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0일은 결혼 40주년 기념일이다. 로스앤젤레스 중심에 있는 동양선교회당에서 1975년에 임동선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한 것이다. 주례 목사님과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약속한 것이 있었다. 결혼기념 10주기를 단위로 매10년 마다 주례 목사님을 모시고 식사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에 온지 2년이 채 되지 아니했기에 당시의 형편으로 결혼식을 치를 마음의 여유도 없었지만 결혼식 비용도 걱정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런 사정을 아시는 임동선 목사님과 사모님이 강권하시어 결혼식 준비를 해 주시므로 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서 생각하니 주례 목사님에게 사례비도 드리지 못했고, 교회 앞에 변변한 감사헌금도 드리지 못한 일이 부끄러움으로 기억이 되는 것이다.
그 은혜를 잊지 못하는 마음에 처음 10주년 기념 때에는 기억을 살려서 주례 목사님과 사모님을 식당으로 초대해 감사의 자리를 마련했었다. 그러나 이후 지금까지 그 때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90이 넘으신 주례 목사님이 아직도 생존해 계신데 나의 게으름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참으로 세월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때는 생각지도 못한 먼 훗날의 일이 벌써 눈앞에 40주년을 맞이하다니, 앞만 보고 달려온 그 동안의 이민 목회자의 길을 돌아보니 지난 세월이 정말로 꿈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기념일에 대한 추억이 내게는 별로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까지 결혼기념일 행사를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집 사람에게 정말로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수일 전 집 사람의 몇 안 되는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받고나서 전화 받은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친구가 금번에 결혼 40주년 기념으로 부부가 한국 여행을 가는데 자녀들이 경비를 부담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친구는 매년 결혼기념일 마다 여행을 한다는 것이었다.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화살처럼 날아와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민교회 목회자로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해 준 것이 너무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집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어린 시절이었다. 같은 지역에 살면서 친구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청년시절에 불치병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으로 치료를 받으러 오게 되었던 것이다. 73년부터 74년까지 UCLA대학병원 혈액학 주임교수 Dr. Nicolas Costea 로부터 치료를 받고 완치 진단을 받은 후, 당시 Los Angeles 시장 Tom Bradley의 도움으로 집사람이 미국에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소유한 비자는 방문 비자였기에 친구를 초청할 수가 없었는데 Bradley 시장이 당시 주한 미국 대사에게 친서를 보내어 이 군의 친구를 미국에 보내 줄 것을 요청해서 오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집 사람이 미국에 온지 두 달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혼 후 1 년 만에 현재 39살인 첫 딸을 낳았고 뒤이어 37살의 둘째 딸을 낳았으며 둘째로부터 10년 후 셋째인 아들을 낳은 것이다. 두 딸들은 지금 각각 3명의 자녀들을 가지고 있으며 아들은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결혼 기념 40주년을 돌아보니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 만입으로도 다 감사치 못할 정도가 된 것이다. 한 가지 안쓰러운 것은 이제는 집 사람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도 있고 함께 여행을 할 수도 있는 여유가 생겼지만 집 사람의 건강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 때문이다. 집 사람은 그 동안 몇 번의 생사의 위기를 벗어나 이제는 놀라울 정도로 건강해졌다.
