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 교회 목양 칼럼입니다

고 박철주 목사님을 생각하며

고 박철주 목사님을 처음 만난 곳은 고 차남진 목사님 댁에서였다. 1974년 어느 가을이었다. 당시 엘에이 한인타운에는 한인이 3-4천명 밖에 되지 않아 올림픽 길을 따라 걷다가 한인을 만나면 반가워서 통성명을 했다.

방미중 인 박 목사님은 차 목사님이 시무하던 웨스트민스터장로교회에서 신앙간증을 하셨다. 장로교 합동측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교회와 더불어 성장하였지만 아버지를 존경하지 못한 것은 목회자의 생활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학 졸업 후 개인사업을 시작하면서 교회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사업이 빠르게 번창했다. 사업차 일본 방문이 잦아졌고 사업상 대접을 하고, 받는 생활이 반복되면서 서서히 세상 쾌락에 물들어 갔다. 그러나 계속 번창할 줄 알았던 사업이 어느 순간에 기울기 시작,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벼랑으로 떨어진 것이다.

발더둥쳐 보았지만 회생은 커녕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결국 큰 집을 팔아 작은 집으로, 다시 전셋집으로 그리고 다시 월세방으로 이사할 때는 온 가족의 살림살이가 리어카 한 대에 실릴 뿐이었다.

잘나가던 시절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실패하고 나서는 찾아갈 친구가 없었다. 마땅한 일자리도 없었다. 그러던 중 친구가 서울서 피아노와 풍금하게를 하고 있어 그곳서 외판원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월급은 없고 팔릴때 마다 수당을 받기로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주인이 박 목사에게 편지를 한 장 주면서 충청도의 시골교회를 다녀오라고 했다. 당시 차비조차 없어서 주인에게 가는 차비를 빌려 길을 떠났다. 차를 몇 번 갈아타고 물어 물어서 종착역에 도착하고 나니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정류장에서 2시간을 더 걸어야 했다. 종일 목지도 못하고 지친 몸이지만 풍금을 팔 생각에 산을 넘고 또 넘었다. 드리어 해가 질 무렵 교회를 찾았으나 말이 교회지 오두막 집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교회서 새 풍금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서울로 돌아가려니 이미 밤이 되었고 서울행 버스는 없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 밤을 교회당에서 머물게 되었다. 돌아갈 차비가 없어 누구에게 어떻게 무슨 면목으로 빌려야 하나 생각하니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하고 한심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교회당 벽으로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 슬라이드가 비쳐지고 있는 것이었다.아무런 생각 없이 벽에 비쳐지는 화면을 보다가 너무 놀라고 말았다.벽면에 비쳐진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지나온 일생의 사진들이 영화 속의 필름처럼 지나가는데 아무도 모르고 은밀하게 죄를 범했던 내용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 잘 나가던 시절에 접대 받으며 접대하던 부끄러운 장면들이 가감 없이 비쳐지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회개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화면에 비쳐진 것을 보면서 “예! 맞습니다.저게 나 입니다.예!제가 지은 죄입니다” 하면서 무릎을 손바닥으로 치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그러기를 얼마나 계속했는지 작은 교회당 안에서 엉엉 울며 콧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을 새벽기도회를 위해 교회당 문을 연 시골교회 전도사가 보고 크게 놀란 것이다.

그날 새벽부터 이 교회는 침례교회 오관석 목사님을 강사로 부흥회를 하려는데 첫 시간부터 미친 사람이 교회당을 장악하고 미친 듯 소리 소리 지르며 울부짖는 광경을 보고서 전도사는 강사목사에게 급히 달려가 사태를 알렸다.오목사는 은사체험이 있는 분이기에 교인들에게 “놀라지 마세요. 무서워하지 마세요!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 교회에 나타났습니다”라고 말한 후 박 목사를 앞으로 불러 간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간증하라고 했단다.

그간의 경위와 이 교회를 찾아오게 된 이유 그리고 지난 밤에 그가 체험한 내용들을 간증하면서 박 목사님의 삶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오관석 목사님이 부흥회 강사로 가는 곳마다 간증과 찬양사역을 시작하게 되어 결국엔 미국에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한국에는 자동 슬라이드가 없었는데 미국에 오니 화면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슬라이드가 있어 기념으로 샀다고 하셨다.

그 후 박 목사님은 한인타운에서 부름침례교회를 개척하셨고 세상을 떠나시기전까지 씨에라기도원 원장으로 사역하셨다.이민교회에 큰 자취를 남기고 가신 박 목사님의 찬양이 내 영혼에 메아리치게 하심에 감사드린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8300

윤석전 목사의 집회 계획 포기한 남가주목사회 결단에 찬사를…

남가주에는 한인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40여년 전통의 두 개의 단체가 있다.

