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4-29 폭동

이번 주간은 한인 이민사 110여년 만에 가장 뼈아픈 고통을 당했던 4-29폭동 21 주년이 되는 주간입니다. 1991년 4월 29일 오후 5시부터 흑인 밀집 지역에서부터 시작된 방화와 약탈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면서 성난 파도와 같은 폭도들은 더욱 가공할 위력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폭동 두번째 날 흑인 중심지역에서 대형 마켓을 운영하던 권사님 가족이 폭도들에게 습격을 받고 마켓이 불에 탔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교통이 두절되 사건 현장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4-29 폭동으로 2천여개의 업소가 피해를 당했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우리 교포가 당한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 부시 대통령이 폭동 3일째인 토요일 새벽 7시에 남가주 캠프 팬들턴의 해병대와 주 방위군을 신속하게 투입하여 더 이상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긴박했던 순간이 지나고 첫 번 맞는 주일이었습니다. 교인 중에도 피해당한 가정들이 있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예배 중 성가대원으로 수고하시는 K 권사님이 앉은 자리에서 코피를 흘리고 계셨습니다.

권사님은 지난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시고 충격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폭동이 일어나는 날 흑인 중심지역에서 대형 마켓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마켓이 폭도들에게 제 1차 공격 목표가 되어 물건을 강탈당하고 건물은 불에 타 전소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한인들이 그러했듯이 사업 보험을 들어 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피해를 보상 받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후일에도 그 일로 힘든 삶을 사셔야 했습니다. 예배 중 코피를 흘리시는 권사님을 보면서 미국에 대한 분노와 배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 제일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땅에 사는 동안은 그런 일 당하지 아니할 것으로 알고 열심히 살아 왔는데 미국에 대한 치안, 경찰력에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권사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 교단 실무자들에게 긴급제안을 했습니다. 폭동피해 대책위원회를 소집했습니다. 지금은 본국 교단과 행정이 중단된 상태였지만 당시는 교단 총회 안에 미국 대회가 있어서 대회 산하 L A 지역에 3개 노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필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미주대회 서기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폭동 피해지역 3개 노회장과 서기들을 소집하여 폭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필자에게 총무 일을 맡겨달라고 자원했습니다. 그러면 곧 바로 한국에 나가 우리가 섬기는 교단 총회에 피해 당한 가정들을 위한 재정지원을 요청하겠다고 했습니다. 경비는 누가 책임을 지느냐고 하기에 일이 성사되지 아니하면 필자가 부담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느 분은 총회가 미주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무슨 지원을 하겠느냐고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분도 있었지만 결국 피해대책위원회가 결성 되었습니다. 그 밤을 새워 본국 총회에 보고할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폭동의 배경, 원인, 피해복구 전망 등 나름대로 서너 페이지의 보고서를 만들어 피 눈물 흘리시는 권사님을 생각하며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총회 임원들을 면담하고서 총회 산하 미주 교회 120여 가정의 피해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왜 피해당한 교우들의 가정을 신속히 돕지 않으면 아니 되는지를 가슴으로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총회 임원회가 즉석에서 미주교회들을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전국교회 앞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모금을 해 주기로 한 것입니다. 필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폭동으로 인하여 평생 쌓아온 K 권사님의 삶의 터전을 일순간에 잃어버리고 큰 절망에서 고통당하시는 아픔의 감동이 필자에게 각인 되어 마침내 교단 산하 교회에 속한 120여 가정의 피해 교인들이 한 가정 당 $1,000 불의 본국 교회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1290

