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제목의 칼럼을 1년 3개월 전에 크리스찬투데이 목양칼럼으로 기고한 일이 있습니다. 다은이나 다은이 엄마를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은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종종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받는 것은 필자와 특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은이는 지금 오래 전 필자가 앓았던 어려운 병으로 큰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 뿐인 외동딸이 병에 걸리고 나서 사랑하는 딸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수소문 하다가 인터넷에서 필자의 투병기를 우연하게 보고서 어렵게 여러 경로를 통하여 전화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서로 얼굴을 볼 수가 없는 것은 사는 곳이 같은 지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받고서 다은이가 남이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고 만나보지는 못했어도 한 동안 잊고 지내던 지난날의 나를 힘들게 했던 질병을 다은이가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은이의 투병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내가 겪어야 했던 길고도 어두운 죽음의 터널에서 절망하며 눈물로 부르짖었던 지난날의 모습이 생각이 되면서 그 힘들고 험한 고난의 여정을 다은이 가족이 당해야 할 모습이 영화의 장면처럼 연상이 되었습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병을 앓는 사람들이 서로 불쌍히 여긴다는 뜻의 말처럼 다은이를 통하여 잊었던 지난들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며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은이도 무사하게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이도 다은이는 현대 의학의 발달도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5-6개월 전에 골수 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쉬운 수술이 아닙니다. 과정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지만 그래도 그런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수술 결과가 예상했던 대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골수에서 새로운 피를 왕성하게 만들어 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병원에 갈 때마다 반복해서 수혈을 받고 있습니다.
그로인하여 환자인 다은이만 지치는 것이 아니라 곁에서 지켜보는 부모도 낙심을 하게 되는 겁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어머니는 우울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염려와 걱정이 되신다는 말이죠,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자식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녀가 어려운 병을 가진 부모도 다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치료의 효과가 희망적이지 아니할 때에 부모들이 갖는 낙심과 좌절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불효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부모님께 실망을 드리지 않았지만 난치병으로 어머니의 가슴을 병들게 했기 때문입니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4번째 입원 했을 때는 40일간 중환자실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40일 동안 집에 가시지 않았습니다. 필자와 함께 병상을 지키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께 너무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40일 동안 어머니는 침대 밑 시멘트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주무셨습니다.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에 잠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식사도 거르셨습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위해서 주는 식사를 제가 먹고 남으면 그것을 드시는 것으로 끼니를 대신하셨습니다. 이제서 생각하니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아파하시고 흘리셨던 눈물이 얼마나 크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이 불효자를 용서해 주세요! 하나뿐인 외동딸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애 쓰시는 다은이 엄마와 아빠의 마음이 제게도 느껴지고 있기에 더욱 주님께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살리셨던 주님! 다은이에게도 기적을 베풀어 주세요!
반복적인 수혈 밖에는 생명을 연명할 방법이 없었던 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하시어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의 피를 수혈 받지 아니하고 골수에서 왕성한 피를 조성케 하신 주님의 능력이 다은이에게도 역사하여 주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2-21 08:56:082020-02-22 01:56:4615살 외동 딸 다은이 엄마의 큰 슬픔(2)
어느 목사님 부부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 참가했다가 듣고서 감동 받은 이야기입니다. K 목사님은 60 중반의 나이를 맞고 계십니다. 지금으로부터 5-6년 전 사모님이 간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간에 1 센티미터의 암이 발견된 것입니다.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오셨습니다.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동안 다른 것은 몰라도 부부의 건강만은 주님이 책임져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사모님이 어려운 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그 일로 사모님만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남편 목사님이 더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2-3년 동안 사모님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부인을 위해서 미친 듯이 기도하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아내가 중한 병에 걸린 것은 다 나의 잘못입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나의 무능함 때문입니다. 남편을 잘못 만나 아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민 목회자의 아내에게 너무 큰 고생을 감당케 해서 중한 병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내의 병 소식을 들은 날부터 목사님은 특별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내에게 임한 간암을 나에게 옮겨 주시고 아내는 암에서 놓임을 받게 해 주세요!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주님께 가면 나는 아내의 도움 없이 주의 종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죽고 아내는 살아야 합니다”
그런 기도를 수년 동안 반복해서 눈물로 해 오셨습니다. 어느 날 사모님이 남편 목사님이 눈물로 부르짖으며 기도하시는 내용을 듣게 되셨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듣자마자 즉시 남편 목사님의 기도를 중단시키신 겁니다. 여보! 그런 기도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이 죽고 나만 살면 어쩌란 말입니까?
