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섬겨오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24년 전의 일로 교회를 설립하고 7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교우중 천사의 성품을 지니신 C 간호사님이 계셨습니다.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시다가 미국으로 가족이민을 오신 분이십니다. C 간호사님을 만난 것은 환자와 목사로 만났습니다.
필자가 어려운 혈액 난치병에서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로 나음 받은 것을 알고서 찾아온 것입니다. 필자는 C집사님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 집사님도 살려 주세요”라고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점점 병세가 악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세상을 떠날 때가 임박한 어느 날 중환자실에서 C 집사님은 나의 손을 잡으시고 힘이 없어 개미 같은 소리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하고 계셨습니다. “목사님! 날 살려주세요! 나는 더 살아야합니다. 이대로는 죽을 수가 없어요! 어린 두 아들을 남겨두고 갈수가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집사님의 병상을 방문할 때마다 안쓰러움과 답답함을 느껴왔는데 이런 애원을 듣고서 필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고 도와 드리고 싶었습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위해서 피가 필요하다고 해서 교회에서 광고를 하고 교우와 함께 집사님을 위해서 헌혈을 했습니다.
피를 나누기는 했지만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아픔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수도 없었습니다. C 집사님이 임종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하나님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단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의 생명을 2 년만 끊으시어 집사님의 생명을 5년 더 연장해 주세요”
가슴을 도려내는 듯 간절한 눈물의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필자의 기도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로부터 수일 후 집사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교회를 설립하고서 두번째 해본 장례식이었습니다. 교회 묘지에서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한없이 나약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목사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가 이렇게 큰 어려움을 당할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아파해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의 눈물은 필자가 목회하는 지역에서 발생한 4-29 흑인 폭동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흑인 지역에서 사업을 하던 K 집사님의 대형 마켓을 시작으로 불붙기 시작한 폭동으로 놀람과 두려움 뿐 아니라 분노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것은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미국 경찰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습니다.
K집사님의 부인 권사님이 이틀 동안 밤을 새우고 주일예배에 참석했다가 창백해진 얼굴로 코피 흘리는 것을 보면서 함께 울어야 했습니다. 폭동이 일어난 초기에 막강한 힘을 가진 경찰이 효과적으로 적절한 대응을 했더라면 그렇게 큰 피해로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폭동이 일어난 곳이 백인 지역이나 부유층이 사는 지역이었더라면 경찰이 그토록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민자의 아픔을 탓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필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성난 폭도들이 상점을 약탈하는 모습을 TV를 통하여 보면서 미국에 대한 분노를 느껴야 했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질서 없는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법이 가장 잘 지켜지는 나라이며 개인의 재산과 생명이 잘 보존되며 교육과 국민들의 윤리의식이 으뜸이라고 믿어왔었는데 4-29를 당하고서 그런 기대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폭동을 딛고 재기한 교우도 있지만 아직도 그 때의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을 볼 때마다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19-12-21 01:18:042019-12-21 01:18:04다시는 그런 슬픔 없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훈계의 말씀을 주시는 것은 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강아지와 고양이를 남다르게 좋아했습니다. 어린 시절엔 품에 안고 자다가 어린 새끼 강아지를 죽게 한 일들도 기억이 됩니다. 특별히 고양이를 너무 좋아해 안고 다니길 좋아했지만 고양이는 사람에게 안기는 것을 싫어해 내 얼굴에 많은 상처를 내, 여섯 손 자녀를 둔 지금도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오래전 이민 생활 20여 년 만에 집을 선물 받고나서 집안에 강아지를 기르기 시작했었습니다. 쿠키, 토토, 치치, 조이, 린노,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름들이 있었지만 기억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길게는 2-3년 동안 함께 생활을 했던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한 달도 머물지 못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알래스카 산 백구인 쿠키는 6개월 만에 크게 성장을 하면서 너무 사나워져 혹시라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상처를 줄 것 같은 염려에서 다른 집으로 보내야 했으며 대부분의 개는 나의 실수로 잃어버린 것입니다. 집에서 기르던 정든 강아지를 잃어 버렸을 때의 상실감은 글로서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아이들과 집 주위를 돌며 개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기도 하고 이집 저집 문을 두드리며 방문도 해 보며 여기 저기 전단지를 만들어 돌리기도 하면서 불쌍한 생각에 안쓰러워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강아지를 잃어버리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개를 보호하고 잃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목에 긴 줄을 매어 두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입니다.
