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모님 명복을 기도합니다. 천국에서 영면하소서! 위로의 말씀드립니다] 지난 12월 26일 토요일 이른 아침에 필자가 받은 카톡의 내용이었습니다. 카톡을 보낸 분은 평소 가깝게 지내는 선배 목사님이셨습니다. 카톡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이렇게 답신을 보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뜻밖의 내용을 받고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잘못 배달된 줄 알고서 [제가 아는 어느 분이 돌아가셨나요?]라고 답신을 보내자 상대방에서 “뭐요” 하면서 놀란 문자가 뜨더니 한 참을 지나고 나서 새로운 내용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에서 목회하시는 동명이인 한믿음교회 이상기 목사님의 사모님이 소천 하셨다는 것을 잘못 알고 전했다고 하신 겁니다. 신문에 난 부고를 보고서 필자의 부인이 세상을 떠난 줄 알고 다급한 마음에 카톡으로 위로의 말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선배 목사님 부부는 집 사람을 위해서 늘 기도해 주셨습니다.
한 달 전에는 식당으로 우리 내외를 불러내어 귀한 대접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부고를 통하여 소천소식을 접하고 놀라셨던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잠시 후 고등학교 선배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신문에 난 부고를 보고 전화를 하셨다고 하면서 교회이름도 다르고 돌아가신 분의 나이가 집 사람보다 10살이 아래인데 하면서 확인차 전화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이 이민 교회의 이름이 수시로 바뀌는 교회도 있기에 필자가 섬기는 평강교회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날 아침 우리 부부는 이상기 목사님 사모님의 소천 소식을 접하고서 한바탕 웃어야 했습니다. 죽는 꿈만 꾸어도 오래 산다고 하던데 꿈이 아닌 현실에서 이런 인사를 받았으니 당신은 아마도 오래 살 것 같다고 한 것입니다. 한믿음교회을 섬기는 이상기 목사님과는 교제가 없었지만 지면을 통하여 목사님과 자녀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진심으로 드립니다.
이상기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15-6 년 전으로 기억이 됩니다. 새로 교회를 설립하면서 한믿음교회 담임목사로 소개되신 분이 이상기 목사님이라고 언론에 집중적으로 광고가 된 것입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사방으로부터 전화가 필자에게 빗발쳤던 것입니다. 20여 년 동안 섬기던 평강교회는 어떻게 하고 왜 또 다른 교회로 옮기였냐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한번은 교회의 집사님 중 한분이 수년 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신문에 우리교회의 이름으로 공고를 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해주십시오!” 하면서 강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의 청을 웃음으로 받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신문에 낸 광고의 효과가 오래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의 이상기 목사님과 다른 교회의 이상기 목사님은 같은 분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길 원했던 것은 동일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상대방이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일지역에서 같은 이름의 목사님이기에 생겨나는 웃지 못 할 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동명이인이 종종 있습니다. 이민 초창기에 나성한인교회를 설립하셨던 김의환 목사님과 같은 이름이 있었습니다. 김의환 장로님이십니다. 김의환 장로님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셨습니다. 동명이인의 이름 때문에 생겨날 해프닝을 예방하기 위해서 김의환 목사님(장로님이셨다가 목사가 되신)은 이름을 바꾸셨습니다. 그 이름이 김사무엘 목사였습니다. 김사무엘 목사님은 지난 해 소천하시기까지 남가주목사회 회장과 남가주교회협의회 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재미있는 것은 또 다른 이름의 김사무엘 목사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우리에게 이름이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듬어지고 가꾸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름이 빛나길 원하십니다. 2016년의 아침을 맞으면서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나의 삶이되기를 다짐해봅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1-16 00:13:022020-01-16 00:13:02동일한 지역에서 사역하는 동명이인 목사
10 여 년 전에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한 때 중고등부 학생을 담당하셨던 1.5세의 S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S 목사님의 부인은 학교 교사로 슬하에 아들과 딸을 두고 있습니다. 아들은 나면서부터 장애아로 태어나 일반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장애아를 위한 특수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가족이 한 교회에 다니지 못하고 부인과 아들은 장애아를 위한 예배 시설이 있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S 목사님은 항상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딸과 함께 교회를 오는 것입니다. 딸은 초등학교 1-2학년 생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활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당 안에서도 조신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기웃 거리며 매사에 참견하기를 좋아합니다. 필자가 사용하는 목자 실에도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듭니다. 다른 아이 같으면 어려워서라도 목사님 방에 들어오길 꺼려하는데 교육목사님의 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아버지 목사님은 마땅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어린 딸을 자주 핀잔을 주며 활동에 제재를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딸과 아버지 목사님이 교회 안에서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다툼이라고 보다는 충돌이라고 할까요? 모르기는 해도 둘의 관계는 교회 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집안에서부터 벌이진 일로 생각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버지 목사님이 어린 딸에게 그렇게 큰 소리로 야단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필자가 있는 주변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러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어린 딸을 야단치는 목사님이 한편으로는 안 되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빠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으면 저러실까?