개털 모자를 쓰신 권사님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에서 교회를 설립하고 2-3 년이 지났을 때 60이 넘으신 할머니 한분이 교회를 찾아 오셨습니다. 몇 개월 동안 아무 말 없이 교회를 다니시다가 어느 날 심방을 했을 때 교회출석 동기를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이 고향이신 할머니는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떠나 실향민으로 서울에서 사시다가 1970년 초 미국에 유학을 온 아들의 초청으로 이민을 오셨습니다. 교회에 대한 기억은 어린 시절 잠시 교회에 다녔던 기억이 전부였습니다. 그 동안 교회를 멀리하며 하나님을 잊은 채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일상적인 꿈은 잠에서 깨어나면 쉽게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날의 꿈은 시간이 가도 생생한 것입니다. 꿈인데도 생시보다 더 분명하고 더 실감 있게 느껴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제일 먼저 안내 받아 간 곳은 주님 앞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할머니에게 “사랑하는 딸아 그 동안 수고 많았다”고 하시면서 친히 할머니의 머리에 개털모자를 씌어주셨습니다. 그것을 받는 순간 너무 좋아서 무어라 표현할수 없는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할머니는 예수님을 위하여 세상에 사는 동안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자신에게 분에 넘치는 대접과 상을 주신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친히 자신을 기억해 주시고 초청해 주실 뿐 아니라 손수 머리에 개털모자를 씌워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예수님께 개털 모자를 받아쓰고 주님의 곁을 떠나 천국의 아름다운 황금 길을 걸어갈 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할머니의 모자와 같은 모자를 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빛나는 면류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빛나는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자기 머리에 쓴 모자가 자랑스러운 모자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할머니의 머리에 쓴 개털모자를 보면서 조롱하는 사람도, 비난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시작된 교회 생활은 세상을 떠나시기 까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집사로 직분을 감당하시다가 마지막에는 시무 권사로 10여년을 충성스럽게 섬기시다가 십수년전에 주님의 부르심을받으셨습니다.

C 권사님의 이야기는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집사 직분을 받으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어느 날 필자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심방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심방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났을 때 옷장에서 두 겹의 예쁜 보자기에 싼 물건을 건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물으니 한국에 두고 온 땅 문서라고 하셨습니다. 찬송가 반권 분량의 일산과 금촌 일대의 땅 문서였습니다.

그로부터 2 주일 후 아들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어머니가 드린 땅 문서를 되돌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긴급당회가 소집 되었습니다. 결국 당회의 결의로 문서를 돌려주었습니다. 아직도 그 때의 아쉬움이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C 권사님의 개털 모자를 바꿔 쓰실 기회를 교회가 지켜주지 못한 것 같은 생각 때문입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1181

어느 특별한 연말잔치

C 목사님의 교인 L 권사님이 담임목사님을 섬기는 심정으로 평소 담임목사님의 친구목사님들을 대접하신 것입니다

묵은해를 보내는 송년의 달 12 월 18일에 LA지역에서 목회하시는 동역자 목사님 12 가정의 부부들이 좋은 식당에 초대 받아 특별한 점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임의 동기는 H 교회를 담임하시는 C 목사님의 교인 L 권사님이 담임목사님을 섬기는 심정으로 평소 담임목사님의 친구목사님들을 대접하신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우리를 초청하신 친구 목사님이 권사님으로부터 이런 제의를 받으셨을 때 쉽게 응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C 목사님의 성품으로 보아 반복해서 거절하셨을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 두 명도 아니고 20여 분의 식사비를 한 사람이 담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권사님에게 권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의무도 부담도 느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임 목사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런 큰 잔치를 마련한 것입니다.

