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칼럼 # 237 줌을 통한 정기노회 화상회의를 경험하고서!

지난 화요일 오전 11시 필자가 소속한 노회 제 93회 정기 봄 노회가 covid 19 때문에 대면으로 모이지 못하고 줌을 통한 화상회의로 마쳤습니다. 지난 두 회기 동안 정기회의를 갖지 못하다가 1 년 여 만에 대면으로 만나지는 못하지만 화면으로 궁금해 하던 동역 자들의 얼굴을 뵙게 되어 너무 반갑고 감사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고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험하고 무서웠던 고난의 긴 터널을 큰 어려움 없이 건강하게 지나오신 모든 동역자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위로 드리며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되는 주님의 위로와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정기노회를 화상으로 하면서 그동안 우리가 지켜오던 성 노회가 얼마나 큰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예배도 그렇고 회의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 대면으로 만나는 예배와 화상 회의로는 함께하는 서로에게 기대한 것처럼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화상 회의에서 불편을 느껴야 했던 것은 찬송가를 부를 때였습니다. 회의에 참가한 노회원 목사 장로님들이 사역하시는 지역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참여하시고 멕시코에서도 참석하시며 미국 안에서도 여러 지역에서 참석을 하시다보니 찬송을 부르게 될 때에 찬양이 하나가 되지 아니했습니다.

줌을 통한 화상회의에서 가장 불편했던 것은 성찬을 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기노회시마다 개회예배가 마치면 회무에 들어가기전 곧 바로 성찬식에 참여하게 됩니다. 교회의 예식 중 거룩한 예식은 두 가지입니다. 세례와 성찬입니다. 세례는 일생에 한번만 받지만 성찬은 기회가 될 때마다 여러 번 받습니다.

성찬은 회계하고 받으면 축복이기 때문에 많이 받을수록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노회는 화상회의로 하게 되어 성찬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노회가 생긴 이래 93번째 지나오는 동안 성찬식이 없는 노회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성찬식이 없는 노회를 마치게 되니 서운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성찬식이 귀한 것은 지난 회기 동안 주님과의 관계에서 불충하고 불의했던 것을 고백하고 용서 받으며 새 힘을 받는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화상회의에선 성령님의 내재하심과 감동을 받지 못한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화상 회의가 불편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회의 때마다 나누던 커피와 다과 애찬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잔치 집에 참석했다가 잔치 음식을 대접 받지 못하고 나오는 것 같은 허전함을 달래야 했기 때문입니다. 맛있는 잔치 음식을 나무며 지난 회기 동안 지나온 서로간의 받은 은혜와 축복을 나누는 정겨운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우리 모두를 두렵고 불편하게 해왔던 Covid 19이 과학의 발달과 힘으로 그 세가 잡혀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에 다시는 이런 비대면 화상 회의가 없기를 기대해 봅니다. 지금의 돌아가는 분위기로는 금년 가을 정기회의는 모두가 얼굴을 대하며 기쁨으로 손을 마주 잡고 회의 할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다시 만날 그 때까지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모두에게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2021년 4 월 6일

줌을 통한 화상회의로 정기노회를 마치면서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목양칼럼 # 236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한복음 20장 27절에 기록된 말씀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인 곳에 첫 번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길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로부터 여드레 되는 날 같은 장소에 굳게 문이 닫혀있을 때 예수님이 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도마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고 믿을 때에 도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갑자기 나타나신 주님이 8일 전에 한 말 그대로 하시는 말을 듣고 도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의 입술의 모든 말만 다 아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생각도 아시고 행한 일도 다 아십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은혜로 우리를 택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의 나 됨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만물의 때만도 못한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어 주의 은혜와 축복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복중에 복은 날 위하여 죽으신 보혈이 믿어지는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믿어질 때 성경이 믿어지고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이 믿어지며 천국과 지옥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을 맞으면서 날 위해서 죽으시고 사망의 권세를 싸워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육체적 부활이 믿어짐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필자가 부활 설교를 처음 들은 것은 미국에 온지 1년이 지나서인 1974년 부활절 때였으니까 벌써 47년 전이었습니다. 그 때는 교회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를 때였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부활 예배를 마치고 난 후 7-8명의 청년들이 다른 장소에서 친교를 나누며 성도의 교제를 나눌 때였습니다.

