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2주간 동안 미시건 주에 살고 있는 둘째 딸이 세 명의 손자녀를 거느리고 와서 머물다 갔습니다. 사위는 심장내과 의사로 바쁜 병원 일 때문에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 둘째 딸 가족이 오랫 동안 머문 것은 어려운 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선 할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날 저녁은 식당에서 함께 했습니다. 한참 음식을 맛있게 먹다가 큰 손녀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프지도 않았고 누구와 다투지도 않았습니다. 한국 음식이 맛이 있다고 열심히 먹다가 어떤 영문인지 모르게 슬픈 기색을 띄고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우는 이유를 물으니 이 밤을 지나면 가야 하는데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다시 눈물을 보이는 것입니다.
미시건 주에 비해서 이곳은 날씨가 따뜻하고 아이들의 놀이거리가 많은 켈리포니아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는 저들과 비슷한 또래의 사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놀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쓰러운 마음에 필자는 어린 손녀를 부둥켜 앉고 서너 달 후 부활절 방학 기간에 다시 오라는 말로 위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할머니와 헤어지면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다는 것이었습니다. 철없는 아이로만 알았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헤어지면 사랑하는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을 보인 것입니다. 어린 아이로만 알았던 필자에게도 이런 손녀의 행동이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손자녀가 어떤 의미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했습니다.
조용하던 집 안은 아이들이 오고서 하루도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7살, 5살, 3살짜리 손자 손녀가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손발을 주물러 줍니다. 할머니 앞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노래와 춤 솜씨를 발휘합니다. 그럴 때마다 집안은 웃음바다가 되곤 합니다. 밤이면 할머니와 함께 서로 잠을 자겠다고 해 셋이서 돌아가며 할머니와 잠을 잡니다.
집 사람은 이런 재롱이 너무 기쁘고 행복해 기쁨의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쁨과 행복을 주신 하나님께 반복해서 이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고백 했습니다.
혹자는 인생의 행복을 말할 때 건강하고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으면 행복하다고 말을 합니다. 필자도 한 때는 그렇게 생각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딸을 시집보내고 나서 한 동안 허전함을 느끼는가 했더니 곧 이어서 마치 시합이라도 하듯 두 딸의 가정에서 각기 셋씩 여섯 손자녀를
보게 하셨습니다.
아이를 키울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 손주들로 인하여 주어졌습니다. 이런 것이 사람이 사는 이유며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런 행복은 돈을 주고 살 수도 없고 노력과 수고로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지난 14년 동안 아내가 얻은 어려운 질병으로 인하여 때는 낙심도 했고 절망도 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위로 받고 웃을 수 있었으며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 병과 긴 세월 싸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자녀와 손주들을 통하여 주시는 사랑과 기쁨 그리고 주위에서 집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은혜임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19-12-31 02:35:542019-12-31 02:35:54할머니 앞에서 손녀가 보인 눈물의 의미는?
이번 주간은 한인 이민사 110여년 만에 가장 뼈아픈 고통을 당했던 4-29폭동 21 주년이 되는 주간입니다. 1991년 4월 29일 오후 5시부터 흑인 밀집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방화와 약탈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면서 성난 파도와 같은 폭도들은 더욱 가공할 위력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폭동 두번째 날 흑인 중심지역에서 대형 마켓을 운영하던 권사님 가족이 폭도들에게 습격을 받고 마켓이 불에 탔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교통이 두절되 사건 현장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4-29 폭동으로 2천여개의 업소가 피해를 당했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우리 교포가 당한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 부시 대통령이 폭동 3일째인 토요일 새벽 7시에 남가주 캠프 팬들턴의 해병대와 주 방위군을 신속하게 투입하여 더 이상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긴박했던 순간이 지나고 첫 번 맞는 주일이었습니다. 교인 중에도 피해당한 가정들이 있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예배 중 성가대원으로 수고하시는 K 권사님이 앉은 자리에서 코피를 흘리고 계셨습니다.