애완용 개의 목에 줄을 매고 묶어 두는 것은 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는 것으로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에 줄이 묶인 것을 볼 때마다 개에게 너무 고통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너무 학대하는 것 같으며 자유를 제한하는 것 같아서 묶인 줄을 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린 강아지를 울타리 밖으로 내모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집 안에 있으면 계속되는 사랑과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집을 나간 강아지는 그 순간부터 거친 세파와 싸워야 합니다. 보장된 행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강아지만 불행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강아지를 사랑하던 가족 모두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 후 나는 새로운 각오를 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엄하고 냉정하게 기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결심이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더 이상 개를 집에서 기르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훈계의 말씀을 주시는 것은 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계명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사항도 아니고 권장 사항도 아닙니다.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명령하면 아랫사람은 순종만 요구될 뿐입니다. 불순종하면 명령자를 화나게 할 뿐 아니라 징계가 따릅니다. 그러나 순종하면 명령자를 기쁘게 하고 순종자에게 보상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심은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짐을 지우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가면 영원히 불행하여져 죄악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평화와 행복을 영원토록 보장하시기 위해서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만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19-12-21 01:14:162019-12-21 01:14:16주님 안에 머무는 행복
어느 날 꿈에서 필자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어딘가를 향하여 바쁘게 길을 가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내 앞에 지긋한 연세의 어른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분을 뵙는 순간 젊은 시절 사랑하는 연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는 것 이상의 기쁨과 감격이 일어나면서 가던 길을 포기하고 그분을 따라 가길 시작합니다.
나타나신 그 분을 보는 순간 무엇 때문에, 어디에서 왜 오셨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모든 염려와 근심뿐 아니라 이제까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왔던 가족과 교회 성도들을 향한 생각도 한 순간에 사라지면서 지금 이 순간이 세상을 떠나는 이별의 시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세상을 영원히 떠나가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섭섭하거나 서운하거나 세상에 남겨두고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더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없을 뿐더러 더 살도록 허락해 주신다 해도 더 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된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과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지키려 했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것이 이 순간부터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조금도 아까운 생각이 없었습니다. 내 길을 인도하시는 분을 따르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분을 따라서 영생으로 향하는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문은 호텔의 회전식 유리문과 같아서 손으로 밀고 들어가는 문이 아니었습니다. 인도자를 따라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이 저절로 열렸고 문 안에 들어서자 더 크고 화려한 문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보아 온 그 어떤 화려한 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빛나는 보석으로 장식된 문이었습니다. 그 문을 보자 순간 한시라도 급히 그 문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원한다고 들어갈 수가 있는 문이 아니었습니다. 안에서 열어 주셔야만 들어갈 수 있는 문으로 손잡이가 없었습니다.
그 문안으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회전식 문으로 들어가자 마자 왼편에 끝없이 길게 들어선 긴 책장들이 있었고 그곳은 들어갈 사람들의 이름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기록보관 책임자가 나를 인도한 분을 향해 말하길 아직 내가 올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더니 한번 더 내 기록을 확인하겠다며 진열대에서 내 이름을 갖고 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볼 수 없었지만 나를 인도하신 분은 문서에서 나의 때를 확인하였습니다.