그 때 서울에서 약학대학을 졸업하시고 약사의 직업을 가지고 미국에 이민을 오신 Y 집사님이 자신은 부활을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현대의학으로는 삶은 달걀을 다시 원래 상태로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삶은 달걀을 다시 원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것도 가능할 수가 있지만 과학적으로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도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지금도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오래된 교인도 있고 설교자 가운데도 있으며 신학자들 가운데도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육체적 부활로 보지 않고 영적인 부활로 이해하며 상징적 부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강하게 부정하시던 분이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믿어도 그분만은 절대로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을 것 같았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20여 년 전에 목사가 되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믿어도 내가 나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내 손으로 주님의 손과 발 옆구리를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주장하던 도마처럼 그 분도 부활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셨음을 믿습니다.

필자가 사는 도시 안에서 사시기에 언젠가는 만날 때가 있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목사님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47년 전에 한인 타운의 어느 교회 C 목사님의 부활절 설교를 들으시고 그렇게 강하게 부정하셨습니다. 주님의 육체 부활을 의학과 과학적으로 강하게 부정하셨는데 언제 어떤 계기로 주님의 부활을 이해하고 믿게 되셨기에 좋은 직업을 포기하시고 신학을 전공하시고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목사가 되셨는가요? 그 날에 그 목사님과의 귀한 만남을 통하여 은혜로운 신앙 간증을 듣게 될 날을 오늘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2021년 4월 3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목양칼럼 # 235 하늘로 시집가신 어느 주일학교 선생님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들의 마음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인이 많든 적든 간에 교회안의 지체 중 한분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들의 아픔으로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밤잠을 설치며 아파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간절하게 기도하였어도 응답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목사는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 주간에 친구 목사님이 카톡으로 긴급하게 기도를 요청하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내용인즉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시는 여 선생님이 3 개월 전에 뇌출혈로 수술을 받고 깨어나지 못한 채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하늘나라로 시집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지난 수개월 동안 만날 때마다 고인의 상태를 수시로 보고하면서 기도를 요청해 오셨기에 어느 정도로 위중한 상태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젊은 나이셨기에 곧 회복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친구목사님과 교회의 성도님들이 너무도 간절하게 계속해서 기도해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빠르게 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성도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것을 알기에 전화로 목사님과 사모님을 위로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고인이 얼마나 성실하게 교회를 섬기셨기에 목사님과 성도들의 마음에 큰 아픔과 섬김의 자취를 남기시어 모두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셨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고인은 대학을 졸업한 후 교사로서의 삶을 살아오면서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교사로의 충성스러운 헌신의 삶을 사셨습니다. 특별히 친구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지난 5 년 동안 모범적인 교사로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의 본을 삶으로 보여 교인들로부터 천사라는 칭호를 받으셨습니다.

어려서부터 믿음 안에서 성장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신장병으로 투석을 해오며 고생 했습니다. 병이 깊어지면서 직장 생활을 계속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주일학교 교사 마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고인의 건강을 염려하는 목사님을 향하여 이런 말을 남기기도 하셨답니다.

“자기는 예수님 없이는 못사는 사람이라며 육신의 질고로 고난이 깊고 크지만 이 모든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믿음을 하나님이 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삶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상에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공하기 위해서 입니까? 부자가 되기 위해서입니까? 행복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목적은 세상이라는 징검다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원하는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삶은 성공한 삶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이 귀한 것도 세상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천국에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늘로 시집가신 선생님은 비록 세상에서는 평범하지 아니하고 원하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는 못하시어 실패한 것 같지만 그 누구보다도 성공한 믿음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다시는 눈물도 아픔도 죽음도 없는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신랑 되신 예수님의 품에 정결한 신부의 몸으로 안기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선생님을 보내시며 아파하시는 교회 성도님들과 고인의 가족 모두에게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로 18절의 말씀으로 위로 드리기를 원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 말씀의 위로가 사랑하는 딸을 먼저 주님께 시집보내신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임하시길 기도드립니다.