더욱 특별하게 생각이 되는 것은 그 동안의 경험으로 보아서 대접을 하시는 분이 함께 자리 하면서 덕담을 나누게 되는데 L 권사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모인 장소에 잠시 나타나 초대에 응해주신 여러 목사님들께 감사의인사를 정중하게 하신 후 필자가 대표로 축복을 마치자 곧 자리에서 일어나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필자는 L 권사님을 특별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목회를 해 오면서 이런 대접을 처음 받아 보았기 때문입니다. 권사님이 떠나고 나서 필자는 곧바로 친구 목사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L 권사님이 어떤 분이신가요? 부자이신가요? 어떤 사업을 하시는지요?“ 예사로운 분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나의 기대는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잔치를 마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별로 여유있는 생활을 하시지 못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부끄러움이 생겼습니다. 권사님에게 분에 넘치는 초대를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소에 알고 지내는 사이도 아닙니다. 보기 드문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목사님이 목회를 잘하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말로 이 시대에 아름다운 믿음의 성도를 만난 것 같아서 얼마나 기뻤던지 주님께 감사의 기도와 함께 권사님의 가정과 자녀 사업을 위해서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감동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목사님들을 향하여 C 목사님이 예쁜 성탄카드를 한 장씩 나누어 주셨습니다. L 권사님이 가시면서 남기고 가신 것이라고 하시면서 정성스럽게 예쁜 글씨로 쓰여진 목사님들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나누어 주셨습니다. 대접을 받는 우리는 권사님의 이름을 몰랐지만 대접하시는 권사님은 초대에 응하신 모든 목사님들의 이름을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번 잔치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기도하며 준비해 오신 잔치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간의 교차로에서 기분 좋은 잔치에 초대받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민 교회가 날이 갈수록 어렵고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우리 주위에 이렇게 아름다운 믿음의 성도들이 있는한 소망이 있습니다. 교회마다 사랑이 넘쳐날 것을 기대해 봅니다.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L 권사님과 아름다운 목양을 이루어 가시는 존경하는 동역자 C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1040

어느 사형수가 읽은 성경

엘리트 교육을 받은 남파 간첩이 성경을 배운 것도 아니고 생전 처음 그것도 단 한번 읽고서 엄청난 변화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유앵손 목사님을 처음 만난 곳은 1974년 LA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차남진목사)에서였습니다. 유 목사님의 시부모님은 서울의 건국대학교 설립자이셨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목사님이 아니셨습니다. 권사님으로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실 때였습니다.

그 후 20여년이 지나서 목사 안수를 받으셨고 세상을 떠나시기 전 까지 한인 타운에서 여자목사로서 교회를 설립하시고 담임을 하셨습니다. 유 목사님은 필자가 어려운 병으로 힘들어하며 삶의 희망을 잃고 있을 때 자주 찾아 주시어 기도해 주시며 사랑으로 대해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놀라운 간증을 해 주신 것입니다.

미국에 이민 오기 전 서울에서 충현교회를 섬길 때 같은 교회를 섬기시던 집사님이 사업상 발생한 문제로 실형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집사님이 감옥에 있는 동안 한 달에 두 번 정기적으로 감옥을 방문하시어 집사님을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당시 유 목사님은 충현교회의 옥중 선교대원으로 감옥을 수시로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긴 복도 끝 한 편에서 어느 죄수가 유 목사님을 향하여 손짓하며 부르는 것입니다. 가까이 다가서자 철장 안에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슨 책인지 모르지만 그 책을 빌려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 목사님이 가지고 있었던 책은 성경이었습니다. 그냥 달라고 해도 기쁜 마음으로 전해 줄 터인데 빌려 달라는 것입니다. 유 목사님은 품에 지녔던 두툼한 성경책을 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말하지도 아니했고 또 묻지도 않았으며 왜 성경을 빌려 달라고 하는지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감옥을 방문했습니다. 유목사님의 방문을 안 죄수가 큰 소리로 유 목사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가까이 다가서니 철장 안에 갇혀있는 죄수가 유 목사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이런 책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북한에서 김일성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한 북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북한에 돌아와서 특수 교육을 받고 남한으로 파송 받은 직급이 높은 고등 간첩으로 은밀하게 활동을 하다가 정부 기관에 체포 당해 사형수로서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그가 지금까지 읽어본 많은 책 중에 성경처럼 처음과 끝이 딱 맞아 떨어지는 책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책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느냐며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줄줄이 이어서 암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 목사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반 사람도 아니고 공산국가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남파 간첩이 성경을 배운 것도 아니고 생전 처음 그것도 단 한번 읽고서 엄청난 변화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감옥에서 그 간첩은 유 목사님에게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같은 사실이 교정 책임자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반신반의했지만 나날이 변해가는 그의 삶에 다른 죄수들도 놀라움을 보이게 됩니다.

