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말 한국교회의 은인이라 불리는 고 사무엘 휴 마펫 선교사님의 하관식을 참여하기 위해서 12인승 교회 차량으로 10여분의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장지가 있는 곳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장지까지는 평소 같으면 한 시간 십여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프리웨이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3시간 이상 길에서 지체해야 했던 것입니다. 당시 동승했던 목사님 한분이 계속되는 더위와 교통 체증을 이기지 못하고 멀미를 시작하시더니 결국에는 달리는 차 안에서 구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비닐봉지에 실례를 하셨지만 더 이상 견디지 못했기에 프리웨이에서 급하게 내려야 했던 것입니다.
Thousand oaks city 지역의 쇼핑센터로 가서 차에서 내리기 쉬운 가까운 곳에 위치한 멕시칸 음식점으로 들어가 급한 일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 때 곁에 계신 다른 목사님 한분이 뒤 따라가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일행은 프리웨이를 달려서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멀미하던 목사님을 따라 차에서 내렸던 목사님이 자신의 가방을 잃어버린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입니다. 작은 손가방에는 여러 개의 크레딧 카드와 현금이 담겨있는 지갑과 그리고 최신 전화기 등 목사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장에라도 가방을 잃어버린 곳으로 가보고 싶으셨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곧 행사가 시작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함께 한 일행 모두가 무거운 마음으로 걱정 하면서도 아무런 도움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방을 두고 내린 멕시칸 음식점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식당의 전화번호도 없었고 정확한 위치를 기억하는 분들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찾아 헤매야 했던 것입니다. 몇 번의 실수가 있었습니다. 프리웨이를 타고 내리길 몇 번 하다가 그러는 동안 가방을 잃어버린 목사님이 “이제는 포기하고 그냥 돌아갑시다”라고 말을 하신 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오전에 가방을 두고 내렸던 식당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아니하고 힘없이 걸어 들어가신 목사님이 10여분 후 밝은 얼굴로 다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손에는 검은색 작은 손가방을 들고 나오시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신기하고 너무도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일행 중 한 분은 “지갑부터 열어보세요? 현금과 크레디트카드는 있습니까?”
목사님이 식당에 들어갔을 때는 오전에 만났던 직원들이 교대가 되어서 없었는데 그중 한 여자 직원이 오전에 보았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녀에게 다가가 5-6시간 전에 가방을 두고 갔는데 혹시 아느냐고 했더니 안다고 하면서 즉시 사무실에 보관해둔 가방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입니다.
고마운 마음에 약간의 팁을 주려고 했지만 극구 사양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차 안에 잃어버렸던 가방을 들고 들어오신 목사님을 향하여 일행은 뜨거운 박수를 했으며 잃어버린 물건을 찾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한 일행 중 누구도 잃어버린 가방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가방을 잃어버린 목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자고 말하신 것입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차에서 내려 가방을 잃어버린 목사님을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가 이름 모를 손님의 잃어버린 가방을 안전하게 보관해 두었다가 돌려드린 양심적인 직원의 밝은 얼굴을 보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을 가져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야 말로 보통 미국인의 살아있는 양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방을 잃어버리셨다가 찾은 목사님이 일본인 친구 목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에서 열사람이 지갑을 길에서 잃어버리면 몇 개나 주인에게 돌아가겠느냐는 물음에 8-9개는 주인에게 돌아간다고 서슴없이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하여 한국에서 지갑을 잃어버리면 5-10% 정도만 주인에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기독 인구는 1%인데 비하여 한국의 기독 인구는 25% 이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여자 직원의 작은 행함이 여러 사람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었듯이 우리의 삶도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필자가 30여 년 동안 단골로 다니는 식당이 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그리 크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화려한 건물을 자랑하는 식당도 아닙니다. 우리말로 설명하자면 작은 마을 식당이라고나 할까요? 특별하지도 않고 음식이 다른 식당보다 맛이 있어서 그곳을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점심때가 되면 교회 인근에서 식사할 만한 다른 식당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는 다른 식당이란 한국 음식점을 말합니다. 미국 생활이 한국에서 산 것보다 두 배 이상이나 되었을 정도로 고국을 떠나 이민자로 이곳에서 산지도 40여년의 긴 세월이 지나갔지만 아직도 미국 식사에 익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빵 보다는 밥과 국이 더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두세 번 많이 갈 때는 일주일에 한두 번 번씩 그 식당을 가는 것은 그곳엔 나를 반겨주는 매니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음식 맛보다도 그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주 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유명한 식당에서 느끼지 못하는 인간미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종업원 중에 한국인은 없습니다. 모두가 영어보다는 스페니시를 더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은 6-7명이 됩니다. 