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스카 여행기

알라스카 여행기<1>

지난해 7월 14일 밤 8시 비행기로 집 사람과 함께 롱비치공항을 떠나 5시간 만에 사랑하는 손자·손녀들이 살고 있는 알라스카의 앵커리지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지난 십 수 년 전에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셨던 고 최재만 집사님 가족이 알라스카 크루즈여행을 하면서 우리 부부를 초대해 함께 여행을 한 후 두 번째 방문이었습니다. 처음 앵커리지를 방문했을 때는 작은 규모의 공항에 익숙지 못했었는데 금번에는 놀랍게 변한 현대식 공항 모습에 알라스카가 빠르게 발전하는 신도시가 되고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둘째 사위가 어려운 공부를 마치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있을 때 내과의사로 3년 동안 근무하던 우리가 살고 있는 집 근처 남가주로 직장을 구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집 사람이 오랫동안 어려운 병과 싸움을 하고 있기에 전문 의료인의 도움이 항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장내과 전문의가 되고서 새로 얻은 직장이 알라스카로 정해진 것입니다. 너무 멀고 낮선 곳으로 새로운 직장을 택하여 떠나갈 때 우리 내외의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랑하는 손자·손녀들을 보고 싶을 때 마음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급할 때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이 우리 부부에게 특별한 것은 그 동안 집 사람이 비행기를 탈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무사히 사랑하는 손자·손녀들을 만날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기적이 있지만 오늘 나에게 임한 기적은 집 사람과 함께 하늘을 날아온 것입니다. 의학적으론 어려운 결정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습니다. 늦은 밤까지 어린 손자·손녀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다 늦게 잠이든 방을 새날이 밝아 들어가 보니 한 침대에 3명의 손자·손녀와 집 사람이 붙어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가로로는 네 명이 한 침대에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세로로 발끝이 침대 끝에 달린 자세로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보지 못하던 집 사람과 아이들이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할머니 몸에 손을 잡고 좁은 공간에서 행복한 잠이 든 모습을 보면서 어린 손자·손녀를 사랑하는 할머니의 사랑이 무엇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알라스카를 방문하면 아이들하고만 있다가 올거에요! 당신은 며칠 여행을 해요!”

알래스카를 방문한 둘째 날 아내의 권유로 2박 3일의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나를 위해 수고하셨으니 이번에 좋은 시간을 가지라는 권고로 현지 한국인 관광회사를 통하여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북미 최고봉인 맥킨리 산이 있는 디날리국립공원과 여름에는 해가지지 않는 다는 페어뱅크스를 방문하기로 한 것입니다. 디날리국립공원은 앵커리지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한국인 산악인 고상돈 씨의 아픈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국인 최초로 히말라야 정상을 1977년에 정복하고 미주한국일보지사 설립 10주년을 기념하면서 1978년에 LA 미주한국일보사 내 전시장에서 히말라야 사진전을 개최했었습니다. 그 때 저도 사진전에 참석해서 고상돈 씨와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1979년에 6명의 전문 산악인들로 구성된 맥킨리 산 등정단의 단장으로 참가했다가 정상을 정복하고 하산하는 길에 800미터 빙산 아래로 추락해 31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을 당한 곳입니다. 이번 여행으로 한 동안 잊고 지내던 고 고상돈 씨의 강한 인상이 기억에서 살아나는 듯 했습니다.

알라스카는 남한의 13배에 달하는 광활한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남가주는 지금 극심한 가뭄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알라스카는 풍부한 수자원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3000개의 강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물이 풍부한 곳입니다. 이번에 방문한 북미 최북단의 작은 도시 페어뱅크스(Fairbanks)는 위도선 북위 64도에 해당하는 인구 41,000명의 군사 도시로서 그곳에 우리 교포들이 600여명이나 거주하고 계셨습니다.

