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 LA 한인타운에서 성업중인 북경식당을 경영하는 K씨 성의 여자분이 계셨다. 서울에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다가 1960년대 후반, 남미농업이민단 모집에 지원해 두 아들과 함께 배로 아르헨티나에 도착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평소 영화를 좋아했던 K여사는 누구든지 미국 땅에 들어가면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화려한 삶을 사는 줄로 믿었던 것이다.
남미 농업이민단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서 “남미” 라는 끝에 “미”자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미국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미국인줄 알고 도착한 곳이 미국이 아니었다. 외국생활의 경험이 없는 K여사와 어린 두 아들이 살아가기에 너무 힘이 드는 것이었다.
이주 정착금으로 가져온 돈은 오래가지 않아 동이 나고 말았다. 생계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엇이든지 살기위해서 해야만 했던 것이다. 언어도 통하지 아니하고 자본도 없었던 것이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리에서 좌판을 벌이고 과일을 파는 행상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K여사는 미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연구하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미국행 비자를 얻게 된 것이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Los Angeles 공항에 도착했다.
미국에 가면 모든 것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연하였던 것이다. 공항에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까지 걷다가 걸음을 멈춘 곳이 모텔이었다.
어린 두 아들은 피곤에 지쳐 곧바로 깊은 잠에 들었지만 어머니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모텔비를 주고 남은 돈을 세어보니 84불이 남았다. 이 돈으로 2주일 먹고 죽을 것이라면 차라리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좋은 일이나 한번 하고 죽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 밤에 밖으로 나가 교회당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돈을 교회당 편지함 속에 집어넣고 돌아왔다. 내일 아침부터 세 식구가 굶어야 하고 결국에는 함께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큰 설움이 통곡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잠들었던 두 아들이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깨어나 사연을 듣게 되었다.
더 이상 너희들을 먹여 살릴 자신이 없어 죽기를 결심하고 남은 마지막 84불을 하나님께 바치고 돌아왔다고 말하자 두 아들이 엄마를 부둥켜 앉고 울음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 어린 줄만 알았던 큰 아들이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더니 주유소에서 기름 넣어주는 일을 얻은 것이었다.
얼마 후 작은 아들도 같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모은 돈으로 식당을 하게 되었다. 이상한 것은 시작한 날부터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16 그릇을 팔면 한 그릇이 재료비고 나머지는 남는 것이라고 하였다.
K여사는 한국에서 식모를 둘이나 두고 살아 부엌일을 잘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아무래 생각해도 자기가 만든 음식을 맛있어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어느 날 어떻게 큰돈을 벌수 있었는가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바친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복을 주셨다고 고백했다. 후에 그 교회당을 찾으려고 몇 번 시도하다가 찾지 못했다고 하셨다.
같은 지역에서 사역하던 동역자의 사모님의 입관예배에 참석했다가 순서지를 받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장례식을 참석했지만, 그 같은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식 순서지 뒷면에는 암으로 70세에 돌아가신 사모님이 짙은 빨간 색의 옷을 입으시고 두 손으로는 흰 꽃(부활을 상징하는)을 아름답게 피운 난 화분을 바쳐들고서 환한 미소를 크게 짓고 계셨다. 장례식장에 참석한 우리를 향하여 내가 죽은 것이 아니고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슬퍼하지 마세요! 라고 당부의 말씀을 하고 계신듯 했다.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장례식장을 방문할 때마다 마음의 무거움과 답답함 그리고 안쓰러움을 당하는 것은 그 어떤 죽음도 이유 없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가신 사모님의 이런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장례식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어둡고 침통한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정사진으로 순서지에 사용되는 것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검은 색의 사진을 사용하는데 반하여 사모님의 경우는 순서지 뒷면에 지면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연출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고인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미리 준비하여 된 것임을 느끼게 하는 것은 고인의 지나온 삶을 20년 가까이 곁에서 지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나시면서 남은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세심한 손길을 느끼며 죽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죽음은 무엇인가! 우리 가운데 죽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는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인 것이다.
