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 교회 목양 칼럼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한 고난이 언제나 끝이 날까요?

지난 주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연세가 제일 많으신 권사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91세 되시는 K 권사님 이십니다. 목사님!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한 고난이 언제나 끝이 날까요? 이는 K 권사님만 궁금해 하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 땅위에 호흡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궁금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이 하나님께 기도로 물어보시면 알려 주시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물어보시어 알게 되시면 자신에게도 알려 달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그 때를 알고 싶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시며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을 아시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그런 말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어디 누구에게 하소연 할 때도 없으시기에 필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K 권사님은 연세에 비하여 아직도 기억력이 좋으시고 총명하시어 지금도 성경구절을 매일 암송하시고 계십니다. 매주일 강단에서 증거되는 설교 본문 가운데 요절을 정리하시여 30여 년 째 암송을 해 오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사님이 성경을 암송하고 계시는 내용의 분량이 많습니다. 일 년에 두세 차례 주일 낮 예배시 교인들 앞에서 암송하고 있는 성경구절의 일부를 제한된 시간에 맞추어 지금도 암송하고 계십니다. K 권사님은 현재 시니어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계십니다. 세 명의 아들 가정이 있지만 모두 멀리 살고 있습니다.

권사님의 삶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주일 날 교회에 나오시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성도의 교제를 가지는 시간입니다. 권사님은 교회에서 보석 같은 분이십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권사님의 남편 되시는 K 장로님과 함께 지금의 평강교회를 개척하고서 지난 40년 동안 한 번도 공 예배를 빠지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의 교회로 자리하기까지 K 장로님과 권사님의 희생과 충성이 큰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한 정부의 행정명령으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하고 꿈도 꾸지 못하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만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예배를 빠져 본 일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만 출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한된 좁은 공간에서 오고가는 사람도 없고 자동차도 없으시기에 바깥세상을 다닐 수도 없으신 겁니다. 그야말로 죄 없는 죄인이 되어 창살 없는 감옥 같은 하루하루를 지루하게 살아가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갑갑하고 고독하며 외로우시겠습니까?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하여 어려움 당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병든 사람만 힘든 것이 아닙니다. 가족이 힘듭니다.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전문 의료인들도 힘들어 합니다. 저들을 치료하다가 전염되어 목숨을 잃은 의사도 있고 간호사님들도 있습니다. 힘든 사람은 저들만이 아닙니다. 정치가들도 힘이 듭니다.

매일 방송에 나와 상황을 보고하고 대책을 발표하는 뉴욕의 쿠우모 주지사가 안쓰럽게 느껴졌습니다. 운수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합니다. 관광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힘들어합니다. 항공사에 근무하는 사람이나 경영인들 모두가 힘들어 합니다. 많은 공장, 농장을 경영하는 분들이 힘들어 합니다.

모든 가게와 회사가 문을 닫고 있어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다 힘들어합니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힘들어 합니다.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힘들어합니다. 은행에서 일하는 분들도 힘들어합니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하여 고통당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마저 예배가 중단되는 엄청난 일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른이나 아이들도 힘이 듭니다. 큰 자도 낮은 자도 다 함께 힘들어 합니다. 언제 이러한 삶의 위기와 죽음의 공포가 우리에게 다가올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도 우리가 소망을 가지는 것은 우리와 동행하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 23 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언제나 살아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굳게 잡으시고 이 어려운 고난의 때를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6493

따사한 햇살이 빛나는 사월의 어느 봄날이 주는 행복

우리가 사는 이곳 Los Angeles는 여간해선 4월에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50년 가까이 이곳에서 살아오면서 4월에 금년처럼 많은 비를 경험하기는 처음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바이러스19로 움츠러든 마음으로 답답했는데 오늘의 밝은 봄빛으로 닫힌 마음이 열리는 듯 했습니다.

특별히 필자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 것은 사무실 창가로 나타난 두 마리의 다람쥐 때문이었습니다. 일 년 전 33년 동안 사용해 오던 교회당 건물을 매각하고 지금의 교회당으로 이전하고 나서 교회당 주변에 20여 구루의 과실 수를 심었습니다. 그 중 일부에서 지난 해 사과와 복숭아 감 블루베리 등이 열렸습니다.

봄을 맞은 지금 나무마다 새순과 과실수 꽃들이 피고 지면서 새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리고 있습니다. 요즘 그 과일들이 커가는 모습을 매일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순종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겨울 동안 잠자던 나무들이 다시 살아서 잎과 꽃을 피우고 결실하는 모습이 너무도 보기에 좋습니다.

