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필자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나눠보지 못했기에 너무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필자가 이민 교회를 섬겨오면서 가장 의지가 되고 많은 대화의 시간을 나눴던 분 가운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유상민 목사님(늘사랑한인교회를 섬기셨던)이 계셨습니다. 세상을 떠나신 지도 다음 달이면 3주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필자는 한인 타운에서 떨어진 외곽에, 유 목사님은 한인 타운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 목사님 댁은 필자를 비롯한 수명의 동역자들에게 마치 고향마을 사랑방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언제나 목사님 댁의 문은 열려 있었고 방문할 때마다 따뜻한 사랑의 대접을 받으며편안하게 쉬어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남을 섬기길 좋아하셨습니다. 함께 식당에 가면 언제나 식사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접할 기회를 주지 않으시는 겁니다. 필자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유 목사님과 같은 분을 만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은 정말로 주님의 본을 받아 이웃을 섬기길 좋아하시며 행복해 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유 목사님은 유학생 비자로 미국에 오셔서 오래 동안 서류 미비자로 사시며 목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0여년 동안 고국 방문도 못하셨습니다. 목회 초창기는 힘든 노동을 하시면서 어렵게 교회를 섬기셔야 했습니다. 영주권이 없어 당하시는 어려움에 얼마나 한이 맺히셨으면 어느 날 필자에게 푸념과도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이 목사님! 내가 영주권을 받으면 목사님을 유럽 여행을 시켜드리겠습니다”그 말이 실현 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또 영주권을 손에 쥐신다 하시더라도 유럽 여행을 하는 것은 작은 경비가 아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은 것입니다.
그로부터 15-16 년 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꿈에도 그리던 영주권을 받게 되셨습니다. 영주권 인터뷰를 하러 가시기 수일 전 유 목사님은 기억에서 잊혀진 유럽 여행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 이제 약속을 지켜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영주권을 받으면 이 목사님 부부와 우리 부부가 함께 유럽 여행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지난 20여 년 동안 해외여행을 해보지 못했으니 필자가 원하는 날짜와 지역을 선택하여 여행사에 예약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유 목사님의 이 같은 부탁을 서너 차례 받았지만 곧 바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말씀을 하시기에 이번에는 필자가 정색을 하고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유 목사님! 가까운 여행도 아니고 유럽 여행을 10여일 이상, 더구나 4명이 여행하려면 적어도 1만 달러 정도 돈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그 돈을 감당하시려고 하십니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조용하게 말씀을 드리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래 전의 빛 바랜 약속을 말씀하시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감사드립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유 목사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딸에게 여행비 1만 달러의 돈을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칼 같이 지키시는 목사님이셨습니다. 어떠한 손해와 아픔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키시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 유 목사님이 내 곁에 계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복이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필자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나눠보지 못했기에 너무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함께 귀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원하시던 영주권을 받으시고 이제는 마음껏 주님을 위해서 크게 사역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얼마나 자비량 이민 목회가 힘이 드셨으면 몸이 그토록 망가지셨는지 60을 갓 넘기신 나이에 지병으로 그토록 사랑하시던 교회와 가족을 두고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동역자들에게 크게 존경 받으시며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유 목사님이 주님께 가신지 3 주년이 다가오는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계신 것처럼 따뜻한 온정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가정을 가진 부부들이 다 싸움을 합니다. 세상에 싸우지 아니하는 부부는 한가정 한 사람도 없습니다.
20여 년 전, 매주 금요일 마다 학생회 성경 공부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야고보 4 장 1 절“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는 말씀을 중심으로 모임을 마치고 난 후에 한 여학생으로부터 뜻밖에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도 부부 싸움을 하시나요?”
그 여학생의 얼굴에는 웃음이 늘 없었습니다. 매우 힘들어 보였습니다. 오래 동안 난치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통 당하시는 어머니 때문 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학생의 어머니는 재량불량성빈혈이라고 하는 난치병으로 병마와 싸우고 계셨습니다. 그 학생은 아래로는 중학교에 다니는 두 명의 여 동생이 있었으며 아버지는 집에서 자동차로 6-7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먼 곳에서 장사를 하셨기에 한 달에 서너 번 밖에 뵐 수가 없었습니다.
대학에 갓 들어갔으므로 부모님에게 지속적인 도움과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에 가사를 맡으며 동생들까지 책임을 져야하고 어머니의 병 수발도 들어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시기 전에는 단란한 가정이입니다. 그러나 치료가 되지아니하는 난치병으로 집안에 웃음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부부사이도 예외가 아닌 것입니다. 어머니의 병세가 깊어가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멀어지고 있었나 봅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들의 갈등으로 가정이 위기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누구와 상의 할 곳도 없습니다.
