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 교회 목양 칼럼입니다

알라스카 여행기

알라스카 여행기<1>

지난해 7월 14일 밤 8시 비행기로 집 사람과 함께 롱비치공항을 떠나 5시간 만에 사랑하는 손자·손녀들이 살고 있는 알라스카의 앵커리지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지난 십 수 년 전에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셨던 고 최재만 집사님 가족이 알라스카 크루즈여행을 하면서 우리 부부를 초대해 함께 여행을 한 후 두 번째 방문이었습니다. 처음 앵커리지를 방문했을 때는 작은 규모의 공항에 익숙지 못했었는데 금번에는 놀랍게 변한 현대식 공항 모습에 알라스카가 빠르게 발전하는 신도시가 되고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둘째 사위가 어려운 공부를 마치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있을 때 내과의사로 3년 동안 근무하던 우리가 살고 있는 집 근처 남가주로 직장을 구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집 사람이 오랫동안 어려운 병과 싸움을 하고 있기에 전문 의료인의 도움이 항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장내과 전문의가 되고서 새로 얻은 직장이 알라스카로 정해진 것입니다. 너무 멀고 낮선 곳으로 새로운 직장을 택하여 떠나갈 때 우리 내외의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랑하는 손자·손녀들을 보고 싶을 때 마음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급할 때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이 우리 부부에게 특별한 것은 그 동안 집 사람이 비행기를 탈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무사히 사랑하는 손자·손녀들을 만날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기적이 있지만 오늘 나에게 임한 기적은 집 사람과 함께 하늘을 날아온 것입니다. 의학적으론 어려운 결정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습니다. 늦은 밤까지 어린 손자·손녀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다 늦게 잠이든 방을 새날이 밝아 들어가 보니 한 침대에 3명의 손자·손녀와 집 사람이 붙어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가로로는 네 명이 한 침대에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세로로 발끝이 침대 끝에 달린 자세로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보지 못하던 집 사람과 아이들이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할머니 몸에 손을 잡고 좁은 공간에서 행복한 잠이 든 모습을 보면서 어린 손자·손녀를 사랑하는 할머니의 사랑이 무엇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알라스카를 방문하면 아이들하고만 있다가 올거에요! 당신은 며칠 여행을 해요!”

알래스카를 방문한 둘째 날 아내의 권유로 2박 3일의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나를 위해 수고하셨으니 이번에 좋은 시간을 가지라는 권고로 현지 한국인 관광회사를 통하여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북미 최고봉인 맥킨리 산이 있는 디날리국립공원과 여름에는 해가지지 않는 다는 페어뱅크스를 방문하기로 한 것입니다. 디날리국립공원은 앵커리지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한국인 산악인 고상돈 씨의 아픈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국인 최초로 히말라야 정상을 1977년에 정복하고 미주한국일보지사 설립 10주년을 기념하면서 1978년에 LA 미주한국일보사 내 전시장에서 히말라야 사진전을 개최했었습니다. 그 때 저도 사진전에 참석해서 고상돈 씨와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1979년에 6명의 전문 산악인들로 구성된 맥킨리 산 등정단의 단장으로 참가했다가 정상을 정복하고 하산하는 길에 800미터 빙산 아래로 추락해 31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을 당한 곳입니다. 이번 여행으로 한 동안 잊고 지내던 고 고상돈 씨의 강한 인상이 기억에서 살아나는 듯 했습니다.

알라스카는 남한의 13배에 달하는 광활한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남가주는 지금 극심한 가뭄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알라스카는 풍부한 수자원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3000개의 강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물이 풍부한 곳입니다. 이번에 방문한 북미 최북단의 작은 도시 페어뱅크스(Fairbanks)는 위도선 북위 64도에 해당하는 인구 41,000명의 군사 도시로서 그곳에 우리 교포들이 600여명이나 거주하고 계셨습니다.

알라스카 여행기<2>

이번 여행을 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축복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젊어서는 어려운 병으로 생사의 갈림에서 고통당하게 하시더니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므로 지난 40여년의 삶을 놀랍게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삶을 계획하지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나를 주님은 인도자가 되시어 지금의 내가 되게 하셨습니다. 가정의 복을 주셨습니다. 자녀의 복을 주셨습니다. 손자·손녀들의 복을 주셨습니다. 교회의 복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실수 없이 복음을 전하는 종의 길을 부족하지만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특별히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여행의 복을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33년의 목회 활동 중 5번의 남미 선교여행과 두 번의 성지여행과 1번의 유럽여행 그리고 중국 및 백두산을 보게 하시고 오래 전에는 결혼주례를 받은 가정이 결혼기념 10주년을 기념하면서 자신들이 신혼여행을 다녀온 하와이로 우리 내외를 여행케 했습니다. 그리고 알라스카를 다시 여행할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니 이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라는 것을 이번에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나에게 향하신 주님의 인자하시고 사랑하시는 손길을 확인하게 된 것은 정말로 큰 기쁨이요 감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발길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곳으로 이동할 때마다 마음으로 입으로 영혼으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하심을 감사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사람의 손과 발길이 닿지 않게 하신 대 자연을 보는 알라스카는 정말로 감동의 연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한 땅의 13배에 달하는 거대한 땅에 인구는 고작 70만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중 30만이 앵커리지에 살고 있고 해변을 중심한 작은 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 넓은 지역에서 뿜어져 나오는 산소들이 지구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원시림으로 가득한 아마존을 방문했을 때 경험했던 것처럼 이곳의 공기도 충분한 산소량으로 한없이 맑고 깨끗해 신선함을 더해주었습니다. 여행 중에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에서 2박 3일의 일정으로 지금 같은 무리한 여행을 했다면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만 자동차로 첫날에는 14시간을 여행 했는데도 피곤치가 않았던 것입니다.

