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 교회 목양 칼럼입니다

성경교육 그만하시고 이제부터는 인성교육 시키세요!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는 아니면서도 가까이 지내는 부부가 있습니다. 이민 초기에 한 동리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때의 인연으로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교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필요에 의해서 가끔 만나는 것은 그 분이 하는 일 때문입니다. 서울의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한국계 미국 회사에 채용되어 이민을 오셨습니다.

그러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하고 계십니다. 10여 년 째 집사님이 하시는 일은 플러밍이었습니다. 매사에 성실하시고 맡은 일을 책임 있게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시기 때문에 항상 바쁘게 살아가고 계십니다. 처음 직장 일을 그만두고 플러밍을 배우러 다니는 동안 왜 좋은 직장을 포기하고 힘들게 살려고 하느냐고 말을 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미국에 이민을 와서도 육체노동을 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전공한 분야와는 너무나 격이 다른 육체적 노동을 하려는 것을 아무리 좋게 이해를 하려고 해도 쉽게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마다 할 수만 있다면 편한 직장을 구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만한 자격이나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며 남보다 편한 삶을 살기 위해서 어려운 공부를 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집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사의 사장이 한인 타운에서 이름이 크게 알려진 큰 교회의 장로님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존경 받는 장로님인데 직장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지 아니하는 사람보다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더욱 집사님을 견디기 어렵게 한 것은 사장 장로님의 인도로 같은 교회를 다니게 되고 나서 부터였습니다. 일터에서 매일 만나는 사장님과 교회에서 대표기도하시는 장로님은 같은 분인데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선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분으로 말과 행동에 조금도 흠과 티가 없는데 회사에선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회사 사장 장로님의 그런 이중적인 삶과 모습이 너무도 자신을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고민을 계속하다가 고용된 기간이 지나고 나서 회사를 그만둠과 동시에 사장 장로님이 시무하는 교회를 떠나 지금의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수일 전 그 집사님의 부인이 필자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부인 집사님도 한가한 분이 아닙니다. 직장을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화로 집사람과 가끔 안부를 전하다가 그 날은 작정을 하고 모처럼 토요일 하루를 집 사람과 보내기 위해서 저희 집을 방문 한 것입니다. 맛난 음식도 대접을 받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듣던 중 어느 순간에 집 사람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던 중 두 사람의 곁을 지나다가 필자의 귀가 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어느 날 남편 집사님이 같은 교회 성도님 가정의 일을 하고 돌아왔는데 평소와 달리 얼굴에 화가 크게 나 있었던 것입니다. 일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 것입니다.

“여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차분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분이기에 평소에는 여간해서 화를 내는 일이 없어 말소리가 작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말소리의 톤이 평소와 달리 매우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부인 집사님을 향하여 하는 말이 ”나 목사님 만나서! 우리 교회에서 성경공부 그만 시키고 교인들 인성교육이나 시키라고 말해야겠어요!”

그러면서 들려주는 말은 이러했습니다. 성경공부 모임에 빠지지 않고 오랫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성경을 많이 아는 분인데 성경을 아는 것만큼 삶에서 말씀의 실천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행동이 같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 오래 다니고 직분이 올라가고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신앙인격도 그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가을 벌판에 황금물결로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며 익은 벼처럼 머리가 겸손하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숙여져야하는데 교회안의 직분 자들의 자세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집사님의 눈에 보이는 먼저 믿은 분들의 이런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은 잘하는데 마음은 곱지가 않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나 섬김이 없습니다. 일을 마치면 교회에서 계속 만나야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관계를 하지 않았을 때는 몰랐는데 맡은 일을 하면서 같은 교회를 섬기는 교인, 같은 믿음의 사람이 타인처럼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먼저 믿은 분이면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자기보다 교회에서 직분이 높고 오래 되었다는 것만으로 아랫사람을 부리듯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치 주인이 종을 대하듯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인을 오늘의 교회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 교회의 현실이 아닌가를 생각하며 답답한 마음을 쓸어 내려야 했습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143

프리웨이 교통사고를 당하고서 생각한 것!

지난 7 월 22일 수요일 저녁에 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Freeway에서 5 중 충돌 교통사고를 당했다. 당시의 도로는 심한 교통 체증으로 정상적인 속도를 내지 못하고 서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앞에서 20여대의 차가 멈추고 있었기에 앞 차를 따라 차를 세우고 나서 5-6 초가 지났을 때였다.

뒤에서 요란한 굉음과 함께 타고 가던 차가 심하게 흔들림과 동시에 그 충격으로 타고 있던 차가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에서 앞으로 밀려가 앞 차의 뒤 범퍼를 밀게 되었다. 사고 후 뒤를 돌아보니 3대의 차가 뒤에서 엉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당시 가고 있던 길은 6개의 차선이 있는 다이아몬드길 옆길로 일명 fast lane이라 불리는 1차선 도로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가 났어도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좌우로는 차들이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신고를 했는지 사고가 난후 10 분 쯤 지났을 때 Highway Patrol 두 대가 달려와 Free way 전체를 막고서 사고 차량 5 대를 Local 안전한 길로 인도한 후 각 차의 운전자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

5-6 명의 Highway patrol 대원이 사고 수습을 시작하였다. 각 차의 운전자에게 면허증과 보험증서 그리고 차량 등록증을 수거한 후 다른 경관들은 각 차의 운전자들에게 사고 경위를 청취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할 일을 경찰이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까지 각 차의 운전자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 동안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앞차 운전을 하던 여자 분에게 다가가 안부를 물을 수 있었고, 내 뒤를 받은 차의 운전자는 필자에게 다가와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20여 분간의 기초 조사를 하고나서 우리에게 수거해간 서류를 돌려주면서 1번 차와 2 번차는(필자가 타고 있던 차가 2 번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집으로 가라고 해서 현장을 떠날 수 있었다.

