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생일을 맞았습니다. 생일을 당하면 근처에 사는 큰 딸의 가족이 생일잔치를 준비합니다. 다른 딸과 아들은 멀리 있어서 특별한 날에도 자주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족 중 생일을 당하면 주로 식당에서 모임을 갖습니다. 그때 어느 식당 어떤 음식을 먹을까를 정하는 것은 당일의 주인공이 정하게 됩니다.
그 날은 필자가 주인공이기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아는 큰 딸이 장소를 정하고 지정한 날짜와 시간에 초청을 했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때나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없는 것은 일반 음식보다 값이 비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손님을 대접하거나 아니면 대접 받을 때만 먹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기계적인 인간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충분하게 예비하시고 그것들을 통하여 생명을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전도서 5 : 18절에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고 하신대로 우리가 사는 동안 부족함이 없이 먹을 것을 넘치도록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헤어질 시간이 되었을 때에 딸이 작은 박스로 포장된 것을 생일 선물이라며 주었습니다. 당연히 딸 가족이 준비한 선물인줄 알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받았을 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허술하게 포장된 선물을 받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큰 딸이 준비한 선물은 포장도 예쁘고 아름다웠는데 그날 받은 선물은 이전에 비하면 너무 조잡하고 허술해 보이며 정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것을 받아 들고 한 시간을 운전해서 집에 도착 후 포장지를 열었습니다. 그 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그 날의 선물은 딸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 명의 손녀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서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갈색의 가벼운 구두였습니다. 구두 상자에는 할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내용과 함께 세 손녀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셋이서 의논하고 함께 그것을 사서 자신들의 손으로 포장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장지도 세련되지 못하여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잠시나마 이것도 선물이라고 주느냐고 마음속으로나마 흡족해 하지 모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귀한 정성과 사랑으로 선물을 준비해준 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생애 처음 손녀들에게 받아본 선물이었습니다. 70 평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이번에 사랑하는 손녀들을 통하여 받은 선물은 정말로 감동이었습니다. 아마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유는 손녀들에게 그 날 그런 선물을 받을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늘 어린 아이로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 이렇게 반듯하게 성장했습니다. 세 손녀는 고등학생이 둘 그리고 중학생입니다. 자기들만 생각할 나이인줄 알았는데 이제는 자신들의 미래를 계획하고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을 자신들의 정성된 고사리 손으로 표현할 줄도 아는 아이들로 성장했습니다.
시 128 4 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하시면서 축복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며, 복되고 형통하며, 네 자식의 복을 주시고,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손자녀들의 성장과 축복하심을 보면서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드립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2-03-03 13:52:072022-03-03 13:53:38목양칼럼 # 269 어린 손녀들에게 받은 생일 선물!
2월 11일 아침은 기쁘고 행복한 날로 시작 할 수 있었습니다. 필자가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회 뜰에 금년 들어 처음으로 피어난 복숭아와 살구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꽃 모두 붉은 색의 아름다운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겨울이 지나는 동안 나무는 죽은 것 같았습니다.
마른가지에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지에서 봄이 되면서 여기 저기 꽃망울이 돋아나기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나무에 잎이 나지도 않았는데 꽃망울이 먼저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을 관찰하면서 이 작은 꽃망울들이 언제 피어날까 기대하면서 지켜보았습니다.
33년 동안 교회 건물로 사용하던 건물을 매각하고 3 년 전에 지금의 교회로 이사를 했습니다.
전에 사용하던 교회 건물은 상용 건물이었기에 지금의 교회처럼 주변에 잔디도 없었고 정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사 후 제일 먼저 한 것이 교회당 주변에 과실 수를 심었습니다. 그 때 20여 구루의 과실 수를 심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당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만나는 것이 과실 수입니다. 이제는 제법 나무들이 자리를 잡아 커가고 있습니다. 복숭아와 살구꽃은 수줍은 듯 붉고 고운 색을 드리우며 조금씩 잎을 벌려 피는 것을 보면서 감성이 무딘 필자의 입에서도 어떡케 이렇게 고울 수가 있을까하는 탄성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무의 존재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실 수를 종류별로 허락하신 이유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나무에게도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무는 아무 때나 꽃을 피우지 않습니다. 아무 때나 열매를 맺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알고 있습니다.
