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칼럼 #277 크리스찬투데이 창간 25주년 행사를 다녀와서!

지난 5월 9일부터 10일 양 이틀 동안 멕시코 바하 캘리포니아 해변 호텔인 Pueroto Nuevo Hotel에서 바하 캘리포니아 북쪽인 티와나와 엔세나다 지역에서 사역하시는 한인 선교사 40여명을 초청하여 크리스찬투데이 창간 25주년 기념행사로 선교사님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드리기 위한 특별한 행사를 가졌습니다.

이를 위해서 고든 콘엘 신학대학원 학장을 역임하신 구약학 박성현 교수님을 강사로 모시고 3시간 이상 이어지는 명 강의를 통하여 선교사님들만 은혜 받은 것이 아니라 행사를 돕기 위해 함께한 행사위원들과 크리스찬투데이 임직원 모두도 도전을 받았습니다. 박 교수님의 강의가 모두에게 큰 공감이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남미 파라과이로 이주하여 현지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어려운 가정을 돕기 위해서 중학교 때 학업을 중단했다가 이후 어려운 과정을 거쳐 고등학교에 입학 했지만 역시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서 두 번째도 자진해서 학교를 중단했기에 더 이상 자신에게 배움의 기회는 없을 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부모의 선택에 이끌려 남미에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살다가 누군가의 말에 이스라엘에 가면 학비 없이 대학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에 이스라엘에 갔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답니다. 박사학위 공부를 하는 사람에 한하여 학비 없이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지만 대학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외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현지인들보다 더 많은 학비를 내야만 했습니다. 부모의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그때부터 홀로 몸부림 쳐야만 했습니다. 가야할 곳도 돌아갈 곳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흘려야만 했던 땀과 눈물의 강의는 듣는 모두에게 전달이 되었습니다.

중 고등학교를 자퇴하고서 자신은 대학의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역경을 통하여 히브리대학교 고고학, 인문학 학사에 이어 텔아비브대학교 고고, 근동문화학 석사와 하바드대학교 근동어문학과 박사 학위를 받으시고 지금은 하버드대학교 산하 아쉬켈론 고고학 소장을 맡고 계십니다.

특별히 이번 행사가 더욱 빛났던 것은 Washington D. C.에 거주하시는 양현승 목사님이 함께해 주셔서 심신이 피곤해 지치신 선교사님들에게 큰 웃음과 기쁨 행복을 크게 선물해 주셨습니다. 사역자들에게 따라오는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관리 할 수 있는 명쾌한 방법을 제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첫날 마지막 저녁 시간에 선교사님들을 4팀으로 만들어 성극의 주제를 4가지로 20세기 솔로몬의 심판, 예수님이 행하신 첫 이적, 탈란트 비유,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것 중 하나를 택하게 해서 10분 후 팀원 전원이 참석하는 대회를 갖게 했습니다. 양현승 목사님의 탁월한 진행이 모두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둘째 날 오전 시간에는 현지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주제 발표와 함께 여러 사례들에 대한 보고회도 있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하여 바하 캘리포니아 북부 지역에서 사역하시는 한인 선교사님의 숫자가 70여 분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고 젊고 실력 있는 선교사님들이 많으심을 보고서 미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선교사님의 발표회를 듣다가 필자가 마음에 찔림을 받아 잠시 머리를 숙여야만 했던 내용이 있었습니다. 선교 후원금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역은 중단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음에도 후원은 상대적으로 증가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소를 20여마리 키우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야생 개떼들의 습격을 받아 염소가 모두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의 상실감이 너무 크셨다고 하셨습니다. 한편에서는 청계 알을 얻기 위해서 닭을 키우시는 분도 계시고 나무와 관상용 물고기를 키우는 일에 도전하시는 분도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이번 행사를 지켜보면서 주님이 기뻐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 25장 40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주님이 사랑하시는 선교사님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드린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십니다. 이번 행사를 위하여 기도와 물질 그리고 봉사로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주의 축복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2022년 5월 18일
이상기 목사

