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 교회 목양 칼럼입니다

타주에 사시는 L 장로님과의 오래된 인연

아틀란타에 사시는 L 장로님과의 교제가 20여 년째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먼 타주에 사시지만 가끔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하실 때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를 방문하시곤 하십니다. L 장로님을 알게 된 것은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신실하신 권사님 중 한분이신 P 권사님의 막내 사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L 장로님의 가족과 장모님 사랑은 특별하셨습니다. 10여 년 전에는 장모님과 필자 내외를 아틀란타로 초청해서 일주일 동안 그 일대 관광명소를 방문하는 분에 넘치는 사랑으로 섬겨주셨습니다. 그 때 받은 감동과 사랑은 삶에 활기가 되고 있으며 시간이 갈수록 기억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P 권사님 때문에 귀한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이에 지나지 않고 L 장로님은 추수 감사절이나 특별한 때가 되면 교회 앞으로 특별헌금도 매년 보내주시고 계십니다. 그 장로님 내외분이 지난 주간에 갑자기 LA를 방문하셨습니다. 갑작스런 방문 소식을 듣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L 장로님의 형님은 40년 전에 이민을 오셨습니다.

형님 장로님은 이곳 NH 교회 장로님이신데 금번에 일본으로 단기선교 여행을 가셨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10여명의 선교단원을 이끌고 단장으로 일본에서 사역을 하던 중 심근경색으로 병원에 실려 가신지 30분만인 지난 7월 28일 소천하신 겁니다. 평소 건강하셨던 형님 장로님이셨습니다.

선교 여행을 떠나시기 전에도 3번이나 건강검진을 받으셨을 때도 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과 형제들이 받는 충격은 클 수밖에 없습니다. 타국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시신을 이곳으로 모셔와서 장례식을 마치기까지는 20일의 시간이 소요되어 지난 8월 17일 로스앤젤레스 인근 공원묘지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아틀란타로 돌아가시기 전 날 L 장로님과 부인 권사님을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반가운 만남이었지만 형님을 앞세우신 장로님을 웃음으로 맞이할 수가 없었습니다. 큰 슬픔을 당하신 장로님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를 드릴 수 있을까? 생각을 거듭하다가 얻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축하의 말씀을 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갑자기 형님이 돌아가신 것은 충격이며 큰 아픔이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죽음의 복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죽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죽을 때는 죽을 만큼 아프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오랫동안 병원에서 아프다가 가신 것이 아니십니다.

중병으로 고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가슴에 통증을 느끼시고 병원에 가신지 30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미국사람들이 죽음의 복을 말할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족에게는 충격이지만 떠나는 본인에게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나 아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필자의 동생이 10여 년 전에 프리웨이 사고로 현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집에서 두 시간 거리인 현장으로 소식을 듣고 달려가던 중 운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차 안에는 둘째 딸 내외가 함께 있었습니다. 사위가 의사이기에 그 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차 사고로 현장에서 운명할 때 죽음의 공포를 느끼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육체의 고통을 느끼느냐고 물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픔도 죽음의 공포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님의 죽음이 복이 되는 것은 이것 때문이 아닙니다. 장로님의 죽으심은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시다가 선교현장에서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말하자면 순교적인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 안에서 죽는 죽음이 복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죽는 것이 복이 되는 것은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귀한 죽음은 주를 위하여 살다가 장로님처럼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상급이 하늘에서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모한다고 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자만 순교자의 면류관을 쟁취할 수 있습니다. 장로님이 이런 죽음을 받으신 것은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뿌리신 복음의 씨앗이 열매 맺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5491

한 해 동안 키운 대추를 수확하는 기쁨의 날

30여 년 전에 동일한 지역에서 목회하시는 7 명의 목사님들이 월요일마다 모여서 기도회를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임에서 벨리 지역에서 목회하시던 O 목사님이 지난 주간에 섬기시는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신 후 강사님이 전해 주셨던 은혜 받았던 간증을 모두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인천에서 목회하시는 장원모 목사님의 간증이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재정형편이 어려워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가족 식구가 살아가기에 너무 협소한 공간에서 사시기에 아침마다 학교에 등교해야 하는 아이들과 화장실 문제로 어려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가까운 시일에 문제가 해결될 방법이 없는 것을 아시는 목사님은 특별 기도를 해 오셨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회가 끝나면 교인들이 집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후 강단에 홀로 남아서 특별한 기도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장 목사님이 기도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도 집을 주세요! 어린 자녀들과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아니한 넉넉한 공간의 집을 주시길 기도한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해 오던 어느 날 강단 아래에서 여인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기도했는데 누군가가 장목사님의 기도를 듣고 있었습니다. 목사가 집을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을 다른 사람이 들은 것에 대하여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기도를 들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확인했습니다.