그 후 처음 들어간 그 문으로 나를 세상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꿈이었지만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고 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언젠가 나의 때가 되면 나를 인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천사가 다시 올 것입니다. 그 때를 소망하면서 주님이 예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주어진 생명의 기간 동안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19-12-19 23:35:272019-12-19 23:35:27꿈 속에서 경험한 신비로운 체험
다시는 그런 슬픔 없기를!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교회를 섬겨오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24년 전의 일로 교회를 설립하고 7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교우중 천사의 성품을 지니신 C 간호사님이 계셨습니다.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시다가 미국으로 가족이민을 오신 분이십니다. C 간호사님을 만난 것은 환자와 목사로 만났습니다.
필자가 어려운 혈액 난치병에서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로 나음 받은 것을 알고서 찾아온 것입니다. 필자는 C집사님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 집사님도 살려 주세요”라고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점점 병세가 악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세상을 떠날 때가 임박한 어느 날 중환자실에서 C 집사님은 나의 손을 잡으시고 힘이 없어 개미 같은 소리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하고 계셨습니다. “목사님! 날 살려주세요! 나는 더 살아야합니다. 이대로는 죽을 수가 없어요! 어린 두 아들을 남겨두고 갈수가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집사님의 병상을 방문할 때마다 안쓰러움과 답답함을 느껴왔는데 이런 애원을 듣고서 필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고 도와 드리고 싶었습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위해서 피가 필요하다고 해서 교회에서 광고를 하고 교우와 함께 집사님을 위해서 헌혈을 했습니다.
피를 나누기는 했지만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아픔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수도 없었습니다. C 집사님이 임종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하나님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단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의 생명을 2 년만 끊으시어 집사님의 생명을 5년 더 연장해 주세요”
가슴을 도려내는 듯 간절한 눈물의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필자의 기도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로부터 수일 후 집사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교회를 설립하고서 두번째 해본 장례식이었습니다. 교회 묘지에서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한없이 나약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목사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가 이렇게 큰 어려움을 당할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아파해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의 눈물은 필자가 목회하는 지역에서 발생한 4-29 흑인 폭동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흑인 지역에서 사업을 하던 K 집사님의 대형 마켓을 시작으로 불붙기 시작한 폭동으로 놀람과 두려움 뿐 아니라 분노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것은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미국 경찰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습니다.
K집사님의 부인 권사님이 이틀 동안 밤을 새우고 주일예배에 참석했다가 창백해진 얼굴로 코피 흘리는 것을 보면서 함께 울어야 했습니다. 폭동이 일어난 초기에 막강한 힘을 가진 경찰이 효과적으로 적절한 대응을 했더라면 그렇게 큰 피해로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폭동이 일어난 곳이 백인 지역이나 부유층이 사는 지역이었더라면 경찰이 그토록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민자의 아픔을 탓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필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성난 폭도들이 상점을 약탈하는 모습을 TV를 통하여 보면서 미국에 대한 분노를 느껴야 했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질서 없는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법이 가장 잘 지켜지는 나라이며 개인의 재산과 생명이 잘 보존되며 교육과 국민들의 윤리의식이 으뜸이라고 믿어왔었는데 4-29를 당하고서 그런 기대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폭동을 딛고 재기한 교우도 있지만 아직도 그 때의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을 볼 때마다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행복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하나님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훈계의 말씀을 주시는 것은 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강아지와 고양이를 남다르게 좋아했습니다. 어린 시절엔 품에 안고 자다가 어린 새끼 강아지를 죽게 한 일들도 기억이 됩니다. 특별히 고양이를 너무 좋아해 안고 다니길 좋아했지만 고양이는 사람에게 안기는 것을 싫어해 내 얼굴에 많은 상처를 내, 여섯 손 자녀를 둔 지금도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오래전 이민 생활 20여 년 만에 집을 선물 받고나서 집안에 강아지를 기르기 시작했었습니다. 쿠키, 토토, 치치, 조이, 린노,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름들이 있었지만 기억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길게는 2-3년 동안 함께 생활을 했던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한 달도 머물지 못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알래스카 산 백구인 쿠키는 6개월 만에 크게 성장을 하면서 너무 사나워져 혹시라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상처를 줄 것 같은 염려에서 다른 집으로 보내야 했으며 대부분의 개는 나의 실수로 잃어버린 것입니다. 집에서 기르던 정든 강아지를 잃어 버렸을 때의 상실감은 글로서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아이들과 집 주위를 돌며 개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기도 하고 이집 저집 문을 두드리며 방문도 해 보며 여기 저기 전단지를 만들어 돌리기도 하면서 불쌍한 생각에 안쓰러워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강아지를 잃어버리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개를 보호하고 잃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목에 긴 줄을 매어 두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입니다.