당신 없이 내가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당신도 살고 나도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런 기도를 당장 취소하세요! 부인의 강한 권고에 남편 목사님은 그동안 아내에게 임한 간암을 자신에게 옮겨 달라고 구한 기도를 취소해 주시길 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인과 함께 새로운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당신과 내가 함께 살아서 주의 일을 더 아름답게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시작하신 겁니다. 그 기도도 광적으로 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병원에서 여러 번의 진찰을 통하여 몸에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순간마다 죽음의 공포로 짓눌려야 했던 1 센티미터의 간에 깊이 자리 잡고 성장하던 암이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다른 병과 달리 간암으로 매일 피곤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던 연약한 몸이 건강한 몸으로 변화 받은 것입니다.
6년이 지난 지금 더 이상 간 문제로 병원에 갈 필요가 없게 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간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부부의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에게 회복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구한대로 응답해 주시는 것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생명 기간 동안 받은 은혜를 크게 감사하면서 우리 부부처럼 주변에서 뜻하지 않은 깊은 질병으로 고통과 신음에서 살아가는 불쌍한 이웃들을 위해서 이름 없이 기도하는 종으로 살고 싶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존경하는 K 목사님 부부의 건강과 가정 그리고 섬기시는 교회위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기도 드립니다.
얼마 전 필자가 사는 지역의 한인 마켓을 잠시 들릴 일이 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차를 타기 위하여 주차장으로 가는데 출입구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50대 후반의 단정하게 차려 입은 여인이 필자에게 다가와 전도지와 설교 CD를 전해 주려고 하기에, 그 분을 향하여 공손하게 수고하신다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노방 전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과 복음에 대한 열정이 없이는 공적인 장소에서 여러 사람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름대로 정중하게 예의를 표하며 수고하신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인사를 받은 전도인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신은 Valley 지역의 어느 감리교회에 속해 있으며 드리려고 하는 설교 CD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의 것이라고 하면서 너무 좋은 내용이 들어있으니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신분을 조용하게 그분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그러니 저에게는 그런 수고를 안 하셔도 됩니다.
좋은 의도로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목사이기에 더 자기 교회 목사님의 설교 CD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과 그런 일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큰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 다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라고 말하고 떠나려 하자 그래도 자신이 전하는 전도지와 설교 CD를 받아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태가 이 정도까지 되다보니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노방 전도하는 분을 귀하게 여겨 처음부터 정중하게 대한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말을 섞지 않았으면 마음이 상할 일도 없었을 것을 너무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가 차문을 열어 놓은 채 실랑이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신분을 밝힌 것은 그 시간에 다른 사람,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도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목사이기에 더 전도지를 받아야 하고, 목회자이기에 자기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반드시 들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묻지도 않았는데 설교 내용에는 이러 이러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면서 당신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이 모든 목사님들의 선생의 위치에 있는 것처럼 강하게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순간! 내가 목사입니다. 내가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입니다! 라고 말한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들을 마음에 준비가 없는 사람이나 상대방의 말을 받을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는 어떤 소리도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할 줄 모르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런 자신의 행동이 주님을 위한 열심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일로 상대방이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할까?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복음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저런 강압적인 자세로 복음을 전하면 전도의 효과가 있기는 할까? 좀 더 부드러운 자세로 전할 수는 없을까? 교회 이름으로 노방 전도를 할 정도면 준비 없이는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도인의 자세와 전도를 효과적으로 하는 방법을 훈련 받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겸손한 자세로 하지 아니하고 자기 열심만으로 한다면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전도가 될 수 있을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강요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을 당신이 받아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명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2 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여 권하라” 바른 전도인의 자세는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을 통하여 상대방이 구원을 받든지 안 받든지 우리는 속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책임은 힘을 다하여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가워야 할 전도인과의 만남이 상처로 남지 않기 위해선 주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처럼 먼저 사랑으로 상대를 향하여 겸손과 희생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희생과 사랑, 섬김이 수반하지 않는 전도는 돌짝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아서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2-20 13:05:022020-02-20 13:05:02열심만 가지고 되지 않는 노방 전도의 부작용