알라스카 여행기<2>

이번 여행을 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축복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젊어서는 어려운 병으로 생사의 갈림에서 고통당하게 하시더니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므로 지난 40여년의 삶을 놀랍게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삶을 계획하지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나를 주님은 인도자가 되시어 지금의 내가 되게 하셨습니다. 가정의 복을 주셨습니다. 자녀의 복을 주셨습니다. 손자·손녀들의 복을 주셨습니다. 교회의 복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실수 없이 복음을 전하는 종의 길을 부족하지만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특별히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여행의 복을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33년의 목회 활동 중 5번의 남미 선교여행과 두 번의 성지여행과 1번의 유럽여행 그리고 중국 및 백두산을 보게 하시고 오래 전에는 결혼주례를 받은 가정이 결혼기념 10주년을 기념하면서 자신들이 신혼여행을 다녀온 하와이로 우리 내외를 여행케 했습니다. 그리고 알라스카를 다시 여행할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니 이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라는 것을 이번에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나에게 향하신 주님의 인자하시고 사랑하시는 손길을 확인하게 된 것은 정말로 큰 기쁨이요 감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발길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곳으로 이동할 때마다 마음으로 입으로 영혼으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하심을 감사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사람의 손과 발길이 닿지 않게 하신 대 자연을 보는 알라스카는 정말로 감동의 연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한 땅의 13배에 달하는 거대한 땅에 인구는 고작 70만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중 30만이 앵커리지에 살고 있고 해변을 중심한 작은 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 넓은 지역에서 뿜어져 나오는 산소들이 지구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원시림으로 가득한 아마존을 방문했을 때 경험했던 것처럼 이곳의 공기도 충분한 산소량으로 한없이 맑고 깨끗해 신선함을 더해주었습니다. 여행 중에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에서 2박 3일의 일정으로 지금 같은 무리한 여행을 했다면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만 자동차로 첫날에는 14시간을 여행 했는데도 피곤치가 않았던 것입니다.

특별히 페어뱅크스는 지구상에서 밤과 낮의 길이가 가장 길고 짧은 곳입니다. 어려서 배운 기억으로 6개월은 밤이고 6개월은 낮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임을 이번에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지금 그곳은 밤이 없습니다. 새벽 1시 2시에도 마치 비 오는 날 해가 가린 날씨처럼 창문을 가리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환한 상태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었던 내게는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방문에서 뉴스로만 듣던 알라스카 송유관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나서 우리를 미국에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처럼 미국은 나약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라스카 송유관은 1971년에 시작하여 1974년에 끝이 났습니다. 북해 바다에서 기름을 추출해 800마일 떨어져 있는 항구도시로 송유관을 통하여 배에 실어서 본토에 있는 정유공장으로 보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라스카는 기름 값이 싸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남가주보다 더 비쌉니다. 미국에서 기름 값이 가장 비싼 곳은 기름이 나는 북극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은 대단한 나라입니다. 위대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미국의 정치가들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는 지구상에서 미국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오일 파동이 있을 것을 알고 대비한 것입니다. 송유관에 사용된 파이프를 만들 수 있는 곳은 일본 밖에 없어서 일본이 제조한 것으로 공사를 마치고 그 기름으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역사를 이루지 못했으면 지금의 우리는 심각한 오일 문제로 큰 혼돈에서 방황했을 것입니다.

이상기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2569

L 집사님의 아름다운 우정!

L 집사님은 16년 만에 부인과 함께 지난 10월초 한 달간의 일정으로 꿈에 그리던 고향 땅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수년 전 장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고국을 방문하지 못했던 것은 서류미비자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한 때는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활발한 사업과 사립학교 설립자로 활동을 하다가 학교 교사 건물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부도를 맞아 그동안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일구어오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빈손으로 사랑하는 네 명의 자녀와 함께 40대 중반의 나이에 미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지난 16년 동안의 삶은 초창기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그러했듯이 빈손으로 고국을 떠나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서 격어야만 했던 어려움을 온 몸으로 체험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타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인 줄 알았다면 미국행을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만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앞만 보고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이민 생활 16년 동안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들이 10여 년 전 12살 되던 해에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어려운 병으로 고생하다가 부모의 곁을 떠나 큰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만 이후 두 딸이 가정을 이루어 외손자 둘과 외손녀 하나를 얻어 위로와 기쁨이 되셨습니다. 이에 더하여 큰 딸 가정을 통하여 그토록 간절하게 소원하던 영주권을 받으신 것입니다. 서류 미비자로 살아가는 동안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엄두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계획 없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주권을 받은 후 끝이 보이지 아니하던 어둠의 긴 터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은 새 삶의 용기와 희망이 생겼습니다.

지난 16년 동안 식당 주방에서 부인이 일을 해오면서 음식을 만드는 것에 자신이 생긴 것입니다. 이제는 종업원으로서가 아니라 식당의 주인으로 일을 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마침 일하는 한인 타운의 유명한 큰 쇼핑센터 건물 내 음식 백화점의 여러 식당중 하나가 매물로 나왔습니다. 인수 가격은 10만 불이었습니다.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럴만한 큰돈을 만들 방법이 없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먼저 이민 와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학교 동창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거절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근심을 반복하다가 어렵게 친구를 찾아가 입을 열었습니다.

