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차남진 목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필자가 불치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미선교기관의 초청으로 미국에 온 1973년 11월 LA 공항에서였다. 2년여 가까이 차목사님의 인도로 UCLA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차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세례를 받았다. 74년 어느 주일에 차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때까지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 목사님이 한국의 총신에서 교수로 있던 어느 해 여름이었다. 40여 명의 학생들과 여름 수련회를 위해 계룡산으로 갔다. 물가 그늘 진 곳을 찾아 텐트를 친 곳은 갑사라고 하는 큰 절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우물가를 찾은 신학생들이 그곳에서 수도중인 중들과 만나 논쟁이 시작되었다.
기독교가 참 종교인가? 불교가 참 종교인가? 시간이 갈수록 종교 논쟁은 커지기 시작했다. 양편에서 수십 명씩 떼 지어 큰 소리로 발전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쪽도 수긍할 수 없는 평행선을 그을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제안을 했다. 우리가 서울에서 교수님을 모시고 왔는데, 이 절에도 큰 주지 스님이 계실 터이니 지금 곧 두 분을 모시고 어느 종교가 진짜인지 대결을 하자고 한 것이었다. 누구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소는 갑사 절 안 마당이었고 시간은 오후5시였다. 학생회 대표가 차 목사님께 이런 내용을 고하고 곧바로 절로 향했다. 절 안마당에는 수도승 수십 명이 한 편에 자리하고 있었고 반대편으로는 신학생들이 자리를 했다.
연단에 먼저 오른 분은 갑사의 주지승이었다. 놀란 것은 스님이 두 시간 동안 기독교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하여 교회가 잘못한 사건들을 조목조목 들이대며 비판했다. 나중에 안 것은 그 스님이 비교종교학을 연구하시는 분으로 신학교에 3년 동안 다녔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갑사 주지 스님은‘예수는 세계 3대 성자와 함께 성인이시다’라고 선언을 한 것이다.
차 목사님 차례가 되어 강단에 섰지만, 20대의 젊은 나이에 고국을 떠나 유학했기에 불교에 대해 별로 연구한 것이 없어 비판할 수가 없었다. 차 목사님은 단 5분 동안 말씀을 하셨다. 지금까지 주지 스님께서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신 모든 내용은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그러나 스님께 한 가지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 결론으로 말씀하시길, 예수는 세계 3대 성자와 함께 성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성자이십니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면 다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성자이신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실까요? 다시 스님이 말을 했다. 성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성자가 아니며 성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 묻겠습니다.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 외에는 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차 목사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님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여 그 자리에서 법당 안으로 급하게 피하셨다고 합니다.
순간! 두 손을 높이 치켜든 신학생들이“할렐루야”를 힘차게 외치며 기뻐했다. 그 때의 함성과 감동이 오랜 시간이 지난 이곳 미국에까지 나의 귓전에 종종 메아리치고 있다.
나는 가끔 장원모 목사님을 생각한다. 인천에서 목회하신 목사님으로만 알고 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년이 지나도록 장 목사님을 나의 삶에서 지우지 못하는 사연이 있다.
매주 월요일이면 7명의 목회자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며 교제의 시간을 갖던중 S교회를 담임하시는 O목사님이 부흥회 강사로 모셨던 장 목사님의 간증을 모인 동역자들에게 전한 것이다.
인천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재정 자립이 충분치 못할 때였다. 넉넉지 못한 목회비로 생활이 어려웠다. 당연히 목사님 가정이 기거하는 사택도 형편이 좋지 못했다. 점점 커가는 아이들로 인하여 어려움은 커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장 목사님은 특별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 기도회가 끝나면 교인들이 다 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기도의 제목은 이러했다. 왜 주의 종이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까? 자녀들에게 넉넉한 주거공간이 필요합니다. 종의 가정에 집을 주시옵소서!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인의 울음소리가 강단 아래서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순간 장 목사님은 부끄러운 생각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교인들이 간 줄 알고 기도 했는데, 한 여자 교인도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여자는 여전도회 회장 권사였으며 더 충격적인 것은 교회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장로님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도둑질하다가 현장에서 잡인 것처럼 창피했다고 하셨다.
