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론의 백향목

레바논의 백향목은 살아서만 수천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수천년간 자리를 지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백향목이 사용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난 여름 레바논 대학에서 교수하셨던 이재훈 박사님 가족이 오만과 시리아를 여행하고 돌아오면서 필자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셨습니다. 유향과 물레방아가 힘차게 돌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필자도 두 번의 성지 여행을 했지만 유향을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유향을 읽을 때마다 어떤 모양일까 늘 생각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면서 손으로 만져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너무 귀한 것이기에 친구 동역자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갈 때 유향을 조금씩 나누며 기쁨을 함께 했습니다. 유향은 마치 송진과 같은 것으로 중동지역에서는 오만에서나 구할 수 있습니다.

유향도 귀한 것이지만 필자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은 물레방아 사진이었습니다. 한국의 물레방아보다는 7-8배 정도 컸습니다. 마치 2층까지 집 크기라고 할까요. 그런데 물레방아의 크기때문이 아니라 그 물레방아의 나이가 1천년이 되었다는 사실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천년이 되었는데도 어떻게 물레방아가 썩지 않았을까? 더 놀라운 것은 그 물레방아의 수명이 앞으로도 1천년 이상은 더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물레방아에 사용된 나무는 보통의 것이 아니라 레바논에서 나는 백향목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0여년 전 로마를 방문했을 때 필자가 감동 받은 곳이 있습니다. 로마의 많은 성당 중 스칼라산타 성당이 있습니다. 스칼라산타 성당이 유명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는 재판을 할 때 성 금요일 이른 새벽에 총독 집무실로 끌려 오르고 내려오신 28개의 나무 계단을 옮겨다가 놓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칼라산타 성당은 다른 말로 성 계단 성당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나무 계단을 과연 누가 옮겨놓았을까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후 326년에 예루살렘에서 이 나무들을 옮겨다가 교회 건물을 지었습니다. 교황청에서 이 성 계단이 있는 곳을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지정했습니다. 지금도 그 성당 안에는 교황만이 사용하는 소 예배당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면죄부 판매가 처음으로 그곳에서 시작되었으며, 주후 850년에 교황 에로 4세가 산타스칼라 성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사람의 죄를 사하는 의식을 시작하면서, 지금도 죄 씻음을 원하는 사람들이 무릎으로 그 계단을 오르고 있습니다.

한 계단을 무릎으로 오를 때마다 9년 동안 지은 죄의 속죄를 보증 받는다고 전해져,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도 죄 씻음을 받기 위해 이 성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다가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인 “복음에는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성 28개 계단에서 일어나 걸어서 내려와 종교 개혁의 불을 피웠습니다.

28개의 나무계단은 2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필자도 계단을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 포기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올라가는 사람들의 뒤에서 성 계단에 두발을 잠시 올려보고 나무 계단을 자세히 보니 사람들이 무릎으로 올라가는 곳마다 깊은 자국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스칼라산타 성당의 28개의 나무계단이 이토록 오랫동안 보존되는 이유는 바로, 이 나무들이 레바논의 백향목이기 때문입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살아서만 수천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수천년 동안 자리를 지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백향목이 사용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편 92장 12에서 13절 말씀을 되새겨보면서 글을 마칩니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며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황하리로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9870

고 유상민 목사님을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필자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나눠보지 못했기에 너무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필자가 이민 교회를 섬겨오면서 가장 의지가 되고 많은 대화의 시간을 나눴던 분 가운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유상민 목사님(늘사랑한인교회를 섬기셨던)이 계셨습니다. 세상을 떠나신 지도 다음 달이면 3주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필자는 한인 타운에서 떨어진 외곽에, 유 목사님은 한인 타운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 목사님 댁은 필자를 비롯한 수명의 동역자들에게 마치 고향마을 사랑방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언제나 목사님 댁의 문은 열려 있었고 방문할 때마다 따뜻한 사랑의 대접을 받으며편안하게 쉬어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남을 섬기길 좋아하셨습니다. 함께 식당에 가면 언제나 식사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접할 기회를 주지 않으시는 겁니다. 필자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유 목사님과 같은 분을 만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은 정말로 주님의 본을 받아 이웃을 섬기길 좋아하시며 행복해 하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유 목사님은 유학생 비자로 미국에 오셔서 오래 동안 서류 미비자로 사시며 목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0여년 동안 고국 방문도 못하셨습니다. 목회 초창기는 힘든 노동을 하시면서 어렵게 교회를 섬기셔야 했습니다. 영주권이 없어 당하시는 어려움에 얼마나 한이 맺히셨으면 어느 날 필자에게 푸념과도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이 목사님! 내가 영주권을 받으면 목사님을 유럽 여행을 시켜드리겠습니다”그 말이 실현 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또 영주권을 손에 쥐신다 하시더라도 유럽 여행을 하는 것은 작은 경비가 아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은 것입니다.