2021년 3월 24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목양칼럼 # 234 고난절에 생각하는 주의 십자가!

두 번의 성지 방문을 통하여 가장 은혜 받은 곳은 예루살렘에서의 주님이 십자가 지셨던 골고다였습니다.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성지를 방문하면서 크게 은혜 받는 것은 기독교가 우화적인 종교가 아니라 역사적인 종교라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보고 확인하며 오감으로 느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도 감동과 은혜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빈 무덤과 성령님이 강림하셨던 마가요한의 다락방과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던 곳도 은혜의 도가니였으며 감람산 정상에서 천사의 옹위를 받으시며 승천하신 곳도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장소였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부활했던 무덤이 실제 존재함을 통하여도 놀라움과 함께 충격을 받는 곳입니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무덤이 붕괴의 위험 때문에 일반인에게 방문이 허락되지 않고 무덤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만 처음 방문했을 때인 30여 년 전에는 나사로의 무덤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은 지하 3층으로 나선형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는데 그 무덤의 규모와 정교함이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죽었던 나사로가 수의를 입은 채 묶인 몸으로 그 많은 돌계단을 올라와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덤 안에는 나사로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저들의 무덤은 우리와 같이 개인 무덤이 아니고 가족 무덤이기에 무덤의 구조가 산 자의 무덤과 죽은 자의 무덤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무덤의 문이 있는 것은 수시로 안에 들어가서 시신의 형태를 살피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례시 시신에 향유를 붓고 장례를 하는 것입니다.

뼈만 남으면 그 뼈를 항아리에 담아서 보관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있는 모든 자를 향하여 다 나오라고 하셨으면 그곳에 잠자던 자들도 다 나오게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의 방문에서 필자가 가장 큰 감동과 충격을 받은 곳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장 방문하기 힘든 곳은 그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좁습니다. 여러 사람이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비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체로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곳을 방문하지 못합니다. 너무도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필자가 두 번째 그곳을 방문 했을 때는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없을 때 였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과 전쟁이 예고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저와 함께 미국에서 여행을 하기로 한 40여명이 출발하기 일주일 전에 모두 여행을 취소했습니다. 여행사 담당자게 제게도 취소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거절했습니다. 어떻게 주어진 기회인데 하루라도 빨리 가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돌아와서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지를 방문하는 것은 성경을 수십 번 읽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처음 방문하고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위험 부담을 가지고 저의 부부만 여행 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두 나라는 관광수입으로 사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국 내에서 여행자의 안전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여러 발의 총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는 십자가 지셨던 곳을 방문하기 어렵지만 긴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을 방문하기 전에는 큰 감동과 은혜를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골고다는 바위산입니다. 전체가 통 바위처럼 느껴졌습니다. 십자가가 선 곳은 눈으로 볼 수 없게 가려져 있습니다.

4인 용 밥상크기의 사각으로 된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둘레는 모두가 천으로 덥혀 있었으며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앉으면 손으로 가려진 천을 들치고 손으로 깊게 패인 바위를 더듬어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느낌으로 주의 십자가 선 그 곳은 페인트 1 갤런 크기의 넓이와 깊이로 패어져 있었습니다.

나무 십자가를 그곳에 세우고 작은 여러 개의 돌로 고이게 해 세운 것입니다. 깊게 패인 바위를 손으로 몇 번 훔치는데 감당할 수 없는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높이 달리신 예수님의 몸에서 쏟아져 내린 보혈이 그리로 흐른 모습이 연상되었습니다. 나의 구원이 주의 피로 말미암을 느끼게 하셨습s니다.