사표를 준비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수일 후에 장로님의 전화가 있었다. 내일 예배 후 당회를 소집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조용할 수가 없지, 교회를 떠날 각오를 하고 다음 날 당회에 임했다. 그런데 당회 소집을 요청한 장로님이 목사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리고 용서를 구했다. “목사님! 잘못했습니다. 목사님은 가난하게 사셔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그러면서 사택 구입비의 절반을 그 장로님이 내어 놓으셨고 나머지는 당회의 결의로 목사님의 사택을 구해 드리기로 한 것이다.
그 간증을 듣고 있는데 뜨거운 감동이 왔다. 그렇지. 왜 나도 진작에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는가? 주의 종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부끄러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 필자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즉시 그 날부터 장 목사님이 하셨던 기도를 하기로 한 것이다. “가족이 다섯이 아닙니까? 그러니 세 아이들이 사용할 각자의 방과 우리 내외가 사용할 방이 있어야겠습니다.
장 목사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나의 기도도 들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부끄러운 생각에 집 사람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만 2년여동안 집을 주실 것을 반복해서 기도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방 네 개짜리 2층 집을 주신 것이다. 나도, 가족 모두 놀랬다. 교회 교인들도 놀랐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다 놀랬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신 것이다.
그 때의 기도를 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안다. 아직도 작은 셋방살이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동기 부여를 하게 한 인천의 장원모 목사님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교회를 설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평소 알고 지내던 박계로 장로님이 전화를 주셨다. 박 장로님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동양선교교회 협동장로로 봉사하고 계셨다. 부산서 목회하는 사위가 LA를 방문했는데 설교할 교회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LA 한인타운에는 지금처럼 교회들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는 정 목사님의 인지도가 지금처럼 세계적 목회자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박 장로님이 섬기는 교회에서도 예배 초청을 받지 못하셨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분을 교회에 모신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처음 받은 청이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주일예배 강사로 모셨다. 정 목사님은 부산에서 수영로교회를 개척하면서 경험하신 내용을 간증하셨다. 매일 새벽기도를 마친 후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돈 것처럼 교회당 주변의 땅을 밞으며 기도하신대로 성전의 터를 넓혀 갔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민 교회가 교회당 건물 구입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엄두도 내기 어려운 때였다. 정 목사님이 다녀가신 후, 우리도 빌려보던 흑인 교회당 건물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일 새벽기도회를 마치면 참석한 모든 교인들이 목사인 저의 뒤를 따라 교회당 건물을 한 바퀴 돌았던 것이다.
그러기를 4년여 동안 계속했다. 미국인 성도들이 우리가 하는 행동을 보고서 이상하게 여겨서 질문을 해왔다. 교회당을 우리에게 주시길 기도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그렇게 시작이 되어 양 교회가 건축위원회를 구성하고 매입 절차를 6개월간 협상하게 되었다.
약간의 다운페이먼트를 지불하고 에스크로를 오픈하는 과정에서 우리 교회 내에 문제가 발생했다. 작은 교회가 어떻게 큰 건물을 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30만 불의 다운페이먼트를 누가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교회는 건축헌금을 작정하는 과정에서 큰 위기를 맞았다. 교인의 절대 다수가 교회당 구입을 반대하고 교회를 떠나게 되므로 존망의 귀로에 서게 됐다. 여기저기서 평강교회가 문을 닫았다는 소문도 들려오고 있었다.
그 때의 절망감은 표현할 길이 없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목회를 더 이상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미국교회에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교회건물 구입으로 인한 광풍으로 남은 교인들의 마음이 모두 상처를 크게 받고 있을 때였다. 그런 일이 몇 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신 것이다. 우리가 구한 것보다 더 좋은 환경과 조건의 건물을 강권적으로 허락하신 것이다.
큰 환란을 당한 지 두 달 만에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성전으로 입당을 하게 될 때,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역시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믿고 구한 것은 다 받은 줄 알라고 하신 말씀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웃서 교회를 담임하시는 어느 목사님은 평강교회가 건물을 받은 것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은 기적이라고 했다.