그로부터 15-16 년 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꿈에도 그리던 영주권을 받게 되셨습니다. 영주권 인터뷰를 하러 가시기 수일 전 유 목사님은 기억에서 잊혀진 유럽 여행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 이제 약속을 지켜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영주권을 받으면 이 목사님 부부와 우리 부부가 함께 유럽 여행을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지난 20여 년 동안 해외여행을 해보지 못했으니 필자가 원하는 날짜와 지역을 선택하여 여행사에 예약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유 목사님의 이 같은 부탁을 서너 차례 받았지만 곧 바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말씀을 하시기에 이번에는 필자가 정색을 하고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유 목사님! 가까운 여행도 아니고 유럽 여행을 10여일 이상, 더구나 4명이 여행하려면 적어도 1만 달러 정도 돈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그 돈을 감당하시려고 하십니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조용하게 말씀을 드리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래 전의 빛 바랜 약속을 말씀하시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감사드립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유 목사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딸에게 여행비 1만 달러의 돈을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칼 같이 지키시는 목사님이셨습니다. 어떠한 손해와 아픔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키시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 유 목사님이 내 곁에 계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복이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필자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나눠보지 못했기에 너무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함께 귀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원하시던 영주권을 받으시고 이제는 마음껏 주님을 위해서 크게 사역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얼마나 자비량 이민 목회가 힘이 드셨으면 몸이 그토록 망가지셨는지 60을 갓 넘기신 나이에 지병으로 그토록 사랑하시던 교회와 가족을 두고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동역자들에게 크게 존경 받으시며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유 목사님이 주님께 가신지 3 주년이 다가오는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계신 것처럼 따뜻한 온정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9742

목사님도 부부싸움 하시나요?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가정을 가진 부부들이 다 싸움을 합니다. 세상에 싸우지 아니하는 부부는 한가정 한 사람도 없습니다.

20여 년 전, 매주 금요일 마다 학생회 성경 공부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야고보 4 장 1 절“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는 말씀을 중심으로 모임을 마치고 난 후에 한 여학생으로부터 뜻밖에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도 부부 싸움을 하시나요?”

그 여학생의 얼굴에는 웃음이 늘 없었습니다. 매우 힘들어 보였습니다. 오래 동안 난치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통 당하시는 어머니 때문 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학생의 어머니는 재량불량성빈혈이라고 하는 난치병으로 병마와 싸우고 계셨습니다. 그 학생은 아래로는 중학교에 다니는 두 명의 여 동생이 있었으며 아버지는 집에서 자동차로 6-7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먼 곳에서 장사를 하셨기에 한 달에 서너 번 밖에 뵐 수가 없었습니다.

대학에 갓 들어갔으므로 부모님에게 지속적인 도움과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에 가사를 맡으며 동생들까지 책임을 져야하고 어머니의 병 수발도 들어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시기 전에는 단란한 가정이입니다. 그러나 치료가 되지아니하는 난치병으로 집안에 웃음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부부사이도 예외가 아닌 것입니다. 어머니의 병세가 깊어가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멀어지고 있었나 봅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들의 갈등으로 가정이 위기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누구와 상의 할 곳도 없습니다.