나머지 3 대는 추가 조사를 하여야 한다며 계속해서 조사를 하는 것을 보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길은 지난 30여 년간 거의 매일 어떤 때는 하루에도 두 세 번씩 오고 가던 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고가 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사고를 당하고 나서야 그동안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40여년을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교통사고를 여러 번 경험했지만 이번과 같이 고속도로에서의 연쇄 충돌 사고는 처음이었다. 일반 교통사고의 경우는 사고당한 차의 운전자간에 보험증서와 운전면허 그리고 차량 등록증과 전화번호만을 주고받았지만 이번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부터 모든 과정을 경찰이 대신한 것이다. 미국을 자동차 천국의 나라라고 말하는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사고를 당한 우리는 서로의 정보를 교환할 필요도 없었다. 경찰은 말하길 각 보험회사에 사고 보고를 하면 보험회사는 Highway patrol에 사고 보고서를 요청하기에 절차에 따라 조사 보고서를 보험사로 통보하겠다는 것이었다.

사고 후 운전자 간에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시시비비를 가릴 법도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당신 때문에 사고가 났다며 화를 내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한 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서로 간에 몸은 괜찮은지 안부를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는 미국에서의 교통사고 후 다 같이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사고의 경우는 연쇄 충돌 사고이기에 앞으로의 추이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고가 나고 2 주일 만에 이 같은 염려와 걱정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후속 조치는 보험사가 완벽하게 처리를 담당하고 차 수리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충분하게 보상 받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30년간 한 회사의 자동차 보험을 들어오면서 약간의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무사고 운전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보험료가 생각한 것처럼 저렴하거나 할인 혜택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불하지 않아도 될 것을 공연한 곳에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고로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잘못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만일 사고 당시 자동차보험이 없었다면 지금쯤 큰 염려와 고민으로 밤잠을 설치며 고생을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당하고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크게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삶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 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혜로운 자 같아도 잠시 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지키시고 인도하신 주님의 선하신 이끄심이 앞으로도 함께 하실 것이기에 매일 매 순간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삶을 오늘도 기쁨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상기 목사

크피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123

어떻게 해야 주의 일을 잘 할 수 있을까요?

20여 년 동안 한 지역에서 알고 지내는 여자 집사님이 있습니다. 이혼을 하고서 어린 두 아들과 힘겹게 살아가는 분이십니다. 오랫동안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자로 봉사하고 계십니다. 평소에는 서로 지나칠 때 목례만 할 정도였는데 어느 날 필자에게 정중하게 다가와 인사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 내가 어떻게 해야 주의 일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집사님은 평소에 말이 별로 없으십니다. 자신의 말도 하지 않지만 남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 저희 집을 방문할 때마다 집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만 한 번도 저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정을 하고서 용기 내어 필자에게 말을 한 것입니다.

평소와 달리 마음에 담아둔 생각을 거침없이 말로 표현하는 것을 보고서 듣고 있던 저는 약간 놀랬습니다. 그렇게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분 인줄 몰랐었기 때문입니다. 늘 조용한 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집사님을 볼 때마다 힘든 삶 때문인지 얼굴에는 항상 수심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별로 웃는 얼굴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 분을 대할 때마다 삶이 얼마나 힘들면 저렇게 항상 풀이 죽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잘 양육하여 큰 아들은 결혼을 해 가정을 이뤘습니다. 이제는 제한된 삶의 틀을 벗어나 큰일을 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남들처럼 주의 일에 크게 충성하지 못함에 대하여 주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의 일에 동참하고 싶어도 그 동안은 생활 때문에, 남들처럼 오지에서 고생하시는 선교사님들을 돕기 위하여 봉사자로 떠날 때마다 함께 하지 못함에 죄스러워했던 분이셨습니다.

이제 남은 생애 동안 주님만을 위해서 무언가 큰일을 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 동안 행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목사인 제가 시키는 일이라면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실행하겠다는 다짐으로 답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분에게 작은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집사님! 주의 일은 멀리 가서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주의 일은 꼭 선교사로 나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주의 일은 지금 집사님이 잘하고 계십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두 아들이 실족하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도록 어머니로서 크게 희생하신 것이야말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큰일을 하신 겁니다.

그 동안 교회의 반주자로서 예배를 도운 것이야 말로 주님의 일을 잘 수행하신 겁니다. 주의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원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무시하거나 등한히 하고 다른 일에 매달린다면 잘못하는 것입니다.

건강을 돌보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어린 아이가 배가 고파서 울고 있을 때 허기진 아이의 배를 채우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병든 자녀를 돌보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이웃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반대로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치는 것은 주님을 화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 노상에서 죽게 되었을 때 제사장이 그를 보고 지나갔습니다. 누구보다도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할 사람이 외면한 것입니다. 레위인도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사라마리인은 강도만난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었습니다.

자기가 타던 짐승에게 강도를 태우고 주막에 데리고 갔습니다. 비용을 담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세 사람 중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할 때 너도 가서 이같이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에 대해서 잘못 알고 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의 말을 듣고 있던 집사님이 말합니다. 목사님! 그렇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이들에게 울타리가 되어주고 저들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말이지요! 알겠습니다. 멀리 가서 주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가까운 곳에서 충성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29절에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질문할 때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그래서 바르게 믿는 사람은 소금과 빛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