그러면서도 그렇게까지 역정을 내는 것은 과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딸이 무리한 행동을 해도 교인 중 누구하나 어린 아이를 미워하거나 야단치는 분은 없었습니다. 어린이는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육목사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딸답게 얌전하길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목사님이 딸을 훈계하는 큰 소리를 여러 번 교회 안에서 들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은 아빠의 계속되는 꾸지람에 대하여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빠 목사님은 더 큰 소리로 역정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야단치는 음성으로 보아선 금방 매를 들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그 정도 되었으면 보통 아이라면 기가 죽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향하여 책망하는 아버지 목사님을 향하여 누구도 생각지 못한 충격적인 말을 아버지 얼굴을 향하여 두 눈을 부릅뜨고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평강교회 목사님과 같아야 하는 거야!] 그 말은 목사로서 자격이 미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로서는 그럴 수도 있지만 교회 안에서 목사로서는 아무리 딸이라도 자기에게 그래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격한 언행, 지나친 분노, 관용과 사랑이 없는 목사라는 말로 들려졌습니다.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목사님이나 함께 듣고 있던 교우나 필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놀라움이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아야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 목사님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10여년의 세월이 지나갔지만 지금도 종종 귓전에서 어리아이가 불을 토하듯 쏟아낸 그 말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그런 감정이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런 표현 능력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후부터 아이들을 보는 나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섬기고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알게 하신 겁니다. 수년 전 3 명의 딸을 가진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큰 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잘 해 주려고 하다가도 가끔 화를 내고 매를 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빠는 어떻게 자신들을 길러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기억하기로는 두 딸과 아들에게 매를 가한 적이 없으며, 너희들이 화를 내지 않도록 잘 자라주어서 늘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상처가 되는 꾸지람이나 야단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당부의 말을 했습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1-16 00:07:312020-01-16 00:07:31목사님은 P K 교회 목사님과 같아야 되는 거야!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의 교차로에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니 한동안 잊고 지내던 K 장로님과의 약속이 되 살아났다.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74년 가을의 어느 날로 기억이 되었다. 필자가 1973년 11월 미국에 처음오기 전 한국에서 어려운 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으로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의학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미국의 큰 병원에서 치료 받을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수단으로 택한 것은 당시 서울시청 뒤에 위치한 영자신문인 Korea Herald 신문사였다.
수원에서 신촌의 세브란스 병원으로 치료를 받기 위하여 한 달에 서너 차례 올라갈 때마다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면 곧바로 신문사로 달려간 것이다. 신문사는 2층에 있어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당시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한 걸음을 옮기고 쉬었다가 다시 걸어서 10여분이 걸려할 정도로 위중했다.
당시 헤모글로빈의 수치가 심할 때는 3-4까지 내려 갈 정도로 앉고 서는 것도 힘이 들었던 때였다. 계단을 올라가 편집국 문을 열고 들어가면 편집국에서 일하는 분들을 향하여 허리를 굽혀 크게 인사하며 “안녕하세요! 수원의 이상기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선 곧바로 뒤돌아 나오길 6개월을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김경해 기자로부터 전보가 왔다. 내일 아침 8시 반까지 조선호텔 4층 207 호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당시는 조선호텔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해서 이른 아침 첫 차를 타고 신문사로 향했다. 신문사에 도착해서 김경해 기자님과 사진기자 그리고 당시 하와이에 있는 영자신문의 미국인 교환기자와 함께 조선호텔로 향한 것이다.