목양칼럼 # 276 목회에 힘이 되어준 아름다운 이름들(4)

교회 설립 5년 만에 하나님이 기적 같은 은혜로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에 극장 건물을 예배 처소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두서너 달 동안 은혜에 대한 감동이 너무 커 밤마다 깊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한 두 시에도 일어나 교회로 달려가 교회당 주변을 여러 차례 돌면서 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성전을 받은 기쁨보다는 건물을 관리하고 유지해야 하는 염려와 근심이 더 크게 밀려왔습니다. 이유는 건물 페이먼트에 대한 압박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건물이 오래 된 것이었기에 안과 밖을 수리해야할 부분이 너무 많았습니다. 당시의 교회 재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교회 출석한지 얼마 되지 아니한 Chung K S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한국에서 작은 목수로 건설 현장에서 일한 경험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집사님은 자원하셔서 재료만 제공해 주면 몸으로 봉사를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집사님을 도와 밤과 낮으로 건물 안과 밖을 수리하게 되었습니다.

권사님들은 일하시는 교우님들의 매 식사를 기쁨으로 준비하셨습니다. 공사가 진행되는 한 달 여 동안 육신적으로는 모두가 많이 힘 들었지만 특별한 은혜의 장소와 시간에 부름 받아 주님의 전을 위해서 땀 흘리는 기쁨이 얼마나 컷던지 지금도 당시를 생각만 해도 그 때의 감동과 기쁨이 살아납니다.

그 때 먹었던 음식중 잊히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나이가 많으신 노 권사님은 걷는 것도 불편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대중교통인 시내버스를 타시고 여러 차례 교회에 오셨습니다. 교회 당 문 앞이 버스 정류장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런 굴비를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값도 비싸지만 구하기도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자 아들이 어머니 드시라고 사온 것을 모두 교회로 가지고 오셔서 일하시는 분에게 정성스럽게 대접하시던 그 섬김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두 주간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시간에 정 집사님의 부인이 교회 작업 현장에 오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필자도 있었고 다른 몇 분의 조력자도 있었습니다. 부인은 남편을 향하여 삿대질을 하면서 큰 소리로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돈도 주지 아니하는 이 일을 하느냐며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할 말을 잃고 있을 때 남편이 부인을 달래어 집으로 데리고 가서 몇 시간 만에 다시 교회에 왔습니다.

그 때 이불과 옷 몇 가지를 가지고 와서 일을 마치기까지 2 주일 동안 교회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집사님이 일을 하시면서 쉬지 않고 불렀던 찬송이 있습니다. 새 찬송가 141장, “원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그 찬송을 하루도 수십 번을 부르면서 감사하시며 정말로 열심히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집사님 가정에 일어났습니다. 교회 일을 마치고 나서 한 달이 지났습니다. 캘리포니아 복권 국에서 복권을 시작한지 두 번째 되는 추첨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주청사가 있는 새크라멘토 시에서 TV 생중계로 방영되는 추첨에 5명이 초청을 받았습니다. 정 집사님 7식구와 교인등 10여명이 중계 현장에 초대받았습니다. 5명 중에서 정 집사님이 가장 큰 상금인 5만 불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현장에서 세금으로 20%인 만 불을 제하고 4만 불을 받았습니다.

그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여 십일조로 4000불을 하나님께 바치고 남은 돈으로 교회 건물 뒤편에서 집을 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교우들이 하는 말은 이러했습니다. 한 달 동안 교회 일하고 집을 선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받는 복은 행한 대로 받고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2023년 4월 27일
이상기 목사

목양칼럼 # 275 목회에 힘이 되어준 아름다운 이름들(3)

교회를 설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Moon H Y 집사님이 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누구에게 전도를 받았거나 권면을 받으시고 교회에 나오신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찾아 오셨습니다. 1970년대 초 파독 간호사로 근무하셨습니다.

남편은 파독 광부 출신이셨습니다. 독일에서 만나 가정을 이루시고 어린 두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습니다. 당시 South Gate 시에서 중형 마켓을 운영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어려운 병에 걸리셨습니다. 전문 의료인이었기에 자신의 병이 얼마나 중한지에 대해서 아시고 계셨습니다.