이제 5개월 후면 평강교회 설립 30주년을 기념하게 되며 교회당을 구입한지 25주년이 된다. 3년 후면 건물 페이먼트도 끝이 나게 되어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 봉헌 드리는 감격을 꿈꾸게 하셨다. 목회 초창기에 정필도 목사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이 같은 은혜와 축복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고 차남진 목사님을 생각하며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고 차남진 목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필자가 불치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미선교기관의 초청으로 미국에 온 1973년 11월 LA 공항에서였다. 2년여 가까이 차목사님의 인도로 UCLA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차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세례를 받았다. 74년 어느 주일에 차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때까지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 목사님이 한국의 총신에서 교수로 있던 어느 해 여름이었다. 40여 명의 학생들과 여름 수련회를 위해 계룡산으로 갔다. 물가 그늘 진 곳을 찾아 텐트를 친 곳은 갑사라고 하는 큰 절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우물가를 찾은 신학생들이 그곳에서 수도중인 중들과 만나 논쟁이 시작되었다.
기독교가 참 종교인가? 불교가 참 종교인가? 시간이 갈수록 종교 논쟁은 커지기 시작했다. 양편에서 수십 명씩 떼 지어 큰 소리로 발전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쪽도 수긍할 수 없는 평행선을 그을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제안을 했다. 우리가 서울에서 교수님을 모시고 왔는데, 이 절에도 큰 주지 스님이 계실 터이니 지금 곧 두 분을 모시고 어느 종교가 진짜인지 대결을 하자고 한 것이었다. 누구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소는 갑사 절 안 마당이었고 시간은 오후5시였다. 학생회 대표가 차 목사님께 이런 내용을 고하고 곧바로 절로 향했다. 절 안마당에는 수도승 수십 명이 한 편에 자리하고 있었고 반대편으로는 신학생들이 자리를 했다.
연단에 먼저 오른 분은 갑사의 주지승이었다. 놀란 것은 스님이 두 시간 동안 기독교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하여 교회가 잘못한 사건들을 조목조목 들이대며 비판했다. 나중에 안 것은 그 스님이 비교종교학을 연구하시는 분으로 신학교에 3년 동안 다녔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갑사 주지 스님은‘예수는 세계 3대 성자와 함께 성인이시다’라고 선언을 한 것이다.
차 목사님 차례가 되어 강단에 섰지만, 20대의 젊은 나이에 고국을 떠나 유학했기에 불교에 대해 별로 연구한 것이 없어 비판할 수가 없었다. 차 목사님은 단 5분 동안 말씀을 하셨다. 지금까지 주지 스님께서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신 모든 내용은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그러나 스님께 한 가지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 결론으로 말씀하시길, 예수는 세계 3대 성자와 함께 성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성자이십니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면 다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성자이신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실까요? 다시 스님이 말을 했다. 성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성자가 아니며 성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 묻겠습니다.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 외에는 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차 목사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님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여 그 자리에서 법당 안으로 급하게 피하셨다고 합니다.
순간! 두 손을 높이 치켜든 신학생들이“할렐루야”를 힘차게 외치며 기뻐했다. 그 때의 함성과 감동이 오랜 시간이 지난 이곳 미국에까지 나의 귓전에 종종 메아리치고 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7928
장원모 목사님을 생각하며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나는 가끔 장원모 목사님을 생각한다. 인천에서 목회하신 목사님으로만 알고 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년이 지나도록 장 목사님을 나의 삶에서 지우지 못하는 사연이 있다.
매주 월요일이면 7명의 목회자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며 교제의 시간을 갖던중 S교회를 담임하시는 O목사님이 부흥회 강사로 모셨던 장 목사님의 간증을 모인 동역자들에게 전한 것이다.
인천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재정 자립이 충분치 못할 때였다. 넉넉지 못한 목회비로 생활이 어려웠다. 당연히 목사님 가정이 기거하는 사택도 형편이 좋지 못했다. 점점 커가는 아이들로 인하여 어려움은 커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장 목사님은 특별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 기도회가 끝나면 교인들이 다 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기도의 제목은 이러했다. 왜 주의 종이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까? 자녀들에게 넉넉한 주거공간이 필요합니다. 종의 가정에 집을 주시옵소서!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인의 울음소리가 강단 아래서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순간 장 목사님은 부끄러운 생각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교인들이 간 줄 알고 기도 했는데, 한 여자 교인도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여자는 여전도회 회장 권사였으며 더 충격적인 것은 교회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장로님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도둑질하다가 현장에서 잡인 것처럼 창피했다고 하셨다.