친구는 생각해보자는 말도 하지 아니하고 즉석에서 도와주겠다고 선뜻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식당을 인수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L 집사님은 며칠 동안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식당을 인수하면 그동안 주방에서 일 해온 아내의 실력으로 성공할 자신이 있었지만 만에 하나 실패할 경우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럴 경우 친구도 잃고 돈도 잃을 것 같아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다가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매물로 나왔던 식당은 15만 불에 다른 사람에게 팔렸습니다. 불과 한 달 만에 5만 불이나 비싼 값에 팔린 것입니다. 아차 하는 생각도 했지만 후회는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던 큰 딸이 아버지를 향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지난 16년 동안 미국에서 살아온 것이 실패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에게도 어려울 때 큰 도움을 주는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을 보고서 아버지가 이 땅에서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국으로 떠나기 수일 전 L 집사님을 통하여 이 말을 들으면서 참으로 좋은 친구를 가지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과 같이 각박한 이민사회에서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100%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조건 없이 10만 불의 큰돈을 빌려주겠다는 친구도 훌륭하지만, 만일을 생각해서 그 돈을 사랑하는 친구에게 도움을 구하다가 다시 거절한 L 집사님의 결정도 이에 못지않기 때문입니다.

부인은 남편의 친구가 식당 인수 자금을 빌려 주겠다는 말에 며칠간 꿈에 부풀었다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거절한 남편의 행동에 대해서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아 힘들어 했지만 깊은 고민 끝에 결정한 남편의 뜻을 존중해주고 가벼운 마음으로 고국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가뭄에 단비와 같은 이 아름다운 우정이 우리에게 삶의 동력으로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L 집사님과 그의 좋은 친구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이 늘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2504

34년 동안 한결같은 K 권사님

다가오는 1월 4일은 필자가 섬기는 평강교회가 설립 34주년을 맞이하는 기념 주일입니다. 금번 기념일이 특별한 것은 한 달 전 주님께서 기도 응답에 대한 축복으로 예배당을 허락하셔서 29년을 한 장소에서 예배를 드려 오는 동안 건물에 대한 페이-오프를 하고서 건물 소유권을 은행으로부터 돌려받았기 때문입니다.

길고도 지루한 세월이긴 했지만 막상 돌이켜 생각하니 한 순간에 지난 것 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필자가 소개하길 원하는 분은 교회 설립일 부터 지금까지 교회를 섬겨 오신 K 권사님입니다. 권사님이 필자와 우리 교회에 특별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34년 동안 변함없이 강단에 설교자를 위해 물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한두 번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 년 아니 수년을 계속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 권사님은 설교자를 위해서 강단에 물을 바치시는 것을 교회 설립 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계신 것입니다.

내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그 일을 계속 하시겠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하시어 다른 교우님들은 그 일을 생각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권사님이 한 주간에 강단에 바치시는 물은 주일 낮 예배와 오후 예배 그리고 수요 예배와 금요 기도회 때입니다. 지금까지 권사님을 통하여 강단에서 마셔온 차의 숫자를 세어본 적이 있습니다. 약 7,000회가 넘었습니다. 주님은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잔을 대접한 상까지 잊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는데 권사님이 받으실 상급이 과연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일까에 대해서 생각을 해봅니다.

권사님이 강단에 물을 바치는 것은 단순한 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늘 같은 잔에 바치는 것으로 생각이 될 수 있지만 받는 필자는 매 번 맛이 다른 차가 강단에 오르는 것을 경험합니다. 한 번은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강단에 물을 바치기 위해서 설교자의 건강을 살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이런 내용으로 기도 하십니다. “이번 주일에는 어떤 것으로 강단에 올려 드릴까요?” 그렇기 때문에 한 번도 같은 내용의 물이 연속적으로 강단에 올라오지 않는 것입니다. 매번 다른 종류의 차가 오르는 것입니다. 그 날의 기후와 설교자의 컨디션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러다보니 K 권사님의 손길을 통하여 마셔본 차의 종류도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어디 특별한 차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그것을 구해다가 강단에 올리시는 겁니다. 여름에는 차 잔에 얼음을 가득 넣어 올리시어 설교하다가 땀이 날 때는 시원한 찻잔을 잡기만 해도 큰 힘이 되는가하면 추운 날에는 무겁고 투박한 잔에 뜨거운 차를 준비해 잔에서 올라오는 따사한 온기를 느끼며 설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권사님의 사랑과 정성이 설교자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가 모릅니다.