특별히 페어뱅크스는 지구상에서 밤과 낮의 길이가 가장 길고 짧은 곳입니다. 어려서 배운 기억으로 6개월은 밤이고 6개월은 낮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임을 이번에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지금 그곳은 밤이 없습니다. 새벽 1시 2시에도 마치 비 오는 날 해가 가린 날씨처럼 창문을 가리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환한 상태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었던 내게는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방문에서 뉴스로만 듣던 알라스카 송유관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나서 우리를 미국에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처럼 미국은 나약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라스카 송유관은 1971년에 시작하여 1974년에 끝이 났습니다. 북해 바다에서 기름을 추출해 800마일 떨어져 있는 항구도시로 송유관을 통하여 배에 실어서 본토에 있는 정유공장으로 보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라스카는 기름 값이 싸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남가주보다 더 비쌉니다. 미국에서 기름 값이 가장 비싼 곳은 기름이 나는 북극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은 대단한 나라입니다. 위대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미국의 정치가들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는 지구상에서 미국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오일 파동이 있을 것을 알고 대비한 것입니다. 송유관에 사용된 파이프를 만들 수 있는 곳은 일본 밖에 없어서 일본이 제조한 것으로 공사를 마치고 그 기름으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역사를 이루지 못했으면 지금의 우리는 심각한 오일 문제로 큰 혼돈에서 방황했을 것입니다.

이상기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2569

L 집사님의 아름다운 우정!

L 집사님은 16년 만에 부인과 함께 지난 10월초 한 달간의 일정으로 꿈에 그리던 고향 땅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수년 전 장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고국을 방문하지 못했던 것은 서류미비자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한 때는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활발한 사업과 사립학교 설립자로 활동을 하다가 학교 교사 건물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부도를 맞아 그동안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일구어오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빈손으로 사랑하는 네 명의 자녀와 함께 40대 중반의 나이에 미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지난 16년 동안의 삶은 초창기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그러했듯이 빈손으로 고국을 떠나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서 격어야만 했던 어려움을 온 몸으로 체험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타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인 줄 알았다면 미국행을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만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앞만 보고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이민 생활 16년 동안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들이 10여 년 전 12살 되던 해에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어려운 병으로 고생하다가 부모의 곁을 떠나 큰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만 이후 두 딸이 가정을 이루어 외손자 둘과 외손녀 하나를 얻어 위로와 기쁨이 되셨습니다. 이에 더하여 큰 딸 가정을 통하여 그토록 간절하게 소원하던 영주권을 받으신 것입니다. 서류 미비자로 살아가는 동안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엄두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계획 없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주권을 받은 후 끝이 보이지 아니하던 어둠의 긴 터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은 새 삶의 용기와 희망이 생겼습니다.

지난 16년 동안 식당 주방에서 부인이 일을 해오면서 음식을 만드는 것에 자신이 생긴 것입니다. 이제는 종업원으로서가 아니라 식당의 주인으로 일을 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마침 일하는 한인 타운의 유명한 큰 쇼핑센터 건물 내 음식 백화점의 여러 식당중 하나가 매물로 나왔습니다. 인수 가격은 10만 불이었습니다.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럴만한 큰돈을 만들 방법이 없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먼저 이민 와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학교 동창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거절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근심을 반복하다가 어렵게 친구를 찾아가 입을 열었습니다.

친구는 생각해보자는 말도 하지 아니하고 즉석에서 도와주겠다고 선뜻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식당을 인수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L 집사님은 며칠 동안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식당을 인수하면 그동안 주방에서 일 해온 아내의 실력으로 성공할 자신이 있었지만 만에 하나 실패할 경우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럴 경우 친구도 잃고 돈도 잃을 것 같아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다가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매물로 나왔던 식당은 15만 불에 다른 사람에게 팔렸습니다. 불과 한 달 만에 5만 불이나 비싼 값에 팔린 것입니다. 아차 하는 생각도 했지만 후회는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던 큰 딸이 아버지를 향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지난 16년 동안 미국에서 살아온 것이 실패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에게도 어려울 때 큰 도움을 주는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을 보고서 아버지가 이 땅에서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국으로 떠나기 수일 전 L 집사님을 통하여 이 말을 들으면서 참으로 좋은 친구를 가지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과 같이 각박한 이민사회에서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100%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조건 없이 10만 불의 큰돈을 빌려주겠다는 친구도 훌륭하지만, 만일을 생각해서 그 돈을 사랑하는 친구에게 도움을 구하다가 다시 거절한 L 집사님의 결정도 이에 못지않기 때문입니다.