사표를 준비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수일 후에 장로님의 전화가 있었다. 내일 예배 후 당회를 소집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조용할 수가 없지, 교회를 떠날 각오를 하고 다음 날 당회에 임했다. 그런데 당회 소집을 요청한 장로님이 목사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리고 용서를 구했다. “목사님! 잘못했습니다. 목사님은 가난하게 사셔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그러면서 사택 구입비의 절반을 그 장로님이 내어 놓으셨고 나머지는 당회의 결의로 목사님의 사택을 구해 드리기로 한 것이다.
그 간증을 듣고 있는데 뜨거운 감동이 왔다. 그렇지. 왜 나도 진작에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는가? 주의 종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부끄러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 필자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즉시 그 날부터 장 목사님이 하셨던 기도를 하기로 한 것이다. “가족이 다섯이 아닙니까? 그러니 세 아이들이 사용할 각자의 방과 우리 내외가 사용할 방이 있어야겠습니다.
장 목사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나의 기도도 들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부끄러운 생각에 집 사람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만 2년여동안 집을 주실 것을 반복해서 기도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방 네 개짜리 2층 집을 주신 것이다. 나도, 가족 모두 놀랬다. 교회 교인들도 놀랐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다 놀랬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신 것이다.
그 때의 기도를 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안다. 아직도 작은 셋방살이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동기 부여를 하게 한 인천의 장원모 목사님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7758
정필도 목사님께 받은 은혜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교회를 설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평소 알고 지내던 박계로 장로님이 전화를 주셨다. 박 장로님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동양선교교회 협동장로로 봉사하고 계셨다. 부산서 목회하는 사위가 LA를 방문했는데 설교할 교회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LA 한인타운에는 지금처럼 교회들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는 정 목사님의 인지도가 지금처럼 세계적 목회자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박 장로님이 섬기는 교회에서도 예배 초청을 받지 못하셨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분을 교회에 모신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처음 받은 청이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주일예배 강사로 모셨다. 정 목사님은 부산에서 수영로교회를 개척하면서 경험하신 내용을 간증하셨다. 매일 새벽기도를 마친 후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돈 것처럼 교회당 주변의 땅을 밞으며 기도하신대로 성전의 터를 넓혀 갔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민 교회가 교회당 건물 구입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엄두도 내기 어려운 때였다. 정 목사님이 다녀가신 후, 우리도 빌려보던 흑인 교회당 건물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일 새벽기도회를 마치면 참석한 모든 교인들이 목사인 저의 뒤를 따라 교회당 건물을 한 바퀴 돌았던 것이다.
그러기를 4년여 동안 계속했다. 미국인 성도들이 우리가 하는 행동을 보고서 이상하게 여겨서 질문을 해왔다. 교회당을 우리에게 주시길 기도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그렇게 시작이 되어 양 교회가 건축위원회를 구성하고 매입 절차를 6개월간 협상하게 되었다.
약간의 다운페이먼트를 지불하고 에스크로를 오픈하는 과정에서 우리 교회 내에 문제가 발생했다. 작은 교회가 어떻게 큰 건물을 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30만 불의 다운페이먼트를 누가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교회는 건축헌금을 작정하는 과정에서 큰 위기를 맞았다. 교인의 절대 다수가 교회당 구입을 반대하고 교회를 떠나게 되므로 존망의 귀로에 서게 됐다. 여기저기서 평강교회가 문을 닫았다는 소문도 들려오고 있었다.
그 때의 절망감은 표현할 길이 없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목회를 더 이상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미국교회에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교회건물 구입으로 인한 광풍으로 남은 교인들의 마음이 모두 상처를 크게 받고 있을 때였다. 그런 일이 몇 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신 것이다. 우리가 구한 것보다 더 좋은 환경과 조건의 건물을 강권적으로 허락하신 것이다.
큰 환란을 당한 지 두 달 만에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성전으로 입당을 하게 될 때,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역시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믿고 구한 것은 다 받은 줄 알라고 하신 말씀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웃서 교회를 담임하시는 어느 목사님은 평강교회가 건물을 받은 것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은 기적이라고 했다.
이제 5개월 후면 평강교회 설립 30주년을 기념하게 되며 교회당을 구입한지 25주년이 된다. 3년 후면 건물 페이먼트도 끝이 나게 되어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 봉헌 드리는 감격을 꿈꾸게 하셨다. 목회 초창기에 정필도 목사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이 같은 은혜와 축복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7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