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1일 토요일에 어느 특별한 장례식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고인의 아버지 되는 분이 아들 장례식의 축도를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고인은 22살의 나이로 지난 5월 4일 집 근처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과속으로 달려오는 차와 충돌하여 현장에서 세상을 떠난 멕시코계 미국인 이었습니다.
고인과 가족을 아는 것은 필자가 섬기는 교회당을 함께 사용하는 스페니시 교회가 있습니다. 1993년 9월 1일부터 스페니시 교회가 우리교회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니까, 벌써 23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처음 스페니시 교회 교인들이 예배당 사용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을 했을 때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 때만해도 그런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결심을 갖게 된 것은 우리 교회도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예배 처소가 없어서 큰 어려움을 당하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교회를 시작했을 때 예배 처소를 구하지 못해서 다저스 야구장이 있는 엘리시안공원에서 두 달 동안 야외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K 장로님과 저는 매일같이 예배처소를 구하기 위해서 두 달 동안 발품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구한 예배처소는 흑인교회당이었습니다. 예배처소를 구하는 것은 지금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때도 그랬습니다. 흑인 교회당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시간을 허락 받은 것은 주일 새벽과 그리고 낮 예배는 오후 1시 반이었습니다.
그 때가 되어야 흑인교회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흑인 교회는 새벽예배나 저녁 예배가 없었기에 우리는 주일 새벽과 수요일 그리고 금요기도회와 주일 밤 예배까지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5년 여 동안 셋방살이 교회를 하다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지금의 교회당을 30여 년 전에 허락 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일부의 염려와 걱정도 있었지만 스페니쉬 교회를 받아 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한 지붕아래 두 교회가 지금까지 연합하여 섬겨오고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스페니시 교회 교인들이 교회를 너무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 건물에 이상이 발견 되면 우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미리 알아서 수리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당 안의 청소와 정돈은 그 분들이 지금까지도 도맡아 해오고 있습니다. 예배 처소를 사용하는 건물이 근 90년 가까이 된 건물이기에 이곳저곳 수리해 야 할 부분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 모든 문제 해결의 앞에는 멕시칸 교회의 교인인 Jorge Cali 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며칠 밤을 새어가면서 교회 일을 한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만 아니라 스페니시 교회 교인들이 자원하여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도 있었는데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는 지금은 고인이 된 아들도 아버지를 도와 교회에서 밤을 새어가며 먼지를 뒤집어쓰고 땀 흘려 일을 하곤 했습니다.
언젠가 Cali에게 이름의 뜻을 물은 적이 있습니다. California에서 태어 나 이름을 Cali로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동기는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20살 되던 해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낮 큰 길에서 길을 건너다 달려오는 차에 치어 10여 미터 밖으로 던짐을 당하여 전신마비로 수년 동안 고생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어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일이라면 온 마음과 정성으로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22살의 아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뉴스를 통하여 사고 소식을 접하고 위로 전화를 했습니다. 그 때 아들 장례식에 축도를 해 달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스페니시 교회 성도들의 장례식을 참석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우리와 다른 것은 저들의 장례식에 소요되는 시간은 3시간이었습니다. 장례식 예배가 그렇게 긴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도 장례식 집례를 많이 했지만 길어도 40분을 넘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장지로 옮겨가서 하관식을 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장례식이 우리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면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 중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다 앞으로 나와서 고인과 유가족에게 하고 싶은 위로의 말을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쁜 시간 속에 살아가는 우리와는 거리감을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갑작스런 사고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서 큰 슬픔을 믿음으로 극복한 가족에게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가정의 달인 지난 5 월 12일 밤에 고국으로부터 긴급한 전화를 받았다. 9 남매 중 막내인 여동생의 다급한 전화였다. 오빠! 지금 곧 둘째 형부에게 전화를 해서 기도를 해 주셔야 겠어요? 지금 곧 세상을 떠나실 것 같은데 목사님을 불러 오라고 해서 목사님을 모시고 가는 중인데 시간이 30여분이나 걸린다는 것이었다.