도움을 받을 곳도 없었습니다. 아무에게나 집안일을 들어 내놓고 이야기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의 깊은 상처를 가지고 불안해 하며 어두운 삶을 근심 속에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나는 위기의식을 느껴야 했습니다. 나의 생각 없이 던지는 잘못된 한 마디 말 때문에 이 여학생이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으며 반대로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 주기로 한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이지만 예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도 집 사람과 싸움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로 심각하게 싸움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말할 수 없었던 내용들을 말해 주었습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가정을 가진 부부들이 다 싸움을 합니다. 세상에 싸우지 아니하는 부부는 한가정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무엇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까?
부부들에게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면 부부의 인연으로 지금의 부부와 사시길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왜 부부는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했지만 싸우며 삽니까? 이유는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싸움을 하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만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싸움을 해도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지켜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동에 대한 주님의 심판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도 인내 할 수 있고 인내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부부가 금실이 좋아도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며 생각나는 대로 살 수 있습니까? 목사님도 부부 싸움을 하시느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솔직한 답변을 들은 학생은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님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 여학생의 부모님들과 가정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길 시작했었던 것입니다.
인사를 해도 눈을 주지 않고 악수도 거절하는 것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부인은 생사의 귀로에 있는데 남편인 목사가 쌍꺼풀 수술을 한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아내는 말기 암 환자로 12년째 투병 중에 있습니다. 유방암 2 기 진단을 받고 수술 받은 것은 지금으로 부터 12년 6개월 전이었습니다. 수술을 하고 4년 반 만에 말기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담당의사는 통계 수치를 인용하여 2년 이내에 명을 달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방암이 골수암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피를 말리는 투병 생활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키모떼라피를 5개월 째 받아오고 있으며 방사선 치료는 인체 허용량이 다하여 더 이상 치료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내에게는 어쩌면 마지막 방문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집 사람과 함께 3년 전에 고국을 방문했습니다. 머무는 십여일 동안에 필자의 형수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인의 시신을 화장터에서 처리할 때였습니다. 화장에 소요되는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였습니다. 그 동안 가족들은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모인 곳에 서울의 성형외과병원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는 이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눈 수술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나 봅니다.
필자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와 그렇지 않아도 작은 눈이 더 작게 보이고 있었습니다. 저런 상태로 그냥두면 계속해서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와 지금보다 더 눈이 작아 보인다는 말을 들은 집 사람은 곧 바로 내게로 와서는 이번 기회에 눈 수술을 하고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듣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집 사람은 계속해서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 밤 늦은 시간까지 그 문제로 아내와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완강하게 거절하는 필자에게 아내는 마지막 카드를 꺼낸 것입니다. “여보! 나는 내가 떠나고 난 다음 당신이 이런 모습으로 추하게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너무 싫어요! 그러니 더 이상 거절하지 마시고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마지막 선물로 알고 받아 달라”고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선물이라는 말에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입니다. 다른 병원에 알아볼 시간도 필요도 없었습니다. 다음 날 이른 시간에 집 사람과 병원을 방문해서 그곳에서 곧 바로 수술을 하고 두 눈에 난 상처 위로 테이프를 부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주일 날 교회 강단에 선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났는데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인사를 해도 눈을 주지 않고 악수도 거절하는 것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부인은 생사의 귀로에 있는데 남편인 목사가 쌍꺼풀 수술을 한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실은 쌍꺼풀 수술이 아니었습니다. 위 눈썹을 끌어 올리는 수술이었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목사님이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주일 밤 목사인 나의 처사에 대하여 강하게 충격을 받은 몇 교우들이 서로 연락하여 한 장소에 모여서 저를 규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무슨 말로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로부터 한 주간 동안 여러 이상한 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예배에 참석해야 할 교우님들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시고 오랫동안 충성하셨던 분들이셨습니다. 그 때의 허탈함은 무엇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귀하게 여기셨던 직분자중 한 분에게는 필자가 왜 수술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간의 내용을 설명했지만 이미 굳어진 마음은 그 어떤 말로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아내에게 들은 말입니다. “당신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까지 교회를 섬겨오면서 처음으로 강하게 질타 하시던 교우님의 집을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구하는 용서를 빌었지만 끝까지 용서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일로 교회를 떠나신 직분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아내에게 받은 마지막 선물의 값을 지불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19-12-21 01:19:252019-12-21 01:19:25아내에게 받은 마지막 선물