그 식당이 특별한 것은 일하시는 분들이 모두 오래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매니저 말고도 30여년 이상 그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또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단골로 다니는 식당이지만 아직도 매니저와는 서로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고 그도 역시 내게 이름을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가 식당 근처에 있는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식당 매니저를 처음 만났을 때만해도 젊고 건강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때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허리는 약간 구부정해졌고 머리는 희어졌습니다. 그 분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변함 모습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내가 식당에 들어서면 다른 손님이 있거나 말거나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Hi my boss” 그러면 식당에 있는 모든 손님들이 다 고개를 돌려 나를 주목합니다. 마치 식당에 사장이 나타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my boss’라는 말을 식당 매니저에게서 30여년을 들어오면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싫지 않은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식당 매니저의 말이 왜 내게 거부감이 없으며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른 종업원들은 나에 대하여 그런 인사를 왜 한 번도 하지 않는 것일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그런 인사를 다른 종업에게서 받지 못하는 것은 내가 저들의 상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식당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잠시도 내가 저들의 상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매니저의 인사가 싫지 않은 것은 그 분의 진정성 있는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가식 없는 따뜻하고 정겨운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대화는 오고 가지 못해도 짧은 한 두 마디의 말이 서로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속담에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듯이 식당 매니저에게 그런 대접을 받다 보니 주변에 많은 다른 식당으로 발걸음이 쉽게 옮겨지지가 않는 겁니다.
30여 년 동안 변함없이 그 식당을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것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식당을 나설 때는 내가 먼저 매니저를 향하여 인사를 합니다. “Thank you my boss” 그러면 그는 오른 손을 높이 들고 흔들어 인사에 답합니다. 그 분과 나는 이제 남남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장소에서 만나서 대화를 나누지도 못합니다. 그와 만날 수 있는 곳은 식당에서 매니저와 손님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대도 나의 마음에 늘 식당 매니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길을 오고가다가도 그 분의 얼굴, 행동, 말씨가 생각이 날 때마다 미소 짓게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식당을 또 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식당을 가게 될 것입니다. 매니저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나의 발걸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칼럼을 쓰는 것은 매니저를 통하여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의 겸손한 자세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당에 오래된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아니하는 것이 손님을 대하는 매니저의 정성된 자세 때문인 것처럼 교회를 섬기는 목자의 자세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는 목자의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1-11 02:40:512020-01-11 02:40:51만날 때마다 마음이 즐거워지는 사람
남가주의 강렬한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8월 29일 토요일 오후 2 시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서북방향으로 80여 마일 거리에 있는 태평양해변의 작은 도시 카핀테리아의 공동묘지에서 사무엘 휴 마펫 선교사님(한국이름으로는 마삼락 박사)의 한미합동 이장예배가 있었습니다.
이장예배 준비위원으로 수고하신 미국장로교 전국한인교회 증경 총회장 정시우 목사님의 초청으로 필자가 소속한 남가주목사장로부부합창단이 특별찬양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12인승 밴으로 이동하던 중 Freeway 교통사고로 장지에 도착하기까지는 3시간이 소요되어야 했습니다. 긴 시간이었지만 함께 동승하신 전 장신대총장 김인수 박사님의 마펫 선교사님의 가족사에 대한 말씀을 듣고서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하여 그토록 복음에 충성하신 믿음의 거장 마펫 선교사님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무엘 휴 마펫 선교사님은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아버지 새뮤얼 오스틴 마펫 선교사님은 1890년 26살의 젊은 나이에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하셨습니다. 3년 후인 1899년 의사선교사인 앨리스 피시와 결혼하여 제임스와 찰스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1912년 의사인 앨리스는 이질로 한국 땅에서 보름동안 심한 설사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 새뮤엘 오스틴 마펫 선교사님은 1915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의 동생 루시아 피시와 결혼하여 3아들을 더 낳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첫째와 둘째 아들이 한국 땅에서 풍토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중 가슴이 조여 오는 답답함과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만일 새뮤엘 오스틴 마펫 선교사님이 한국에 오지 아니하시고 미국 땅에 남아 계셨더라면 이 같은 가족의 비극 사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두 아들과 의사 부인의 죽음은 질병과 가난이 극심한 흑암의 땅 한국을 선교지로 택하신 아버지 선교사님의 고난의 열매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받은 복음이 거저 받은 것이 아니라 그토록 헌신하신 위대한 믿음의 거장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곁에 있던 친구목사님은 마펫 선교사님을 우리 한국교회의 은인이시라고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섯 아들 중 세 번째가 이장예배를 드린 새뮤엘 휴 마펫 선교사이십니다.