그의 변화가 인위적인 것이 아니며 말씀을 통한 변화라는 사실이 위 사람들에게도 보고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사형 받아야 할 간첩은 무기수로 감형을 받게 되었으며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성경을 통하여 받은 은혜를 자기만 간직하지 아니하고 같은 감옥의 죄수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간첩의 신앙 간증을 통하여 다른 죄수들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지켜본 교정 당국이 마침내 그에게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게 됩니다. 주기적으로 죄수들을 향하여 방송으로 설교하는 전도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유는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딤후> 3 : 15-16절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0890

다시 만나고 싶은 강동철 교수님!

성경을 글자로 읽는 것이 아니라 조각가의 시각으로 하나님이 만드시는 창조물 하나하나를 예술가의 특별한 시선과 느낌으로 창조의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14년 전인 1998년 10월, 조각가 강동철 교수님의 ‘청동십자가 전시회’에 아무런 생각없이 방문했습니다. ‘청동십자가 전시회’라는 말에 끌림을 받아서였습니다. 많은 사람으로 복잡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시장은 한가했고 강 교수 부부만이 있었습니다. 조각에 문외한인 필자를 향하여 강 교수님은 작품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강 교수님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시고 영국황실의 청동조각을 유학하셨습니다. 필자는 강 교수님을 향하여 질문했습니다. “이 일은 돈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조각물을 만드시게 되었습니까?” 그렇게 질문 한 것은 사연이 있을 것이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물음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당시로부터 7 년 전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여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쳤다는 겁니다. 이후 가족들에 의하여 강제로 1년 반 이상 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기왕에 죽을 것이라면 하나님이 정말로 계신가? 확인을 하고 죽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어디에 가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어려서 읽던 성경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해 겨울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성경만 읽다가 그만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후로 지난 성경 속 사건을 쫓아다니며 청동으로 조각물을 제작, 전 세계를 다니며 전시회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강 교수가 크게 은혜 받은 것은 창세기 1장 1~2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조각가가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아픔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작품 구상이 되지 않아 몇 개월씩 계속되는 정신적 방황을 이기지 못해 정처 없는 여행을 다녀야 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해산의 고통을 통하여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으면 그것을 만들기 위해 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성을 들여서 만든 것도 작품도 10%의 만족 밖에 느낄 수 없었답니다. 예술가마다 자기가 만든 작품에 대하여 20~30% 이상 만족할 수 있으면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럴때마다 찾아오는 낙심과 좌절 절망감은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을 갖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작품을 자신의 손으로 도끼를 들어 내리친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천지 창조의 기록을 읽게 될 때에 하나님은 인간들처럼 작은 것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주와 만물을 그것도 움직이고 성장하며 변화하게 만드시되 자신이 만드신 것에 대하여 원망하지 아니하시고 100%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아니고 매번 하나님은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 대단히 기뻐하시고 흡족해 하신 것입니다. 조각하는 사람들처럼 복잡한 여러 과정을 통하지 아니하시고 말씀으로 단번에 창조하셨습니다.

사람들처럼 있는 것을 갖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사람은 모형이나 형상 밖에 만들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게 만드셨습니다. 바다를 수영하게 만드셨고 하늘을 날개 하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습니다. 강 교수가 창 1장 1~2 절을 읽는데 소요된 시간은 6 개월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글자로 읽는 것이 아니라 조각가의 시각으로 하나님이 만드시는 창조물 하나하나를 예술가의 특별한 시선과 느낌으로 창조의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그가 누구로부터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삶의 목적과 방향을 깨닫게 되어 그 일을 생명이 다하는 날 까지 할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pyongkang.com/?page_id=1172

Do me a favor Grandfather!

