물의 감사였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불안하고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도 역사의 주인이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시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 우리가 당한 팬데믹에서 자유함을 허락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0년 12 월 1 일
이상기 목사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11-30 13:49:472021-01-06 13:17:12목양칼럼 # 218 명절 음식인 터키 없이 보낸 추수감사절!
지난 토요일 이른 아침에 교회를 향하여 자동차로 달려가고 있을 때입니다. 집에서 교회 까지는 20마일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로 30분을 달려가야 합니다. 교회로 가기 위해선 두 번의 고속도로를 갈아타야 하고 가는 길 중간 로칼 길에서는 여러 번의 교차로를 만나게 됩니다.
그 중 한 곳에서 만난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제가 탄 차 앞에는 3 대의 차가 기다리고 있었고 뒤에도 다른 차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의 세대 차 중 두 번째 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유는 다른 차와 달리 중형 트럭으로 차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검은색의 자동차 운전석 뒤편에 “JESUS IS LORD”라는 흰색 페인트의 큰 글자가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입가에선 아멘이라는 소리가 튀어 나왔습니다. 자신이 믿는 예수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모든 사람에게 표시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감동이 식기도 전이었습니다. 기다리던 신호등에 파란 불이 들어오면서 차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신호등이 바뀌기까지 5-6대의 차량이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선 3 대의 차 중 첫 번째 차가 빠르게 갔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차가 움직이지를 않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운전자가 전화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는지 아니면 전화를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검은 차 바로 뒤에 서 있던 차에서 강한 크락션 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래도 앞에 선 차가 움직이지 않으니까? 계속해서 경적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면서 비로서 두 번째 차가 움직였습니다.
그 일로 6-7 대의 차량이 건너야 할 신호등이었지만 나까지 고작 4대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내 뒤에 줄 서서 기다리던 운전자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그려지는 듯했습니다. 검은 색 차는 미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빠르고 거칠게 마치 도망가듯 달려갔습니다.
이른 아침 상쾌한 운전 길에 만난 뜻하지 않은 이 일로 필자의 마음이 상한 것은 차라리 “JESUS IS LORD”라는 말을 자기 차에 쓰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글자를 쓰더라도 그렇게 큰 글자가 아닌 작은 글씨로 썼다면 더 좋았을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자신을 구원한 주님을 증거하는 것은 귀한 일이며 아름다운 행동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모범적인 행동이 수반하지 아니하는 사소한 일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다면 그 일로 주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로만 믿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의 삶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말로서 전도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믿는 자의 삶을 통하여 주님이 증거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 22장 37절 이하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 말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이 나타나야 하며 자신을 사랑함같이 이웃의 아픔을 돌아보며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큰 소리로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외치지 아니해도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이 널리 증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11-28 11:57:462021-01-06 13:16:58목양칼럼 # 217 JESUS IS LORD
목양칼럼 # 219 어느 권사님의 장례식에 참석하고서!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지난 12 월 1 일 오랜 인연을 맺어온 H 장로님의 부인 권사님의 장례식이 있어서 장지에 참석 해 대표기도를 했습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장로님은 아니시지만 제가 아는 교회 밖에서 만나는 장로님들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장로님의 부인 권사님이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시다가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오랜 시간 고인과 관계를 이어오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로인해서 행복했었던 기억들이 생각나 장로님으로부터 권사님이 부르심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먹먹해 지는 아픔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길고 슬펐던 질병의 사슬을 끊어주신 은혜를 감사드리며 권사님의 영혼을 받아 주심을 기뻐했습니다.
H 장로님을 필자가 크게 존경하는 것은 십 수 년 째 교제를 이어오면서 단 한 번도 말이나 행동에 실수가 없으실 뿐 아니라 매사에 본을 보이시는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 하거나 비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으시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높이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장로님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케하는 성품을 느끼곤 했습니다. 진실한 주님의 제자요,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장로님을 존경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내가 어려운 병으로 힘들어 할 때 끝까지 곁에서 아내를 위해서 크게 헌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아내가 그런 병에 걸려야 합니까? 평생 주님을 위하여 충성한 결과가 이게 뭡니까? 하나님을 원망 하실 수 있으십니다. 사람을 원망할 수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그 힘든 상황에서도 이웃이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병든 아내를 돌보는 것이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요즘 코로나 19로 병든 아내를 수발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평소보다 몇 배나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로인하여 육신적으로도 감당하기 힘들고 어려웠지만 끝까지 인내로 최선을 다해서 병든 아내를 사랑과 지극한 정성으로 섬겨주시어 곁에서 지켜보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시었습니다.