평양에서 출생하시어 고등학교까지를 졸업하고 대학은 미국에서 공부하셨습니다. 휘튼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시고 1942년 프린스턴에서 신학학사 학위를 그리고 1945년에 예일 대학교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1947년에 중국 베이징의 옌칭 대학교에서 교수로 섬기셨으며 1955년에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셨습니다. 1959년부터 1981년까지 서울의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섬기시는 동안 대학원장과 공동학장으로 봉사하셨습니다. 1981년부터 1987년까지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선교학교수로 사역하셨습니다. 프린스턴신학교 이사이며 서울 장로회 신학교 교수인 임성빈 박사는 “마펫이 한국에 남긴 학문적, 교육적 유산은 오래도록 계승될 것이라고 하면서 마펫 박사는 한국교회를 세계교회의 지평으로 이끈 선교적 학자이자, 한국 교회의 역사를 아시아 전반의 맥락 속에서 조명하게끔 한 교회 역사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펫 선교사님은 금년 2월 9일 프린스턴 원드로스에서 98세의 나이로 별세하셨습니다.
이번에 이장 예배를 드린 곳은 가족묘지가 있는 곳입니다. 김인수교 수님의 말에 의하면 고인이 마지막으로 한국 땅에 묻히길 소원하시어 유골함을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한국으로 이송하여 서울의 외국인 선교사 묘지인 양화진에 묻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곳엔 새뮤엘 휴 마펫 선교사님의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곳으로 우리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시므로 죽어서도 그가 태어난 한국 땅에 묻히길 그토록 소원하셨던 믿음의 거장 마펫 선교사님이 남기신 위대한 믿음의 유산을 우리는 잘 지켜 나가야 하며 고귀한 저들의 희생과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현장을 체험하다!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지난 8월 말 한국교회의 은인이라 불리는 고 사무엘 휴 마펫 선교사님의 하관식을 참여하기 위해서 12인승 교회 차량으로 10여분의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장지가 있는 곳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장지까지는 평소 같으면 한 시간 십여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프리웨이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3시간 이상 길에서 지체해야 했던 것입니다. 당시 동승했던 목사님 한분이 계속되는 더위와 교통 체증을 이기지 못하고 멀미를 시작하시더니 결국에는 달리는 차 안에서 구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비닐봉지에 실례를 하셨지만 더 이상 견디지 못했기에 프리웨이에서 급하게 내려야 했던 것입니다.
Thousand oaks city 지역의 쇼핑센터로 가서 차에서 내리기 쉬운 가까운 곳에 위치한 멕시칸 음식점으로 들어가 급한 일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 때 곁에 계신 다른 목사님 한분이 뒤 따라가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일행은 프리웨이를 달려서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멀미하던 목사님을 따라 차에서 내렸던 목사님이 자신의 가방을 잃어버린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입니다. 작은 손가방에는 여러 개의 크레딧 카드와 현금이 담겨있는 지갑과 그리고 최신 전화기 등 목사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장에라도 가방을 잃어버린 곳으로 가보고 싶으셨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곧 행사가 시작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함께 한 일행 모두가 무거운 마음으로 걱정 하면서도 아무런 도움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방을 두고 내린 멕시칸 음식점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식당의 전화번호도 없었고 정확한 위치를 기억하는 분들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찾아 헤매야 했던 것입니다. 몇 번의 실수가 있었습니다. 프리웨이를 타고 내리길 몇 번 하다가 그러는 동안 가방을 잃어버린 목사님이 “이제는 포기하고 그냥 돌아갑시다”라고 말을 하신 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오전에 가방을 두고 내렸던 식당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아니하고 힘없이 걸어 들어가신 목사님이 10여분 후 밝은 얼굴로 다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손에는 검은색 작은 손가방을 들고 나오시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신기하고 너무도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일행 중 한 분은 “지갑부터 열어보세요? 현금과 크레디트카드는 있습니까?”