하나님은 기도한 것 이상으로 복에 복을 더 하셨습니다. … 지난 7년 여간 큰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지난 달 큰 손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전화 했습니다. 가끔 전화로 대화를 하지만 이번처럼 울음 섞인 떨리는 소리는 처음이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손녀의 첫 마디는 다급한 목소리로 “Do me a favor Grandfather”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었기에 이렇게 급한 소리로 전화 했을까?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지만 당연히 원하는 것을 해주리라 생각했습니다. 손녀가 전화 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물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위중한 상태에 있는 할머니를 위해서 전화를 한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사랑하는 할머니가 죽지 않고 오래 살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집 사람은 어려운 병으로 수시로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할머니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런 전화를 한 것으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큰 손녀의 뜻밖의 전화를 받고나서 가슴에 진한 감동과 함께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어린 손자녀들이 할머니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할머니의 병세가 호전되지 아니하므로 위기를 느껴 자기가 기도하는 것보다는 할아버지는 목사님이기에 기도에 대한 응답을 속히 주시리라 생각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손녀의 부탁을 받은 필자는 마음에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집 사람의 병세가 나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약해져 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어쩌면 어린 손자녀들이 이번 일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아이로만 알았던 손녀가 할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어른과 다르지 아니함을 보면서 생각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자녀의 복자손의 복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집사람이 13년 이상 투병을 해 오면서 그 힘든 시기를 인내하며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딸의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축복하신 온 천하보다 귀한 6명의 손자녀들을 통한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웃을 일이 별로 없는데도 혼자 소리 내어 웃음을 지으며 기뻐합니다. 어떤 때는 손벽을 치며 눈물까지 흘리며 큰 소리로 웃습니다. 처음에는 무엇 때문에 웃느냐고 질문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웃음의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손자녀들의 재롱을 생각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집 사람이 처음 발병 했을 때 자녀들에 대한 소원은 두 딸이 기도한 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배후자로 짝지어 주시는 것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도한 것 이상으로 복에 복을 더하셨습니다. 아들도 대학을 졸업하게 하셨고 두 딸의 가정을 통하여 주신 6 명의 손자녀들을 보는 재미로 지난 7년 여간 큰 위로와 기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집 사람이 처음 수술 받고나서 4년 반 후에 재발이 되었을 때 담당의사는 앞으로 남은 생명은 2년 미만이라고 했습니다만 지금까지 생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집 사람이 그 어려운 투병 중에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기적 같은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사방에서 집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많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임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내외가 주위 여러 어르신들에게 받은사랑의 빚은 평생을 두고 갚아도 다 갚지 못할 것입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0609

어느 노 수녀님과의 만남!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는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뿐인 것입니다

지난 달 어느 오후에 집 사람이 20여 일간 입원해 있는 병원 한 편에 위치한 간이 커피숍에서 줄을 서 있었을 때 필자의 눈에 띄는 분이 계셨습니다. 커피를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곤한 몸을 가지고 계산대 한 편에 손을 대고 쉬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돌아서는 발걸음이 편치 않아서 커피를 사고 남은 거스름 돈을 받지 아니하고 그 돈으로 노 수녀님에게 커피 한잔을 드리라고 부탁하고 돌아서는 필자를 향하여 수녀님이 뜻밖의 말을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이시지요?”

나의 무엇이 노 수녀님의 눈에 보통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으로 비쳐졌을까? 한 번의 만남도 대화도 없었을 뿐아니라 서로의 신상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먼발치에서 잠시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수녀님은 계속 말을 이어가셨습니다. 내 평생에 목사님에게 커피를 대접받기는 처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대한 대답으로 저도 수녀님에게 커피를 대접하기는 생애 처음이라고 화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수녀님은 “누가 어느 병동 몇 호에 입원에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노 수녀님은 그 병원 환자들을 담당하시는 수녀님이셨습니다.