애완용 개의 목에 줄을 매고 묶어 두는 것은 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는 것으로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에 줄이 묶인 것을 볼 때마다 개에게 너무 고통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너무 학대하는 것 같으며 자유를 제한하는 것 같아서 묶인 줄을 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린 강아지를 울타리 밖으로 내모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집 안에 있으면 계속되는 사랑과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집을 나간 강아지는 그 순간부터 거친 세파와 싸워야 합니다. 보장된 행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강아지만 불행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강아지를 사랑하던 가족 모두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 후 나는 새로운 각오를 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엄하고 냉정하게 기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결심이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더 이상 개를 집에서 기르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훈계의 말씀을 주시는 것은 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계명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사항도 아니고 권장 사항도 아닙니다.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명령하면 아랫사람은 순종만 요구될 뿐입니다. 불순종하면 명령자를 화나게 할 뿐 아니라 징계가 따릅니다. 그러나 순종하면 명령자를 기쁘게 하고 순종자에게 보상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심은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짐을 지우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가면 영원히 불행하여져 죄악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평화와 행복을 영원토록 보장하시기 위해서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만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꿈 속에서 경험한 신비로운 체험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어느 날 꿈에서 필자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어딘가를 향하여 바쁘게 길을 가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내 앞에 지긋한 연세의 어른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분을 뵙는 순간 젊은 시절 사랑하는 연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는 것 이상의 기쁨과 감격이 일어나면서 가던 길을 포기하고 그분을 따라 가길 시작합니다.
나타나신 그 분을 보는 순간 무엇 때문에, 어디에서 왜 오셨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모든 염려와 근심뿐 아니라 이제까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왔던 가족과 교회 성도들을 향한 생각도 한 순간에 사라지면서 지금 이 순간이 세상을 떠나는 이별의 시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세상을 영원히 떠나가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섭섭하거나 서운하거나 세상에 남겨두고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더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없을 뿐더러 더 살도록 허락해 주신다 해도 더 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된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과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지키려 했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것이 이 순간부터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조금도 아까운 생각이 없었습니다. 내 길을 인도하시는 분을 따르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분을 따라서 영생으로 향하는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문은 호텔의 회전식 유리문과 같아서 손으로 밀고 들어가는 문이 아니었습니다. 인도자를 따라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이 저절로 열렸고 문 안에 들어서자 더 크고 화려한 문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보아 온 그 어떤 화려한 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빛나는 보석으로 장식된 문이었습니다. 그 문을 보자 순간 한시라도 급히 그 문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원한다고 들어갈 수가 있는 문이 아니었습니다. 안에서 열어 주셔야만 들어갈 수 있는 문으로 손잡이가 없었습니다.
그 문안으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회전식 문으로 들어가자 마자 왼편에 끝없이 길게 들어선 긴 책장들이 있었고 그곳은 들어갈 사람들의 이름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기록보관 책임자가 나를 인도한 분을 향해 말하길 아직 내가 올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더니 한번 더 내 기록을 확인하겠다며 진열대에서 내 이름을 갖고 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볼 수 없었지만 나를 인도하신 분은 문서에서 나의 때를 확인하였습니다.
그 후 처음 들어간 그 문으로 나를 세상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꿈이었지만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고 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언젠가 나의 때가 되면 나를 인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천사가 다시 올 것입니다. 그 때를 소망하면서 주님이 예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주어진 생명의 기간 동안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