요즘 코로나 19로 장례 문화가 이전에 생각지 못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번 장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장의사에서 입관예배나 발인예배를 드리지 아니하고 장지에서 한 번의 예배(하관예배)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 헌화의 순서가 이어지려고 하는데 한 분이 나타나 잠시 특별한 순서를 가지겠다고 안내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얀 네모난 나무 사장에 담겨진 흰색의 비둘기 20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안내자의 지시에 따라 고인의 딸이 상자안의 갇힌 문을 열고 한 마리의 비둘기를 두 손에 잡고 하늘로 날려 보냈습니다. 이어서 비둘기 상자의 문을 열자 나머지 19 마리의 백색의 비들기가 맑고 푸른 하늘을 떼 지어 힘차게 날아올랐습니다.
갇힌 상자 안에서 자유로운 넓은 세계를 향하여 힘차게 날아가는 모습에서 육신의 장막에서 오랜 시간 병으로 고통 받으셨던 고인의 영혼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올라가심을 상징하는 것 같아 이를 보는 모두에게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장례식을 보았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습니다.
산 물고기를 물가나 바다에서 놓아주는 것은 보았지만 장례식장에서 새장에 갇힌 잘 훈련된 백색의 비둘기를 떼 지어 날려 보내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존경하는 H 장로님! 아내를 보내시는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아프시겠습니까? 세상 누가 장로님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주님만이 장로님을 위로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 장로님을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이제부터 둘이 아닌 홀로 90을 향하여 외롭고 힘든 삶을 사셔야 하는데 도와주시길 원하며 장로님의 남은 생애가 주 안에서 더 기쁘고 행복하시며 하늘의 상급을 크게 예비하시는 삶이되시길 원합니다. 하늘에서 다시 기쁨으로 만나실 때까지 건강케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2020년 12 월 7일
이상기목사
크리스찬투데이
목양칼럼 # 218 명절 음식인 터키 없이 보낸 추수감사절!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미국 생활 반세기 만에 추수감사절에 터기 고기 없이 명절을 보냈습니다. 추사감사절에 각 가정에서만 터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터기를 먹어 왔습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는 다음 달이면 교회 설립 40주년을 맞이합니다. 40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추수감사절에 터기를 먹지 아니한 때는 단 두 번뿐이었습니다.
금년과 그리고 지난 해였습니다. 금년은 코로나 19 때문에 교회에서 모임과 식사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난해에 터키를 먹지 아니한 것은 어느 교인 중 한 분이 추수감사절 때마다 먹는 터기 음식이 입에 맞지 아니한다며 차라리 닭고기를 교회에서 만들어 먹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그 분의 의견을 여전도회 회원들이 듣고서 지난해에는 교회 마당에서 터키 고기를 대신하여 양념 닭고기를 현장에서 버무려 기름에 튀겨 맛있게 먹은 일이 있습니다. 필자도 오랜 이민 생활을 하면서 추수감사절 때마다 터키 고기를 먹는 것에 익숙지 못했습니다. 근 30여년이 지나오는 동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터기 고기가 입에 맞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매년 추수감사절이 되면 터기 고기가 기다려졌습니다. 누군가 옆에서 이런 나의 변한 입맛을 향하여 말하길 이제야 비로서 미국 사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 고기가 없는 추수감사절은 생각할 수 없는 음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명절에는 교회에서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터키를 먹지 못했습니다. 전 같으면 식당에 가서라도 사 먹을 수 있지만 지금은 식당도 영업을 하지 않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집에서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할 분이 계시지만 아직 나의 실력으로는 터키를 요리할 정도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매년 추수감사절 때마다 가까이 사는 딸 가정에서 모임을 갖고 잔치 음식을 나누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번에도 딸이 초청을 했지만 처음으로 딸의 잔치 초대에 거절을 했습니다. 이유는 코로나 19 때문이었습니다. 최근 코로나 19 사태가 필자가 사는 대도시에 갑자기 빠르게 확산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하여 시 행정 당국의 책임자가 명절 기간 동안 가족 모임을 자제하라고 강력하고 권고하고 있기에 이를 거역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서로를 위해서 모임을 갖지 아니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서운하며 안스러움이 가시지 아니했습니다.