다음 날 입원실을 방문했을 때 집 사람에게 수녀님이 다녀가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집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보! 수녀님이 기도해 주셨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셨어요” 집 사람이 놀라워 하는 것은 천주교인들이 기도할 때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필자도 있는 시간에 노 수녀님이 다시 입원실을 방문하셨습니다. 그 때 우리 내외는 수녀님의 기도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신 것을 특별히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중하게 질문하길 평소 기도하실 때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시는지요? 필자가 묻는 질문의 의도를 아시는 노 수녀님은 이렇게 대답 하셨습니다. 집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한 것은 집 사람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불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는 나무아무타불로 기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기도 받는 사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편협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넓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한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상 어느 종교 모든 종교는 다 하나라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의 말처럼 들렸습니다. 수녀님과의 짧은 만남을 통하여 천주교와 개신교가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날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 어떤 종교로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 된 보증으로 기도의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아무렇게나 기도해도 된다면 이런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응답 받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는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뿐인 것입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0445

Ko 수학선생님을 생각하며!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1970년대 초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숫자는 3-4천명으로 집계가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많은 한인이 없었을 때입니다. 길을 가다가 한국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 서로 통성명을 하던 때였습니다.그 당시 한인타운에서 유일하게 하숙집을 하고 있는 곳에 10여명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식사시간이면 자주 듣는 말이 있었습니다. 강원도에서 수학선생을 하시다가 미국에 오신 Ko 선생님에 대한 말이었습니다.그 분은 하숙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친구와 함께 생활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한인들은 지금처럼 이민 비자를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때는 미국에 가는 사람에게 한국 정부가 200불 이상을 가지고 가지 못하게 할 때였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도착해서도 변변한 직장을 쉽게 가질 수 없었습니다.그런데 Ko 선생님은 달랐습니다. 미국에 도착하자 마자 한국에서의 직업을 생각지 않으신 것입니다.무슨 일이든 닥치는대로 하셨습니다.

당시에 우리 한인이 할 수 있는 직업이 많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남자는 밤마다 빌딩 청소나 페인트를 하고 낮에는 주유소에서 일했습니다.모두가 청운의 푸른 꿈을 품고 미국에 유학차 오신분도 계셨고 사업을 위해서 오신 분도 있으셨지만 모두가 만만치 않았습니다.모두가 특별하시고 훌륭하신 분들이지만 미국에서의 정착은 쉽지가 않았습니다.그런데 Ko 선생님은 달랐습니다.그 분은 하루에 세 곳에서 일하셨습니다.그렇게 2년 동안 열심히 일한 대가로 2만불의 돈을 모았습니다.당시 그 정도의 돈은 큰 돈이었습니다.지금 한인타운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올림픽 가에 위치한 집 한 채의 값이 15,000 – 20,000불 할 때였습니다.2-3천불이면 집을 한 채 다운페이 하고 살 수 있었습니다.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노동을 해서 그 돈을 모은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이룬 것입니다.그때까지만 해도 필자는 Ko선생님을 말로만 들었지 보지는 못했습니다.그 분의 친구가 하숙집에 머물고 있어 어느날 인사차 들렀습니다.

Ko 선생님은 그 동안 모은 돈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롱비치에 위치한 리커스토어를 계약했습니다. 가게를 시작하면 몇 년은 그 일에 매말려야 하므로 이번에 일주일 동안 시간을 내었습니다. 그분이 택한 휴가 장소는 라스베가스였습니다.

한국에서부터 미국에 가면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라고 했습니다.우리 모두의 부러움을 뒤로한 채 여행을 떠났습니다.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분의 소식을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Ko 선생님은 라스베가스에서 머무는 며칠 동안 수천불의 돈을 땄습니다.

그것이 화가 된 것입니다.하지만 일주일 머무는 동안 가지고 온 돈 마저 다 잃고 만 것입니다 본전 생각이 났습니다.어떻게 번 돈인데! 먹을 것도 절약하고 밤잠도 자지 아니하면서 힘들여 모은 돈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화가 난 것입니다.

이후 Ko 선생님을 어디에서 보았다는 분도 없었고 어디로 가셨는지 아는 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당당하시고 그렇게 멋있어 보이셨던 Ko 선생님이 왜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야만 하셨을까?