삶의 연장이 죽음이며 죽음은 더 나은 삶,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에 아무것도 준비하고 오지 아니하였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예비하신 것처럼 삶 저편 주님이 계신 우리가 장차 가야할 본향도 영원토록 부족함이 없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은 저주가 아닌 것이다. 더 나은 곳, 우리 모두가 그토록 사모하는 영원한 곳으로 들어가는 축복의 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죽음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무리 이 땅에서 성공해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 필자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사진 아래에 장례식장을 찾아준 조객들을 향하여 남기신 고인의 인사의 말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000 사모입니다. 저의 짧지 않은 삶을 돌아보면 때론 후회스럽고 때론 슬프고 때론 고통스러웠지만 그때마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셔서 저의 무릎을 일으키시고 제 삶속에서 주님의 선을 이루셨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기쁨을 누리다가 이제 먼저 주님 품으로 갑니다. 오늘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자매님들과 이 세상에서 작별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요, 조금은 슬퍼해 주시면 좋겠어요!
하지만 모두 저를 위해 또한 기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 속에서 즐거운 영원의 삶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을 받는 축하의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경주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 경주가 다 끝났을 때 그 때 예수님과 같이 축하하러 마중 나가겠습니다. 그때까지 충성된 삶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럼 다시 만날 때 까지….”
왜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시고 떠나가시는 사모님을 뒤로하고 다시 만날 소망으로 장례식장을 떠나는 모두의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 해 나성영락교회당에서 어느 권사님의 장례식이 있었다. 권사님은 6∙25전쟁으로 이북의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셨다가 오래전에 미국으로 가족이민을 오셨다. 권사님의 사망 원인은 교통 사고였다.
장례식에는 많은 조객들이 넓은 교회당을 가득 채웠다. 사람의 평가는 얼마나 잘 살고 얼마나 크게 성공했느냐를 말하지 않는다. 장례식을 보아서 그 사람이 생전에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권사님의 지난 삶은 아브라함처럼 고향을 떠나 낮선 타향살이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도 평탄치 않으셨다. 그럴 때마다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했다. 이런 권사님의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권사님이 가는 곳마다, 행하는 사업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어려서부터 전쟁으로 겪어야 했던 가난과 피난살이의 삶은 평생 동안 권사님이 절약하고 검소하게 사는 방법을 갖게 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으나 불행한 이웃을 위해서는 늘 베푸는 삶을 살아오셨다. 특별히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많은 희생과 헌신을 하셨다.
유가족을 대표해서 고인의 아들이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가 홀로 되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53세 되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사고를 당하시고 나서 누님과 함께 어머니의 살림을 정리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세 번이나 필사한 수십 권의 노트를 발견한 것입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바르고 깨끗하게 써내려간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어머니에 대하여 불효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제 나이가 55세인데 만일 내가 이 나이에 혼자되었다면 그 긴 세월을 혼자서 지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 여년이 지나도록 어머니에 대하여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어머니는 그렇게 사셔도 되는분으로 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어머니는 언제나 교회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예배 중심의 삶을 사셨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찬송하셨으며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한 번도 자녀들 앞에서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왜 어머니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으셨겠습니까?
왜 낙심되는 일이 없었겠습니까? 왜 화나는 일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자녀나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사람이나 하나님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감사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항상 밝은 미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위로하시고 칭찬하시며 용기를 주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고독할 틈도 시간도 없는 줄 생각한 것입니다. 밤 시간이 얼마다 길고 지루하셨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성경을 필사하셨던 것입니다. 어머님에게 예수님은 위로자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예수님은 동행자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예수님은 행복 그 자체셨습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을 말씀 안에서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그 어머님의 믿음을 우리 자손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 드립니다.”
유 권사님의 아들은 벨리서 목회하는 나성북부교회 유영기 목사입니다. 또 고인은 저의 큰 딸의 시어머니의 어머니로 나성영락교회 창립교인이었습니다.