하지만 아직 집을 떠나는 여행을 할 정도는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말을 해 보았다. 여보! 한국에 가본지가 너무 오래지 않았소! 이 정도의 건강이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번 가을에는 고국의 가족들을 만나러 가지 않겠소! 아내는 이렇게 말을 했다. “아직은 자신이 없어요”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렇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부인을 향하여 입으로는 말하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여보! 아무래도 좋으니 지금처럼 매일 더 건강하여 내년 기념일에는 그 동안 못한 결혼기념 여행을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멋진 여행을 해 봅시다”
지난 해 연말 알라스카에 살고 있는 둘째 딸 가족이 2주간 동안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이었습니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딸과 사위는 돌아갈 준비를 위해서 짐 가방을 챙기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밝고 잘 놀았던 세 명의 손자·녀 중 막내인 5살짜리 손녀의 얼굴에 수심이 쌓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딸에게 살며시 그 이유를 살며시 물어야만 했습니다. 이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별다른 생각이 없이 아마도 추운 곳에서 살다가 왔기에 따뜻한 캘리포니아의 날씨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잘 놀다가도 가족이 밖으로 나갈 때는 먼저 달려 나가던 손녀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 반대였던 것입니다. 자동차에 짐 가방을 하나 둘 싣기 시작하자 결국 어린 손녀는 소리 내어 울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엄마 아빠에게는 언니와 오빠가 있으니까 자기는 이곳에 남아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남기고 어떻게 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 몰랐던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다른 손자·녀들에 비하여 특별히 잘 해 준 것도 없었고 더구나 두세 살 위인 언니나 오빠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5살 밖에 되지 아니하는 어린 막내 손녀가 언니 오빠도 생각지 못한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토록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놀라움과 함께 깊은 감동으로 우리 내외를 가슴 뭉클하게 한 것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면 평소에 더 살갑게 대해주고 더 잘 해주었을 것을 하는 마음이 스쳐가기도 했던 것입니다.
딸과 언니 오빠가 울고 있는 어린 동생을 향하여 그래서는 안 된다며 이렇게 권하고 있었습니다. 3살 위인 언니가 먼저 말하길 “네가 이곳에서 할아버지와 살면 오래지 않아서 너는 뚱보가 될 거야! 왜인지 알아? 할아버지 할머니가 네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네 몸 생각은 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다 사다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도 좋겠느냐고 다짐을 하지만 어린 손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딸이 말을 했습니다. 이번에 올라가면 네가 유치원에도 가야하고 엄마 아빠가 너를 두고 가면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자, 엄마 아빠에게는 언니 오빠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가족과 함께 갔다가 여름방학이 되면 다시 보낼 터이니 가자고 권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린 손녀는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있다가 여름 방학이 되면 엄마 아빠 언니 오빠를 보러 올라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엄마가 말하길 그러면 이번 여름 방학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알라스카에 오시게 하겠다고 타협을 하지만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온 가족이 어린 손녀를 향하여 달래도 보고 설득도 했지만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자동차를 타고 집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울고 있는 손녀를 강제로 차에 태울 때에 어린 손녀는 몸부림을 치며 큰 소리로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린 손녀가 그토록 서럽게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아야 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우리도 울어야 했고 다른 가족들의 눈시울도 붉어지게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차가 멀리 떠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리 내외는 자리에 선채로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이 무엇임을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자손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세상 어느 누가 우리를 향하여 그토록 서럽게 울어줄 사람이 있단 말인가? 세상 어느 누가 우리의 고독하고 외로운 삶에 대해서 저렇게 마음 아파하고 염려하며 근심하여 돕기를 자원한단 말인가? 우리는 생각하길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자녀들이 부모에게 대하여 무관심한 것에 서운함을 가진다는 말을 가끔씩 듣고 있는데, 한 치 건너 두 치라고 우리도 미처 생각지 못하는 어린 손녀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토록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 가운데 하나인 자손의 복이 이렇게 아름답고 귀한 것임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건강하고 지혜로우며 착한 성품을 손자·녀들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하나님을 높이 찬양합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1-08 00:29:462020-01-08 00:29:46감동의 눈물을 선물한 어린 손녀
20여 년 전 어느 날 이었습니다. 다급한 목소리로 C 권사님이 전화 했습니다. 십여 년간 한 교회를 섬겨오면서 권사님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권사님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직감적으로 건강하던 딸이 어려운 중병에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권사님은 아들 하나와 두 딸을 두고 있습니다.