치료를 받으시는 동안 필자가 어려운 병에서 기적 같은 은혜로 살아났다는 소식을 전해듣고서 살기 위해서는 이 목사의 곁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서 교회에 나오셨다고 후일에 간증하셨습니다. 교회에 처음 오셨을 때는 상태가 매우 위중했습니다. 치료 부작용으로 머리카락은 다 빠져 있으셨습니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어 매우 창백했으며 앉고 일어서는 것도 주변의 도우 심을 받으셔야 할 정도로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얼굴엔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생사의 반복되는 위기와 치료 부작용으로 인한 아픔에도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한 번도 힘들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중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집사님처럼 마음의 평안을 가지지 못하시고 항상 불안해하시며 죽음의 공포로 인하여 가까운 이웃이나 가족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집사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천사와 같으신 성품을 지니신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입원을 여러 차례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 직원이 필자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집사님이 수혈을 반복해서 받아야 하는데 가족이나 주변에서 집사님을 위하여 헌혈을 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교회로 돌아와 광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분 밖에 헌혈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필자와 K 장로님이셨습니다. 다음 날 헌혈을 위해서 병원으로 갈 때에 Y 집사님이 함께 가시길 원했습니다. 입원에 계시는 집사님을 병문안하고 헌혈을 했습니다. 그 광경을 Y 집사님은 곁에서 지켜보고만 계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교회 청년 집사님이 꼭 보셔야 할 것이 있다고 해서 주어진 주소로 갔습니다.

가보니 매물로 나온 건물이었습니다. 6 개월 이상 사용치 아니하고 방치된 극장 건물로 천장의 일부가 내려앉았고 비가 새어 바닥 카펫에선 역한 냄새가 코를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청년 집사님이 부동산 라이선스를 취득하고 첫 번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건물 상태가 좋지 않아 시가의 절반 가격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당시 교회 형편상 건물을 매입할 실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청년 집사님의 강요에 마지못해 보기만 하려고 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가셨던 Y 집사님이 건물을 둘러보고 차를 타려고 하는데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나는 간이 나빠서 헌혈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이것을 하겠습니다”

당시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Y 집사님은 한국에서 이민 오셔서 교회에 출석하신지 몇 개월이 되지 아니하셨을 때였습니다. 한국에 계실 때에는 전문 법조인으로 평생을 사시다가 말년에 건강상 이유로 미국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M 집사님의 투병을 통하여 큰 감동을 받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 주일에 건물 구입에 필요한 다운페이먼트 55,000.00 불을 가져 오셨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그 돈을 지불하고 건물 구입을 위한 계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Y 집사님이 그런 실력이 있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후에 장로 안수를 받으셨습니다.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즉시 입주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이 있기 두 달 전에 4 년 동안 교회 건물 주시기 위해서 기도하다가 건물 구입을 위한 에스크로 오픈 과정에서 교회가 두 조각이 났습니다. 그 일로 교회가 문을 닫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도의 응답을 기적적으로 허락하시어 새 장소로 입당케 하시오 지금의 교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2022년 4월 23일
이상기 목사

목양칼럼 # 274 목회에 큰 힘이 되어준 아름다운 이름들(2)

지난 칼럼에 이어 Paik 집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남기고 싶습니다. 교회를 떠난 지 오래된 집사님에게 긴급한 교회의 재정적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그런 믿음과 신뢰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 집사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벌써 40년 전 일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제게 두툼한 봉투를 하나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돈으로 성지를 다녀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도 성지를 가보지 못했지만 설교하시는 목사님은 성지를 다녀오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문으로 이 돈을 주시는지를 물었습니다.