2021년 고난주간에 우리 위해서 피 흘려주신 골고다 언덕의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2021년 3월 18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목양칼럼 # 233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하는 봄!

말라 죽은 가지 같았던 과실 수들이 하나 둘씩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펴면서 푸른 새 순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봄이 온 것을 가장 먼저 알린 것은 오렌지 꽃과 복숭아꽃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살구와 사과나무에서 꽃이 피기 시작했으며 지난 주간에는 감나무에서 새 순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체리와 대추가 뒤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나무들이 계절이 바뀜을 자신들의 변화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성이 무딘 필자와 같은 사람도 자연의 변화를 가까이서 보면서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생동하는 계절의 변화를 통하여 자연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같은 땅에서 같은 햇빛을 받으며 자라는데 모두가 하나같지가 않습니다. 나무마다 같은 꽃이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각기 자기의 이름대로 다른 모양의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각기 다른 모양의 잎이 돋아나게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왜 각기 다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아는 것은 살아 있는 나무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잎이 피고 꽃이 피며 때에 맞게 열매를 맺습니다. 왜 나무들이 종류대로 열매를 맺는 것일까요? 심는 이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보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일하는 농부들에게 결실의 기쁨을 안겨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보면서 사도바울이 왜 성도들을 향하여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 하셨는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은 내가 기쁘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대접과 환영을 받습니다. 사람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기쁨의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된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기쁘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기쁨은 나만의 기쁨이 아닙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며 이웃의 기쁨이 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슬픔을 가진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항상 기뻐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선 좋은 땅에 심기어져야 합니다. 물이 마르지 아니하는 시냇가에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땅에 심기어질 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축복의 땅에 뿌리를 내리도록 허락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사람마다 세상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복 있는 사람은 룻처럼 보아스의 땅에서 이삭을 줍도록 허락 받는 것입니다, 첫 결혼에 실패한 룻이 보아스의 땅에 들어가 이삭을 주었습니다.

이삭을 줍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알의 이삭을 줍기 위해서 허리를 굽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허락하신 교회 안에서 한 알의 이삭을 줍는 것 같은 믿음의 행동을 지켜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땅의 주인인 예수님의 그림자 보아스인 것입니다.

이방의 실패한 여인 룻이 보아스의 땅에서 이삭을 줍는 일로 보아스의 마음에 들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길 원하노라”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로인하여 가장 천하고 멸시 받으며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룻이 하루아침에 신분의 변화를 받아 그 땅에서 가장 존중히 여김을 받는 축복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생각과 걸음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무엇을 위하여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 가를 불꽃같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하루하루의 우리의 삶이 주님의 마음에 감동과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아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021년 3월 14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우리의 소망과 자랑(살전 2장 19 – 20절) / 여전도회 총회 개회설교

사람마다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에 소망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소망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씨앗과 같아서 정한 때에 심어야 합니다. 아무 때나 심는 것이 아닙니다. 심는 장소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 심어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심는다고 다 결실하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양분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누가 그것을 해야 합니까? 내가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나의 행복, 나의 기쁨은 남이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본문에도 우리의 소망, 우리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기쁘지 아니하면 남에게 기쁨을 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기쁘지 아니하면 주님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전도회를 섬겨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입니까?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교회에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소망과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성령님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소망을 가지되 예수안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기쁨이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세상이나 물질이나 가문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의 사람이 된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교회 여전도회는 주님이 인정하시는 여전도회인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수고한 모든 수고를 다 기억하시고 하늘의 상급으로 예비하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힘을 모으고 여전도회 총회로 모인 것은 목적이 하나입니다. 누구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함입니까?