둘째 매형은 평생 동안 건강하게 살아오신 분이셨다. 70 중반의 나이 이심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열심히 운동을 하셨는지 강철 같은 체력을 유지하고 있어 주위 사람들에게 늘 부러움을 받는 분이셨다. 그런 분이 1 년 여 전에 말기 암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계셨던 것이다.
수주 전부터는 식사도 못하시며 앉고 서는 것도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병원에서도 치료를 포기하고 집에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수일 전 위로차 고국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셋째 매형 장로님이 이때가 아니면 다시 전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반대 할 것을 알고서도 예수 믿고 천국에 가야 할 것을 권한 것이다.
둘째 매형님은 매사에 실수가 없는 분이셨다. 형제들 간에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늘 앞장서서 힘든 일을 도맡아 해결해 오셨던 분으로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며 열심히 사신 분이셨다. 그러나 교회와는 담을 쌓고 살아오신 것이다. 그렇게 좋으신 분이시지만 예수를 철저하게 부정하시며 교회를 멀리하며 사셨던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매형의 뿌리 깊은 불신앙을 알기에 가족 중 누구도 면전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지 못한 것이다. 필자도 지난 30여 년 동안 매형과 그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 새벽에 기도 제단에 엎드릴 때마다 기도해 오다가 언제부터인가 그 기도를 중단하게 된 것은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도 둘째 매형님은 믿을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처남인 필자가 목사인 것은 인정하며 고국을 방문할 때마다 늘 좋은 것으로 섬겨주길 기뻐하셨다. 6-7년 전에 형제들이 단체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둘째 매형과 누님도 동행 했었다. 그 때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석을 하셨다. 그 때 형제들은 말하길 교회당 앞까지는 와도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을 했었다.
그런데 누가 권하지 아니했음에도 예배에 참석을 한 것이었다. 그것이 세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회를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가족들이 모인 마지막 위로 자리에서 셋째 매형이 이대로 가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을 했을 때도 누구하나 그 말을 받으리라고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기적인가? 웬 은혜인가? 임종 직전에 목사님을 불러 달라고 청한 것이다. 세상에 많은 기적이 있지만 정말로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곧 바로 누님께 전화를 드렸다. 매형을 바꾸라고 했더니 전화를 받을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전화기에 대고 큰 소리로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님에게 부탁을 드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기도를 매형님이 따라하게 하라고 한 것이다. 기도하는 대로 따라하겠느냐고 했더니 그러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의 영혼을 받아주세요” 길게 따라할 수 없어서 단어 하나씩을 끊어서 따라하게 했다.
예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의 영혼을! 받아 주세요! 전하는 말을 누님이 매형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복창을 하라 할 때 작은 소리지만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앉지도 못하고 누운 상태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회개 기도를 마친 후 다시 전화로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기도를 마치니 누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그 동안 기도해 준 것을 알았다는 것이었다. 그 기도의 응답이 오늘의 이런 역사를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이제 누님도 교회에 나가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이다. 수일 후 매형은 세상을 떠나셨다. 장성한 세 아들은 아직 교회를 받아 드릴 마음의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였기에 기독교식 장례를 강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들이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 토록 고통스러워하시던 평소의 모습이 아닌 지금까지 보아오지 못했던 평안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가신 것을 목격하고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기독교식 장례식을 하기로 한 것이다. 필자도 포기한 매형의 영혼을 구원해 주신 주님께 큰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1-17 23:57:042020-01-17 23:57:04응답 포기한 40여 년 만에 받은 기도응답
로스앤젤레스의 유명한 대형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암 전문의가 있었습니다. 그 병원에서 일하는 암 전문 의사는 두 분이십니다. 한분은 한국인이시고 다른 한분은 필리핀계 미국인 의사입니다. 필자가 두 분을 아는 것은 가족이 지난 십 수 년 동안 그 병원 암 병동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같은 진료실을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두 분 다 많은 환자들로 진료실은 항상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3년여 전에 환자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필리핀계 암 전문 의사가 암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다른 의사도 아니고 암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의사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의학에 지식이 없는 보통 사람만 암에 걸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반 의사도 아니고 암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치료하는 의사가 암에 걸린 것입니다. 소문이 소문으로 그치고 만 것이 아닙니다. 소문을 듣고 오래지 않아서 그 의사는 정말로 환자가 되어 더 이상 환자를 돌보지 아니하고 병원을 떠나게 되셨습니다.