그 사람은 장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의 BMW(Big Mouth Woman)이었습니다. 수석 장로님의 부인이며 여전도회 책임을 맡고 있는 분으로 교회 안에서 큰 소리를 내는 분이셨습니다. 순간적으로 장목사님은 더 이상 그 교회에서 목회 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분의 능력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수일 후 토요일에 수석 장로님이 전화로 주일 예배 후 당회를 소집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생각하고서 사표를 써서 품안에 넣고서 당회에 제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회를 시작하자마자 수석 장로님이 당회원들 앞에서 무릎을 꿇으시고서 하시는 말이 목사님 잘못 했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가난하게 사셔도 되는 줄 알았다면서 목사님의 사택을 구입하기 위한 특별헌금을 수석장로님이 내시는데 당시 목사님이 구인한 집값의 절반을 내어 놓으시어 나머지 반은 교회가 부담을 해서 즉시 이사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간증을 듣는데 나의 마음에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은 그 간증을 듣고 웃고 말았는데 나는 즉시 나도 그 기도를 해야 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장원모 목사님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 나의 기도도 들어주시길 기도했습니다. 당시 다섯 식구가 2 베드룸에서 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부인과도 상의하지 아니하고 혼자 매일 새벽마다 집을 주시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2 년을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지금의 집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2층짜리로 방이 4개인 집을 주셨습니다. 집으로 이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큰 지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화가 복이 되었습니다. 보험회사로부터 23,000불의 돈을 받았습니다. FEMA에서 수천불의 정부 지원을 받았습니다.

보험회사가 집 안과 밖 페인트 및 카펫트까지 새로 교환해 주었습니다. 그 돈으로 2년 반 이상의 집 페이먼트를 지불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기도의 은혜, 응답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때 그 기도를 하지 않았으면 아직도 아파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25년 전 집을 구입하고 이사 했을 때 S 권사님이 작은 대추나무 한 구루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나무를 심고 수년 동안 잘 키웠더니 지금은 큰 나무로 자랐습니다. 그래서 매년 8 월 중순이면 대추를 따서 교회성도님들과 나누어 먹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한 해 동안 열심히 키웠던 대추나무에 올라 기쁜 마음으로 수확했습니다.

수확을 할 때마다 결실을 얻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농부의 심정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누는 기쁨을 알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년을 계획하고 기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추나무를 선물하신 권사님의 사랑이 한 순간으로 그치고 만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매해 큰 사랑의 선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집을 주시기 위해서 기도한 것에 대한 보너스를 지금도 받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장원모 목사님의 기도를 이어 받는 은혜와 응답을 받으시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5475

어느 특별한 장례식을 집례 하면서

알츠하이머 질환으로 10여 년 동안 병마와 싸우느라 많은 고생을 하시다가 지난 8월 3일에 하늘의 부르심을 받으신 92세의 C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권사님을 알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40년 가까이 지척의 거리에서 인사를 나누어왔습니다. 3남 2 녀를 두신 어머니 권사님의 큰 딸이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창립교인이며 권사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딸 권사님은 Los Angeles에서의 오랜 삶의 경계를 하와이 빅 아일랜드로 십 수 년 전에 옮겨 가셨습니다. 그로인하여 어머니 권사님과의 만남도 전과 같이 자주 갖지를 못했습니다. 1년 여 전에 딸 권사님이 어머니의 병문을 왔다가 필자에게 장례식을 부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가 기억을 잃어버리시므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멀어져 갔습니다.

오래 동안 섬겨 오셨던 교회와의 관계도 단절이 되어갔습니다. 그래서 필자에게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 바로 양로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병실에는 가족들이 와 있었습니다. 장의사에서 시신을 모셔가기까지 서너 시간 고인의 곁에서 가족들과 함께 머물 때에 평소 볼 수 없었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일하는 직원 두 분이 차례로 고인을 문상하면서 C 권사님의 손과 얼굴을 쓸어내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병원에서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해오던 환자분도 고인 앞에서 작별의 아쉬운 눈물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마지못해서 흘리는 형식적인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체면을 위해서 슬퍼하는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목회를 해 오는 동안 많은 죽음을 보아왔지만 이번의 경우는 특별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을 때에 가족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직계 가족이 아닌 이웃이 그렇게 아파하며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환자를 돌보던 병원 직원들이 그런 슬픔을 보인 것은 아주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순간 C 권사님의 인품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기억도 잃어가므로 매 순간 주변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힘들게 살면서도 의식이 돌아오거나 아니면 습관적으로라도 가까운 이웃에게 끊임없는 감동과 사랑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한 것은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습니다. 고인 앞에서 눈물을 보이신 분들을 위해서 고인이 베푸셨던 희생과 사랑이 열배 100배 더 크지 않고는 그런 대접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는 동안 나의 노리에 스쳐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나도 언젠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죽을 터인데 그 때 나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달려올 사람은 누구일까? 그 때 날 위해서 진심으로 아파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려줄 사람은 누구일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게는 그럴 사람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C 권사님처럼 이웃을 위하여 감동과 희생을 베푸는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C 권사님 고인의 면전에서 다짐을 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세상을 더 살지는 모르지만 살아가는 동안 가까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므로 죽어서도 이웃에게 사랑의 기억을 남기고 갈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C 권사님의 장례식을 준비할 때에 마음에 샘솟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면서 만난 어르신 중 미국에서 태어난 어르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C 권사님은 1926년 5 월에 Honolulu, Hawaii에서 태어나신 미주한인 이민의 뿌리로 태어나시므로 살아 있는 역사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권사님을 만날 때마다 알고 싶은 것도 많았고 묻고 싶었던 것도 많았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신 대로 주님과 교회를 남달리 사랑하셨으며 믿음의 본을 그 어려운 투병 중에도 잃지 않으시고 선한 싸움을 승리로 마감하신 권사님의 장례식을 집례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5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