도움을 받을 곳도 없었습니다. 아무에게나 집안일을 들어 내놓고 이야기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의 깊은 상처를 가지고 불안해 하며 어두운 삶을 근심 속에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나는 위기의식을 느껴야 했습니다. 나의 생각 없이 던지는 잘못된 한 마디 말 때문에 이 여학생이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으며 반대로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 주기로 한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이지만 예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도 집 사람과 싸움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로 심각하게 싸움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말할 수 없었던 내용들을 말해 주었습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가정을 가진 부부들이 다 싸움을 합니다. 세상에 싸우지 아니하는 부부는 한가정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무엇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까?

부부들에게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면 부부의 인연으로 지금의 부부와 사시길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왜 부부는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했지만 싸우며 삽니까? 이유는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싸움을 하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만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과 믿지 않은 사람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싸움을 해도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지켜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동에 대한 주님의 심판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도 인내 할 수 있고 인내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부부가 금실이 좋아도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며 생각나는 대로 살 수 있습니까? 목사님도 부부 싸움을 하시느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솔직한 답변을 들은 학생은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님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 여학생의 부모님들과 가정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길 시작했었던 것입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9606

아내에게 받은 마지막 선물

인사를 해도 눈을 주지 않고 악수도 거절하는 것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부인은 생사의 귀로에 있는데 남편인 목사가 쌍꺼풀 수술을 한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아내는 말기 암 환자로 12년째 투병 중에 있습니다. 유방암 2 기 진단을 받고 수술 받은 것은 지금으로 부터 12년 6개월 전이었습니다. 수술을 하고 4년 반 만에 말기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담당의사는 통계 수치를 인용하여 2년 이내에 명을 달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방암이 골수암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피를 말리는 투병 생활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키모떼라피를 5개월 째 받아오고 있으며 방사선 치료는 인체 허용량이 다하여 더 이상 치료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내에게는 어쩌면 마지막 방문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집 사람과 함께 3년 전에 고국을 방문했습니다. 머무는 십여일 동안에 필자의 형수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인의 시신을 화장터에서 처리할 때였습니다. 화장에 소요되는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였습니다. 그 동안 가족들은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모인 곳에 서울의 성형외과병원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는 이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눈 수술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나 봅니다.

필자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와 그렇지 않아도 작은 눈이 더 작게 보이고 있었습니다. 저런 상태로 그냥두면 계속해서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와 지금보다 더 눈이 작아 보인다는 말을 들은 집 사람은 곧 바로 내게로 와서는 이번 기회에 눈 수술을 하고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듣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집 사람은 계속해서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 밤 늦은 시간까지 그 문제로 아내와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완강하게 거절하는 필자에게 아내는 마지막 카드를 꺼낸 것입니다. “여보! 나는 내가 떠나고 난 다음 당신이 이런 모습으로 추하게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너무 싫어요! 그러니 더 이상 거절하지 마시고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마지막 선물로 알고 받아 달라”고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선물이라는 말에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입니다. 다른 병원에 알아볼 시간도 필요도 없었습니다. 다음 날 이른 시간에 집 사람과 병원을 방문해서 그곳에서 곧 바로 수술을 하고 두 눈에 난 상처 위로 테이프를 부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주일 날 교회 강단에 선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났는데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인사를 해도 눈을 주지 않고 악수도 거절하는 것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부인은 생사의 귀로에 있는데 남편인 목사가 쌍꺼풀 수술을 한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실은 쌍꺼풀 수술이 아니었습니다. 위 눈썹을 끌어 올리는 수술이었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목사님이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주일 밤 목사인 나의 처사에 대하여 강하게 충격을 받은 몇 교우들이 서로 연락하여 한 장소에 모여서 저를 규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무슨 말로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로부터 한 주간 동안 여러 이상한 소리가 귀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예배에 참석해야 할 교우님들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시고 오랫동안 충성하셨던 분들이셨습니다. 그 때의 허탈함은 무엇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귀하게 여기셨던 직분자중 한 분에게는 필자가 왜 수술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간의 내용을 설명했지만 이미 굳어진 마음은 그 어떤 말로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아내에게 들은 말입니다. “당신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까지 교회를 섬겨오면서 처음으로 강하게 질타 하시던 교우님의 집을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구하는 용서를 빌었지만 끝까지 용서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일로 교회를 떠나신 직분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아내에게 받은 마지막 선물의 값을 지불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시는 그런 슬픔 없기를!