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00pyongkanghttp://pyongkang.com/wp-content/uploads/2022/08/평강로고-3-1030x683.jpgpyongkang2019-12-14 02:34:352019-12-14 02:36:58“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마지막 헌금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1970년대 중반 LA 한인타운에서 성업중인 북경식당을 경영하는 K씨 성의 여자분이 계셨다. 서울에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다가 1960년대 후반, 남미농업이민단 모집에 지원해 두 아들과 함께 배로 아르헨티나에 도착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평소 영화를 좋아했던 K여사는 누구든지 미국 땅에 들어가면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화려한 삶을 사는 줄로 믿었던 것이다.
남미 농업이민단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서 “남미” 라는 끝에 “미”자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미국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미국인줄 알고 도착한 곳이 미국이 아니었다. 외국생활의 경험이 없는 K여사와 어린 두 아들이 살아가기에 너무 힘이 드는 것이었다.
이주 정착금으로 가져온 돈은 오래가지 않아 동이 나고 말았다. 생계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엇이든지 살기위해서 해야만 했던 것이다. 언어도 통하지 아니하고 자본도 없었던 것이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리에서 좌판을 벌이고 과일을 파는 행상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K여사는 미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연구하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미국행 비자를 얻게 된 것이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Los Angeles 공항에 도착했다.
미국에 가면 모든 것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연하였던 것이다. 공항에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까지 걷다가 걸음을 멈춘 곳이 모텔이었다.
어린 두 아들은 피곤에 지쳐 곧바로 깊은 잠에 들었지만 어머니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모텔비를 주고 남은 돈을 세어보니 84불이 남았다. 이 돈으로 2주일 먹고 죽을 것이라면 차라리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좋은 일이나 한번 하고 죽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 밤에 밖으로 나가 교회당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돈을 교회당 편지함 속에 집어넣고 돌아왔다. 내일 아침부터 세 식구가 굶어야 하고 결국에는 함께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큰 설움이 통곡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잠들었던 두 아들이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깨어나 사연을 듣게 되었다.
더 이상 너희들을 먹여 살릴 자신이 없어 죽기를 결심하고 남은 마지막 84불을 하나님께 바치고 돌아왔다고 말하자 두 아들이 엄마를 부둥켜 앉고 울음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 어린 줄만 알았던 큰 아들이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더니 주유소에서 기름 넣어주는 일을 얻은 것이었다.
얼마 후 작은 아들도 같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모은 돈으로 식당을 하게 되었다. 이상한 것은 시작한 날부터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16 그릇을 팔면 한 그릇이 재료비고 나머지는 남는 것이라고 하였다.
K여사는 한국에서 식모를 둘이나 두고 살아 부엌일을 잘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아무래 생각해도 자기가 만든 음식을 맛있어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어느 날 어떻게 큰돈을 벌수 있었는가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바친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복을 주셨다고 고백했다. 후에 그 교회당을 찾으려고 몇 번 시도하다가 찾지 못했다고 하셨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7430
주님의 품으로 먼저 갑니다.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같은 지역에서 사역하던 동역자의 사모님의 입관예배에 참석했다가 순서지를 받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장례식을 참석했지만, 그 같은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식 순서지 뒷면에는 암으로 70세에 돌아가신 사모님이 짙은 빨간 색의 옷을 입으시고 두 손으로는 흰 꽃(부활을 상징하는)을 아름답게 피운 난 화분을 바쳐들고서 환한 미소를 크게 짓고 계셨다. 장례식장에 참석한 우리를 향하여 내가 죽은 것이 아니고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슬퍼하지 마세요! 라고 당부의 말씀을 하고 계신듯 했다.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장례식장을 방문할 때마다 마음의 무거움과 답답함 그리고 안쓰러움을 당하는 것은 그 어떤 죽음도 이유 없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가신 사모님의 이런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장례식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어둡고 침통한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정사진으로 순서지에 사용되는 것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검은 색의 사진을 사용하는데 반하여 사모님의 경우는 순서지 뒷면에 지면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연출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고인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미리 준비하여 된 것임을 느끼게 하는 것은 고인의 지나온 삶을 20년 가까이 곁에서 지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나시면서 남은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세심한 손길을 느끼며 죽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죽음은 무엇인가! 우리 가운데 죽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는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인 것이다.