주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런 여전도회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상기 목사
2021년 3월 14일 / 친교실에서

목양칼럼 # 232 교회 뜰에 심은 튤립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는 봄이 왔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가는 세월 막지 못하고 오는 세월 막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세월을 역행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의 법칙과 정하신 순리에 복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해 말 교회를 섬기는 부목사님이 꽃씨를 뿌리면서 튤립 씨앗도 40개를 사 오셨습니다. 생김새가 작은 양파처럼 생겼으며 모양도 그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30센티미터 간격으로 땅을 파고 심을 때 곁에서 지켜보면서 과연 이것이 3-4개월 후 어떤 모양의 꽃을 피울까에 대하여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는 지난 서너 달 동안 튤립을 심었던 기억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서너 주일 전부터 대지를 뚫고 푸른 잎을 세우며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오늘은 그 중 하나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한 번도 튤립을 심어보지 못했고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고 신비로우며 아름다운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서 하나님의 솜씨를 새삼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 어느 누가 만물을 소생케 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만물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솜씨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름답게 피어나는 튤립 꽃을 보면서 갈라디아 6장 7절의 말씀이 기억되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렇습니다. 심지 아니했으면 기쁨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무엇을 심을 것을 먼저 생각하고 필요한 양을 계산한 후 정해진 장소에 가서 값을 지불하고 사다가 땅을 파고 거름을 덮으며 때마다 필요한 물과 양분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그 일을 누가 해야 합니까? 나의 기쁨 나의 행복은 남이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126편의 기자는 5–6절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행복하길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우연하게 오지 않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아픔의 눈물, 하늘과 땅의 풍성한 축복을 보상하는 희생과 헌신의 씨앗을 뿌리고 또 인내로 뿌리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결실할 때 비로서 감동과 감격의 기쁨과 행복을 내가, 우리가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 않고는 거둘 것이 없습니다. 돌보지 않고는 내게 돌아올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5장 7–8절에서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운동장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구경하는 사람과 경기하는 선수들 그리고 경기를 진행하는 심판이 있습니다. 구경꾼에겐 상이 없습니다. 아무리 여러번 경기장에 들어가도 상이 없습니다. 경기를 운영하는 위원이나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선수에게는 상이 있습니다. 언제 상이 주어집니까?

경기에 이긴 자입니다. 세상에 쉬운 경기는 없습니다.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선 많은 연습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경기하는 동안 잠시도 방심하거나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때로는 죽기를 각오하고 경기에 임하지 아니하면 적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늘의 상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2021년 3월 5일
이상기 목사

목양칼럼 # 231 코비드–19 백신 2차 접종을 받았습니다.

지난 금요일(2월 26일) 오후 집에서 20 마일 떨어진 곳에서 코로나 백신 2 차 접종을 받았습니다. 일차 접종을 받은 지 30일 만이었습니다. 2 차 접종은 일차 접종 장소와 다른 곳에서 받았습니다. 일차 때는 대학교 넓은 주차장의 간이 텐트에서 주사를 맞았는데 이번에는 대형 마켓안의 약국에서 맞았습니다.

일차 접종 때 주사하는 간호사님이 3 주일 후 전화로 2 차 예약을 통보할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주변에서 접종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전화로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을 통하여 2차 접종 일자를 받습니다만 필자에게 접종 주사를 해준 곳의 간호사님은 전화로 통보가 갈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간호사님이 말한 대로 정확히 3 주일 째 되는 날 전화로 2차 예약 장소와 일자 시간을 받았습니다. 일차 접종 후 3 주간이 지나는 동안 약속대로 전화로 통보 받는 것에 대해서 약간의 의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3 주후 전화로 연락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담당 간호사님이 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4 주 까지 기다렸다가 그래도 연락이 가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전화로 알려 달라고 했었습니다. 계획한 대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백신을 관장하는 행사 요원들에게 신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염병에서 한 사람이라도 구하기 위해 수고하시는 분들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연일 보도되는 백신 뉴스에 의하면 아직도 주변에 많은 어르신들이 1차 백신도 맞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2 차 접종에 필요한 백신 공급이 원활치 못하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한 일자와 장소에서 예정대로 2차 접종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려움 없이 2차 접종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일차 접종 때와 같이 백신을 맞기 전 집에서 출발하면서 있을지도 모를 후유증을 대비하여 의사들이 추천해 주는 타이레놀 500mg을 가지고 갔습니다. 2차 접종을 받으신 분들이 일차 때와 달리 더 심한 통증이 있었다고 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1차 때와 달리 2 차 접종 후에 필자도 약간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정하고 다음 날 집에서 온 종일 쉬면서 타이레놀을 시간에 맞춰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통증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아픔 자체가 몸 안에서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백신을 맞는 다음 날 온 종일 피곤함을 느껴서 두 번에 걸쳐서 타이레놀을 2 알씩 4 알을 먹고 잠이 오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잠에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3 일째 되는 주일 날 아침은 몸이 정상적으로 회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큰 어려움 당하지 아니하고 회복케 해 주신 은혜를 주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백신을 원하는데도 자신의 차례가 되지 않거나 백신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서 애를 태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19의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속히 모든 분들에게도 충분한 백신이 공급되어 모두가 빠르게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크게 수고하는 이름 모를 모든 의료진들에게 큰 박수와 함께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위정자들에게도 같은 마음을 전합니다. 코로나 사태를 당하면서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 백신 접종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미국은 부자라고 먼저 맞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력자라고 앞서 맞을 수 있지도 않습니다. 힘 있는 자라고 먼저 맞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와 같이 평범한 사람도 큰 애를 쓰지 않고도 쉽게 맞을 수 있었습니다.