필자도 그 소식을 듣고서 의사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의 병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아니한 것은 당연히 병을 극복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고국인 필리핀을 여행 중이라는 것이며, 치료를 위해서 같은 병원, 같은 병실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 한국인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그 힘든 키모테라피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소식이 오래 가지 않아서 환우들에게 들려졌습니다. 누구보다도 암에 대해서 잘 알뿐 아니라 치료 방법을 알고 있으며 새로 개발된 치료약을 아는 의사이기에 당연히 암과 싸워 이기고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어 이전처럼 환자들을 위해서 크게 봉사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가 자신의 몸을 고치지 못하고 병든 지 수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자신이 치료하던 환자들도 아직 살아서 암과 투병을 하고 있는데 정작 의사인 본인은 자기 몸 안에 있는 암과 싸워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환자들처럼 오래 투병 생활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인간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우리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병든 자만 가는 것이 아니라 의사도 가야하고 건강한 사람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주님의 부르심을 거역하거나 피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길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정작 본인은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호흡하며 살고 있는 것이 나의 수고나 노력의 댓가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법칙을 아는 사도바울은 로마서 14장 7-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오늘도 우리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주님이 주신 은혜로 주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해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 뿐 아니라 죽음도 나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죽음으로 향하여 달려가고 있지만 이것도 우리가 원하거나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섭리하시고 주장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죽음을 예비해야 합니까?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도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더라 하시더라”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된 죽음이 있는가하면 저주의 죽음이 있습니다. 예수 안의 죽음은 구원 받는 복된 죽임이지만 예수 없는 죽음은 영원한 저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1-17 00:46:042020-01-17 00:53:13어느 유명 암 전문 의사의 암 투병기
어느 타인종의 특별한 장례식 체험기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지난 5월 21일 토요일에 어느 특별한 장례식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고인의 아버지 되는 분이 아들 장례식의 축도를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고인은 22살의 나이로 지난 5월 4일 집 근처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과속으로 달려오는 차와 충돌하여 현장에서 세상을 떠난 멕시코계 미국인 이었습니다.
고인과 가족을 아는 것은 필자가 섬기는 교회당을 함께 사용하는 스페니시 교회가 있습니다. 1993년 9월 1일부터 스페니시 교회가 우리교회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니까, 벌써 23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처음 스페니시 교회 교인들이 예배당 사용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을 했을 때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 때만해도 그런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결심을 갖게 된 것은 우리 교회도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예배 처소가 없어서 큰 어려움을 당하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교회를 시작했을 때 예배 처소를 구하지 못해서 다저스 야구장이 있는 엘리시안공원에서 두 달 동안 야외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K 장로님과 저는 매일같이 예배처소를 구하기 위해서 두 달 동안 발품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구한 예배처소는 흑인교회당이었습니다. 예배처소를 구하는 것은 지금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때도 그랬습니다. 흑인 교회당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시간을 허락 받은 것은 주일 새벽과 그리고 낮 예배는 오후 1시 반이었습니다.
그 때가 되어야 흑인교회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흑인 교회는 새벽예배나 저녁 예배가 없었기에 우리는 주일 새벽과 수요일 그리고 금요기도회와 주일 밤 예배까지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5년 여 동안 셋방살이 교회를 하다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지금의 교회당을 30여 년 전에 허락 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일부의 염려와 걱정도 있었지만 스페니쉬 교회를 받아 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한 지붕아래 두 교회가 지금까지 연합하여 섬겨오고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스페니시 교회 교인들이 교회를 너무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 건물에 이상이 발견 되면 우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미리 알아서 수리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당 안의 청소와 정돈은 그 분들이 지금까지도 도맡아 해오고 있습니다. 예배 처소를 사용하는 건물이 근 90년 가까이 된 건물이기에 이곳저곳 수리해 야 할 부분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 모든 문제 해결의 앞에는 멕시칸 교회의 교인인 Jorge Cali 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며칠 밤을 새어가면서 교회 일을 한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만 아니라 스페니시 교회 교인들이 자원하여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도 있었는데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는 지금은 고인이 된 아들도 아버지를 도와 교회에서 밤을 새어가며 먼지를 뒤집어쓰고 땀 흘려 일을 하곤 했습니다.