고 유상민 목사님을 생각하며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필자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나눠보지 못했기에 너무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필자가 이민 교회를 섬겨오면서 가장 의지가 되고 많은 대화의 시간을 나눴던 분 가운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유상민 목사님(늘사랑한인교회를 섬기셨던)이 계셨습니다. 세상을 떠나신 지도 다음 달이면 3주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필자는 한인 타운에서 떨어진 외곽에, 유 목사님은 한인 타운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 목사님 댁은 필자를 비롯한 수명의 동역자들에게 마치 고향마을 사랑방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언제나 목사님 댁의 문은 열려 있었고 방문할 때마다 따뜻한 사랑의 대접을 받으며편안하게 쉬어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남을 섬기길 좋아하셨습니다. 함께 식당에 가면 언제나 식사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접할 기회를 주지 않으시는 겁니다. 필자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유 목사님과 같은 분을 만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은 정말로 주님의 본을 받아 이웃을 섬기길 좋아하시며 행복해 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유 목사님은 유학생 비자로 미국에 오셔서 오래 동안 서류 미비자로 사시며 목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0여년 동안 고국 방문도 못하셨습니다. 목회 초창기는 힘든 노동을 하시면서 어렵게 교회를 섬기셔야 했습니다. 영주권이 없어 당하시는 어려움에 얼마나 한이 맺히셨으면 어느 날 필자에게 푸념과도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이 목사님! 내가 영주권을 받으면 목사님을 유럽 여행을 시켜드리겠습니다”그 말이 실현 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또 영주권을 손에 쥐신다 하시더라도 유럽 여행을 하는 것은 작은 경비가 아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은 것입니다.
그로부터 15-16 년 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꿈에도 그리던 영주권을 받게 되셨습니다. 영주권 인터뷰를 하러 가시기 수일 전 유 목사님은 기억에서 잊혀진 유럽 여행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 이제 약속을 지켜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영주권을 받으면 이 목사님 부부와 우리 부부가 함께 유럽 여행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지난 20여 년 동안 해외여행을 해보지 못했으니 필자가 원하는 날짜와 지역을 선택하여 여행사에 예약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유 목사님의 이 같은 부탁을 서너 차례 받았지만 곧 바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말씀을 하시기에 이번에는 필자가 정색을 하고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유 목사님! 가까운 여행도 아니고 유럽 여행을 10여일 이상, 더구나 4명이 여행하려면 적어도 1만 달러 정도 돈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그 돈을 감당하시려고 하십니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조용하게 말씀을 드리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래 전의 빛 바랜 약속을 말씀하시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감사드립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유 목사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딸에게 여행비 1만 달러의 돈을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칼 같이 지키시는 목사님이셨습니다. 어떠한 손해와 아픔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키시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 유 목사님이 내 곁에 계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복이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필자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나눠보지 못했기에 너무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함께 귀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원하시던 영주권을 받으시고 이제는 마음껏 주님을 위해서 크게 사역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얼마나 자비량 이민 목회가 힘이 드셨으면 몸이 그토록 망가지셨는지 60을 갓 넘기신 나이에 지병으로 그토록 사랑하시던 교회와 가족을 두고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동역자들에게 크게 존경 받으시며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유 목사님이 주님께 가신지 3 주년이 다가오는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계신 것처럼 따뜻한 온정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9742
목사님도 부부싸움 하시나요?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가정을 가진 부부들이 다 싸움을 합니다. 세상에 싸우지 아니하는 부부는 한가정 한 사람도 없습니다.
20여 년 전, 매주 금요일 마다 학생회 성경 공부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야고보 4 장 1 절“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는 말씀을 중심으로 모임을 마치고 난 후에 한 여학생으로부터 뜻밖에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도 부부 싸움을 하시나요?”
그 여학생의 얼굴에는 웃음이 늘 없었습니다. 매우 힘들어 보였습니다. 오래 동안 난치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통 당하시는 어머니 때문 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학생의 어머니는 재량불량성빈혈이라고 하는 난치병으로 병마와 싸우고 계셨습니다. 그 학생은 아래로는 중학교에 다니는 두 명의 여 동생이 있었으며 아버지는 집에서 자동차로 6-7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먼 곳에서 장사를 하셨기에 한 달에 서너 번 밖에 뵐 수가 없었습니다.
대학에 갓 들어갔으므로 부모님에게 지속적인 도움과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에 가사를 맡으며 동생들까지 책임을 져야하고 어머니의 병 수발도 들어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시기 전에는 단란한 가정이입니다. 그러나 치료가 되지아니하는 난치병으로 집안에 웃음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부부사이도 예외가 아닌 것입니다. 어머니의 병세가 깊어가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멀어지고 있었나 봅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들의 갈등으로 가정이 위기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누구와 상의 할 곳도 없습니다.