백신을 관장하는 담당자들이 정한 절차에 따라 무상으로 누구나 코로나 예방 주사를 맞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하늘의 은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항상 우리를 도우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코로나의 위기로부터 모두가 벗어나 다시 밝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복된 날을 기대합니다.

2021년 3월 1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목양칼럼 # 230 목사님은 행복한 목사님이십니다!

40년 동안 동일한 지역에서 같은 교단에 속한 동역자로 교제를 이어가고 있는 절친한 친구 목사님이 계십니다. 오랫동안 한결 같은 마음으로 변하지 아니하고 지금까지 교제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은 목회 연수도 비슷하고 나이도 같고 자녀들의 숫자(일남이녀)도 같으며 손자녀들의 숫자도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목회 정보를 교환하며 서로의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함께 가벼운 운동을 하기도 합니다. 지난주는 세 목사님 부부가 가까운 산을 오르기도 했습니다. 구슬땀을 흘리며 언덕진 산등성이를 돌다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서 나무 그늘에 서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친구 목사님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우리 중 행복한 목사님이십니다” 그것을 아십니까? 갑작스런 질문을 받고 아멘이라고 입으로 말하며 머리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왜 그런 장소에서 그 말을 하시는 의도가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가 않았습니다.

하산 하는 동안에도 그 말이 반복해서 울림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 밤에 깊은 잠에서 깨어났는데 다시 “목사님은 우리 중 가장 행복한 목사님이십니다“는 말이 잔잔하게 귓가에 메아리치고 있었습니다. 친구 목사님은 왜 필자가 행복한 목사인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으셨습니다.

주변의 동역자 중에서 한 교회를 40년 이상 섬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교회가 빚이 없이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가정의 복, 자손의 복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Lip service로 여길 수도 있지만 존경하는 친구의 말이기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서 친구 목사님의 말을 조용히 음미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회 초년 시절엔 지금처럼 Long run을 하리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난 40년 동안 부족한 종을 도우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제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내가 특별해서도 아닙니다.

목회 성공의 비결은 좋은 교인을 만나는 것입니다. 목사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좋은 성도를 만나지 못하면 성공적인 목회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게 하나님을 크게 사랑하시며 하나님께 사랑을 크게 받는 성도님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지금도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는 30년 이상 되신 분들이 계십니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아들 같은 젊은 목사로 목회 경험이 전혀 없는 안수 받은 지 2달 밖에 되지 아니한 저를 설립 당시부터 36년 동안 변함없이 충성스럽게 섬겨주시다가 주님의 나라에 가신 고 김시철 장로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장로님은 36년 동안 한 번도 공적 예배에 빠진 적이 없으셨습니다.