그 때를 알뿐 아니라 주어진 본분과 사명을 알고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꽃이 피기 위해선 저절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송이의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는 시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어린 생명이 산모의 몸에서 태어날 때 죽을 것 같은 산고의 고통을 당하고서야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꽃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꽃들만이 겪는 그들만의 인고의 시련과 아픔이 없이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게 피어나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과실수들의 사명은 맛나고 보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꽃이 피고 잎이 나며 열매를 피우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에게 비유한다면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우리가 이 땅위에 살아가는 동안 어느 한 순간도 중요하지 않은 때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어린 시절도, 청년 시절도 장년 시절도 아니 노년의 삶도 어느 한 순간도 중요하지 않은 때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각 사람을 향하여 이 땅위에 삶을 다하고 주님의 곁으로 가는 죽음조차도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고 축복하신다고 시 116편 15절에서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계 14장 13절에서는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어떤 사람의 죽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모든 사람의 죽음이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동안 맡겨진 본분과 사명을 위하여 충성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며 영원한 쉬임과 평안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하지 아니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요? 마 7장 19-2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도 복숭아꽃 살구꽃처럼 우리의 믿음과 섬김 충성의 꽃을 피워 이웃과 하나님께 감동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고 문성만 목사님! 목사님을 이곳 Los Angeles 에서 처음 뵈온지가 벌써 50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1969년에 미국에 오셨고 저는 4 년 후인 1973년에 이곳에 왔습니다. 당시 이곳은 지금처럼 우리 한인들이 많지 않았었습니다. 공식적인 집계로 남가주 전체 한국인의 숫자가 3천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한국인을 마주치면 반가워 서로 통성명을 나누곤 했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동서남북의 방향을 알기도 전에 목사님을 만난 것은 저에겐 큰 축복이었습니다. 오늘의 제가 목회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주시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민 초창기 먹고 사는 문제로 어려워 할 때도 목사님은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50년 동안 늘 목사님을 곁에서 따르며 은혜를 입었습니다.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1970년 초에는 지금처럼 이민교회의 숫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자체 건물을 가진 교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 시절에 Long Beach 시에 아름다운 잔비 밭을 가진 자체 교회당을 구입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감격스럽게 예배드리던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문서 선교로 크게 쓰임 받으셨습니다. 한국에서부터 미국의 선교기관과 문서를 통하여 많은 어려움 당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미국 비자를 누구나 쉽게 얻습니다.
하지만 70-80년대는 미국비자를 얻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단체가 초청장을 발급해주지 아니하면 여권도, 비자도 받지 못할 때입니다. 그러한 때에 목사님은 초청장을 손수 타이핑해서 만들고 비자를 받는데 필요한 재정실력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통하여 미국행 비자를 받으신 분이 2-300명은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여러분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교회를 개척해서 42년 째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가 만난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그 많은 목사님들 중 제가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은 고 문성만 목사님이셨습니다. 저의 친구 동역자 목사님들께 이 같은 내용을 여러 차례 말해왔었습니다.
정말로 고 문성만 목사님은 산 성자셨습니다. 작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오랜 교제의 시간 동안 한 번도 말에 실수가 없으셨습니다. 한 번도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의 주변에는 늘 도움을 받으려는 분들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우리 교단인 합동 교단이 미주에 뿌리내릴 때 설립위원으로 수고하셨습니다.
목사님 때문에 그동안 행복했습니다. 목사님 때문에 주변의 많은 사람이 은혜를 입었고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우리 교단의 어른이 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삶의 본, 목자의 모범을 보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존경하는 목사님을 보내면서 가까운 시일에 주님의 나라에서 기쁨으로 뵈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목양칼럼 # 269 어린 손녀들에게 받은 생일 선물!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얼마 전 생일을 맞았습니다. 생일을 당하면 근처에 사는 큰 딸의 가족이 생일잔치를 준비합니다. 다른 딸과 아들은 멀리 있어서 특별한 날에도 자주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족 중 생일을 당하면 주로 식당에서 모임을 갖습니다. 그때 어느 식당 어떤 음식을 먹을까를 정하는 것은 당일의 주인공이 정하게 됩니다.