그곳에는 Tulsa, Oklahoma에 본부가 있는 선교단체인 David Livingstone Missionary Foundation의 회장인 Dr. Pedigo 박사가 머물고 있었다. 선교단체는 한국에서 어린 아이들을 미국인 가정에 입양을 하고 한국의 여러 곳의 고아원을 돕고 있었다. 김 기자는 Pedigo 박사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의 기관에서 고아들을 입양해주고 여러 곳의 고아원을 지원해주는 일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그동안도 좋은 일을 해 오셨지만 이번에 Korea Herald 영자신문사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은 이상기군을 살려 달라고 한 것이다. 이후 영자신문에 Pedigo 박사님과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미국에서 치료 받게 되었다는 기사가 보도 되었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 선교단체의 초청으로 UCLA 대학병원으로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도 치료 방법은 없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필자가 앓았던 병을 치료하는 약이나 수술방법은 아직도 없는 것이다. 당시 필자의 주치의는 Dr. Nicolas Costea 박사로 혈액학 주임 교수였다.
이듬해 7월 이었다. Costea 박사는 반복되는 골수 검사의 결과에 대하여 놀라운 사실을 말했다. 그동안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던 병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는 것이다. 왜 나앗는지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완전하게 나았다는 것이다. 이제후로는 정상적인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 무엇이든지 다 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죽을 사람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틈틈이 의학 서적을 통하여 병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치 진단을 받은 후 그해 여름에 귀국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귀국을 하고나서 불안해 지기 시작한 것이다.
재발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의 공포에서 보름간을 지내다가 다시 미국으로 가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 싶은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비자를 내준 Dean Martin 영사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신기한 것은 1970년 당시 해외 방문 후 귀국하는 단수 여권은 공항에서 회수 했는데 나의 것은 그대로 있었다.
당신의 나라의 도움으로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 난치병에서 살아나 귀국하였는데 한국에 오고 나서 재발에 대한 두려움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미국에 가서 완전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길 원한다는 내용과 함께 여권을 동봉해서 등기우편으로 보냈다. 그로부터 2주후 Dean Martin 영사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대사관 내에는 이상기군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다시 미국에 가길 원하면 이 편지를 가지고 대사관을 방문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보냈던 여권을 다시 보내온 것이었다. 그 편지를 가지고 대사관을 방문해 미국 비자를 다시 받을 수 있었다.
곧바로 김포공항으로 달려가 출입국 관리에게 문의 했다. 이 여권과 비자를 가지고 미국으로 갈수 있냐고 했더니 안 된다는 것이었다. 비자는 살아있지만 여권은 단수여권이기에 유효기간이 만료 되었다는 것이다.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시 인근 우체국으로 가서 청와대 영부인 육영수여사님께 그간의 상황을 담은 도움을 구하는 속달 편지를 올렸다.
그런 다음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수원 집으로 3시간 후에 도착하니, 청와대의 전보가 먼저 날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 오전 8시 반 외무부 제2여권 과장을 만나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중앙청에 도착하여 외무부 여권과로 가니 담당부서의 여직원이 문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권 과장님은 연락을 받았다고 하면서 나의 여권을 달라고 하더니 그 여권 앞 페이지에 이 여권은 유효함이라는 큰 사각형의 인장을 찍어 주면서 미국을 잘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청사를 나오면서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서소문)십자군연맹을 방문해 다시 미국에 가게 된 것을 감사하는 인사를 하기 위해 김득황 회장님을 찾아간 것이다.
(김득황 장로님은 내무부차관을 역임하셨다)십자군연맹은 미국의 선교본부를 돕는 한국내 기관으로 미국의 선교기관이 한국의 십자군연맹을 통하여 초청장을 보내왔으며 그 동안 나에 대한 여행 서류를 도아 왔기에 다시 미국에 가는 것에 대해서 김득황(장로)회장님도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에 인사차 방문한 것이다.