그런데 요즘 K 권사님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그렇게 늘 건강하시고 항상 변함이 없으실 것 같으셨던 권사님의 발걸음이 예전과 같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80세 중반에 들어서시는 권사님이 얼마 전부터는 주일 오후나 수요 예배 시 아래 강단에 물을 바치시기 위해서 올라오실 때 힘들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위의 강단은 오르는 계단이 낮은데 반하여 아래 강단은 권사님이 오르시기에 이제는 높기 때문입니다. 이를 아는 필자는 행여나 넘어지실까 조심이 되어 권사님이 물 잔을 가지고 아래 강단으로 나오실 때는 계단 아래로 다가가 정성스레 준비하신 차를 받아가지고 강단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만일 K 권사였다면 나도 34년 동안 변함없이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 나만 한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있지 않은가?” 불평도 할 수 있고 이제는 그만 하겠다고 선언할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봉사하시면서 좋은 때만 있으셨겠습니까? 다른 교우들에게 시기의 대상이 될 때도 있고, 스스로 시험이 될 때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필자가 K 권사님을 귀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시험에도 중단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권사님이 교회를 오실 때에는 늘 두 개의 가방을 양손에 들고 오십니다. 물론 하나의 가방에는 집에서 정성으로 준비해 담아오는 보온병과 잔을 바치는 작은 쟁반 그리고 흰색이 아닌 예쁜 색깔의 냅킨이 담겨져 있습니다.

권사님!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셔서 지금처럼 권사님의 뜨거운 정성과 사랑의 섬김을 통하여 큰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2395

Mr. Most 씨의 특별한 아내 사랑!

필자가 사는 이웃에 부인은 한국인이고 남편은 미국인인 부부가 살았습니다. 자녀는 의사 아들 하나를 두고 있습니다. 이 가정과 20여 년째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두 분이 부부의 인연을 맺은 것은 남편 Most씨가 미 8군 헌병 장교로 서울에서 근무할 때 만나 가정을 이룬 것입니다.

부인의 종교는 불교였고 남편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에 살면서도 가까운 대화는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 분의 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수인사를 나누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 10여 년 전에 한국인 부인이 유방암으로 투병하면서 조금씩 가까워 졌습니다.

처음에는 목사인 필자를 의도적으로 멀리하려 했지만 병세가 깊어 가면서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기도하자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기독교를 적대시 했었는데 기도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환자만 아니라 남편도 부인의 병세가 회복이 어려운 상황에 빠지자 정식으로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당신이 믿는 신에게 미안하지만 집 사람의 회복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좋으니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두서너 달 전에는 자신의 생명이 다한 것을 알고서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을 정리하여 가까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 년 전 어느 해 봄이었습니다. 토요일 낮에 남편에게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집에서 부인이 방금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연락을 받고 달려가 보니 아들이 운명한 어머니의 품에 기대어 말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임종을 하기 수일 전부터 삶과 죽음의 문턱을넘나들다가 동부에서 살고 있는 아들이 도착하기까지 힘들게 기다렸다가 아들의 품에서 두 서너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남편에게 장례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장지는 어디입니까? 남편은 장례식을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장례식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보다 더 기막힌 것은 상을 당한 가정에 조문객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남편의 친구나 형제, 아들의 친구나 이웃도 없었습니다. 물론 영정사진도 없었으며 한 사람도 상을 당한 가정을 위로하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고작 이웃에 살고 있는 다른 한국인 한 가정만이 다녀갈 정도였습니다. 길을 건너 마주하고 사는 외국인이 상을 당한 집을 나서는 필자에게 다가와 Mrs. Most가 세상을 떠났느냐고 묻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되었습니다. 평소 이웃과 너무 교제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 그동안 무관심했던 것처럼 느껴 쪘습니다. 운명한지 서너 시간 만에 화장터로 향하는 고인은 수의도 없이 임종 시 입고 있던 그 상태로 영구차에 실려 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쓸쓸한 죽음이었습니다. 너무도 안타까운 죽음이었습니다. 이런 죽음 이런 장례는 처음 이었습니다. 예수 없이 살다가 떠나는 죽음이 얼마나 허무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것이 복이라고 하신 말씀이 귀한 것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의 진행이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에 고인을 위해서 집에서 특별히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장의사에서 시신을 가져다가 화장을 한 후 재(Ash)를 집으로 돌려주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2 주일 이상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Ash를 돌려받은 날 필자에게 그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부인이 병상에 있을 때 남편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면 나도 당신 따라 곧 바로 갈 거야? 당신 없는 세상을 나 혼자 살아갈 수가 없어” 그러면서 자살을 위한 수단으로 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난지 서너 달 후 30여 년 동안 살던 집을 팔고 근처 다른 도시로 이사를 떠났습니다. 한 동안 그 분의 소식을 접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고 나서 일 년에 두 서너 번 살았던 곳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사랑하는 부인을 잊을 수 없어 지금도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집 안에 부인의 Ash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만하면 놓아 줄 때도 되었건만 Most씨는 사랑하는 아내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Most 씨가 아내를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2114