자신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6 개월 동안 기간을 정하고서 팀으로 모아진 것을 목사님의 여행경비로 모았다는 것이었습니다. 40년 전에 2000불은 작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한인 타운에 집을 사려면 다운 페이먼트로 지불할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 돈을 받고 너무 놀라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이지만 손님들에게 봉사하고서 얻은 작은 팁을 6 개월 동안 모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돈을 모을 때 생각 없이 모은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으로 모았습니다. 담임목사님의 성지 순례 비용으로 모은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나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정말로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 형편으로 그 돈을 가지고 즉시 성지 여행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회와 상의해서 그 헌금을 교회에 적립을 하고 언제고 성지 여행을 떠날 때에는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 약속이 실행 된 것은 그로부터 20년 이 지난 후 이었습니다.

교회 설립 20주년을 기념하면서 Paik 집사님 이름으로 성지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한 달 전 여행사를 통하여 모집된 여행객이 4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과의 전쟁 소문이 난 것입니다. 그 일로 출발 일주일 전까지 예약된 모든 예약이 취소되었습니다.

출발하기 수일 전 여행사 담당자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이번 여행에 위험이 있으니 다른 분들처럼 여행을 취소하고 다음 기회가 되는대로 다시 일정을 조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나 혼자라도 여행을 가겠다고 고집했습니다. 이유는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이스라엘 정부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시민권자가 자국을 방문할 때 자국민 이상으로 여행자의 신분과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약된 40명 중 떠나는 날엔 혼자만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현지에 도착해 보니 상황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사방에서 총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로인하여 성지를 방문하려는 세계인의 발길이 끊겼습니다. 예루살렘은 물론 모든 관광지가 기다림 없이 텅 빈 상태로 비어있어 어디를 가든지 기다림 없이 즉시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일로 크게 은혜를 받은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입니다.

그곳은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많은 사람이 방문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언덕진 곳을 오르고 내리는 길이 협소하여 많은 사람이 방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마다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그런데 그 날은 기다림이 없어서 필자도 그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무 십자가가 세워진 곳은 바위가 움푹 패어 있습니다. 마치 페인트 1 갤론짜리 크기의 넓이와 깊이로 패어 있습니다. 그 공간에 나무 십자가가 세워졌던 것이며 그곳으로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쏟아져 모였던 곳입니다.

그곳을 두 손으로 바닥을 쓸어 더듬으며 기독교가 우화의 종교가 아니라 역사적 종교라는 사실이 강하게 각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주님의 보혈의 능력 권세가 얼마나 위대하며 강한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은혜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하게 지금도 나에게 밀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Paik 집사님의 희생과 헌신 감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2022년 4월 5일
이상기 목사

목양칼럼 # 273 목회에 큰 힘이 되어준 아름다운 이름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살 어름 위를 걷는 것 같았었던 42년 동안의 긴 목회 여정을 7-8 개월 남기고 평강교회를 이끌 제2대 담임목사를 선정하고 은퇴를 준비하면서 지난 온 목회 여정 가운데 오늘의 우리 교회가 있기까지 아름다운 믿음의 자취를 남겨주신 분들을 기억하면서 감사의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첫 번째로 Paik, Y H and Paik, S K 집사님이십니다. 교회설립 회원 중 한분이셨던 이갑제 권사님이 Paik 집사님 집에 거하시며 가사를 도와주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신실하시며 기도를 많이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권사님이 집안일을 하시는 동안 Paik 집사님 부부는 권사님을 통하여 큰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권사님이 가사 일을 하신 지 3개월 만에 Paik 집사님 가정이 저희 교회를 출석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란 것은 Paik 집사님이 교회를 출석하시면서 모두가 놀랄 정도로 헌금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당시는 교인수도 작았고 십일조를 하는 분들이 많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의 가정에서 십일조를 하셨습니다.