목사님이 식당에 들어갔을 때는 오전에 만났던 직원들이 교대가 되어서 없었는데 그중 한 여자 직원이 오전에 보았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녀에게 다가가 5-6시간 전에 가방을 두고 갔는데 혹시 아느냐고 했더니 안다고 하면서 즉시 사무실에 보관해둔 가방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입니다.
고마운 마음에 약간의 팁을 주려고 했지만 극구 사양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차 안에 잃어버렸던 가방을 들고 들어오신 목사님을 향하여 일행은 뜨거운 박수를 했으며 잃어버린 물건을 찾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한 일행 중 누구도 잃어버린 가방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가방을 잃어버린 목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자고 말하신 것입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차에서 내려 가방을 잃어버린 목사님을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가 이름 모를 손님의 잃어버린 가방을 안전하게 보관해 두었다가 돌려드린 양심적인 직원의 밝은 얼굴을 보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을 가져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야 말로 보통 미국인의 살아있는 양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방을 잃어버리셨다가 찾은 목사님이 일본인 친구 목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에서 열사람이 지갑을 길에서 잃어버리면 몇 개나 주인에게 돌아가겠느냐는 물음에 8-9개는 주인에게 돌아간다고 서슴없이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하여 한국에서 지갑을 잃어버리면 5-10% 정도만 주인에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기독 인구는 1%인데 비하여 한국의 기독 인구는 25% 이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여자 직원의 작은 행함이 여러 사람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었듯이 우리의 삶도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241
만날 때마다 마음이 즐거워지는 사람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필자가 30여 년 동안 단골로 다니는 식당이 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그리 크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화려한 건물을 자랑하는 식당도 아닙니다. 우리말로 설명하자면 작은 마을 식당이라고나 할까요? 특별하지도 않고 음식이 다른 식당보다 맛이 있어서 그곳을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점심때가 되면 교회 인근에서 식사할 만한 다른 식당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는 다른 식당이란 한국 음식점을 말합니다. 미국 생활이 한국에서 산 것보다 두 배 이상이나 되었을 정도로 고국을 떠나 이민자로 이곳에서 산지도 40여년의 긴 세월이 지나갔지만 아직도 미국 식사에 익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빵 보다는 밥과 국이 더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두세 번 많이 갈 때는 일주일에 한두 번 번씩 그 식당을 가는 것은 그곳엔 나를 반겨주는 매니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음식 맛보다도 그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주 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유명한 식당에서 느끼지 못하는 인간미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종업원 중에 한국인은 없습니다. 모두가 영어보다는 스페니시를 더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은 6-7명이 됩니다. 그 식당이 특별한 것은 일하시는 분들이 모두 오래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매니저 말고도 30여년 이상 그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또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단골로 다니는 식당이지만 아직도 매니저와는 서로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고 그도 역시 내게 이름을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가 식당 근처에 있는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식당 매니저를 처음 만났을 때만해도 젊고 건강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때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허리는 약간 구부정해졌고 머리는 희어졌습니다. 그 분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변함 모습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내가 식당에 들어서면 다른 손님이 있거나 말거나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Hi my boss” 그러면 식당에 있는 모든 손님들이 다 고개를 돌려 나를 주목합니다. 마치 식당에 사장이 나타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my boss’라는 말을 식당 매니저에게서 30여년을 들어오면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싫지 않은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식당 매니저의 말이 왜 내게 거부감이 없으며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른 종업원들은 나에 대하여 그런 인사를 왜 한 번도 하지 않는 것일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그런 인사를 다른 종업에게서 받지 못하는 것은 내가 저들의 상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식당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잠시도 내가 저들의 상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매니저의 인사가 싫지 않은 것은 그 분의 진정성 있는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가식 없는 따뜻하고 정겨운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대화는 오고 가지 못해도 짧은 한 두 마디의 말이 서로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속담에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듯이 식당 매니저에게 그런 대접을 받다 보니 주변에 많은 다른 식당으로 발걸음이 쉽게 옮겨지지가 않는 겁니다.