어느 홈 리스를 위한 기도 감사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걸인을 향하여 간절하게 기도해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당 뒷마당에 지난 3 개월 동안 홈리스가 잠자리를 만들고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다른 곳으로 돌아다니다가 밤만 되면 그곳에 이부자리를 깔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보기에도 좋지 않았고 청결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매 주일 새벽기도회를 마치면 여전도회 회원들은 예배 후 성도의 교제를 위한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두 분 장로님과 저는 교회당 밖을 청소 했습니다. 건물 앞은 김 장로님이 담당하시고 뒤편은 이 장로님과 필자가 청소해 왔습니다.

교회 뒤편에는 나무가 있어서 늘 나무 잎이 떨어지기에 청소를 하는데 홈리스가 그곳에서 잠을 자는 동안은 청소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 두서너 주는 잠을 자고 있는 주변을 큰 갈퀴를 들고 어두운 새벽을 후레쉬 불을 밝혀 가면서 청소 했습니다. 걸인이 잠에서 깨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우리 일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홈리스를 무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약간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불결해 보이는 걸인의 소유물을 치워버리고 싶은 생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어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떤 날은 걸인에게 다가가 여기는 교회당 뒤 마당이니 이곳을 떠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고 참았습니다. 그런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주님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보신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생각에 뒤돌아서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걸인의 짐이 늘어가고 혼자만 아니라 또 다른 홈리스가 늘어나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10여 일 전부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교회 당 뒤 마당에서 잠자는 걸인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더 좋은 환경과 장소를 허락하셔서 하루 속히 다른 장소로 옮겨 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시작한 후 그 주간에 수요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에게 걸인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데 함께 동참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생각 같아선 걸인이 쉽게 떠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 졌습니다. 주일 새벽 기도를 위하여 이른 새벽에 교회당에 도착하니 그 시간에 건물 뒷마당에서 잠을 자는 걸인이 걸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먼발치서 몇 번 보기는 했어도 정면으로 만나서 대화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아직 어둠이 덮여 있는 새벽이기에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에게 다가가 나의 신분을 밝혔습니다. 신체가 건장하고 키도 나보다 큰 거구의 몸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오래 동안 지켜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건물 뒤편 숙소를 정한 곳의 주변을 청결하게 해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 했습니다. 그 말 밖에 하지 않았는데 걸인은 허리를 굽히고 공손하게 경어를 써 가면서 이렇게 말 했습니다. 오늘 하루 만 이곳에서 잠을 잔 후 다른 장소로 옮겨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내가 부탁해야 하는데 걸인이 한 것입니다. 헤어지고 나서 새벽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갔다가 다시 오전 9시 반에 교회당에 도착을 하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 밤 더 교회당 뒤 마당에서 잠을 잔 후 떠나겠다고 했는데 서너 시간 만에 자취를 감추고 만 것입니다.

그 동안 걸인이 모아 생활하던 물건은 혼자서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는데 흔적도 없이 주변을 청결하게 하고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대로 더 좋은 장소를 예비하시고 옮겨가게 하신 것입니다. 즉시 기도응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 기도를 드렸고 걸인의 영혼을 위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아니하고 다른 방법으로 걸인에게 다가갔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요 14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1982

고 박영조 장로님의 천국 환송예배를 통하여 받은 은혜!

지난 3 월 21일 밤 7시 반에 같은 지역에서 목회하시는 친구이며 동역자인 박재웅목사님의 부친 고 박영조 장로님의 천국 환송예배가 박 목사님이 섬기시는 U&I교회당에서 있었습니다. 박 목사님은 필자에게 가까운 친구로 35년을 지내오는 동안 언제나 가장 많이 만나고 가장 많은 목회 정보를 주고받으며 어려운 일이나 기쁜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슬픔도 함께 하는 친구로 늘 자랑스러워하며 존경하는 목사님입니다.

박 목사님과 필자는 오래전에 약속을 한 것이 있습니다. 둘 중 누가 먼저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나면 남은 자가 먼저 간 친구를 위해서 장례식을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이런 내용을 문서화해서 오래 전에 필자가 섬기는 교회 당회에 [이런 장례식을 원합니다]라는 내용으로 구체적인 내용까지 문서화해서 비치해두고 있습니다. 천국환송예배 중 인사 및 광고하는 시간에 박 목사님은 아버지에 대해서 눈물로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이 고백은 아버지가 한국에 계시기에 전화로 통화할 때마다 늘 드린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 뜨거운 말 한 마디에 우리 모두의 가슴을 적시는 진한 감동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듣기 어려운 아니 들어보지 못한 아름다운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들 목사님이 아버지 장로님을 존경한 내용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래전에 그런 말을 하셨습니다. 아들 다섯 중 셋째인 박 목사님을 하나님의 종으로 어려서부터 서원하여 바치셨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들에게 목사의 꿈을 갖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늘 하게 하신 것이 있으셨습니다.