십일조를 하시면서 부인 집사님이 특별한 부탁을 하셨습니다. 남편이 십일조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무명으로 주보에 게재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교회 제정의 40% 정도를 Paik 집사님 가정에서 담당하실 정도였습니다. 집사님은 세탁소와 식당을 운영하셨고, 남편은 직장에서 중역으로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섬기던 중 어느 날 부인 집사님이 상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상담의 내용은 지난 2년 여 동안 비밀에 부쳐왔던 십일조 바치는 것이 남편에게 발각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부부 사이에 다툼이 있었답니다. 계속 십일조를 바친다면 남편은 교회 출석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인 집사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성도가 양보할 수 없는 것으로 어떠한 시험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드려야만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신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묵상 기도를 마친 후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헌금도 중요하지만 가정의 평안도 중요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를 드릴 때 남편의 뜻을 존중해 함께 상의해서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 목회의 첫 실패한 상담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다음부터 집사님의 가정은 십일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부부는 두어 달 교회 출석을 하시다가 이후에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그런 Paik 집사님을 남다르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비록 교회를 떠나셨지만 부인 집사님은 특별하셨습니다. 집사님이 교회를 떠나가신 후 다시 오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 왔지만 다시 오시라고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의 전화를 몇 번 했습니다.

그것도 교회를 떠나신지 잠시 후가 아니라 십 수 년이 지났을 때도 그러했습니다. 얼마나 다급하고 상황이 어려우면 교회를 떠나간 교인에게 담임목사가 전화를 하겠습니까? 정말로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하는 수 없이, 달리 재정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없어서 체면을 불구하고 어렵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지금은 교회 건물 페이먼트가 없어 주변 분들의 말처럼 빚이 없는 교회가 되었지만 지난 30여 년 동안 건물 페이먼트로 인한 압박을 반복해서 당해 왔었습니다. 은행이 정한 날짜에 페이먼트를 지불하지 못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교회에서 가장 힘들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 재정을 담당하시는 장로님과 담임목사입니다. 필자의 전화를 받은 부인 집사님은 왜 교회를 떠나간 교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시느냐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도 교회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필자가 어렵게 전화하는 것을 아시기에 도리어 전화 해 주셔서 감사하시다는 말씀과 함께 필요한 액수를 즉시 전달해 주셨습니다.

그런 신실한 믿음의 종님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평강교회가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2022년 4월 5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목양칼럼 # 272 정필도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접하고서!

얼마 전 교계 신문을 인터넷으로 읽다가 부산 수영로교회 설립 목사이셨던 존경하는 정필도 목사님이 82세의 나이로 지난 3월 21일 부산동아대병원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필자가 고 정필도 목사님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81년 봄으로 41년 전 이었습니다.

교회를 설립하고 몇 개월이 지나지 아니했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시던 당시 동양선교교회 협동장로님이셨던 박계로 장로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인 타운에는 지금처럼 한인 교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사위 목사가 Los Angeles를 방문했는데 설교할 교회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목사님으로 부산지역에서 제일가는 교회로 자리하고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 장로님이 섬기시는 교회에서도 설교자로 세우심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당시 필자의 교회는 20여명이 모여서 미국인 교회당을 빌려서 그것도 낮 예배를 11시에 드리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미국인 교회가 예배를 마치고 난 오후 1시 반에 주일 낮 예배를 드리던 때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 강사를 모신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때였습니다. 전화로 부탁하시는 박 장로님에게 교인이 너무 적고 예배 시간도 11시가 아니고 오후 1시 반이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그래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처음으로 외부 설교자를 모시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정 목사님은 예배 시간에 부산에서 교회를 개척하셨을 때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를 마치고 나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돈 것처럼 교회당 주변 땅을 밟으며 성전의 터를 넓혀 가셨다고 간증하셨습니다.

당시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교회당 건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정 목사님의 간증이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부산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의 기도도 들으시고 교회 건물 주시길 기도했습니다.