두 딸 모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딸 가정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큰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딸이 IRS로부터 강도 높은 세무 감사를 받게 된 것입니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교회에 헌금한 명세서를 가짜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액수에 해당하는 금액을 현찰로 헌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권사님의 딸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교회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것을 알기에 당연히 어머니의 청을 목사님이 거절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무리한 부탁인줄 알면서도 어머니를 통하여 그런 요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가지만 해도 교회를 섬기면서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음 같아선 도와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재정부장 장로님과 상의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곧 바로 장로님께 전화 했습니다. 재정부장 장로님의 대답은 가짜 헌금증명서를 IRS 앞으로 발급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액수도 작은 것이 아니고 더구나 세무 감사에 걸린 상태에서 위조 서류를 발급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요! 그렇다고 C 권사님에게 “나는 해 주고 싶은데 재정부에서 거절하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권사님에게 전화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권사님의 요청을 도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재정부에 이런 내용을 요청해도 허락 받기가 어려울 것 같아 재정부장 장로님께 말을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내용의 전화를 드려서 정말로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권사님은 매우 섭섭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화로 다시 애끓는 사정을 하셨습니다. 한번만 도와달라고 간청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이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지만 이런 내용으로는 도움을 드릴 수가 없기에 끝까지 권사님의 요청을 거절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필자의 마음도 편치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다음 주일부터 권사님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토록 교회를 사랑하고 목사님을 좋아하셨던 권사님이신데 왜 교회를 말없이 떠나 가셨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교회를 떠나도 권사님은 끝까지 지킬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교회를 사랑하셨던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을 알지 못하는 친구 권사님들과 교인들은 목사인 저를 향하여 권사님 댁을 찾아가 모셔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권사님에게 무슨 잘못이나 섭섭한 일을 하셨기에 그렇게 충성하시던 권사님이 단번에 돌아서셨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권사님에게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기를 당한 사랑하는 딸을 살려 달라”는 권사님의 처음이자 마지막 간절한 청을 당연히 들어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토록 믿었던 목사님에게 거절당하므로 크게 실망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내용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습니다. 알고 싶어 하는 교인들에게 설명할 수 없어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대화를 나누었던 재정부장 장로님과 필자만 알고서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 친하던 교우님들이 권사님에게 전화를 해도 C 권사님은 교회를 떠난 이유에 대해서 끝까지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척의 거리에서 20여 년째 살아가면서 아직도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지 않고 마치 원수 같은 타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때 이후로 굳게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다시 이런 요청이 있더라도 그때처럼 이 원칙을 지키기로 한 것입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20-01-07 02:28:392020-01-07 02:28:39목사님! 내 딸을 살려 주세요!
결혼 40주년을 기념하면서!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5월10일은 결혼 40주년 기념일이다. 로스앤젤레스 중심에 있는 동양선교회당에서 1975년에 임동선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한 것이다. 주례 목사님과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약속한 것이 있었다. 결혼기념 10주기를 단위로 매10년 마다 주례 목사님을 모시고 식사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에 온지 2년이 채 되지 아니했기에 당시의 형편으로 결혼식을 치를 마음의 여유도 없었지만 결혼식 비용도 걱정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런 사정을 아시는 임동선 목사님과 사모님이 강권하시어 결혼식 준비를 해 주시므로 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서 생각하니 주례 목사님에게 사례비도 드리지 못했고, 교회 앞에 변변한 감사헌금도 드리지 못한 일이 부끄러움으로 기억이 되는 것이다.