교회를 섬겨오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24년 전의 일로 교회를 설립하고 7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교우중 천사의 성품을 지니신 C 간호사님이 계셨습니다.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시다가 미국으로 가족이민을 오신 분이십니다. C 간호사님을 만난 것은 환자와 목사로 만났습니다.

필자가 어려운 혈액 난치병에서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로 나음 받은 것을 알고서 찾아온 것입니다. 필자는 C집사님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 집사님도 살려 주세요”라고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점점 병세가 악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세상을 떠날 때가 임박한 어느 날 중환자실에서 C 집사님은 나의 손을 잡으시고 힘이 없어 개미 같은 소리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하고 계셨습니다. “목사님! 날 살려주세요! 나는 더 살아야합니다. 이대로는 죽을 수가 없어요! 어린 두 아들을 남겨두고 갈수가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집사님의 병상을 방문할 때마다 안쓰러움과 답답함을 느껴왔는데 이런 애원을 듣고서 필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고 도와 드리고 싶었습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위해서 피가 필요하다고 해서 교회에서 광고를 하고 교우와 함께 집사님을 위해서 헌혈을 했습니다.

피를 나누기는 했지만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아픔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수도 없었습니다. C 집사님이 임종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하나님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단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의 생명을 2 년만 끊으시어 집사님의 생명을 5년 더 연장해 주세요”

가슴을 도려내는 듯 간절한 눈물의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필자의 기도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로부터 수일 후 집사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교회를 설립하고서 두번째 해본 장례식이었습니다. 교회 묘지에서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한없이 나약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목사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가 이렇게 큰 어려움을 당할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아파해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의 눈물은 필자가 목회하는 지역에서 발생한 4-29 흑인 폭동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흑인 지역에서 사업을 하던 K 집사님의 대형 마켓을 시작으로 불붙기 시작한 폭동으로 놀람과 두려움 뿐 아니라 분노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것은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미국 경찰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습니다.

K집사님의 부인 권사님이 이틀 동안 밤을 새우고 주일예배에 참석했다가 창백해진 얼굴로 코피 흘리는 것을 보면서 함께 울어야 했습니다. 폭동이 일어난 초기에 막강한 힘을 가진 경찰이 효과적으로 적절한 대응을 했더라면 그렇게 큰 피해로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폭동이 일어난 곳이 백인 지역이나 부유층이 사는 지역이었더라면 경찰이 그토록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민자의 아픔을 탓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필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성난 폭도들이 상점을 약탈하는 모습을 TV를 통하여 보면서 미국에 대한 분노를 느껴야 했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질서 없는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법이 가장 잘 지켜지는 나라이며 개인의 재산과 생명이 잘 보존되며 교육과 국민들의 윤리의식이 으뜸이라고 믿어왔었는데 4-29를 당하고서 그런 기대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폭동을 딛고 재기한 교우도 있지만 아직도 그 때의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을 볼 때마다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행복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훈계의 말씀을 주시는 것은 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강아지와 고양이를 남다르게 좋아했습니다. 어린 시절엔 품에 안고 자다가 어린 새끼 강아지를 죽게 한 일들도 기억이 됩니다. 특별히 고양이를 너무 좋아해 안고 다니길 좋아했지만 고양이는 사람에게 안기는 것을 싫어해 내 얼굴에 많은 상처를 내, 여섯 손 자녀를 둔 지금도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오래전 이민 생활 20여 년 만에 집을 선물 받고나서 집안에 강아지를 기르기 시작했었습니다. 쿠키, 토토, 치치, 조이, 린노,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름들이 있었지만 기억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길게는 2-3년 동안 함께 생활을 했던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한 달도 머물지 못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알래스카 산 백구인 쿠키는 6개월 만에 크게 성장을 하면서 너무 사나워져 혹시라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 상처를 줄 것 같은 염려에서 다른 집으로 보내야 했으며 대부분의 개는 나의 실수로 잃어버린 것입니다. 집에서 기르던 정든 강아지를 잃어 버렸을 때의 상실감은 글로서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아이들과 집 주위를 돌며 개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기도 하고 이집 저집 문을 두드리며 방문도 해 보며 여기 저기 전단지를 만들어 돌리기도 하면서 불쌍한 생각에 안쓰러워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강아지를 잃어버리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개를 보호하고 잃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목에 긴 줄을 매어 두는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입니다.

