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 교회 목양 칼럼입니다

동양선교교회 강준민 목사님께 드리는 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면을 통하여 글을 드리는 것은 평소에 강 목사님과 교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지난 29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기고 있는 동역자임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목사님을 멀리서 대할 때마다 하나님께 남다른 사랑을 받은 특별한 종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가끔 지면을 통하여 보도되는 목사님의 칼럼을 대할 때마다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다운 문장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하면서 감탄을 하기도 했습니다.

큰 종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목사님을 진심으로 존경도 하고, 또 같은 지역에서 목회하는 동역자로 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와 열매들을 인하여 크게 부러워하기도 했었습니다.

남가주에 거주하는 한인 목회자가 3000여명이 됩니다. 그 많은 주의 종들 가운데 목사님은 스타(Star) 목사님이십니다. 작은 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목사님을 대표하는 목사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목사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기 전 기도하면서 목사님의 입장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만일 내가 목사님의 자리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왜 아프지 않으시겠습니까? 왜 억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왜 화나지 않으시겠습니까? 깊은 벼랑으로 떨어짐에 왜 두렵지 않으시겠습니까?

큰 위기를 당하신 목사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어 드리지 못하고 위로도 하지 못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드리는 것은 목사님에 대한 기대와 믿음 때문입니다. 실추된 이민교회와 목사들의 명예를 회복해주시길 기대합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고소할 때에 예수님은 스스로를 변론하지 않으셨습니다. 심문하는 빌라도가 이를 이상히 여겨 ‘왜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죽임 당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죽음의 길을 택하신 것은 모든 인류를 살리시고 또 예수님 스스로도 다시 사시기 위해서 죽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육체의 고통만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고통과 번민, 영혼의 아픔까지 당하셨습니다. 존경하는 강 목사님! 감히 용기 내어 권합니다. 예수님 처럼 앞에 있는 형벌의 십자가를 잡으십시오. 그리고 골고다로 가십시오.

부활은 죽음을 전제한 것입니다. 죽지 아니하면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나는 강 목사님이 이전보다 더 빛나는 이룸으로 이 땅에서 큰 종으로 사역하시길 원합니다. 목사님에겐 그런 은사가 있으십니다. 과연 강 목사님답다고 하는 칭송을 받으시는 목사님이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5132

“나 어떻게 해”

가정적인 일로 지난달 초 한국을 잠시 방문했습니다.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늘 만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1월에 고국을 방문하기는 36년만에 처음이었습니다. 저녁 식사자리에 보여야할 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83세 되신 친구 어머니가 아주대학병원에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입원실 안에는 장남인 친구와 형제자매 가족 등 15·16명이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담당의사의 말로는 그 밤이 마지막 밤이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는 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시골교회 집사님으로 교회를 섬겼지만 죽음을 앞두고 몹시 불안해하고 계셨습니다. 왼쪽 눈에서 시작한 흑생종 암이 간과 폐 등 장기 전체에 퍼져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고단위 진통제만 의지한 채 임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인사만 하고 돌아서려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밤 9시부터 찬송으로 시작한 임종 예배가 3시간여 지나 늦은 밤 12시반에 끝났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아니하던 어머니가 간간히 찬송가를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은 무엇인가? 믿음의 사람들에게 임하는 죽음은 절망과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마치 해산을 앞둔 산모가 아기를 낳기 위하여 육체적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천국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인내하고 참아야만 하는 것임을 설명했습니다.

예배를 마치니 그렇게 절망으로 어둡던 어머니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제는 내가 살았다”며 “나를 살리기 위해 미국에서 목사님을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보니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불안해 하셨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불안과 초조함에서 벗어나 마음에 평안을 회복한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본 친구 오 교장이 어머니의 가족들, 그리고 나의 앞에서 이런 선언을 했습니다.

“어머님! 나도 어머니가 믿는 예수를 이제부터 믿겠습니다.” 40여년 동안 친구로 지내던 그였습니다. 특별히 종교문제에 대해선 조금도 틈을 주지 않던 친구였습니다. 그런 친구가 나를 놀라게 했으며 그를 가장 잘 아는 어머니를 놀라게 했습니다.

나와 어머니께 큰 기쁨의 선물을 준 것입니다. 은혜의 시간은 계속됐습니다. 온 밤을 지새우며 찬송을 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찬송을 합니다. 늦은 밤 고요한 시간에 입원실에서 터져 나오는 찬양소리는 간호사들을 놀라게 해 저들의 요구대로 찬송소리를 줄여야 했습니다.

이제까지 목회자로 살아오면서 밤 시간에 이렇게 많은 찬송과 설교를 연속적으로 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물론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게 긴 밤이 지났습니다. 어머니는 다음 날부터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머무는 9일 동안 매일 병상을 찾아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처음에는 가족의 부축으로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수일이 지나면서는 부드러운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담당의사는 다시 치료 계획을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9일 만에 돌아오기까지 어머니는 한 순간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친구 오 교장은 늦게 되었지만 누구보다도 빠르게 믿음이 성장할 것을 나는 압니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 날, 친구는 어머니의 장례를 의논했습니다.

집안에서 기독교식으로 장례식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유언이기에 기독교식으로 한다고 선언하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4632

“나쁜 사람, 나쁜 놈, 나쁜 자식”

지금으로부터 5년이 전인 어느 날의 일이었습니다. 섬기는 교회의 집사님 가정에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장에 집례를 위해 정한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해서 앞자리 긴 의자에 유가족들과 같이 앉아 고인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장례식장 안은 늘 그러하듯이 고요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여인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필자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이 피눈물을 토하면서 큰 목청을 높여 “나쁜 사람, 나쁜 사람, 나쁜 사람”을 계속 5분여 동안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점점 격한 감정을 더하면서 “나쁜 놈, 나쁜 놈”을 5분여 동안 수 십 차례 토해내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 여인을 이토록 아프게 했을까? 얼마나 억울하면 저렇게 몸부림치며 눈물로 부르짖을 수 있을까? 누가 이 여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나쁜 사람이 변하여 나쁜 놈으로 변하더니, 다시 나쁜 놈이 변하여 나쁜 자식이 되었습니다. “나쁜 자식, 나쁜 자식, 나쁜 자식…” 5분여 동안 목청껏 찢어져라 부르짖는 여인의 절규는 장례식장을 가득 메운 조객들 모두를 울리고 말았습니다.

“나쁜 사람, 나쁜 놈, 나쁜 자식”을 말할 때까지도 누구를 향하여 그런 원망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20여분 동안 “나쁜 사람, 나쁜 놈, 나쁜 자식”을 반복해서 부르짖다가 이어서 하는 말이 “나는 어떻게 살라고,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하는 말에서 나쁜 사람의 실체가 누구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인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고 간 나쁜 사람은 다름 아닌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이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아름답고 건강하며 곧게 자라준 12살 된 하나 뿐인 아들 Terry 였습니다.

희귀 난치병으로 1년여 동안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30년 가까이 교회를 담임하면서 가장 마음에 남는 아픔의 순간이었습니다. “아빠, 내가 먼저 천국에 가면 어떻게 할거야.” 세상을 떠나기 전 병상에서 남긴 말이 늘 우리의 곁에 남아서 앞서간 그를 생각하게 합니다.

출처: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4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