처음 미국행 비자를 얻기 위해서 십자군연맹에서 두 번이나 비자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세 번째는 김득황 장로님이 직접 대사관의 담당 영사를 만났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이유는 십자군연맹의 직원으로 미국에 들어가서 체류기간을 넘기고 귀국하지 않은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군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고 설명했으나 받아드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김득황 장로님은 당시 나의 여권을 돌려주면서 미국 가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담당 영사와 격한 다툼을 벌였기에 비자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혼자 미 대사관을 방문해 비자 신청을 하고서 인터뷰를 거쳐 비자를 받은 것이다.
당시만 해도 미국행 비자 받기가 쉽지 않았을 때였던 것이다. 이런 것을 잘하는 김득황 장로님은 귀국한지 두 달 만에 그것도 단수비자가 아닌 복수비자를 받은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생각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감사의 인사차 방문한 필자를 향하여 김 장로님은 어떻게 어려운 미국 비자를 다시 받았으며 단수여권(유효기간이 지난 여권)을 어떻게 다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아해 하면서 여권을 보자고 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여권을 드렸다. 그러더니 자세히 살펴본 후 여권을 돌려주지 않고 당신이 앉은 책상의자 왼편 서랍을 열더니 그곳에 넣고는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여권은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미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고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 장로님을 향해 이 여권이 어떻게 유효여권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육영수여사님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권 돌려주시지 않으면 이대로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회장실 문을 박차고 나오자 김 회장이 따라 나와 나의 팔을 잡으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네가 미국에 다시가면 선교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는데 그리되면 한국으로 오는 재정 지원이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하나만 약속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미국에 들어가도 선교본부에는 알리지 않고 더 이상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 때문에 지원이 줄어든 다는 말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서 김 장로님으로부터 여권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올 때는 선교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비행기 표를 구입해서 들어온 후 지난 40여 년 동안 미국 선교본부에는 지금까지도 나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물론 한국의 김득황 회장이나 십자군연맹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생명을 구해주신 고마운 마음에 몇 번이고 선교본부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고 개인적으로는 Dr. Pediego 박사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수도 없이 전하고 싶은 마음이 이었지만 김득황 장로님과의 약속 때문에 마음으로만 항상 감사를 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의 가슴에 고마운 마음을 새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1-15 02:56:032020-01-15 02:56:0340여 년 전 K 장로님과의 약속
동일한 지역에서 사역하는 동명이인 목사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모님 명복을 기도합니다. 천국에서 영면하소서! 위로의 말씀드립니다] 지난 12월 26일 토요일 이른 아침에 필자가 받은 카톡의 내용이었습니다. 카톡을 보낸 분은 평소 가깝게 지내는 선배 목사님이셨습니다. 카톡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이렇게 답신을 보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뜻밖의 내용을 받고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잘못 배달된 줄 알고서 [제가 아는 어느 분이 돌아가셨나요?]라고 답신을 보내자 상대방에서 “뭐요” 하면서 놀란 문자가 뜨더니 한 참을 지나고 나서 새로운 내용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에서 목회하시는 동명이인 한믿음교회 이상기 목사님의 사모님이 소천 하셨다는 것을 잘못 알고 전했다고 하신 겁니다. 신문에 난 부고를 보고서 필자의 부인이 세상을 떠난 줄 알고 다급한 마음에 카톡으로 위로의 말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선배 목사님 부부는 집 사람을 위해서 늘 기도해 주셨습니다.
한 달 전에는 식당으로 우리 내외를 불러내어 귀한 대접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부고를 통하여 소천소식을 접하고 놀라셨던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잠시 후 고등학교 선배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신문에 난 부고를 보고 전화를 하셨다고 하면서 교회이름도 다르고 돌아가신 분의 나이가 집 사람보다 10살이 아래인데 하면서 확인차 전화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이 이민 교회의 이름이 수시로 바뀌는 교회도 있기에 필자가 섬기는 평강교회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날 아침 우리 부부는 이상기 목사님 사모님의 소천 소식을 접하고서 한바탕 웃어야 했습니다. 죽는 꿈만 꾸어도 오래 산다고 하던데 꿈이 아닌 현실에서 이런 인사를 받았으니 당신은 아마도 오래 살 것 같다고 한 것입니다. 한믿음교회을 섬기는 이상기 목사님과는 교제가 없었지만 지면을 통하여 목사님과 자녀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진심으로 드립니다.