애완용 개의 목에 줄을 매고 묶어 두는 것은 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는 것으로 생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에 줄이 묶인 것을 볼 때마다 개에게 너무 고통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너무 학대하는 것 같으며 자유를 제한하는 것 같아서 묶인 줄을 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린 강아지를 울타리 밖으로 내모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집 안에 있으면 계속되는 사랑과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집을 나간 강아지는 그 순간부터 거친 세파와 싸워야 합니다. 보장된 행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강아지만 불행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강아지를 사랑하던 가족 모두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 후 나는 새로운 각오를 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엄하고 냉정하게 기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결심이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더 이상 개를 집에서 기르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훈계의 말씀을 주시는 것은 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계명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사항도 아니고 권장 사항도 아닙니다.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명령하면 아랫사람은 순종만 요구될 뿐입니다. 불순종하면 명령자를 화나게 할 뿐 아니라 징계가 따릅니다. 그러나 순종하면 명령자를 기쁘게 하고 순종자에게 보상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심은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짐을 지우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가면 영원히 불행하여져 죄악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평화와 행복을 영원토록 보장하시기 위해서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만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꿈 속에서 경험한 신비로운 체험

어느 날 꿈에서 필자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어딘가를 향하여 바쁘게 길을 가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내 앞에 지긋한 연세의 어른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분을 뵙는 순간 젊은 시절 사랑하는 연인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는 것 이상의 기쁨과 감격이 일어나면서 가던 길을 포기하고 그분을 따라 가길 시작합니다.

나타나신 그 분을 보는 순간 무엇 때문에, 어디에서 왜 오셨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모든 염려와 근심뿐 아니라 이제까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왔던 가족과 교회 성도들을 향한 생각도 한 순간에 사라지면서 지금 이 순간이 세상을 떠나는 이별의 시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세상을 영원히 떠나가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섭섭하거나 서운하거나 세상에 남겨두고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더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없을 뿐더러 더 살도록 허락해 주신다 해도 더 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된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과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지키려 했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것이 이 순간부터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조금도 아까운 생각이 없었습니다. 내 길을 인도하시는 분을 따르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분을 따라서 영생으로 향하는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문은 호텔의 회전식 유리문과 같아서 손으로 밀고 들어가는 문이 아니었습니다. 인도자를 따라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이 저절로 열렸고 문 안에 들어서자 더 크고 화려한 문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보아 온 그 어떤 화려한 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빛나는 보석으로 장식된 문이었습니다. 그 문을 보자 순간 한시라도 급히 그 문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원한다고 들어갈 수가 있는 문이 아니었습니다. 안에서 열어 주셔야만 들어갈 수 있는 문으로 손잡이가 없었습니다.

그 문안으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회전식 문으로 들어가자 마자 왼편에 끝없이 길게 들어선 긴 책장들이 있었고 그곳은 들어갈 사람들의 이름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기록보관 책임자가 나를 인도한 분을 향해 말하길 아직 내가 올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더니 한번 더 내 기록을 확인하겠다며 진열대에서 내 이름을 갖고 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볼 수 없었지만 나를 인도하신 분은 문서에서 나의 때를 확인하였습니다.