섬기시는 교회 목사님 댁에 심부름을 갈 때마다 다섯 아들 중 언제나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댁에 갈 일을 전담해서 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준비하신 정성된 선물이나 좋은 음식을 들고서 아버님의 심부름으로 목사님사택에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면 늘 목사님이 반갑게 맞아 주셨고 그런 자신을 향하여 아버지를 대신해서 축복 기도를 받게 하신 것인데 지나고서 생각하니 어려서부터 자신에게 목회자의 꿈을 갖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부터 어린 마음에도 세상에서 가장 복되고 귀한 일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게 하시므로 평생 다른 일은 꿈도 꾸지 않고 오직 주의 종이 되기 위한 삶을 향하여 달려가게 하시어 오늘의 자신과 교회가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고인은 92세의 나이로 부르심을 받기까지 지인의 전도로 예수를 믿은 후 62년 동안 한 교회만을 섬겨 오셨습니다. 섬기셨던 교회의 설립자 중 한분으로 섬기신 것입니다. 그 숫한 세월 동안 한 교회를 섬겨오면서 왜 어려움이 없으셨겠습니까? 왜 아픔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교회를 위해서 온 맘과 정성으로 희생하시고 헌신하셨던 것입니다.

장로님은 평생 새벽기도, 평생 가정예배를 드리셨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릴 때마다 매일 3 장의 찬송을 하셨고 수년 전 부터는 가정예배시마다 6장의 찬송을 하셨습니다. 국가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하시기까지 44년 동안 근무하시는 동안 정부로부터 무공훈장까지 받으신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교회와 자녀들에게까지 존경받으신 참 믿음의 삶을 사셨습니다.

유족으로 5남 1 녀를 남기셨는데 그 중 네 아들과 사위가 장로님이고 네 자부와 딸은 권사요 셋째아들은 목회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천국환송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고인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이 시대 보기 드문 장로님이시다. 훌륭한 아버지를 모신 자녀들이 얼마나 보기에 좋았던가?

나도 그런 삶을 남길 수 있을까? 머지않아 나도 부르심을 받을 때가 올 터인데 떠나고 난 후 남은 자손들에게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할아버지 사랑합니다. 할아버지 존경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 영광이며 자녀들에게도 자랑과 기쁨이 되지 않겠는가는 다짐을 한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1886

왜 안식교가 이단인가요?

얼마 전 30 여 년 동안 지척의 거리에서 알고 지내던 분이 전화로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평소에는 필자에게 직접 전화를 건 예가 없었습니다. 상담의 내용은 왜 안식교가 이단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교가 이단인 이유에 대해서 간단하게 두 가지를 설명했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 것인데 안식교에선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행위 믿음 때문이며, 두 번째는 성경의 일부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안식교는 지옥을 부정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옥을 만드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옥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도 지옥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왜 갑자기 안식교에 대해서 질문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 질문이라면 본인이 나가는 교회 목사님께 질문해야지 왜 필자에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전화로 하는 말이 “목사님! 그러면 쪽 팔리잖아요!”

이단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을 본 교회 목사님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는 말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안식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중 한 분이 안식교 교인인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성실하고 이웃을 배려하며 정직하게 사시는 분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민 생활 30여 년 동안 LA 한인 타운의 이름 있는 큰 교회를 섬겨오면서 그 동안 너무나 많은 교인들로 인해 상처를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보수를 받는 정식 직원으로 일하면서 교회 분쟁의 현장을 수도 없이 목격하면서 이 편도 저편도 들 수 없는 형편에서 평소 가깝게 친분을 나누던 교우들이 양편으로 갈리어 서로를 경멸하고 원수시하는 상황에서 이편도 저편도 들 수 없었던 자신을 향하여 비판과 비난이 쏟아질 때는 너무나 견디기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큰 건물과 교인 수를 자랑하던 교회 안에서 그가 존경할만한 믿음의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직장 동료가 속해 있는 안식교회로 교회를 옮겨볼까 하는 생각에서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필자는 기가 막혔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건만 교회 안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다면 과연 이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물론 본인 자신이 이웃을 섬기고 헌신적으로 사랑했다면 이런 대접은 받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이 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많은 교인 속에서 진정한 성도의 코이노니아를 느끼지 못했다면 그 분 주위에 먼저 믿은 사람과 직분 자들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가족에게는 물론이요 가까운 이웃과 교인 사이에서도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가짜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교회 안에 없기 때문에 안식교로 가겠다는 이 말은 오늘의 모든 교회를 향하여 외치는 경종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 교회가 이렇게 사랑이 식어져 가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섬기는 자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지 말고 대접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전화를 끊기 전 그 분에게 필자는 이런 권면을 했습니다.