삶의 연장이 죽음이며 죽음은 더 나은 삶,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에 아무것도 준비하고 오지 아니하였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예비하신 것처럼 삶 저편 주님이 계신 우리가 장차 가야할 본향도 영원토록 부족함이 없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은 저주가 아닌 것이다. 더 나은 곳, 우리 모두가 그토록 사모하는 영원한 곳으로 들어가는 축복의 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죽음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무리 이 땅에서 성공해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 필자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사진 아래에 장례식장을 찾아준 조객들을 향하여 남기신 고인의 인사의 말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000 사모입니다. 저의 짧지 않은 삶을 돌아보면 때론 후회스럽고 때론 슬프고 때론 고통스러웠지만 그때마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셔서 저의 무릎을 일으키시고 제 삶속에서 주님의 선을 이루셨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기쁨을 누리다가 이제 먼저 주님 품으로 갑니다. 오늘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자매님들과 이 세상에서 작별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요, 조금은 슬퍼해 주시면 좋겠어요!
하지만 모두 저를 위해 또한 기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 속에서 즐거운 영원의 삶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을 받는 축하의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경주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 경주가 다 끝났을 때 그 때 예수님과 같이 축하하러 마중 나가겠습니다. 그때까지 충성된 삶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럼 다시 만날 때 까지….”
왜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시고 떠나가시는 사모님을 뒤로하고 다시 만날 소망으로 장례식장을 떠나는 모두의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7317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카테고리: 목양칼럼 /작성자: pyongkang지난 해 나성영락교회당에서 어느 권사님의 장례식이 있었다. 권사님은 6∙25전쟁으로 이북의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셨다가 오래전에 미국으로 가족이민을 오셨다. 권사님의 사망 원인은 교통 사고였다.
장례식에는 많은 조객들이 넓은 교회당을 가득 채웠다. 사람의 평가는 얼마나 잘 살고 얼마나 크게 성공했느냐를 말하지 않는다. 장례식을 보아서 그 사람이 생전에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권사님의 지난 삶은 아브라함처럼 고향을 떠나 낮선 타향살이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도 평탄치 않으셨다. 그럴 때마다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했다. 이런 권사님의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권사님이 가는 곳마다, 행하는 사업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어려서부터 전쟁으로 겪어야 했던 가난과 피난살이의 삶은 평생 동안 권사님이 절약하고 검소하게 사는 방법을 갖게 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으나 불행한 이웃을 위해서는 늘 베푸는 삶을 살아오셨다. 특별히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많은 희생과 헌신을 하셨다.
유가족을 대표해서 고인의 아들이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가 홀로 되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53세 되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사고를 당하시고 나서 누님과 함께 어머니의 살림을 정리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세 번이나 필사한 수십 권의 노트를 발견한 것입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바르고 깨끗하게 써내려간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어머니에 대하여 불효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제 나이가 55세인데 만일 내가 이 나이에 혼자되었다면 그 긴 세월을 혼자서 지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 여년이 지나도록 어머니에 대하여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어머니는 그렇게 사셔도 되는분으로 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어머니는 언제나 교회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예배 중심의 삶을 사셨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찬송하셨으며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한 번도 자녀들 앞에서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왜 어머니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으셨겠습니까?
왜 낙심되는 일이 없었겠습니까? 왜 화나는 일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자녀나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사람이나 하나님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감사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항상 밝은 미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위로하시고 칭찬하시며 용기를 주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고독할 틈도 시간도 없는 줄 생각한 것입니다. 밤 시간이 얼마다 길고 지루하셨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성경을 필사하셨던 것입니다. 어머님에게 예수님은 위로자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예수님은 동행자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예수님은 행복 그 자체셨습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을 말씀 안에서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그 어머님의 믿음을 우리 자손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 드립니다.”
유 권사님의 아들은 벨리서 목회하는 나성북부교회 유영기 목사입니다. 또 고인은 저의 큰 딸의 시어머니의 어머니로 나성영락교회 창립교인이었습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7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