이상기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15-6 년 전으로 기억이 됩니다. 새로 교회를 설립하면서 한믿음교회 담임목사로 소개되신 분이 이상기 목사님이라고 언론에 집중적으로 광고가 된 것입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사방으로부터 전화가 필자에게 빗발쳤던 것입니다. 20여 년 동안 섬기던 평강교회는 어떻게 하고 왜 또 다른 교회로 옮기였냐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한번은 교회의 집사님 중 한분이 수년 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신문에 우리교회의 이름으로 공고를 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해주십시오!” 하면서 강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의 청을 웃음으로 받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신문에 낸 광고의 효과가 오래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의 이상기 목사님과 다른 교회의 이상기 목사님은 같은 분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길 원했던 것은 동일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상대방이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일지역에서 같은 이름의 목사님이기에 생겨나는 웃지 못 할 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동명이인이 종종 있습니다. 이민 초창기에 나성한인교회를 설립하셨던 김의환 목사님과 같은 이름이 있었습니다. 김의환 장로님이십니다. 김의환 장로님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셨습니다. 동명이인의 이름 때문에 생겨날 해프닝을 예방하기 위해서 김의환 목사님(장로님이셨다가 목사가 되신)은 이름을 바꾸셨습니다. 그 이름이 김사무엘 목사였습니다. 김사무엘 목사님은 지난 해 소천하시기까지 남가주목사회 회장과 남가주교회협의회 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재미있는 것은 또 다른 이름의 김사무엘 목사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우리에게 이름이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듬어지고 가꾸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름이 빛나길 원하십니다. 2016년의 아침을 맞으면서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나의 삶이되기를 다짐해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511
목사님은 P K 교회 목사님과 같아야 되는 거야!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10 여 년 전에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한 때 중고등부 학생을 담당하셨던 1.5세의 S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S 목사님의 부인은 학교 교사로 슬하에 아들과 딸을 두고 있습니다. 아들은 나면서부터 장애아로 태어나 일반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장애아를 위한 특수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가족이 한 교회에 다니지 못하고 부인과 아들은 장애아를 위한 예배 시설이 있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S 목사님은 항상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딸과 함께 교회를 오는 것입니다. 딸은 초등학교 1-2학년 생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활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당 안에서도 조신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기웃 거리며 매사에 참견하기를 좋아합니다. 필자가 사용하는 목자 실에도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듭니다. 다른 아이 같으면 어려워서라도 목사님 방에 들어오길 꺼려하는데 교육목사님의 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아버지 목사님은 마땅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어린 딸을 자주 핀잔을 주며 활동에 제재를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딸과 아버지 목사님이 교회 안에서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다툼이라고 보다는 충돌이라고 할까요? 모르기는 해도 둘의 관계는 교회 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집안에서부터 벌이진 일로 생각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아버지 목사님이 어린 딸에게 그렇게 큰 소리로 야단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필자가 있는 주변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러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어린 딸을 야단치는 목사님이 한편으로는 안 되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빠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으면 저러실까?
그러면서도 그렇게까지 역정을 내는 것은 과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딸이 무리한 행동을 해도 교인 중 누구하나 어린 아이를 미워하거나 야단치는 분은 없었습니다. 어린이는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육목사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딸답게 얌전하길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목사님이 딸을 훈계하는 큰 소리를 여러 번 교회 안에서 들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은 아빠의 계속되는 꾸지람에 대하여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빠 목사님은 더 큰 소리로 역정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야단치는 음성으로 보아선 금방 매를 들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그 정도 되었으면 보통 아이라면 기가 죽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향하여 책망하는 아버지 목사님을 향하여 누구도 생각지 못한 충격적인 말을 아버지 얼굴을 향하여 두 눈을 부릅뜨고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평강교회 목사님과 같아야 하는 거야!] 그 말은 목사로서 자격이 미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로서는 그럴 수도 있지만 교회 안에서 목사로서는 아무리 딸이라도 자기에게 그래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격한 언행, 지나친 분노, 관용과 사랑이 없는 목사라는 말로 들려졌습니다.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목사님이나 함께 듣고 있던 교우나 필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놀라움이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아야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 목사님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10여년의 세월이 지나갔지만 지금도 종종 귓전에서 어리아이가 불을 토하듯 쏟아낸 그 말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그런 감정이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런 표현 능력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후부터 아이들을 보는 나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섬기고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알게 하신 겁니다. 수년 전 3 명의 딸을 가진 불혹의 나이에 들어선 큰 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잘 해 주려고 하다가도 가끔 화를 내고 매를 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빠는 어떻게 자신들을 길러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기억하기로는 두 딸과 아들에게 매를 가한 적이 없으며, 너희들이 화를 내지 않도록 잘 자라주어서 늘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상처가 되는 꾸지람이나 야단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당부의 말을 했습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501
40여 년 전 K 장로님과의 약속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의 교차로에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니 한동안 잊고 지내던 K 장로님과의 약속이 되 살아났다.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74년 가을의 어느 날로 기억이 되었다. 필자가 1973년 11월 미국에 처음오기 전 한국에서 어려운 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으로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의학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미국의 큰 병원에서 치료 받을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수단으로 택한 것은 당시 서울시청 뒤에 위치한 영자신문인 Korea Herald 신문사였다.