코로나 19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우리 삶의 여러 영역에 엄청난 변화와 충격을 계속해서 주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런 일이 우리 시대에 일어날 것에 대하여 예상한 과학자나 정치가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로 앞으로 어디까지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할 지에 대해서도 아는 자가 없습니다.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의 시작은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에 온 청교도들에 의해서 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미국 동부 프리므스 항에 도착한 저들을 맞은 것은 기쁨과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혹독한 추위와 질병 굶주림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항해 중 잃는 슬픔과 눈물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일 년 만에 첫 수확을 거둔 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청교도들이 드린 감사는 풍성한 가운데 드린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행복해서 드린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아픔과 고난 절망과 좌절 속에서 내일의 희망을 바라보면서 드린 믿음의 감사이며 하나님께 감동을 드린 눈물의 감사였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불안하고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도 역사의 주인이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시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 우리가 당한 팬데믹에서 자유함을 허락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0년 12 월 1 일
이상기 목사
목양칼럼 # 217 JESUS IS LORD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지난 토요일 이른 아침에 교회를 향하여 자동차로 달려가고 있을 때입니다. 집에서 교회 까지는 20마일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로 30분을 달려가야 합니다. 교회로 가기 위해선 두 번의 고속도로를 갈아타야 하고 가는 길 중간 로칼 길에서는 여러 번의 교차로를 만나게 됩니다.
그 중 한 곳에서 만난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제가 탄 차 앞에는 3 대의 차가 기다리고 있었고 뒤에도 다른 차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의 세대 차 중 두 번째 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유는 다른 차와 달리 중형 트럭으로 차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검은색의 자동차 운전석 뒤편에 “JESUS IS LORD”라는 흰색 페인트의 큰 글자가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입가에선 아멘이라는 소리가 튀어 나왔습니다. 자신이 믿는 예수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모든 사람에게 표시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감동이 식기도 전이었습니다. 기다리던 신호등에 파란 불이 들어오면서 차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신호등이 바뀌기까지 5-6대의 차량이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선 3 대의 차 중 첫 번째 차가 빠르게 갔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차가 움직이지를 않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운전자가 전화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았는지 아니면 전화를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검은 차 바로 뒤에 서 있던 차에서 강한 크락션 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래도 앞에 선 차가 움직이지 않으니까? 계속해서 경적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면서 비로서 두 번째 차가 움직였습니다.
그 일로 6-7 대의 차량이 건너야 할 신호등이었지만 나까지 고작 4대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내 뒤에 줄 서서 기다리던 운전자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그려지는 듯했습니다. 검은 색 차는 미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빠르고 거칠게 마치 도망가듯 달려갔습니다.
이른 아침 상쾌한 운전 길에 만난 뜻하지 않은 이 일로 필자의 마음이 상한 것은 차라리 “JESUS IS LORD”라는 말을 자기 차에 쓰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글자를 쓰더라도 그렇게 큰 글자가 아닌 작은 글씨로 썼다면 더 좋았을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자신을 구원한 주님을 증거하는 것은 귀한 일이며 아름다운 행동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모범적인 행동이 수반하지 아니하는 사소한 일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다면 그 일로 주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로만 믿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의 삶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말로서 전도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믿는 자의 삶을 통하여 주님이 증거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 22장 37절 이하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 말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이 나타나야 하며 자신을 사랑함같이 이웃의 아픔을 돌아보며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큰 소리로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외치지 아니해도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이 널리 증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0년 11 월 16일
이상기목사
크리스찬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