권사님은 지난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시고 충격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폭동이 일어나는 날 흑인 중심지역에서 대형 마켓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마켓이 폭도들에게 제 1차 공격 목표가 되어 물건을 강탈당하고 건물은 불에 타 전소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한인들이 그러했듯이 사업 보험을 들어 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피해를 보상 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후일에도 그 일로 힘든 삶을 사셔야 했습니다. 예배 중 코피를 흘리시는 권사님을 보면서 미국에 대한 분노와 배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 제일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땅에 사는 동안은 그런 일 당하지 아니할 것으로 알고 열심히 살아 왔는데 미국에 대한 치안, 경찰력에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권사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 교단 실무자들에게 긴급제안을 했습니다. 폭동피해 대책위원회를 소집했습니다. 지금은 본국 교단과 행정이 중단된 상태였지만 당시는 교단 총회 안에 미국 대회가 있어서 대회 산하 L A 지역에 3개 노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필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미주대회 서기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폭동 피해지역 3개 노회장과 서기들을 소집하여 폭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필자에게 총무 일을 맡겨달라고 자원했습니다. 그러면 곧 바로 한국에 나가 우리가 섬기는 교단 총회에 피해 당한 가정들을 위한 재정지원을 요청하겠다고 했습니다. 경비는 누가 책임을 지느냐고 하기에 일이 성사되지 아니하면 필자가 부담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분은 총회가 미주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무슨 지원을 하겠느냐고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분도 있었지만 결국 피해대책위원회가 결성 되었습니다. 그 밤을 새워 본국 총회에 보고할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폭동의 배경, 원인, 피해복구 전망 등 나름대로 서너 페이지의 보고서를 만들어 피 눈물 흘리시는 권사님을 생각하며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총회 임원들을 면담하고서 총회 산하 미주 교회 120여 가정의 피해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왜 피해당한 교우들의 가정을 신속히 돕지 않으면 아니 되는지를 가슴으로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총회 임원회가 즉석에서 미주교회들을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전국교회 앞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모금을 해 주기로 한 것입니다. 필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폭동으로 인하여 평생 쌓아온 K 권사님의 삶의 터전을 일순간에 잃어버리고 큰 절망에서 고통당하시는 아픔의 감동이 필자에게 각인 되어 마침내 교단 산하 교회에 속한 120여 가정의 피해 교인들이 한 가정 당 $1,000 불의 본국 교회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에서 교회를 설립하고 2-3 년이 지났을 때 60이 넘으신 할머니 한분이 교회를 찾아 오셨습니다. 몇 개월 동안 아무 말 없이 교회를 다니시다가 어느 날 심방을 했을 때 교회출석 동기를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이 고향이신 할머니는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떠나 실향민으로 서울에서 사시다가 1970년 초 미국에 유학을 온 아들의 초청으로 이민을 오셨습니다. 교회에 대한 기억은 어린 시절 잠시 교회에 다녔던 기억이 전부였습니다. 그 동안 교회를 멀리하며 하나님을 잊은 채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일상적인 꿈은 잠에서 깨어나면 쉽게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날의 꿈은 시간이 가도 생생한 것입니다. 꿈인데도 생시보다 더 분명하고 더 실감 있게 느껴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제일 먼저 안내 받아 간 곳은 주님 앞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할머니에게 “사랑하는 딸아 그 동안 수고 많았다”고 하시면서 친히 할머니의 머리에 개털모자를 씌어주셨습니다. 그것을 받는 순간 너무 좋아서 무어라 표현할수 없는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할머니는 예수님을 위하여 세상에 사는 동안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자신에게 분에 넘치는 대접과 상을 주신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친히 자신을 기억해 주시고 초청해 주실 뿐 아니라 손수 머리에 개털모자를 씌워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예수님께 개털 모자를 받아쓰고 주님의 곁을 떠나 천국의 아름다운 황금 길을 걸어갈 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할머니의 모자와 같은 모자를 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빛나는 면류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빛나는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자기 머리에 쓴 모자가 자랑스러운 모자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할머니의 머리에 쓴 개털모자를 보면서 조롱하는 사람도, 비난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시작된 교회 생활은 세상을 떠나시기 까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집사로 직분을 감당하시다가 마지막에는 시무 권사로 10여년을 충성스럽게 섬기시다가 십수년전에 주님의 부르심을받으셨습니다.
C 권사님의 이야기는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집사 직분을 받으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어느 날 필자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심방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심방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났을 때 옷장에서 두 겹의 예쁜 보자기에 싼 물건을 건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물으니 한국에 두고 온 땅 문서라고 하셨습니다. 찬송가 반권 분량의 일산과 금촌 일대의 땅 문서였습니다.
그로부터 2 주일 후 아들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어머니가 드린 땅 문서를 되돌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긴급당회가 소집 되었습니다. 결국 당회의 결의로 문서를 돌려주었습니다. 아직도 그 때의 아쉬움이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C 권사님의 개털 모자를 바꿔 쓰실 기회를 교회가 지켜주지 못한 것 같은 생각 때문입니다.