부인은 남편의 친구가 식당 인수 자금을 빌려 주겠다는 말에 며칠간 꿈에 부풀었다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거절한 남편의 행동에 대해서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아 힘들어 했지만 깊은 고민 끝에 결정한 남편의 뜻을 존중해주고 가벼운 마음으로 고국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가뭄에 단비와 같은 이 아름다운 우정이 우리에게 삶의 동력으로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L 집사님과 그의 좋은 친구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이 늘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2504

34년 동안 한결같은 K 권사님

다가오는 1월 4일은 필자가 섬기는 평강교회가 설립 34주년을 맞이하는 기념 주일입니다. 금번 기념일이 특별한 것은 한 달 전 주님께서 기도 응답에 대한 축복으로 예배당을 허락하셔서 29년을 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려 오는 동안 건물에 대한 페이-오프를 하고서 건물 소유권을 은행으로부터 돌려받았기 때문입니다.

길고도 지루한 세월이긴 했지만 막상 돌이켜 생각하니 한 순간에 지난 것 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필자가 소개하길 원하는 분은 교회 설립일 부터 지금까지 교회를 섬겨 오신 K 권사님입니다. 권사님이 필자와 우리 교회에 특별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34년 동안 변함없이 강단에 설교자를 위해 물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한두 번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 년 아니 수년을 계속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 권사님은 설교자를 위해서 강단에 물을 바치시는 것을 교회 설립 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계신 것입니다.

내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그 일을 계속 하시겠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하시어 다른 교우님들은 그 일을 생각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권사님이 한 주간에 강단에 바치시는 물은 주일 낮 예배와 오후 예배 그리고 수요 예배와 금요 기도회 때입니다. 지금까지 권사님을 통하여 강단에서 마셔온 차의 숫자를 세어본 적이 있습니다. 약 7,000회가 넘었습니다. 주님은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잔을 대접한 상까지 잊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는데 권사님이 받으실 상급이 과연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일까에 대해서 생각을 해봅니다.

권사님이 강단에 물을 바치는 것은 단순한 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늘 같은 잔에 바치는 것으로 생각이 될 수 있지만 받는 필자는 매 번 맛이 다른 차가 강단에 오르는 것을 경험합니다. 한 번은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강단에 물을 바치기 위해서 설교자의 건강을 살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이런 내용으로 기도 하십니다. “이번 주일에는 어떤 것으로 강단에 올려 드릴까요?” 그렇기 때문에 한 번도 같은 내용의 물이 연속적으로 강단에 올라오지 않는 것입니다. 매번 다른 종류의 차가 오르는 것입니다. 그 날의 기후와 설교자의 컨디션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러다보니 K 권사님의 손길을 통하여 마셔본 차의 종류도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어디 특별한 차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그것을 구해다가 강단에 올리시는 겁니다. 여름에는 차 잔에 얼음을 가득 넣어 올리시어 설교하다가 땀이 날 때는 시원한 찻잔을 잡기만 해도 큰 힘이 되는가하면 추운 날에는 무겁고 투박한 잔에 뜨거운 차를 준비해 잔에서 올라오는 따사한 온기를 느끼며 설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권사님의 사랑과 정성이 설교자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가 모릅니다.

그런데 요즘 K 권사님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그렇게 늘 건강하시고 항상 변함이 없으실 것 같으셨던 권사님의 발걸음이 예전과 같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80세 중반에 들어서시는 권사님이 얼마 전부터는 주일 오후나 수요 예배 시 아래 강단에 물을 바치시기 위해서 올라오실 때 힘들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위의 강단은 오르는 계단이 낮은데 반하여 아래 강단은 권사님이 오르시기에 이제는 높기 때문입니다. 이를 아는 필자는 행여나 넘어지실까 조심이 되어 권사님이 물 잔을 가지고 아래 강단으로 나오실 때는 계단 아래로 다가가 정성스레 준비하신 차를 받아가지고 강단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만일 K 권사였다면 나도 34년 동안 변함없이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 나만 한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있지 않은가?” 불평도 할 수 있고 이제는 그만 하겠다고 선언할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봉사하시면서 좋은 때만 있으셨겠습니까? 다른 교우들에게 시기의 대상이 될 때도 있고, 스스로 시험이 될 때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필자가 K 권사님을 귀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시험에도 중단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권사님이 교회를 오실 때에는 늘 두 개의 가방을 양손에 들고 오십니다. 물론 하나의 가방에는 집에서 정성으로 준비해 담아오는 보온병과 잔을 바치는 작은 쟁반 그리고 흰색이 아닌 예쁜 색깔의 냅킨이 담겨져 있습니다.

권사님!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셔서 지금처럼 권사님의 뜨거운 정성과 사랑의 섬김을 통하여 큰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2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