그 날은 필자가 주인공이기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아는 큰 딸이 장소를 정하고 지정한 날짜와 시간에 초청을 했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때나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없는 것은 일반 음식보다 값이 비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손님을 대접하거나 아니면 대접 받을 때만 먹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기계적인 인간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충분하게 예비하시고 그것들을 통하여 생명을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전도서 5 : 18절에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고 하신대로 우리가 사는 동안 부족함이 없이 먹을 것을 넘치도록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헤어질 시간이 되었을 때에 딸이 작은 박스로 포장된 것을 생일 선물이라며 주었습니다. 당연히 딸 가족이 준비한 선물인줄 알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받았을 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허술하게 포장된 선물을 받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큰 딸이 준비한 선물은 포장도 예쁘고 아름다웠는데 그날 받은 선물은 이전에 비하면 너무 조잡하고 허술해 보이며 정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것을 받아 들고 한 시간을 운전해서 집에 도착 후 포장지를 열었습니다. 그 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그 날의 선물은 딸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 명의 손녀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서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갈색의 가벼운 구두였습니다. 구두 상자에는 할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내용과 함께 세 손녀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셋이서 의논하고 함께 그것을 사서 자신들의 손으로 포장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장지도 세련되지 못하여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잠시나마 이것도 선물이라고 주느냐고 마음속으로나마 흡족해 하지 모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귀한 정성과 사랑으로 선물을 준비해준 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생애 처음 손녀들에게 받아본 선물이었습니다. 70 평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이번에 사랑하는 손녀들을 통하여 받은 선물은 정말로 감동이었습니다. 아마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유는 손녀들에게 그 날 그런 선물을 받을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늘 어린 아이로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 이렇게 반듯하게 성장했습니다. 세 손녀는 고등학생이 둘 그리고 중학생입니다. 자기들만 생각할 나이인줄 알았는데 이제는 자신들의 미래를 계획하고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을 자신들의 정성된 고사리 손으로 표현할 줄도 아는 아이들로 성장했습니다.
시 128 4 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하시면서 축복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며, 복되고 형통하며, 네 자식의 복을 주시고,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손자녀들의 성장과 축복하심을 보면서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드립니다.
힘이 다하는 그 날 까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가까이 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2022년 2월 15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목양칼럼 # 268 봄의 전령, 복숭아와 살구꽃이 주는 기쁨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2월 11일 아침은 기쁘고 행복한 날로 시작 할 수 있었습니다. 필자가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회 뜰에 금년 들어 처음으로 피어난 복숭아와 살구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꽃 모두 붉은 색의 아름다운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겨울이 지나는 동안 나무는 죽은 것 같았습니다.
마른가지에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지에서 봄이 되면서 여기 저기 꽃망울이 돋아나기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나무에 잎이 나지도 않았는데 꽃망울이 먼저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을 관찰하면서 이 작은 꽃망울들이 언제 피어날까 기대하면서 지켜보았습니다.
33년 동안 교회 건물로 사용하던 건물을 매각하고 3 년 전에 지금의 교회로 이사를 했습니다.
전에 사용하던 교회 건물은 상용 건물이었기에 지금의 교회처럼 주변에 잔디도 없었고 정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사 후 제일 먼저 한 것이 교회당 주변에 과실 수를 심었습니다. 그 때 20여 구루의 과실 수를 심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당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만나는 것이 과실 수입니다. 이제는 제법 나무들이 자리를 잡아 커가고 있습니다. 복숭아와 살구꽃은 수줍은 듯 붉고 고운 색을 드리우며 조금씩 잎을 벌려 피는 것을 보면서 감성이 무딘 필자의 입에서도 어떡케 이렇게 고울 수가 있을까하는 탄성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무의 존재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실 수를 종류별로 허락하신 이유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나무에게도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무는 아무 때나 꽃을 피우지 않습니다. 아무 때나 열매를 맺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알고 있습니다.