목사회와 교회협의회다.누구보다도 목회자들에게 신임과 사랑 받아야 할 이 두 단체가 한 동안 그렇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난 수년 전부터 목사회와 교회협의회에 신선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중∙대형 교회 목사들이 계속해서 회장단으로 등장하면서 그 동안 잃었던 신뢰와 명성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더구나 이 두 단체가 서로 반목하지 않고 함께 손을 잡고 아름다운 사역을 이루어가는 모습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지난 11월28일 오후에 제44대 남가주한인목사회 회장 취임식이 있었다.필자도 주일 오후 피곤한 시간이었지만 참석을 했었다.교회당은 많은 축하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2시간 동안 진행되는 취임식 중 윤석전 목사의 축하 메시지가 전달이 되는가하면 광고를 담당한 목사께서 목사회의 행사 계획을 발표할 때 필자는 귀를 의심해야 했었다.내년에 목사회 중요 행사 중 하나로 서울의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를 초청하여 목회자들을 위한 영성 세미나와 일반 성도들을 위한 집회를 하겠다는 것을 발표하고 있는 것이었다.그 발표를 듣는 순간 아!이래선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힘들여 쌓아온 목사회의 신뢰와 공든 탑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릴 터인데 이를 어찌할꼬 하면서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그 발표를 듣는 순간 앞 자리에 앉아 있던 필자는 더 이상 자리에 머물 수가 없어서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행사장을 빠져 나오면서 44대 목사회의 앞날을 걱정하기 시작한 것이다.더우기 아주 오래전 윤 목사를 강사로 남가주에서 연합집회를 갖을때도 집회 반대 여론이 거셌지만 당시 교협 리더가 이를 강행한바 있고, 그때 남가주교협회관 구입을 위해 작정된 헌금으로 인해 남가주교계에서는 전후 후무한 재정논란에 휘말리는 아픔과 수치를 겪지 않았던가.

필자는 윤석전 목사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한번도 만난 적도, 본적도 없다.그러나 분명하게 아는 것은 한국의 주요 교단에서 오래전에 이단으로 분류되어 있는 목사다.그런데 지난 7일 저녁 내년도 행사중 윤석전 목사의 세미나와 집회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미주기독교이단대책위원회 회장으로 수고하시는 한선희 목사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러한 결정은 쉬운 것이 아니다.그런 결단을 하기 까지 많은 진통이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번 결정으로 인해 목사회에 드리어졌던 검은 구름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제44대 목사회 일 년 행사 중 그 어떤 행사보다도 윤석전 목사의 세미나 계획을 취소한 결정이야말로 칭찬과 박수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교계와 목사회를 위하여 어려운 결단을 내려준 박효우 회장과 임원 모두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리며 성탄과 연말을 맞게되어 참 감사하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8138

“나 기도 응답 받았어요!”

1980년 7월과 8월, 목사안수를 앞두고 팜데일기도원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생전 처음 뵙는 노년의 박대희 목사 내외분이 필자가 머문 33호실 맞은 편 건너 방에 거하시면서 일주일간 금식기도를 하셨다. 팜데일은 지대가 높은 사막에 있어 여름이면 몹시 더운 곳이다.

지금은 크리스찬투데이 발행인이신 서종천 목사님(당시는 전도사)도 그 때 기도원에서 함께 금식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같은 처마 밑에서 기도 하는 동안 여러 번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됐다. 대부분 금식기도원에 올라오시는 분들이 당면한 육신의 문제로 오는데 반하여 박 목사님은 다르셨다.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아니하시고 지난 40년 동안 교회를 섬기시면서 늘 마음에 부족하셨던 것을 채움 받고자 오셨다고 하셨다.

당시의 박 목사님은 우리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에 거목과 같은 분이셨다. 그런 성공한 목사님이 어린 저희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뜨거운 기도의 체험과 성령의 은사를 받고 싶어 왔다. 은퇴하면 이런 시간을 갖지 못할 것 같아서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결심으로 왔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 부르짖어도 응답을 받지 못하신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날 이른 새벽에 제 방을 두드리셨다. “이전도사 나 박 목사인데 오늘 새벽에 응답 받았어요!”

문을 열자 기뻐하시며 이런 간증을 하셨다. “기도하는데 비몽사몽간에 예수님이 나타나시어 네가 평생 소원하던 것이 이것이니 받으라고 하시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주님께서 응답을 직접 주시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놀랍고 기뻐 받은 선물을 펴 보는 순간, 실망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선물은 녹이 슬어 휘어지고 토막 나 공사판에 버려진 몇 개의 쓰지 못하는 못이었습니다.

내가 원한 것이 이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순복음교회 C목사님처럼 기도할 때에 신유가 나타나는 것이며, 내가 설교할 때에 아멘 할렐루야 소리로 화답 받는 것이며, 능력 있는 설교자가 되기 위한 말씀의 권능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동안 구한 것이 바로 이것들이다. 이미 너는 복을 받았느니라! 네가 구하던 것들은 지금까지 전하고 설교한 내용들에 비하면 다 이처럼 쓸모없는 것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잘못 구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주님을 만난 기쁨이 크게 교차하면서 마음속에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충만한 기쁨이 임했습니다”

하산 하시는 박 목사님을 배웅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도 금식을 하는 이유가 은혜를 사모했기 때문이다. 정확이 말하자면 능력을 받기 원해서였다. 나의 실력과 노력이 아닌, 그 어떤 보이지 아니하는 부흥사들처럼 능력을 나타내는 전도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내 기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비록 내가 방언을 못해도, 신유 은사를 나타내지 못해도, 이런 목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첫째로, 있으나 마나 한 목사가 되지 않게 해 주시길 기도했다. 비록 유명하지는 않아도 사람과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종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내가 사는 동안 복음만 전하며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세상일 하지 아니하고 교회만 섬기며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금식 기도를 마친 이후 지난 31년 동안 다른 직장 가지지 아니하고 교회만을 섬기면서 살게 하셨다. 기도원에서 헤어진 이후 한 번도 뵙지 못한 박 목사님을 언제 다시 뵈올지 그 날을 기대해본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8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