주일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나면 새벽 기도에 참석한 교인들이 교회당 주변을 여리고 성을 도는 것처럼 기도하기를 4년 동안 계속했습니다. 어느 날 미국인 교인들이 우리의 이러한 행동을 보았습니다. 왜 새벽 기도를 한 후 교회당 주변을 도느냐고 물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 교회당 건물을 우리에게 주시길 기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인 교회도 건물을 매각하고 다른 곳으로 이전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이 되어 양 교회가 건축위원회를 구성하고 매입 절차를 6개월 간 협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스크로를 오픈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우리교회와 같이 작고 힘없는 교회가 어떻게 건물을 살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도 가난하고 장로님도 가난한데 에스크로스가 끝나면 그 많은 다운페이먼트를 누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견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약하고 가난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결국 건축헌금을 작정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큰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상당수의 교인들이 교회당 구입을 반대하면서 교회를 떠나갔습니다. 사방에서 교회가 문을 닫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당시의 절망감을 무어라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미국교회에 이 같은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난 4 년 동안 성전 건물 주시길 위해서 우리가 반복해서 기도한 것을 외면치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는 말씀은 진리였습니다. 정필도 목사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건물보다 더 좋은 건물과 장소를 예비하시고 기적 같은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건물 구입을 포기하고 두 손을 놓은 지 두 달도 되지 않아서 새 성전으로 입당케하셨습니다. 평강교회가 건물을 구입하는 것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 정필도 목사님의 간증을 듣지 못했더라면 성전 건물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성전 건물의 축복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늘 정 목사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못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2022년 3월 22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목양칼럼 # 271 금년에 처음 만난 호랑나비!

지난 주중 햇살이 뜨거워지는 아침에 교회 뜰에서 잔디와 과실 수에 물을 주다가 금년 들어 처음으로 가까이서 살구나무 꽃 위에 자리하고 앉아 있는 호랑나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몸체는 감색으로 진하게 물들어 있었고 넓은 날개는 검은색 결을 따라 크고 작은 백색의 많은 점들이 줄무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교회 주변에 들러선 20여 구루의 과실 수들이 봄을 맞아 저마나 자기의 꽃을 피우니 사방에서 벌들이 날아드는 것을 보지만 호랑나비가 날아든 것은 금년 들어 처음 보았기에 신기하고 반갑기도 했습니다. 이를 보면서 하나님이 풀 한 포기 나무 하나를 통해서도 쉬지 않으시고 일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잔디에 물을 줄 때도 아무런 생각이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물을 주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먹고 마시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메마른 사막이나 황폐한 땅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환경이 보기에 아름답기를 원하시고 우리만 평안한 것이 아니라 들의 풀 한포기도 아름답게 피어나길 원하시며 공중을 나는 새와 땅과 바다에 거하는 모든 생물들이 다 창조함 받은 대로 아름다움을 노래하길 원하십니다.

꽃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벌이 몰려들고 나비들이 떼를 이루며 날아옴같이 주님이 계신 곳에는 목마른 심령들이 달려 나와 복음(말씀의 떡, 생명의 떡)을 통하여 굶주린 영혼들이 배부름을 얻게 하셨습니다. 벌과 나비들을 위하여 꽃을 허락하신 주님이 굶주린 우리를 위하여 몸되신 교회를 허락하셨습니다.

벌들이 꽃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인생은 복의 근원이 되며 축복의 씨앗이 되는 교회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수 없습니다. 시편 1 편 3절에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나무의 행복은 시냇가에 심기어질 때입니다. 아무리 심한 가물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아니하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때마다 과실을 맺습니다. 모든 것이 메말라가는 시대에도 생명강 되시는 주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리면 나의 삶에 물질이 마르지 아니하게 하십니다. 마음에 기쁨이 마르지 않게 하십니다.

가정에 웃음이 마르지 않게 하십니다. 건강이 마르지 않게 하십니다. 하늘의 소망이 시들 거나 쇠하지 않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계획하지 아니한 것까지라도 주께서 형통케 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이러한 것들을 이미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마다 더 큰 행복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각자의 수고와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냇가 되신 주님의 몸 되신 교회에 우리의 믿음의 뿌리가 얼마나 깊이 내리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마실 우물은 어디에 있을까요? 잠 5:15절에서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위의 말씀은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가 우리가 섬겨야 할 교회가 아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마다 마실 우물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허락받은 자신의 우물을 관리하고 보존하며 그 샘에서 나는 우물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집이 나의 것이 아님 같이 모든 교회가 우리 교회가 아닙니다.