다음으로 행복한 목사인 이유는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빚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팬데믹으로 교회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 당하지 아니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움 당하면 크게 걱정하는 사람은 교회 재정을 집행하는 재정부장 장로님과 교회를 담임하시는 목사님이십니다.

30여 년 동안 교회 건물 페이먼트로 어려움 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의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재정이 어려워도 건물 페이먼트는 미룰 수 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님께 지불되는 목회비도 여러 달씩 건너뛰어야 하는 때도 있었으며 때로는 목회비의 작은 일부를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받지 못한 것 자손들에게 갚아주시되 복리에 복리를 계산하고 더하시어 자녀들에게 주시길 수십 년 동안 반복해서 기도해 왔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고 자녀들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축복하셨습니다.

이를 아는 친구 목사님은 기도하실 때마다 이 목사님의 받은 교회의 복과 가정의 복과 자손의 복 주시길 기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행복한 목회를 받고도 자랑이나 교만으로 비쳐질까 말하지 못해온 필자에게 “목사님은 우리 중 가장 행복한 목사입니다”라고 말해 준 친구 목사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2021년 2월 17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목양칼럼 # 229 살아가면서 배우는 삶의 지혜!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교회 마당의 과실 수들을 보면서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간절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해 이른 봄에 교회 당 주위에 심은 여려 종류의 과실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푸르른 잎들을 머지않아 돋아나게 할 것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바람은 나만이 아닙니다.

교인들 중 지난 해 과실 수 심는 것에 동참하지 못하신 어르신들이 자신들의 이름으로 남은 공터에 과실 수를 심으면 좋겠다고 자원하셔서 지난 주간에 부목사님과 함께 3그루의 과실 수를 사다가 심었습니다. 지난 해 심은 20여 그루의 과실 수 중 다른 것은 다 잘 자라서 첫 열매의 수확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두 구루 블루베리는 실패했습니다. 같은 정성과 수고로 살폈지만 다른 나무들은 잘 자란데 반하여 블루베리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번에 화원을 방문해서 블루베리가 죽은 이유가 토양 때문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무가 살고 죽는 것도 우리의 수고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그 자리에 라임나무를 심었고 다른 곳에는 석류나무와 열매가 작은 오렌지나무를 심었습니다. 필자는 그 동안 매주 두세 번 과실 수에 물을 주어 왔습니다. 자주 많이 주면 좋은 줄 알고 나름대로 정성으로 돌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나무들에도 물을 주는 때와 방법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감나무나 다른 겨울잠을 자는 나무들에게 잠을 자는 동안 물을 반복해서 주면 안 되는 것을 몰랐습니다. 많이 주면 잘 자라는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나무가 잠을 자는 수면기 동안에 물을 주면 나무가 깊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건강하게 뿌리를 내리며 성장하는데 지장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잔디나 과일나무들에 물을 줄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에 생각의 기준, 판단의 기준이 자기중심적인 것을 이번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하는 일이라고 열심하는 일들이 도리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주님이 정하신 원리와 법대로 하는 것이 바른 수고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큰 지위를 가지고 권세를 행하며 하나님을 위한 열심히 가장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종교인들을 향하여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로 만들지 말라시며 요한복음 3장 5절에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말은 죽인다는 말이 아닙니다.
심판의 주재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다면 그 말이 정말로 두렵고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유는 우리의 생이 다하고 나면 우리의 선택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가고 싶다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가기 싫다고 안 갈 수 있는 곳도 아닙니다. 천국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 강하는 곳은 영원한 위로와 안식이 없는 곳이기에 두렵고 겁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상류사회를 이끌어가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믿음의 사람 된 우리 각 사람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큰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하여 ‘살전 5장 16-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세상살이가 힘들고 고단해도 인생의 끝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앞에 예비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시련과 고통은 우리를 낙심케 하고 절망케 하지만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이 동행하심을 인하여 기도하라 십니다. 너희가 받지 아니함은 구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삶이 우리의 원대로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나의 편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2021년 2월 14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