도움을 받을 곳도 없었습니다. 아무에게나 집안일을 들어 내놓고 이야기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의 깊은 상처를 가지고 불안해 하며 어두운 삶을 근심 속에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나는 위기의식을 느껴야 했습니다. 나의 생각 없이 던지는 잘못된 한 마디 말 때문에 이 여학생이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으며 반대로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 주기로 한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이지만 예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도 집 사람과 싸움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로 심각하게 싸움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말할 수 없었던 내용들을 말해 주었습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가정을 가진 부부들이 다 싸움을 합니다. 세상에 싸우지 아니하는 부부는 한가정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무엇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까?
부부들에게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면 부부의 인연으로 지금의 부부와 사시길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왜 부부는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했지만 싸우며 삽니까? 이유는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싸움을 하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만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싸움을 해도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지켜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동에 대한 주님의 심판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도 인내 할 수 있고 인내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부부가 금실이 좋아도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며 생각나는 대로 살 수 있습니까? 목사님도 부부 싸움을 하시느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솔직한 답변을 들은 학생은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님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 여학생의 부모님들과 가정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길 시작했었던 것입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9606
아내에게 받은 마지막 선물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인사를 해도 눈을 주지 않고 악수도 거절하는 것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부인은 생사의 귀로에 있는데 남편인 목사가 쌍꺼풀 수술을 한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아내는 말기 암 환자로 12년째 투병 중에 있습니다. 유방암 2 기 진단을 받고 수술 받은 것은 지금으로 부터 12년 6개월 전이었습니다. 수술을 하고 4년 반 만에 말기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담당의사는 통계 수치를 인용하여 2년 이내에 명을 달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방암이 골수암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피를 말리는 투병 생활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키모떼라피를 5개월 째 받아오고 있으며 방사선 치료는 인체 허용량이 다하여 더 이상 치료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내에게는 어쩌면 마지막 방문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집 사람과 함께 3년 전에 고국을 방문했습니다. 머무는 십여일 동안에 필자의 형수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인의 시신을 화장터에서 처리할 때였습니다. 화장에 소요되는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였습니다. 그 동안 가족들은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모인 곳에 서울의 성형외과병원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는 이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눈 수술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나 봅니다.
필자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와 그렇지 않아도 작은 눈이 더 작게 보이고 있었습니다. 저런 상태로 그냥두면 계속해서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와 지금보다 더 눈이 작아 보인다는 말을 들은 집 사람은 곧 바로 내게로 와서는 이번 기회에 눈 수술을 하고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듣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집 사람은 계속해서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 밤 늦은 시간까지 그 문제로 아내와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완강하게 거절하는 필자에게 아내는 마지막 카드를 꺼낸 것입니다. “여보! 나는 내가 떠나고 난 다음 당신이 이런 모습으로 추하게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너무 싫어요! 그러니 더 이상 거절하지 마시고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마지막 선물로 알고 받아 달라”고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선물이라는 말에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입니다. 다른 병원에 알아볼 시간도 필요도 없었습니다. 다음 날 이른 시간에 집 사람과 병원을 방문해서 그곳에서 곧 바로 수술을 하고 두 눈에 난 상처 위로 테이프를 부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주일 날 교회 강단에 선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났는데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인사를 해도 눈을 주지 않고 악수도 거절하는 것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부인은 생사의 귀로에 있는데 남편인 목사가 쌍꺼풀 수술을 한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실은 쌍꺼풀 수술이 아니었습니다. 위 눈썹을 끌어 올리는 수술이었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목사님이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주일 밤 목사인 나의 처사에 대하여 강하게 충격을 받은 몇 교우들이 서로 연락하여 한 장소에 모여서 저를 규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무슨 말로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로부터 한 주간 동안 여러 이상한 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예배에 참석해야 할 교우님들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시고 오랫동안 충성하셨던 분들이셨습니다. 그 때의 허탈함은 무엇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귀하게 여기셨던 직분자중 한 분에게는 필자가 왜 수술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간의 내용을 설명했지만 이미 굳어진 마음은 그 어떤 말로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아내에게 들은 말입니다. “당신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까지 교회를 섬겨오면서 처음으로 강하게 질타 하시던 교우님의 집을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구하는 용서를 빌었지만 끝까지 용서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일로 교회를 떠나신 직분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아내에게 받은 마지막 선물의 값을 지불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