나의 가정, 나의 교회를 주님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나의 행복은 나의 가정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처럼, 나의 영적 기쁨과 충만도 나의 샘 되신 우리 교회를 통하여 공급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제일 좋은 가정은 나의 가정인 것처럼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교회도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022년 3월 17일
이상기 목사

목양칼럼 # 270 대선에서 당선자를 계시 받았다는 어느 목사님!

3 월 9일 한국에서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가 있기 3 일전인 3 월 6일에 오랫동안 같은 교단을 섬겨왔던 K 목사님이 카톡으로 자신과 사모가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위하여 기도하던중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번 대선에서 당선될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을 알려 주셨다고 하면서 급하게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계시를 받은 것이 이번만이 아니라며 트럼프가 선거에서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도 그가 당선될 것을 많은 사람이 기대하지 못했을 때도 자신은 계시를 통하여 알게 되었고 그 같은 사실을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면서 이번에도 하나님이 알려주셨기에 Y 후보가 당선이 된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 칼럼이 신문에 게재가 될 때는 선거가 끝나 한국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을 하게 됩니다. K 목사가 받았다는 계시대로 Y 후보가 당선이 되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계시 받은 분이 대통령이 된다고 그분에게 달라지는 것은 무엇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무엇일까?

필자가 여기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가 받은 계시가 복음에 무슨 유익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계시는 교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계시를 허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죽지만 그 시간과 장소 방법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자신의 죽음의 시간과 장소 방법을 안다면 그로인한 불안과 공포 두려움으로 잠시도 평안할 삶을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셨습니다. 또 하나는 각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은 알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의 평안과 화평을 위하여 하나님은 알아야 할 것과 알아서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것을 구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숨기신 내용을 특별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알려 주셨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물론 기도를 통하여 그런 계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교회의 덕을 세우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남이 받지 아니한 자신만의 신비로운 체험의 내용을 함부로 말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그 같은 기도의 체험으로 인하여 자칫하다간 영적 교만에 빠질 수도 있으며 주변으로부터 이단자로 정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K 목사님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신학적인 기초가 약한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장자교단의 정통신학교육을 받으셨고, 오래전에 미국에 유학 오시어 미국에서도 공인된 유명한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그 어려운 박사과정을 힘들게 공부하셨던 것을 곁에서 가까이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2022년 3월 9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목양칼럼 # 269 어린 손녀들에게 받은 생일 선물!

얼마 전 생일을 맞았습니다. 생일을 당하면 근처에 사는 큰 딸의 가족이 생일잔치를 준비합니다. 다른 딸과 아들은 멀리 있어서 특별한 날에도 자주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족 중 생일을 당하면 주로 식당에서 모임을 갖습니다. 그때 어느 식당 어떤 음식을 먹을까를 정하는 것은 당일의 주인공이 정하게 됩니다.

그 날은 필자가 주인공이기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아는 큰 딸이 장소를 정하고 지정한 날짜와 시간에 초청을 했습니다. 좋아하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때나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없는 것은 일반 음식보다 값이 비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손님을 대접하거나 아니면 대접 받을 때만 먹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기계적인 인간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충분하게 예비하시고 그것들을 통하여 생명을 유지하게 하셨습니다.