수원에서 신촌의 세브란스 병원으로 치료를 받기 위하여 한 달에 서너 차례 올라갈 때마다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면 곧바로 신문사로 달려간 것이다. 신문사는 2층에 있어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당시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한 걸음을 옮기고 쉬었다가 다시 걸어서 10여분이 걸려할 정도로 위중했다.
당시 헤모글로빈의 수치가 심할 때는 3-4까지 내려 갈 정도로 앉고 서는 것도 힘이 들었던 때였다. 계단을 올라가 편집국 문을 열고 들어가면 편집국에서 일하는 분들을 향하여 허리를 굽혀 크게 인사하며 “안녕하세요! 수원의 이상기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선 곧바로 뒤돌아 나오길 6개월을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김경해 기자로부터 전보가 왔다. 내일 아침 8시 반까지 조선호텔 4층 207 호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당시는 조선호텔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해서 이른 아침 첫 차를 타고 신문사로 향했다. 신문사에 도착해서 김경해 기자님과 사진기자 그리고 당시 하와이에 있는 영자신문의 미국인 교환기자와 함께 조선호텔로 향한 것이다.
그곳에는 Tulsa, Oklahoma에 본부가 있는 선교단체인 David Livingstone Missionary Foundation의 회장인 Dr. Pedigo 박사가 머물고 있었다. 선교단체는 한국에서 어린 아이들을 미국인 가정에 입양을 하고 한국의 여러 곳의 고아원을 돕고 있었다. 김 기자는 Pedigo 박사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의 기관에서 고아들을 입양해주고 여러 곳의 고아원을 지원해주는 일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그동안도 좋은 일을 해 오셨지만 이번에 Korea Herald 영자신문사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은 이상기군을 살려 달라고 한 것이다. 이후 영자신문에 Pedigo 박사님과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미국에서 치료 받게 되었다는 기사가 보도 되었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 선교단체의 초청으로 UCLA 대학병원으로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도 치료 방법은 없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필자가 앓았던 병을 치료하는 약이나 수술방법은 아직도 없는 것이다. 당시 필자의 주치의는 Dr. Nicolas Costea 박사로 혈액학 주임 교수였다.
이듬해 7월 이었다. Costea 박사는 반복되는 골수 검사의 결과에 대하여 놀라운 사실을 말했다. 그동안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던 병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는 것이다. 왜 나앗는지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완전하게 나았다는 것이다. 이제후로는 정상적인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 무엇이든지 다 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죽을 사람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틈틈이 의학 서적을 통하여 병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치 진단을 받은 후 그해 여름에 귀국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귀국을 하고나서 불안해 지기 시작한 것이다.
재발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의 공포에서 보름간을 지내다가 다시 미국으로 가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 싶은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비자를 내준 Dean Martin 영사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신기한 것은 1970년 당시 해외 방문 후 귀국하는 단수 여권은 공항에서 회수 했는데 나의 것은 그대로 있었다.