언젠가 Cali에게 이름의 뜻을 물은 적이 있습니다. California에서 태어 나 이름을 Cali로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동기는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20살 되던 해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낮 큰 길에서 길을 건너다 달려오는 차에 치어 10여 미터 밖으로 던짐을 당하여 전신마비로 수년 동안 고생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어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일이라면 온 마음과 정성으로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22살의 아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뉴스를 통하여 사고 소식을 접하고 위로 전화를 했습니다. 그 때 아들 장례식에 축도를 해 달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스페니시 교회 성도들의 장례식을 참석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우리와 다른 것은 저들의 장례식에 소요되는 시간은 3시간이었습니다. 장례식 예배가 그렇게 긴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도 장례식 집례를 많이 했지만 길어도 40분을 넘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장지로 옮겨가서 하관식을 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장례식이 우리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면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 중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다 앞으로 나와서 고인과 유가족에게 하고 싶은 위로의 말을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쁜 시간 속에 살아가는 우리와는 거리감을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갑작스런 사고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서 큰 슬픔을 믿음으로 극복한 가족에게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길 기도합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916
응답 포기한 40여 년 만에 받은 기도응답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가정의 달인 지난 5 월 12일 밤에 고국으로부터 긴급한 전화를 받았다. 9 남매 중 막내인 여동생의 다급한 전화였다. 오빠! 지금 곧 둘째 형부에게 전화를 해서 기도를 해 주셔야 겠어요? 지금 곧 세상을 떠나실 것 같은데 목사님을 불러 오라고 해서 목사님을 모시고 가는 중인데 시간이 30여분이나 걸린다는 것이었다.
둘째 매형은 평생 동안 건강하게 살아오신 분이셨다. 70 중반의 나이 이심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열심히 운동을 하셨는지 강철 같은 체력을 유지하고 있어 주위 사람들에게 늘 부러움을 받는 분이셨다. 그런 분이 1 년 여 전에 말기 암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계셨던 것이다.
수주 전부터는 식사도 못하시며 앉고 서는 것도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병원에서도 치료를 포기하고 집에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수일 전 위로차 고국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셋째 매형 장로님이 이때가 아니면 다시 전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반대 할 것을 알고서도 예수 믿고 천국에 가야 할 것을 권한 것이다.
둘째 매형님은 매사에 실수가 없는 분이셨다. 형제들 간에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늘 앞장서서 힘든 일을 도맡아 해결해 오셨던 분으로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며 열심히 사신 분이셨다. 그러나 교회와는 담을 쌓고 살아오신 것이다. 그렇게 좋으신 분이시지만 예수를 철저하게 부정하시며 교회를 멀리하며 사셨던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매형의 뿌리 깊은 불신앙을 알기에 가족 중 누구도 면전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지 못한 것이다. 필자도 지난 30여 년 동안 매형과 그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 새벽에 기도 제단에 엎드릴 때마다 기도해 오다가 언제부터인가 그 기도를 중단하게 된 것은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도 둘째 매형님은 믿을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처남인 필자가 목사인 것은 인정하며 고국을 방문할 때마다 늘 좋은 것으로 섬겨주길 기뻐하셨다. 6-7년 전에 형제들이 단체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둘째 매형과 누님도 동행 했었다. 그 때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석을 하셨다. 그 때 형제들은 말하길 교회당 앞까지는 와도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을 했었다.