누가 보던지 아니 보던지 각 나무마다 심겨진 장소에서 자신들의 본분과 사명을 하나님과 세상 앞에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며 충성하는 모습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 사과나무엔 지난 해 열렸던 10개의 크고 작은 사과들이 아직 나무에 그대로 달려 있는데 요즘 들어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것이 다람쥐의 소행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람쥐가 사과를 따 가지고 도망가는 것이 현장에서 필자에게 목격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을 목격하였는데도 다람쥐가 밉다는 생각이 들지 아니한 것입니다. 도리어 그 작은 손으로 무거운 사과를 움켜쥐고 뒤뚱거리며 힘들게 도망가는 모습이 너무도 귀엽고 예쁘게만 보였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이처럼 야생돌물로 인하여 웃음과 행복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다람쥐가 미울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우리교회 마당 뜰을 찾아 준 것이 고맙게 느껴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람쥐와 이렇게 가까이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와 가까이 함께 할 수 없는 동물로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우리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창조 받은 만물들이 다 이 땅의 주인인 것입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교만하여 다른 피조물들을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로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지 지배하라고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하여 대기의 공기가 좋아졌다는 뉴스를 듣고 있습니다. 교통량이 줄고 공장 가동률이 현저하게 줄어 상대적으로 대기오염 방출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동안 세계는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구 도처에서 자연이 힘들다고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사인을 보내는데도 우리는 이런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하여 우리가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고 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상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생각해 봅니다. 나라와 나라가 연합하고 대륙과 대륙이 연합하여 새로운 질서로 온 인류가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sub_read.html?uid=26484&section=section3&section2=

코로나바이러스19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

필자의 큰 딸이 사는 곳은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인 오렌지카운티 플라센티아 시입니다. 둘째 손녀가 이번에 중학교를 졸업하는데 코로나바이러스19 때문에 졸업식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하면서 한 밤중에 카톡으로 긴급하게 기도를 요청해 왔습니다. 그 내용은 둘째 손녀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의 어머니 때문입니다.

그 녀의 이름은 Teiko인데 50대 초반의 남편이 코로나바이러스로 10여 일 동안 인근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아 오다가 지난 4월 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인과 세 아이들은 즉시 결리 당하여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남편과 아버지를 생전에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로 인한 충격이 너무나 컸습니다.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일로 아픈 가슴을 달래며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남편을 보내고 이틀 후인 4월 3일 부인(Teiko)과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큰 딸이 코로나바이러스19 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본인들만 충격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분을 아는 모든 분들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지 못할 뿐 아니라 앞으로 그 가정에 어떤 불행한 일이 더 일어날지에 대하여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벽 1시에 잠에서 깨어 그 소식을 접하고 즉시 주님께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Teiko를 살려 주셔야 합니다. 엄마가 살아야 아이들을 돌보지 않겠습니까?

이 가정이 원치 아니하는 큰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왜 저들이 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누가 저들의 아픔에 대하여 책임 질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어떻게 위로 할 수 있습니까? 누구의 잘못입니까? 왜 그런 일이 저들에게 임했는지 누가 알 수 있도록 설명도 해 주지 못하는 너무도 억울하고 분한 일이 아닙니까?

영문도 모르고 갑자기 사랑하는 양 부모를 잃게 되면 남은 세 아이의 장래를 누가 돌보게 되겠습니까? 어린 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어머니를 살려주셔야 합니다. 그 밤에 깊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이나 잠을 설쳐가면서 반복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침에 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장 아이들의 식사 등은 누가 도와주며 아이들을 돌볼 다른 일가친척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단지 아는 것은 손녀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연락을 해서 순번제로 음식을 가져다가 집 앞에 놓고 간다고 했습니다.

이번 사태가 전쟁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지역적인 전쟁이 아니라 세계 3차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세계 3차 전쟁이란 말은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엔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죽음입니다. 그것도 적은 죽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왜 죽습니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이면 죽지 않습니다. 천사라면 죽지 않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사람마다 죽지만 그 죽음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 없는 죽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무서운 것은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 이유 없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야 할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달리 원치 않는 죽음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19가 몰고 오는 죽음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살아야 할 사람이 죽습니다. 인정이 없습니다. 각 가정의 형편과 사정을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전쟁이 소리 없는 무서운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기도합니다. 주님! Teiko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세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주님만이 그 가정을 위기에서 구하실 수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2020년 4월 4일 12시

이상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