그 은혜를 잊지 못하는 마음에 처음 10주년 기념 때에는 기억을 살려서 주례 목사님과 사모님을 식당으로 초대해 감사의 자리를 마련했었다. 그러나 이후 지금까지 그 때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90이 넘으신 주례 목사님이 아직도 생존해 계신데 나의 게으름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참으로 세월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때는 생각지도 못한 먼 훗날의 일이 벌써 눈앞에 40주년을 맞이하다니, 앞만 보고 달려온 그 동안의 이민 목회자의 길을 돌아보니 지난 세월이 정말로 꿈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기념일에 대한 추억이 내게는 별로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까지 결혼기념일 행사를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집 사람에게 정말로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수일 전 집 사람의 몇 안 되는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받고나서 전화 받은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친구가 금번에 결혼 40주년 기념으로 부부가 한국 여행을 가는데 자녀들이 경비를 부담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친구는 매년 결혼기념일 마다 여행을 한다는 것이었다.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화살처럼 날아와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민교회 목회자로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해 준 것이 너무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집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어린 시절이었다. 같은 지역에 살면서 친구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청년시절에 불치병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으로 치료를 받으러 오게 되었던 것이다. 73년부터 74년까지 UCLA대학병원 혈액학 주임교수 Dr. Nicolas Costea 로부터 치료를 받고 완치 진단을 받은 후, 당시 Los Angeles 시장 Tom Bradley의 도움으로 집사람이 미국에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소유한 비자는 방문 비자였기에 친구를 초청할 수가 없었는데 Bradley 시장이 당시 주한 미국 대사에게 친서를 보내어 이 군의 친구를 미국에 보내 줄 것을 요청해서 오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집 사람이 미국에 온지 두 달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혼 후 1 년 만에 현재 39살인 첫 딸을 낳았고 뒤이어 37살의 둘째 딸을 낳았으며 둘째로부터 10년 후 셋째인 아들을 낳은 것이다. 두 딸들은 지금 각각 3명의 자녀들을 가지고 있으며 아들은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결혼 기념 40주년을 돌아보니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 만입으로도 다 감사치 못할 정도가 된 것이다. 한 가지 안쓰러운 것은 이제는 집 사람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도 있고 함께 여행을 할 수도 있는 여유가 생겼지만 집 사람의 건강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 때문이다. 집 사람은 그 동안 몇 번의 생사의 위기를 벗어나 이제는 놀라울 정도로 건강해졌다.
하지만 아직 집을 떠나는 여행을 할 정도는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말을 해 보았다. 여보! 한국에 가본지가 너무 오래지 않았소! 이 정도의 건강이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번 가을에는 고국의 가족들을 만나러 가지 않겠소! 아내는 이렇게 말을 했다. “아직은 자신이 없어요”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렇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부인을 향하여 입으로는 말하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여보! 아무래도 좋으니 지금처럼 매일 더 건강하여 내년 기념일에는 그 동안 못한 결혼기념 여행을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멋진 여행을 해 봅시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2791
감동의 눈물을 선물한 어린 손녀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지난 해 연말 알라스카에 살고 있는 둘째 딸 가족이 2주간 동안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이었습니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딸과 사위는 돌아갈 준비를 위해서 짐 가방을 챙기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밝고 잘 놀았던 세 명의 손자·녀 중 막내인 5살짜리 손녀의 얼굴에 수심이 쌓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딸에게 살며시 그 이유를 살며시 물어야만 했습니다. 이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별다른 생각이 없이 아마도 추운 곳에서 살다가 왔기에 따뜻한 캘리포니아의 날씨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잘 놀다가도 가족이 밖으로 나갈 때는 먼저 달려 나가던 손녀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 반대였던 것입니다. 자동차에 짐 가방을 하나 둘 싣기 시작하자 결국 어린 손녀는 소리 내어 울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엄마 아빠에게는 언니와 오빠가 있으니까 자기는 이곳에 남아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남기고 어떻게 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 몰랐던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다른 손자·녀들에 비하여 특별히 잘 해 준 것도 없었고 더구나 두세 살 위인 언니나 오빠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5살 밖에 되지 아니하는 어린 막내 손녀가 언니 오빠도 생각지 못한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토록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놀라움과 함께 깊은 감동으로 우리 내외를 가슴 뭉클하게 한 것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면 평소에 더 살갑게 대해주고 더 잘 해주었을 것을 하는 마음이 스쳐가기도 했던 것입니다.