할머니 앞에서 손녀가 보인 눈물의 의미는?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지난 연말 2주간 동안 미시건 주에 살고 있는 둘째 딸이 세 명의 손자녀를 거느리고 와서 머물다 갔습니다. 사위는 심장내과 의사로 바쁜 병원 일 때문에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 둘째 딸 가족이 오랫 동안 머문 것은 어려운 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선 할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날 저녁은 식당에서 함께 했습니다. 한참 음식을 맛있게 먹다가 큰 손녀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프지도 않았고 누구와 다투지도 않았습니다. 한국 음식이 맛이 있다고 열심히 먹다가 어떤 영문인지 모르게 슬픈 기색을 띄고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우는 이유를 물으니 이 밤을 지나면 가야 하는데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다시 눈물을 보이는 것입니다.
미시건 주에 비해서 이곳은 날씨가 따뜻하고 아이들의 놀이거리가 많은 켈리포니아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는 저들과 비슷한 또래의 사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놀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쓰러운 마음에 필자는 어린 손녀를 부둥켜 앉고 서너 달 후 부활절 방학 기간에 다시 오라는 말로 위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할머니와 헤어지면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다는 것이었습니다. 철없는 아이로만 알았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헤어지면 사랑하는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을 보인 것입니다. 어린 아이로만 알았던 필자에게도 이런 손녀의 행동이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손자녀가 어떤 의미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했습니다.
조용하던 집 안은 아이들이 오고서 하루도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7살, 5살, 3살짜리 손자 손녀가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손발을 주물러 줍니다. 할머니 앞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노래와 춤 솜씨를 발휘합니다. 그럴 때마다 집안은 웃음바다가 되곤 합니다. 밤이면 할머니와 함께 서로 잠을 자겠다고 해 셋이서 돌아가며 할머니와 잠을 잡니다.
집 사람은 이런 재롱이 너무 기쁘고 행복해 기쁨의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쁨과 행복을 주신 하나님께 반복해서 이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고백 했습니다.
혹자는 인생의 행복을 말할 때 건강하고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으면 행복하다고 말을 합니다. 필자도 한 때는 그렇게 생각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딸을 시집보내고 나서 한 동안 허전함을 느끼는가 했더니 곧 이어서 마치 시합이라도 하듯 두 딸의 가정에서 각기 셋씩 여섯 손자녀를
보게 하셨습니다.
아이를 키울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 손주들로 인하여 주어졌습니다. 이런 것이 사람이 사는 이유며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런 행복은 돈을 주고 살 수도 없고 노력과 수고로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지난 14년 동안 아내가 얻은 어려운 질병으로 인하여 때는 낙심도 했고 절망도 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위로 받고 웃을 수 있었으며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 병과 긴 세월 싸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자녀와 손주들을 통하여 주시는 사랑과 기쁨 그리고 주위에서 집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은혜임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1428
내가 겪은 4-29 폭동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이번 주간은 한인 이민사 110여년 만에 가장 뼈아픈 고통을 당했던 4-29폭동 21 주년이 되는 주간입니다. 1991년 4월 29일 오후 5시부터 흑인 밀집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방화와 약탈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면서 성난 파도와 같은 폭도들은 더욱 가공할 위력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폭동 두번째 날 흑인 중심지역에서 대형 마켓을 운영하던 권사님 가족이 폭도들에게 습격을 받고 마켓이 불에 탔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교통이 두절되 사건 현장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4-29 폭동으로 2천여개의 업소가 피해를 당했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우리 교포가 당한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 부시 대통령이 폭동 3일째인 토요일 새벽 7시에 남가주 캠프 팬들턴의 해병대와 주 방위군을 신속하게 투입하여 더 이상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긴박했던 순간이 지나고 첫 번 맞는 주일이었습니다. 교인 중에도 피해당한 가정들이 있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예배 중 성가대원으로 수고하시는 K 권사님이 앉은 자리에서 코피를 흘리고 계셨습니다.