그 때를 알뿐 아니라 주어진 본분과 사명을 알고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꽃이 피기 위해선 저절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송이의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는 시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어린 생명이 산모의 몸에서 태어날 때 죽을 것 같은 산고의 고통을 당하고서야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꽃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꽃들만이 겪는 그들만의 인고의 시련과 아픔이 없이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게 피어나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과실수들의 사명은 맛나고 보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꽃이 피고 잎이 나며 열매를 피우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에게 비유한다면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우리가 이 땅위에 살아가는 동안 어느 한 순간도 중요하지 않은 때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어린 시절도, 청년 시절도 장년 시절도 아니 노년의 삶도 어느 한 순간도 중요하지 않은 때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각 사람을 향하여 이 땅위에 삶을 다하고 주님의 곁으로 가는 죽음조차도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고 축복하신다고 시 116편 15절에서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계 14장 13절에서는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어떤 사람의 죽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모든 사람의 죽음이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동안 맡겨진 본분과 사명을 위하여 충성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며 영원한 쉬임과 평안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하지 아니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요? 마 7장 19-2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도 복숭아꽃 살구꽃처럼 우리의 믿음과 섬김 충성의 꽃을 피워 이웃과 하나님께 감동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22년 2월 11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목양칼럼 # 267 고 문성만 목사님을 생각하면서!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존경하는 고 문성만 목사님! 목사님을 이곳 Los Angeles 에서 처음 뵈온지가 벌써 50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1969년에 미국에 오셨고 저는 4 년 후인 1973년에 이곳에 왔습니다. 당시 이곳은 지금처럼 우리 한인들이 많지 않았었습니다. 공식적인 집계로 남가주 전체 한국인의 숫자가 3천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한국인을 마주치면 반가워 서로 통성명을 나누곤 했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동서남북의 방향을 알기도 전에 목사님을 만난 것은 저에겐 큰 축복이었습니다. 오늘의 제가 목회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주시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민 초창기 먹고 사는 문제로 어려워 할 때도 목사님은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50년 동안 늘 목사님을 곁에서 따르며 은혜를 입었습니다.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1970년 초에는 지금처럼 이민교회의 숫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자체 건물을 가진 교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 시절에 Long Beach 시에 아름다운 잔비 밭을 가진 자체 교회당을 구입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감격스럽게 예배드리던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문서 선교로 크게 쓰임 받으셨습니다. 한국에서부터 미국의 선교기관과 문서를 통하여 많은 어려움 당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지금은 미국 비자를 누구나 쉽게 얻습니다.
하지만 70-80년대는 미국비자를 얻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단체가 초청장을 발급해주지 아니하면 여권도, 비자도 받지 못할 때입니다. 그러한 때에 목사님은 초청장을 손수 타이핑해서 만들고 비자를 받는데 필요한 재정실력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통하여 미국행 비자를 받으신 분이 2-300명은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여러분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교회를 개척해서 42년 째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가 만난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그 많은 목사님들 중 제가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은 고 문성만 목사님이셨습니다. 저의 친구 동역자 목사님들께 이 같은 내용을 여러 차례 말해왔었습니다.
정말로 고 문성만 목사님은 산 성자셨습니다. 작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오랜 교제의 시간 동안 한 번도 말에 실수가 없으셨습니다. 한 번도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의 주변에는 늘 도움을 받으려는 분들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우리 교단인 합동 교단이 미주에 뿌리내릴 때 설립위원으로 수고하셨습니다.
목사님 때문에 그동안 행복했습니다. 목사님 때문에 주변의 많은 사람이 은혜를 입었고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우리 교단의 어른이 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삶의 본, 목자의 모범을 보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존경하는 목사님을 보내면서 가까운 시일에 주님의 나라에서 기쁨으로 뵈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이상기목사
크리스찬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