그런데 누가 권하지 아니했음에도 예배에 참석을 한 것이었다. 그것이 세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회를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가족들이 모인 마지막 위로 자리에서 셋째 매형이 이대로 가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을 했을 때도 누구하나 그 말을 받으리라고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기적인가? 웬 은혜인가? 임종 직전에 목사님을 불러 달라고 청한 것이다. 세상에 많은 기적이 있지만 정말로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곧 바로 누님께 전화를 드렸다. 매형을 바꾸라고 했더니 전화를 받을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전화기에 대고 큰 소리로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님에게 부탁을 드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기도를 매형님이 따라하게 하라고 한 것이다. 기도하는 대로 따라하겠느냐고 했더니 그러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의 영혼을 받아주세요” 길게 따라할 수 없어서 단어 하나씩을 끊어서 따라하게 했다.
예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의 영혼을! 받아 주세요! 전하는 말을 누님이 매형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복창을 하라 할 때 작은 소리지만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앉지도 못하고 누운 상태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회개 기도를 마친 후 다시 전화로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기도를 마치니 누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그 동안 기도해 준 것을 알았다는 것이었다. 그 기도의 응답이 오늘의 이런 역사를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이제 누님도 교회에 나가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이다. 수일 후 매형은 세상을 떠나셨다. 장성한 세 아들은 아직 교회를 받아 드릴 마음의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였기에 기독교식 장례를 강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들이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 토록 고통스러워하시던 평소의 모습이 아닌 지금까지 보아오지 못했던 평안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가신 것을 목격하고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기독교식 장례식을 하기로 한 것이다. 필자도 포기한 매형의 영혼을 구원해 주신 주님께 큰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869
어느 유명 암 전문 의사의 암 투병기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로스앤젤레스의 유명한 대형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암 전문의가 있었습니다. 그 병원에서 일하는 암 전문 의사는 두 분이십니다. 한분은 한국인이시고 다른 한분은 필리핀계 미국인 의사입니다. 필자가 두 분을 아는 것은 가족이 지난 십 수 년 동안 그 병원 암 병동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같은 진료실을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두 분 다 많은 환자들로 진료실은 항상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3년여 전에 환자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필리핀계 암 전문 의사가 암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다른 의사도 아니고 암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의사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의학에 지식이 없는 보통 사람만 암에 걸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반 의사도 아니고 암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치료하는 의사가 암에 걸린 것입니다. 소문이 소문으로 그치고 만 것이 아닙니다. 소문을 듣고 오래지 않아서 그 의사는 정말로 환자가 되어 더 이상 환자를 돌보지 아니하고 병원을 떠나게 되셨습니다.
필자도 그 소식을 듣고서 의사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의 병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아니한 것은 당연히 병을 극복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간간히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고국인 필리핀을 여행 중이라는 것이며, 치료를 위해서 같은 병원, 같은 병실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 한국인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그 힘든 키모테라피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소식이 오래 가지 않아서 환우들에게 들려졌습니다. 누구보다도 암에 대해서 잘 알뿐 아니라 치료 방법을 알고 있으며 새로 개발된 치료약을 아는 의사이기에 당연히 암과 싸워 이기고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어 이전처럼 환자들을 위해서 크게 봉사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사가 자신의 몸을 고치지 못하고 병든 지 수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자신이 치료하던 환자들도 아직 살아서 암과 투병을 하고 있는데 정작 의사인 본인은 자기 몸 안에 있는 암과 싸워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환자들처럼 오래 투병 생활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인간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우리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병든 자만 가는 것이 아니라 의사도 가야하고 건강한 사람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주님의 부르심을 거역하거나 피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길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정작 본인은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호흡하며 살고 있는 것이 나의 수고나 노력의 댓가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법칙을 아는 사도바울은 로마서 14장 7-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오늘도 우리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주님이 주신 은혜로 주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해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 뿐 아니라 죽음도 나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죽음으로 향하여 달려가고 있지만 이것도 우리가 원하거나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섭리하시고 주장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죽음을 예비해야 합니까?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도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더라 하시더라”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된 죽음이 있는가하면 저주의 죽음이 있습니다. 예수 안의 죽음은 구원 받는 복된 죽임이지만 예수 없는 죽음은 영원한 저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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