그 후 처음 들어간 그 문으로 나를 세상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꿈이었지만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고 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언젠가 나의 때가 되면 나를 인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천사가 다시 올 것입니다. 그 때를 소망하면서 주님이 예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주어진 생명의 기간 동안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돌려드린 주차장 헌금

17-18년의 긴 세월이 지나갔지만 기억에서 지워지지 아니하는 A 권사님이 계십니다. 교회가 주차장 구입을 위해서 6개월 동안 기도한 후 헌금할 날짜를 정하고 특별헌금을 했습니다. 당시 목표로 한 헌금은 다운페이먼트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액수인 2-3만 불로 정했으나 헌금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A 권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필자의 차 안에서 평소에 보지 못하던 검은 가방을 주시며 떨리는 음성으로 받으시라고 하셨습니다. 웬 가방이냐고 했더니 그 안에 헌금 5000불이 들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A 권사님은 60의 나이셨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오신 분이십니다. 일찍이 교육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님의 소개로 교육자인 남편을 만나 2남 1녀를 낳으셨으나 30중반에 홀로 되시어 온갖 궂은 일을 하시며 살아오셨습니다.

3년 전에 미국에 돈 벌기 위해서 방문으로 오셔서 남의 집에 사시며 대학에 다니는 막내아들 학비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저금 통장을 가져 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미국에 사시는 동안 그 흔한 여행이나 구경도 하지 못하셨습니다. 6일 동안 식모살이 하고 주일 날 교회에 나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며 기쁨이셨던 것입니다.

그런 권사님에게 5천불은 생명과 같은 것이며 평생 처음 그렇게 많은 돈을 쥐어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 예배 시간에 바치지 아니하고 예배 후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필자에게 준 것일까요? 헌금이 든 검은 가방을 받아 들고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권사님은 오늘도 교회에서 바치기 위해서 가져오셨지만 바칠까 말까 망설이다가 바치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러기를 지난 한 달 동안 계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더 망설이다가는 바치지 못할 것 같아 크게 결심을 하고 필자에게 전해주신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눈을 감았는데 너무 감격하여 쉽게 기도의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권사님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큰 감동과 은혜를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필자는 하나님과 권사님께 부끄러움을 가져야 했습니다. 당시의 필자는 이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인색하게 작은 액수의 주차장 헌금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마친 후 필자는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결정이 훗날 하나님께 엄한 꾸짐을 당한다 할지라도 감당하기로 한 것입니다. “권사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권사님의 주차장 헌금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이제 지금 제가 권사님에게 드리는 이 5천불은 하나님께서 권사님에게 드리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나는 그 가방을 열어보지도 아니하고 받은 대로 다시 권사님에게 돌려 드릴 때 가방을 받는 권사님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앞으로 미국에서 계속 사시려면 영주권도 얻어야 하고 또 남의 집에서 일할 수 없을 때에는 방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

A 권사님은“목사님!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세 번이나 반복해서 물으셨다. 그럴 때마다 힘주어 나는“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1 년 뒤 막내아들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교사로 임명이 되어 어머니를 모셔가 자녀들과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A 권사님과 자손들 위에 항상 함께 하시길 오늘도 기도합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9038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2)

두 가지를 질문했다. 돈은 어떤 의미로 생각하시느냐는 것과 어떻게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란 필자의 칼럼이 본지를 통해 보도(2010년 1월 20일자) 되고나서 두 달 후 한국서 발행되는 기독언론 <아름다운 동행>의 발행인 박 에스더 권사님으로 부터 칼럼에 소개된 이정희(한) 회장님을 인터뷰 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로부터 1년 2개월 만인 지난 5월 4일 박 에스더 권사님이 이곳 Los Angeles를 방문, 이 회장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회장님은 1974년 서울에서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다음 해에 미국에 오셔서 간호사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분야에서 크게 성공, 현재 11 개의 양로병원을 소유하고 있으며 직원 2000명을 거느리며 5개의 양로 병원을 새로 짓기 위하여 부지 구입을 완료하고 공사를 준비하고 있으시다.

6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를 마치면서 박 에스더 기자가 두 가지를 질문했다. 돈은 어떤 의미로 생각하시느냐는 것과 어떻게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다.

첫째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 자신에게 돈은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으며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종이에 숫자를 적고 그 뒤에 (0)을 몇 개 더 부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하셨다. 자신에게 필요한 돈은 하루에 2-30 불로 족하다는 것이었다. 재산이 적을 때는 많은 돈을 가져보길 원했지만 큰 돈을 소유하고 나니까 돈이 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사업 수단이 있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땀 흘려 수고했기 때문에 오늘의 성공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답 할 줄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큰 부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이 부어 주셔서 받은 것 밖에 없다고 겸손하게 고백하시며 이런 말을 하셨다.