집사님! 사람보고 따라가지 마세요! 직장 동료가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성품의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출석하는 안식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곳도 사람이 모이는 곳입니다. 거기에 가도 집사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시험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안식교에 가서는 아니 되는 중요한 이유는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다른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행 4 : 11-12절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1735

암수술을 기다리는 J엄마에게

얼마 전 우리 중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성실하며 매사에 본을 보이셨고 또 간호사로 열심히 사셨던 J 어머니가 자가 진단을 통하여 몸에 나타난 것 때문에 의사를 찾아가 조직 검사를 하고나서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를 통하여 남편으로부터 듣고서 우리 내외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특히 집 사람은 누구보다도 “j”엄마를 친 자매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하기에 그 소식을 듣자마자 목 놓아 눈물로 통곡했습니다. 생각지 못한 뜻밖의 일을 당하고서 매 순간마다 얼마나 힘들고 고독하셨습니까? 수술을 앞두고 왜 두렵지 않으시겠습니까? 남에게만 있는 일인줄 알았는데 자신에게 나타난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받으신 충격이 어떠했음을 짐작케 합니다.

집 사람이 유방암 수술을 받은 지 15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참으로 긴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한 때는 보이지 아니하는 절망의 어두운 터널에 빠져든 것 같은 착각을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의 우리 내외는 고난을 통하여 주신 은혜와 축복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힘든 환란을 당해야합니까? 잘 못 산 것은 아닙니까?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은것은 아닌가요? 때로는 원망과 낙심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 주시는 환란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15년 여 동안 고난의 와중에서도 이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자녀들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병마와 싸워 지치지 않도록 위기를 당할 때마다 감동할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가정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J”엄마의 가정에도 역사하실 것을 믿습니다.

집 사람의 투병 과정을 지켜오면서 몇 가지 정리되는 것이 있어서 참고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드립니다. 암은 알려진 대로 쉬운 병이 아닙니다. 혼자서 싸울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가족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서 싸워야하는 병입니다. 이를 통하여 가정의 소중함을 배우게 됩니다.

암은 단 기간에 치료되지 않습니다. 오랜 인내와 투병이 필요합니다. 절대로 초조해 하거나 조급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랜 기간 동안 병원을수도 없이 드나들면서 암 투병을 통하여 발견한 것은 건강한 삶이 복이 되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다가오는 죽음도 저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통로(문)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믿어지기까지 아내는 죽음의 공포로 많은 날 동안 신음하며 두려움으로 밤을 새워야했습니다만 지금은 그 날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J”어머니의 병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우리 내외는 기도하기를 쉬지 않고 있습니다. 오가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믿기로는 지금 당하시는 아픔과 고난의 상처가 큰 것처럼 환란을 통하여 하나님께 받을 위로와 축복도 크다는 사실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아모스 5 장 4절로 8 절의 말씀을 드립니다.

병상에서 이 말씀을 암송하시므로 매일 매 순간마다 정금 같은 믿음으로 병과 싸워 승리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라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령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시어 받은 은혜와 축복을 크게 감사하시는 종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1676

목회자 마음에 살아있는 성도

세월이 갈수록 기억이 새로워지는 집사님 가정이 있습니다. 교회를 설립하고 두 해가 지났을 때 P가정 집사님 가정을 만났습니다. 그로부터 30여년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남편은 직장을 다니고 계셨고 부인 집사님은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부인 집사님이 교회에 내신 십일조 헌금은 교회 전체 헌금의 1/3을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년 동안 무명으로 헌금을 바쳤기에 남편은 부인이 십일조를 바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부인 집사님이 심각한 얼굴로 저에게 상담을 요청한 것입니다. 교회에 바치는 헌금 문제로 남편과 심각한 싸움을 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중단하지 않으면 교회 출석을 금하겠다는 말했다고 합니다. 이럴 줄 알고 그동안 남편에겐 비밀로 해왔었지만,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 문제 만큼은 양보할 수 없기에 지혜롭게 위기를 대처하기 위해 상담 요청을 해온 것입니다.