30여 년 동안 변함없이 그 식당을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것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식당을 나설 때는 내가 먼저 매니저를 향하여 인사를 합니다. “Thank you my boss” 그러면 그는 오른 손을 높이 들고 흔들어 인사에 답합니다. 그 분과 나는 이제 남남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장소에서 만나서 대화를 나누지도 못합니다. 그와 만날 수 있는 곳은 식당에서 매니저와 손님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대도 나의 마음에 늘 식당 매니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길을 오고가다가도 그 분의 얼굴, 행동, 말씨가 생각이 날 때마다 미소 짓게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식당을 또 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식당을 가게 될 것입니다. 매니저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나의 발걸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칼럼을 쓰는 것은 매니저를 통하여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의 겸손한 자세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당에 오래된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아니하는 것이 손님을 대하는 매니저의 정성된 자세 때문인 것처럼 교회를 섬기는 목자의 자세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는 목자의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202
믿음의 거장 사무엘 휴 마펫 선교사님을 추모하며!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남가주의 강렬한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8월 29일 토요일 오후 2 시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서북방향으로 80여 마일 거리에 있는 태평양해변의 작은 도시 카핀테리아의 공동묘지에서 사무엘 휴 마펫 선교사님(한국이름으로는 마삼락 박사)의 한미합동 이장예배가 있었습니다.
이장예배 준비위원으로 수고하신 미국장로교 전국한인교회 증경 총회장 정시우 목사님의 초청으로 필자가 소속한 남가주목사장로부부합창단이 특별찬양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12인승 밴으로 이동하던 중 Freeway 교통사고로 장지에 도착하기까지는 3시간이 소요되어야 했습니다. 긴 시간이었지만 함께 동승하신 전 장신대총장 김인수 박사님의 마펫 선교사님의 가족사에 대한 말씀을 듣고서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하여 그토록 복음에 충성하신 믿음의 거장 마펫 선교사님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무엘 휴 마펫 선교사님은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아버지 새뮤얼 오스틴 마펫 선교사님은 1890년 26살의 젊은 나이에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하셨습니다. 3년 후인 1899년 의사선교사인 앨리스 피시와 결혼하여 제임스와 찰스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1912년 의사인 앨리스는 이질로 한국 땅에서 보름동안 심한 설사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 새뮤엘 오스틴 마펫 선교사님은 1915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의 동생 루시아 피시와 결혼하여 3아들을 더 낳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첫째와 둘째 아들이 한국 땅에서 풍토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중 가슴이 조여 오는 답답함과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만일 새뮤엘 오스틴 마펫 선교사님이 한국에 오지 아니하시고 미국 땅에 남아 계셨더라면 이 같은 가족의 비극 사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두 아들과 의사 부인의 죽음은 질병과 가난이 극심한 흑암의 땅 한국을 선교지로 택하신 아버지 선교사님의 고난의 열매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받은 복음이 거저 받은 것이 아니라 그토록 헌신하신 위대한 믿음의 거장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곁에 있던 친구목사님은 마펫 선교사님을 우리 한국교회의 은인이시라고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섯 아들 중 세 번째가 이장예배를 드린 새뮤엘 휴 마펫 선교사이십니다.
평양에서 출생하시어 고등학교까지를 졸업하고 대학은 미국에서 공부하셨습니다. 휘튼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시고 1942년 프린스턴에서 신학학사 학위를 그리고 1945년에 예일 대학교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1947년에 중국 베이징의 옌칭 대학교에서 교수로 섬기셨으며 1955년에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셨습니다. 1959년부터 1981년까지 서울의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섬기시는 동안 대학원장과 공동학장으로 봉사하셨습니다. 1981년부터 1987년까지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선교학교수로 사역하셨습니다. 프린스턴신학교 이사이며 서울 장로회 신학교 교수인 임성빈 박사는 “마펫이 한국에 남긴 학문적, 교육적 유산은 오래도록 계승될 것이라고 하면서 마펫 박사는 한국교회를 세계교회의 지평으로 이끈 선교적 학자이자, 한국 교회의 역사를 아시아 전반의 맥락 속에서 조명하게끔 한 교회 역사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펫 선교사님은 금년 2월 9일 프린스턴 원드로스에서 98세의 나이로 별세하셨습니다.
이번에 이장 예배를 드린 곳은 가족묘지가 있는 곳입니다. 김인수교 수님의 말에 의하면 고인이 마지막으로 한국 땅에 묻히길 소원하시어 유골함을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한국으로 이송하여 서울의 외국인 선교사 묘지인 양화진에 묻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곳엔 새뮤엘 휴 마펫 선교사님의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곳으로 우리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시므로 죽어서도 그가 태어난 한국 땅에 묻히길 그토록 소원하셨던 믿음의 거장 마펫 선교사님이 남기신 위대한 믿음의 유산을 우리는 잘 지켜 나가야 하며 고귀한 저들의 희생과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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