15살 외동 딸 다은이 엄마의 큰 슬픔(2)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같은 제목의 칼럼을 1년 3개월 전에 크리스찬투데이 목양칼럼으로 기고한 일이 있습니다. 다은이나 다은이 엄마를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은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종종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받는 것은 필자와 특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은이는 지금 오래 전 필자가 앓았던 어려운 병으로 큰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 뿐인 외동딸이 병에 걸리고 나서 사랑하는 딸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수소문 하다가 인터넷에서 필자의 투병기를 우연하게 보고서 어렵게 여러 경로를 통하여 전화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서로 얼굴을 볼 수가 없는 것은 사는 곳이 같은 지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받고서 다은이가 남이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고 만나보지는 못했어도 한 동안 잊고 지내던 지난날의 나를 힘들게 했던 질병을 다은이가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은이의 투병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내가 겪어야 했던 길고도 어두운 죽음의 터널에서 절망하며 눈물로 부르짖었던 지난날의 모습이 생각이 되면서 그 힘들고 험한 고난의 여정을 다은이 가족이 당해야 할 모습이 영화의 장면처럼 연상이 되었습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병을 앓는 사람들이 서로 불쌍히 여긴다는 뜻의 말처럼 다은이를 통하여 잊었던 지난들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며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은이도 무사하게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이도 다은이는 현대 의학의 발달도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5-6개월 전에 골수 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쉬운 수술이 아닙니다. 과정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지만 그래도 그런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수술 결과가 예상했던 대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골수에서 새로운 피를 왕성하게 만들어 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병원에 갈 때마다 반복해서 수혈을 받고 있습니다.
그로인하여 환자인 다은이만 지치는 것이 아니라 곁에서 지켜보는 부모도 낙심을 하게 되는 겁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어머니는 우울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염려와 걱정이 되신다는 말이죠,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자식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녀가 어려운 병을 가진 부모도 다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치료의 효과가 희망적이지 아니할 때에 부모들이 갖는 낙심과 좌절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불효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부모님께 실망을 드리지 않았지만 난치병으로 어머니의 가슴을 병들게 했기 때문입니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4번째 입원 했을 때는 40일간 중환자실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40일 동안 집에 가시지 않았습니다. 필자와 함께 병상을 지키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께 너무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40일 동안 어머니는 침대 밑 시멘트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주무셨습니다.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에 잠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식사도 거르셨습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위해서 주는 식사를 제가 먹고 남으면 그것을 드시는 것으로 끼니를 대신하셨습니다. 이제서 생각하니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아파하시고 흘리셨던 눈물이 얼마나 크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이 불효자를 용서해 주세요! 하나뿐인 외동딸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애 쓰시는 다은이 엄마와 아빠의 마음이 제게도 느껴지고 있기에 더욱 주님께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살리셨던 주님! 다은이에게도 기적을 베풀어 주세요!
반복적인 수혈 밖에는 생명을 연명할 방법이 없었던 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하시어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의 피를 수혈 받지 아니하고 골수에서 왕성한 피를 조성케 하신 주님의 능력이 다은이에게도 역사하여 주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6055
어느 목회자 부부의 눈물겨운 병상일기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어느 목사님 부부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 참가했다가 듣고서 감동 받은 이야기입니다. K 목사님은 60 중반의 나이를 맞고 계십니다. 지금으로부터 5-6년 전 사모님이 간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간에 1 센티미터의 암이 발견된 것입니다.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오셨습니다.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동안 다른 것은 몰라도 부부의 건강만은 주님이 책임져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사모님이 어려운 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그 일로 사모님만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남편 목사님이 더 충격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2-3년 동안 사모님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부인을 위해서 미친 듯이 기도하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아내가 중한 병에 걸린 것은 다 나의 잘못입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나의 무능함 때문입니다. 남편을 잘못 만나 아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민 목회자의 아내에게 너무 큰 고생을 감당케 해서 중한 병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내의 병 소식을 들은 날부터 목사님은 특별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내에게 임한 간암을 나에게 옮겨 주시고 아내는 암에서 놓임을 받게 해 주세요!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주님께 가면 나는 아내의 도움 없이 주의 종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죽고 아내는 살아야 합니다”
그런 기도를 수년 동안 반복해서 눈물로 해 오셨습니다. 어느 날 사모님이 남편 목사님이 눈물로 부르짖으며 기도하시는 내용을 듣게 되셨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듣자마자 즉시 남편 목사님의 기도를 중단시키신 겁니다. 여보! 그런 기도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이 죽고 나만 살면 어쩌란 말입니까?