권사님은 지난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시고 충격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폭동이 일어나는 날 흑인 중심지역에서 대형 마켓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마켓이 폭도들에게 제 1차 공격 목표가 되어 물건을 강탈당하고 건물은 불에 타 전소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한인들이 그러했듯이 사업 보험을 들어 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피해를 보상 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후일에도 그 일로 힘든 삶을 사셔야 했습니다. 예배 중 코피를 흘리시는 권사님을 보면서 미국에 대한 분노와 배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 제일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땅에 사는 동안은 그런 일 당하지 아니할 것으로 알고 열심히 살아 왔는데 미국에 대한 치안, 경찰력에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권사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 교단 실무자들에게 긴급제안을 했습니다. 폭동피해 대책위원회를 소집했습니다. 지금은 본국 교단과 행정이 중단된 상태였지만 당시는 교단 총회 안에 미국 대회가 있어서 대회 산하 L A 지역에 3개 노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필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미주대회 서기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폭동 피해지역 3개 노회장과 서기들을 소집하여 폭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필자에게 총무 일을 맡겨달라고 자원했습니다. 그러면 곧 바로 한국에 나가 우리가 섬기는 교단 총회에 피해 당한 가정들을 위한 재정지원을 요청하겠다고 했습니다. 경비는 누가 책임을 지느냐고 하기에 일이 성사되지 아니하면 필자가 부담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분은 총회가 미주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무슨 지원을 하겠느냐고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분도 있었지만 결국 피해대책위원회가 결성 되었습니다. 그 밤을 새워 본국 총회에 보고할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폭동의 배경, 원인, 피해복구 전망 등 나름대로 서너 페이지의 보고서를 만들어 피 눈물 흘리시는 권사님을 생각하며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총회 임원들을 면담하고서 총회 산하 미주 교회 120여 가정의 피해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왜 피해당한 교우들의 가정을 신속히 돕지 않으면 아니 되는지를 가슴으로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총회 임원회가 즉석에서 미주교회들을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전국교회 앞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모금을 해 주기로 한 것입니다. 필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폭동으로 인하여 평생 쌓아온 K 권사님의 삶의 터전을 일순간에 잃어버리고 큰 절망에서 고통당하시는 아픔의 감동이 필자에게 각인 되어 마침내 교단 산하 교회에 속한 120여 가정의 피해 교인들이 한 가정 당 $1,000 불의 본국 교회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1290
개털 모자를 쓰신 권사님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에서 교회를 설립하고 2-3 년이 지났을 때 60이 넘으신 할머니 한분이 교회를 찾아 오셨습니다. 몇 개월 동안 아무 말 없이 교회를 다니시다가 어느 날 심방을 했을 때 교회출석 동기를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이 고향이신 할머니는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떠나 실향민으로 서울에서 사시다가 1970년 초 미국에 유학을 온 아들의 초청으로 이민을 오셨습니다. 교회에 대한 기억은 어린 시절 잠시 교회에 다녔던 기억이 전부였습니다. 그 동안 교회를 멀리하며 하나님을 잊은 채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일상적인 꿈은 잠에서 깨어나면 쉽게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날의 꿈은 시간이 가도 생생한 것입니다. 꿈인데도 생시보다 더 분명하고 더 실감 있게 느껴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제일 먼저 안내 받아 간 곳은 주님 앞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할머니에게 “사랑하는 딸아 그 동안 수고 많았다”고 하시면서 친히 할머니의 머리에 개털모자를 씌어주셨습니다. 그것을 받는 순간 너무 좋아서 무어라 표현할수 없는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할머니는 예수님을 위하여 세상에 사는 동안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자신에게 분에 넘치는 대접과 상을 주신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친히 자신을 기억해 주시고 초청해 주실 뿐 아니라 손수 머리에 개털모자를 씌워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예수님께 개털 모자를 받아쓰고 주님의 곁을 떠나 천국의 아름다운 황금 길을 걸어갈 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할머니의 모자와 같은 모자를 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빛나는 면류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빛나는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자기 머리에 쓴 모자가 자랑스러운 모자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할머니의 머리에 쓴 개털모자를 보면서 조롱하는 사람도, 비난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시작된 교회 생활은 세상을 떠나시기 까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집사로 직분을 감당하시다가 마지막에는 시무 권사로 10여년을 충성스럽게 섬기시다가 십수년전에 주님의 부르심을받으셨습니다.
C 권사님의 이야기는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집사 직분을 받으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어느 날 필자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심방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심방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났을 때 옷장에서 두 겹의 예쁜 보자기에 싼 물건을 건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물으니 한국에 두고 온 땅 문서라고 하셨습니다. 찬송가 반권 분량의 일산과 금촌 일대의 땅 문서였습니다.
그로부터 2 주일 후 아들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어머니가 드린 땅 문서를 되돌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긴급당회가 소집 되었습니다. 결국 당회의 결의로 문서를 돌려주었습니다. 아직도 그 때의 아쉬움이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C 권사님의 개털 모자를 바꿔 쓰실 기회를 교회가 지켜주지 못한 것 같은 생각 때문입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1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