딸과 언니 오빠가 울고 있는 어린 동생을 향하여 그래서는 안 된다며 이렇게 권하고 있었습니다. 3살 위인 언니가 먼저 말하길 “네가 이곳에서 할아버지와 살면 오래지 않아서 너는 뚱보가 될 거야! 왜인지 알아? 할아버지 할머니가 네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네 몸 생각은 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다 사다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도 좋겠느냐고 다짐을 하지만 어린 손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딸이 말을 했습니다. 이번에 올라가면 네가 유치원에도 가야하고 엄마 아빠가 너를 두고 가면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자, 엄마 아빠에게는 언니 오빠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가족과 함께 갔다가 여름방학이 되면 다시 보낼 터이니 가자고 권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린 손녀는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있다가 여름 방학이 되면 엄마 아빠 언니 오빠를 보러 올라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엄마가 말하길 그러면 이번 여름 방학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알라스카에 오시게 하겠다고 타협을 하지만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온 가족이 어린 손녀를 향하여 달래도 보고 설득도 했지만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자동차를 타고 집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울고 있는 손녀를 강제로 차에 태울 때에 어린 손녀는 몸부림을 치며 큰 소리로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린 손녀가 그토록 서럽게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아야 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우리도 울어야 했고 다른 가족들의 눈시울도 붉어지게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차가 멀리 떠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리 내외는 자리에 선채로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이 무엇임을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자손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세상 어느 누가 우리를 향하여 그토록 서럽게 울어줄 사람이 있단 말인가? 세상 어느 누가 우리의 고독하고 외로운 삶에 대해서 저렇게 마음 아파하고 염려하며 근심하여 돕기를 자원한단 말인가? 우리는 생각하길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자녀들이 부모에게 대하여 무관심한 것에 서운함을 가진다는 말을 가끔씩 듣고 있는데, 한 치 건너 두 치라고 우리도 미처 생각지 못하는 어린 손녀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토록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 가운데 하나인 자손의 복이 이렇게 아름답고 귀한 것임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건강하고 지혜로우며 착한 성품을 손자·녀들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하나님을 높이 찬양합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2722
목사님! 내 딸을 살려 주세요!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20여 년 전 어느 날 이었습니다. 다급한 목소리로 C 권사님이 전화 했습니다. 십여 년간 한 교회를 섬겨오면서 권사님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권사님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직감적으로 건강하던 딸이 어려운 중병에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권사님은 아들 하나와 두 딸을 두고 있습니다.
두 딸 모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딸 가정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큰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딸이 IRS로부터 강도 높은 세무 감사를 받게 된 것입니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교회에 헌금한 명세서를 가짜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액수에 해당하는 금액을 현찰로 헌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권사님의 딸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교회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것을 알기에 당연히 어머니의 청을 목사님이 거절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무리한 부탁인줄 알면서도 어머니를 통하여 그런 요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가지만 해도 교회를 섬기면서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음 같아선 도와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재정부장 장로님과 상의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곧 바로 장로님께 전화 했습니다. 재정부장 장로님의 대답은 가짜 헌금증명서를 IRS 앞으로 발급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액수도 작은 것이 아니고 더구나 세무 감사에 걸린 상태에서 위조 서류를 발급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요! 그렇다고 C 권사님에게 “나는 해 주고 싶은데 재정부에서 거절하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권사님에게 전화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권사님의 요청을 도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재정부에 이런 내용을 요청해도 허락 받기가 어려울 것 같아 재정부장 장로님께 말을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내용의 전화를 드려서 정말로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권사님은 매우 섭섭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화로 다시 애끓는 사정을 하셨습니다. 한번만 도와달라고 간청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이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지만 이런 내용으로는 도움을 드릴 수가 없기에 끝까지 권사님의 요청을 거절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필자의 마음도 편치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다음 주일부터 권사님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토록 교회를 사랑하고 목사님을 좋아하셨던 권사님이신데 왜 교회를 말없이 떠나 가셨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교회를 떠나도 권사님은 끝까지 지킬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교회를 사랑하셨던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을 알지 못하는 친구 권사님들과 교인들은 목사인 저를 향하여 권사님 댁을 찾아가 모셔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권사님에게 무슨 잘못이나 섭섭한 일을 하셨기에 그렇게 충성하시던 권사님이 단번에 돌아서셨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권사님에게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기를 당한 사랑하는 딸을 살려 달라”는 권사님의 처음이자 마지막 간절한 청을 당연히 들어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토록 믿었던 목사님에게 거절당하므로 크게 실망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내용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습니다. 알고 싶어 하는 교인들에게 설명할 수 없어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대화를 나누었던 재정부장 장로님과 필자만 알고서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 친하던 교우님들이 권사님에게 전화를 해도 C 권사님은 교회를 떠난 이유에 대해서 끝까지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척의 거리에서 20여 년째 살아가면서 아직도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지 않고 마치 원수 같은 타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때 이후로 굳게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다시 이런 요청이 있더라도 그때처럼 이 원칙을 지키기로 한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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