당시 집사님의 표정으로는 제가 집사님 남편에게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의 의무와 축복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권면해주길 바라는 눈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일조는 성도의 당연한 의무이기에 어떤 유혹과 시험이 있더라도 중단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이런 상담은 처음 당해본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습니다. 순간 묵상으로 주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이런 때에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교회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십일조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권면을 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에 고민은 더욱 깊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권면을 드렸습니다. “집사님 우선 남편의 뜻을 따르십시오, 모든 경제권을 이양하시고 남편을 위해, 가정의 일치와 평화를 위해 노력하세요” 그 다음주부터 그 집사님 가정에서 바쳐지는 십일조는 중단되었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몇 개월이 지난 후 그 집사님 가정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실패한 상담 때문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에 대한 기억은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어느날 예배를 마치고 나서 2천달러가 든 봉투를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오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지순례가 보편화되어서 많은 분들이 다녀오지만, 30년전만 해도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본인도 가보지 못한 것을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다녀와야 자신들도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돈은 지난 6개월간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 손님들에게 받은 팁을 모은 것이었습니다. 뜻밖에 귀한 선물을 받고서, 교회에 광고를 하고 그 돈은 성지순례 헌금으로 교회에 적립했다가, 이후로 17년이 지나 교회설립 20주년을 기념하여 그 집사님 뜻대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집사님 부부가 교회를 떠나시고, 십수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있었는데, 그때 큰 용기를 내어 그 집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제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그 집사님은 교회가 필요한 돈을 선뜻 허락해주셨고, 오히려 잊지않고 연락주어서 감사하다는 말까지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분 가정이 기억에 크게 남습니다. 목회자의 마음에 기억이 되는 집사님 가정을, 우리 주님도 기억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1562

할머니 앞에서 손녀가 보인 눈물의 의미는?

지난 연말 2주간 동안 미시건 주에 살고 있는 둘째 딸이 세 명의 손자녀를 거느리고 와서 머물다 갔습니다. 사위는 심장내과 의사로 바쁜 병원 일 때문에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 둘째 딸 가족이 오랫 동안 머문 것은 어려운 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선 할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날 저녁은 식당에서 함께 했습니다. 한참 음식을 맛있게 먹다가 큰 손녀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프지도 않았고 누구와 다투지도 않았습니다. 한국 음식이 맛이 있다고 열심히 먹다가 어떤 영문인지 모르게 슬픈 기색을 띄고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우는 이유를 물으니 이 밤을 지나면 가야 하는데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다시 눈물을 보이는 것입니다.

미시건 주에 비해서 이곳은 날씨가 따뜻하고 아이들의 놀이거리가 많은 켈리포니아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는 저들과 비슷한 또래의 사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놀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쓰러운 마음에 필자는 어린 손녀를 부둥켜 앉고 서너 달 후 부활절 방학 기간에 다시 오라는 말로 위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할머니와 헤어지면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다는 것이었습니다. 철없는 아이로만 알았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헤어지면 사랑하는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을 보인 것입니다. 어린 아이로만 알았던 필자에게도 이런 손녀의 행동이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손자녀가 어떤 의미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했습니다.

조용하던 집 안은 아이들이 오고서 하루도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7살, 5살, 3살짜리 손자 손녀가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손발을 주물러 줍니다. 할머니 앞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노래와 춤 솜씨를 발휘합니다. 그럴 때마다 집안은 웃음바다가 되곤 합니다. 밤이면 할머니와 함께 서로 잠을 자겠다고 해 셋이서 돌아가며 할머니와 잠을 잡니다.

집 사람은 이런 재롱이 너무 기쁘고 행복해 기쁨의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쁨과 행복을 주신 하나님께 반복해서 이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고백 했습니다.

혹자는 인생의 행복을 말할 때 건강하고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으면 행복하다고 말을 합니다. 필자도 한 때는 그렇게 생각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딸을 시집보내고 나서 한 동안 허전함을 느끼는가 했더니 곧 이어서 마치 시합이라도 하듯 두 딸의 가정에서 각기 셋씩 여섯 손자녀를
보게 하셨습니다.

아이를 키울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 손주들로 인하여 주어졌습니다. 이런 것이 사람이 사는 이유며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런 행복은 돈을 주고 살 수도 없고 노력과 수고로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지난 14년 동안 아내가 얻은 어려운 질병으로 인하여 때는 낙심도 했고 절망도 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위로 받고 웃을 수 있었으며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 병과 긴 세월 싸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자녀와 손주들을 통하여 주시는 사랑과 기쁨 그리고 주위에서 집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은혜임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1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