당신의 나라의 도움으로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 난치병에서 살아나 귀국하였는데 한국에 오고 나서 재발에 대한 두려움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미국에 가서 완전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길 원한다는 내용과 함께 여권을 동봉해서 등기우편으로 보냈다. 그로부터 2주후 Dean Martin 영사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대사관 내에는 이상기군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다시 미국에 가길 원하면 이 편지를 가지고 대사관을 방문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보냈던 여권을 다시 보내온 것이었다. 그 편지를 가지고 대사관을 방문해 미국 비자를 다시 받을 수 있었다.
곧바로 김포공항으로 달려가 출입국 관리에게 문의 했다. 이 여권과 비자를 가지고 미국으로 갈수 있냐고 했더니 안 된다는 것이었다. 비자는 살아있지만 여권은 단수여권이기에 유효기간이 만료 되었다는 것이다.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시 인근 우체국으로 가서 청와대 영부인 육영수여사님께 그간의 상황을 담은 도움을 구하는 속달 편지를 올렸다.
그런 다음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수원 집으로 3시간 후에 도착하니, 청와대의 전보가 먼저 날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 오전 8시 반 외무부 제2여권 과장을 만나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중앙청에 도착하여 외무부 여권과로 가니 담당부서의 여직원이 문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권 과장님은 연락을 받았다고 하면서 나의 여권을 달라고 하더니 그 여권 앞 페이지에 이 여권은 유효함이라는 큰 사각형의 인장을 찍어 주면서 미국을 잘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청사를 나오면서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서소문)십자군연맹을 방문해 다시 미국에 가게 된 것을 감사하는 인사를 하기 위해 김득황 회장님을 찾아간 것이다.
(김득황 장로님은 내무부차관을 역임하셨다)십자군연맹은 미국의 선교본부를 돕는 한국내 기관으로 미국의 선교기관이 한국의 십자군연맹을 통하여 초청장을 보내왔으며 그 동안 나에 대한 여행 서류를 도아 왔기에 다시 미국에 가는 것에 대해서 김득황(장로)회장님도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에 인사차 방문한 것이다.
처음 미국행 비자를 얻기 위해서 십자군연맹에서 두 번이나 비자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세 번째는 김득황 장로님이 직접 대사관의 담당 영사를 만났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이유는 십자군연맹의 직원으로 미국에 들어가서 체류기간을 넘기고 귀국하지 않은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군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고 설명했으나 받아드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김득황 장로님은 당시 나의 여권을 돌려주면서 미국 가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담당 영사와 격한 다툼을 벌였기에 비자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혼자 미 대사관을 방문해 비자 신청을 하고서 인터뷰를 거쳐 비자를 받은 것이다.
당시만 해도 미국행 비자 받기가 쉽지 않았을 때였던 것이다. 이런 것을 잘하는 김득황 장로님은 귀국한지 두 달 만에 그것도 단수비자가 아닌 복수비자를 받은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생각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감사의 인사차 방문한 필자를 향하여 김 장로님은 어떻게 어려운 미국 비자를 다시 받았으며 단수여권(유효기간이 지난 여권)을 어떻게 다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아해 하면서 여권을 보자고 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여권을 드렸다. 그러더니 자세히 살펴본 후 여권을 돌려주지 않고 당신이 앉은 책상의자 왼편 서랍을 열더니 그곳에 넣고는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여권은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미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고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 장로님을 향해 이 여권이 어떻게 유효여권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육영수여사님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권 돌려주시지 않으면 이대로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회장실 문을 박차고 나오자 김 회장이 따라 나와 나의 팔을 잡으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네가 미국에 다시가면 선교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는데 그리되면 한국으로 오는 재정 지원이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하나만 약속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미국에 들어가도 선교본부에는 알리지 않고 더 이상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 때문에 지원이 줄어든 다는 말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서 김 장로님으로부터 여권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올 때는 선교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비행기 표를 구입해서 들어온 후 지난 40여 년 동안 미국 선교본부에는 지금까지도 나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물론 한국의 김득황 회장이나 십자군연맹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생명을 구해주신 고마운 마음에 몇 번이고 선교본부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고 개인적으로는 Dr. Pediego 박사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수도 없이 전하고 싶은 마음이 이었지만 김득황 장로님과의 약속 때문에 마음으로만 항상 감사를 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의 가슴에 고마운 마음을 새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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