당신 없이 내가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당신도 살고 나도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런 기도를 당장 취소하세요! 부인의 강한 권고에 남편 목사님은 그동안 아내에게 임한 간암을 자신에게 옮겨 달라고 구한 기도를 취소해 주시길 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인과 함께 새로운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당신과 내가 함께 살아서 주의 일을 더 아름답게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시작하신 겁니다. 그 기도도 광적으로 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병원에서 여러 번의 진찰을 통하여 몸에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순간마다 죽음의 공포로 짓눌려야 했던 1 센티미터의 간에 깊이 자리 잡고 성장하던 암이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다른 병과 달리 간암으로 매일 피곤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던 연약한 몸이 건강한 몸으로 변화 받은 것입니다.
6년이 지난 지금 더 이상 간 문제로 병원에 갈 필요가 없게 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간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부부의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에게 회복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구한대로 응답해 주시는 것을 체험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생명 기간 동안 받은 은혜를 크게 감사하면서 우리 부부처럼 주변에서 뜻하지 않은 깊은 질병으로 고통과 신음에서 살아가는 불쌍한 이웃들을 위해서 이름 없이 기도하는 종으로 살고 싶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존경하는 K 목사님 부부의 건강과 가정 그리고 섬기시는 교회위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기도 드립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6036
열심만 가지고 되지 않는 노방 전도의 부작용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얼마 전 필자가 사는 지역의 한인 마켓을 잠시 들릴 일이 있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차를 타기 위하여 주차장으로 가는데 출입구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50대 후반의 단정하게 차려 입은 여인이 필자에게 다가와 전도지와 설교 CD를 전해 주려고 하기에, 그 분을 향하여 공손하게 수고하신다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노방 전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과 복음에 대한 열정이 없이는 공적인 장소에서 여러 사람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름대로 정중하게 예의를 표하며 수고하신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인사를 받은 전도인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신은 Valley 지역의 어느 감리교회에 속해 있으며 드리려고 하는 설교 CD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의 것이라고 하면서 너무 좋은 내용이 들어있으니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신분을 조용하게 그분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그러니 저에게는 그런 수고를 안 하셔도 됩니다.
좋은 의도로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목사이기에 더 자기 교회 목사님의 설교 CD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과 그런 일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큰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 다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라고 말하고 떠나려 하자 그래도 자신이 전하는 전도지와 설교 CD를 받아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태가 이 정도까지 되다보니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노방 전도하는 분을 귀하게 여겨 처음부터 정중하게 대한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말을 섞지 않았으면 마음이 상할 일도 없었을 것을 너무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가 차문을 열어 놓은 채 실랑이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신분을 밝힌 것은 그 시간에 다른 사람,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도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목사이기에 더 전도지를 받아야 하고, 목회자이기에 자기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반드시 들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묻지도 않았는데 설교 내용에는 이러 이러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면서 당신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이 모든 목사님들의 선생의 위치에 있는 것처럼 강하게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순간! 내가 목사입니다. 내가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입니다! 라고 말한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들을 마음에 준비가 없는 사람이나 상대방의 말을 받을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는 어떤 소리도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할 줄 모르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런 자신의 행동이 주님을 위한 열심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일로 상대방이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할까?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복음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저런 강압적인 자세로 복음을 전하면 전도의 효과가 있기는 할까? 좀 더 부드러운 자세로 전할 수는 없을까? 교회 이름으로 노방 전도를 할 정도면 준비 없이는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도인의 자세와 전도를 효과적으로 하는 방법을 훈련 받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겸손한 자세로 하지 아니하고 자기 열심만으로 한다면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전도가 될 수 있을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강요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을 당신이 받아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명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2 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여 권하라” 바른 전도인의 자세는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을 통하여 상대방이 구원을 받든지 안 받든지 우리는 속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책임은 힘을 다하여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가워야 할 전도인과의 만남이 상처로 남지 않기 위해선 주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처럼 먼저 사랑으로 상대를 향하여 겸손과 희생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희생과 사랑, 섬김이 수반하지 않는 전도는 돌짝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아서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6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