전도서 5 : 18절에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고 하신대로 우리가 사는 동안 부족함이 없이 먹을 것을 넘치도록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헤어질 시간이 되었을 때에 딸이 작은 박스로 포장된 것을 생일 선물이라며 주었습니다. 당연히 딸 가족이 준비한 선물인줄 알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받았을 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허술하게 포장된 선물을 받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큰 딸이 준비한 선물은 포장도 예쁘고 아름다웠는데 그날 받은 선물은 이전에 비하면 너무 조잡하고 허술해 보이며 정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것을 받아 들고 한 시간을 운전해서 집에 도착 후 포장지를 열었습니다. 그 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그 날의 선물은 딸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 명의 손녀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서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갈색의 가벼운 구두였습니다. 구두 상자에는 할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내용과 함께 세 손녀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셋이서 의논하고 함께 그것을 사서 자신들의 손으로 포장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장지도 세련되지 못하여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잠시나마 이것도 선물이라고 주느냐고 마음속으로나마 흡족해 하지 모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귀한 정성과 사랑으로 선물을 준비해준 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생애 처음 손녀들에게 받아본 선물이었습니다. 70 평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이번에 사랑하는 손녀들을 통하여 받은 선물은 정말로 감동이었습니다. 아마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유는 손녀들에게 그 날 그런 선물을 받을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늘 어린 아이로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 이렇게 반듯하게 성장했습니다. 세 손녀는 고등학생이 둘 그리고 중학생입니다. 자기들만 생각할 나이인줄 알았는데 이제는 자신들의 미래를 계획하고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을 자신들의 정성된 고사리 손으로 표현할 줄도 아는 아이들로 성장했습니다.

시 128 4 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하시면서 축복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며, 복되고 형통하며, 네 자식의 복을 주시고,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손자녀들의 성장과 축복하심을 보면서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드립니다.

힘이 다하는 그 날 까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가까이 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2022년 2월 15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목양칼럼 # 268 봄의 전령, 복숭아와 살구꽃이 주는 기쁨

2월 11일 아침은 기쁘고 행복한 날로 시작 할 수 있었습니다. 필자가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회 뜰에 금년 들어 처음으로 피어난 복숭아와 살구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꽃 모두 붉은 색의 아름다운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겨울이 지나는 동안 나무는 죽은 것 같았습니다.

마른가지에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지에서 봄이 되면서 여기 저기 꽃망울이 돋아나기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나무에 잎이 나지도 않았는데 꽃망울이 먼저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을 관찰하면서 이 작은 꽃망울들이 언제 피어날까 기대하면서 지켜보았습니다.

33년 동안 교회 건물로 사용하던 건물을 매각하고 3 년 전에 지금의 교회로 이사를 했습니다.
전에 사용하던 교회 건물은 상용 건물이었기에 지금의 교회처럼 주변에 잔디도 없었고 정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사 후 제일 먼저 한 것이 교회당 주변에 과실 수를 심었습니다. 그 때 20여 구루의 과실 수를 심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당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만나는 것이 과실 수입니다. 이제는 제법 나무들이 자리를 잡아 커가고 있습니다. 복숭아와 살구꽃은 수줍은 듯 붉고 고운 색을 드리우며 조금씩 잎을 벌려 피는 것을 보면서 감성이 무딘 필자의 입에서도 어떡케 이렇게 고울 수가 있을까하는 탄성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무의 존재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실 수를 종류별로 허락하신 이유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나무에게도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무는 아무 때나 꽃을 피우지 않습니다. 아무 때나 열매를 맺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알고 있습니다.

그 때를 알뿐 아니라 주어진 본분과 사명을 알고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꽃이 피기 위해선 저절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송이의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는 시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어린 생명이 산모의 몸에서 태어날 때 죽을 것 같은 산고의 고통을 당하고서야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꽃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꽃들만이 겪는 그들만의 인고의 시련과 아픔이 없이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게 피어나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과실수들의 사명은 맛나고 보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꽃이 피고 잎이 나며 열매를 피우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에게 비유한다면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우리가 이 땅위에 살아가는 동안 어느 한 순간도 중요하지 않은 때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어린 시절도, 청년 시절도 장년 시절도 아니 노년의 삶도 어느 한 순간도 중요하지 않은 때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각 사람을 향하여 이 땅위에 삶을 다하고 주님의 곁으로 가는 죽음조차도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고 축복하신다고 시 116편 15절에서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계 14장 13절에서는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어떤 사람의 죽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모든 사람의 죽음이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동안 맡겨진 본분과 사명을 위하여 충성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며 영원한 쉬임과 평안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하지 아니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요? 마 7장 19-2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도 복숭아꽃 살구꽃처럼 우리의 믿음과 섬김 충성의 꽃을 피워 이웃과 하나님께 감동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22년 2월 11일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