그 분을 생각할 때마다 약1:22절을 생각하게 됩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Ko 선생님이 누구에게 속았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속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속은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꾀에 속은 것입니다.주님을 떠난 인생의 결국은 다 이런 것입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0303

어느 여의사의 고백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당신에게 전해 달라는 것이 있습니다”

1997년 8 월에 2 주간의 일정으로 네 번째 아마존 선교여행을 했을 때였습니다. 양승만, 양혜란 선교사님의 사역을 돕기 위하여 전문 의료인들을 모시고 방문한 것입니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 곳은 아마존의 하류에 속하는 브라질, 페루, 콜롬비아 국경이 만나는 지점이었습니다. 아마존에는 길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길이 없다는 말은 자동차나 기차가 다닐 수 있는 운송 수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존의 길은 오직 물 위로 떠다니는 배 뿐인 것입니다. 강 본류는 물살이 세고 깊어 큰 배가 다니지만 인디오들이 사는 마을로 연결 되는 작은 강은 수심이 낮아 상업용 배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작 10여 명 미만이 탈 수 있는 작은 나무배에 모터 엔진을 달고서 이 마을 저 마을을 방문 하는 것입니다.

아마존의 인디오 마을들은 우리가 사는 도시처럼 가까운 거리에 붙어 있지 않습니다. 2-3 일을 달려야 만나는 마을도 있으며 먼 곳은 배로 한 두 주일을 가야 만날 수 있는 마을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존의 인디오들은 지금도 자기가 사는 마을에서 밖으로 나오기를 주저하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아마존의 하루는 우리가 사는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5- 60시간의 하루처럼 길고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곳에는 문화 시설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소리 외에는 들을 것이 없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강과 푸른 나무 숲 그리고 높고 맑은 하늘 외에는 달리 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직장에 출근할 필요도 없고 학교에 갈 일도 없으며 전화를 걸 일도 없으며 신문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까운 사람들과의 대화의 시간이 저절로 길어지는 것입니다.

낮에는 마을을 방문해서 병든 자를 치료해 주는데 놀라운 것은 저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의 예방 주사도 맞아 보지 못했고 단 한 개의 비타민도 먹어본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인디오들의 대부분이 외지인들 만나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인디오들의 평균 수명이 30 여살 밖에 되지 않습니다. 선교 여행에 참여하신 전문 의료인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으셨던 여자 의사분이 계셨습니다. 남가주에서 40여년 가까이 의사로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어느 날 필자에게 평생 마음에 담아둔 고백을 하겠다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신 것입니다.

의과대학에 다니던 때 다른 학교 의과대학에 다니던 분을 만나 뜨거운 사랑을 하다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꿀 같은 삶이 이어져 딸과 아들을 얻었습니다.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던 부부사이가 언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더니 타인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남편과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젊은 간호사와 가까운 사이가 된 것입니다.

남편은 주위의 시선을 견디다 못해 미국 유학을 결심하게 됩니다. 미국으로 출발하는 전 날 밤 부인은 남편이 잠든 시간에 남편의 서류 가방을 열어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기어진 누런 색 두툼한 서류 봉투를 꺼냅니다. 그 봉투 안에는 남편이 일할 병원에서 함께 취업 신청을 하는 간호사의 서류가 들어 있었습니다.

남편이 한국을 떠나고 이틀 후 간호사에게 전화를 합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당신에게 전해 달라는 것이 있습니다” 약속한 장소에서 아무 일도 모르고 아무 일도 없었듯이 만나서 서류봉투만 전해 주고 곧 바로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두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이 있는 미국에 들어왔습니다. 부부로 미국에서 40여년을 살아오면서 부인도 남편에게 그 때의 일을 묻지 않았고 남편도 부인에게 그 때의 일을 묻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남편이 부인을 향하여“여보! 내가 당신에게 고백해야 할 것이 있어요, 오늘 교회에 가면 장로로 임직을 받게 되는데 당신에게 용서받지 않고는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정말로 당신에게 잘못했어요! 진작 용서를 빌지 못해서 미안해요 나를 용서해 줘요”