빈손으로 이민 와서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기 위해 이민 초창기에 너무 힘들게 사셨단다. 침대도 없는 방에서 4 식구가 살았고 심지어 먹는 것 까지 아끼면서 돈을 모으셨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원칙을 정하신 것이다. 부부가 버는 월급 중 한 사람의 것은 저금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였던 것이다. 일하는 병원이 직장이라고 생각지 아니하고 주님을,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직원들이 하기 싫어하는 냄새나고 힘든 일을 도맡아 했고,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살피지 아니하며 주변 사람을 원망하지 않으며 항상 감사하며 일을 했다. 그렇게 일하는 것을 본 병원장이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년 전에 시작한 한 개의 양로병원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런 말을 하셨다. 작은 배는 작은 물에서 놀기에 작은 바람과 파도를 만나지만 큰 배는 큰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야 하기에 큰 바람과 풍랑이 있다고 하셨다. 우리가 생각지 못하는 큰 도전과 반복되는 위기를 돌파해서 나아가야만 하는 회장의 위치가 너무 외롭고 힘들어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욥 8 장 7 절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주님과 동행하시는 삶에 감사를 드린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8951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

정성으로 대접한 음식을 받지 못함이 모두에게 그렇게 큰 상처로 남을 줄 몰랐다. 당시만 해도 목회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였기에 그런 우를 범하게 된 것이다.

20 여 년 전 어느 여름에 있었던 일로 오랜 시간이 흘러갔지만 아직도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다. 유학생으로 학교와 직장을 오가며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L 청년을 지켜보던 어느 분이 자신의 조카딸을 배필로 소개하여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이다.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신혼부부는 필자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목사님을 모시고 축복 기도로 결혼 생활을 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랑신부와 필자는 이런 약속을 했다. 약속이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필자가 선언을 하고 다짐 받은 것이다. 심방 시간은 식사 시간을 피해서 토요일 오후 2 시 반으로 정했다. 그리고 아무런 준비를 하지 말것을 지시했다. 첫 심방의 조건으로 내건 것은 차 한 잔의 대접만 받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한 것은 신랑과 신부를 잘 아는 필자로서는 신혼살이를 시작하는 가정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부는 좋은 가문에서 곱게 자라 막 학업을 끝내고 살림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방을 할 때마다 어머니 같은 전도사님과 함께 했다. 심방하는 날은 전도사님의 생신이었다. 당시 교회가 전도사님에게 사례를 하지 않았기에 생일을 맞으신 전도사님을 위해서 점심이라도 대접하고 싶어 좋은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불리고 지척의 거리에 있는 신혼 가정에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각종 산해진미의 아름다운 음식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 아닌가? 문제는 장모에게 있었던 것이다. 사위가 마음에 드니까! 심방하시는 목사님을 최고의 정성으로 대접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이틀 전부터 장모와 처제가 음식을 준비했고 간밤에는 세 모녀가 밤을 새우며 잔치 음식을 차린 것이다. 좁은 방안에 두 개의 큰 상을 펼치고 가득하게 음식을 차린 것이다. 이럴 때는 위가 하나 더 있었으면 좋으련만! 상을 마주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수고한 손길을 칭찬하면서 감사의 뜻을 전했지만 이미 식사를 하였기에 그 많은 음식을 조금도 입에 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안한 마음은 필자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약속을 두 번 세 번 했던 신랑과 신부도 마찬가지였다. “약속이 다르지 않습니까”라는 말의 의미를 아는 모두는 유구무언이었다.

이럴 것이면 미리 말을 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면서 차 한 잔으로 심방을 마친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 이후 교회에 출석해야 할 신혼부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정성으로 대접한 음식을 받지 못함이 모두에게 그렇게 큰 상처로 남을 줄 몰랐다. 당시만 해도 목회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였기에 그런 우를 범하게 된 것이다. 약속을 했지만 처음 모시는 목사님을 정성으로 대접하고 싶어 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후 다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더욱 심방에 세심한 주의를 가지게 된 것이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87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