진심어린 남편의 고백을 듣는 순간 평생 부부로 살아오면서 가슴에 담고 지내온 무거운 짐의 절반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또 10여년의 세월이 지나 가고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갔지만 아직도 마음에 남은 절반의 앙금은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0121

잊고 살았던 하나님의 은혜

힘들고 어렵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인이민자들을 위해 내 몸을 던져 행복의 길, 구원의 길을 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열망으로 끓어 오릅니다

필자는 청소년 시절에 치료되지 않는 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죽음의 문턱을 여러번 넘나 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일명 재생불능성빈혈이라고 하고, 재생불량성빈혈이라고도 불리는 병으로 몸에서 피를 만드는 기관이 폐쇄되어 1년 여간 남의 피를 수혈 받으며 생명을 연장받아야 했습니다.

심할 때는 헤모그라빈의 수치가 2-3까지 내려갔었던 적이 있었고 혈소판의 수치가 수백의 단위로 떨어지면서 온 몸의 피가 오관을 통하여 밖으로 분출이 되었으며 한번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 2-3주씩 지혈이 되지 않아 큰 어려움에 처하곤 했습니다. 혈압이 60/25까지 떨어질 때는 온 몸이 장작처럼 굳어갔으며 심하게 저려 오는 고통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맥박이 300까지 뛰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손목에서 맥박의 진동을 잡을 수가 없어 심장이 있는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맥박의 수를 측정해야 했습니다.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만 4번 입원했으며 그 중 한번은 40일 동안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 성모병원에서도 15일을, 수원의 성빈센트병원에도 여러번 입원했습니다. 필자의 한국에서의 주치의는 당시 한국 혈액학회 부회장이었던 세브란스 병원의 내과 과장 채응석 박사님과 한지숙 박사님이셨으며 미국에서는 UCLA 혈액학 주임교수이셨던 Nicolas Costa 박사님이셨습니다.

필자가 미국에 오게 된 것도 한국에서 병을 치료할 수가 없어서 미국 선교기관의 초청으로 1973년 11월에 미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을 출발할 때는 미네소타 주에 있는 해군 병원인 Mayo 병원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미국에 도착하고서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그곳에서도 치료 방법이 없어서 UCLA병원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8개월 간의 반복되는 정밀검사를 통하여 어느 날 Costa 박사는 중대한 말을 하셨습니다. 필자의 병이 고침받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왜 나았는지 무엇때문에 나았는지 모르지만 의학적으로 완전한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이 병으로 병원에 올 필요도 없으며 이제부터 원하는 일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미국에서 특별하게 치료받은 것은 없습니다. 오직 반복되는 골수검사와 주기적인 검진을 했을 뿐입니다. 특별한 약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병이 나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필자는 죽어야 할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이 나았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치료를 위한 심리적 요법으로 그렇게 말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2년의 세월이 지나기까지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나음 받은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반복 수혈을 받아야 하는 필자가 어느때부터 수혈을 받지 않아도 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40년 동안 수혈을 받지 않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오면서 가정을 이루고 세 자녀의 부모로서 현재 6명의 손자까지 축복받았습니다.

필자의 아내는 말기 암 환자로 힘든 투병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난 달 병원 입원기간 동안 담당 의사와 우연한 대화를 하던 중 필자가 재생불량성빈혈 환자였다는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그때 혈액 마침 암 전문의사인 집사람의 주치의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오진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 병은 치료약이 없어 고쳐지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감사하게 되었으며 만일 그 때 구원받지 못했다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천국의 상속자로 영생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것을 생각하니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필자에게 있어서 병은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축복이 되었습니다. 병을 통하여 어린나이에 죽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아니하는 죽음 다음의 세계를 알게 하셨습니다. 환경상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처지였으며 병을 통하여 나를 꺽으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셨으며 오늘의 내가 소유한 모든 복은 병을 말미암은 것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나의 삶에 있어서 병은 상상할 수 없는 하늘의 복으로 인도하는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