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품으로 먼저 갑니다.

같은 지역에서 사역하던 동역자의 사모님의 입관예배에 참석했다가 순서지를 받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장례식을 참석했지만, 그 같은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식 순서지 뒷면에는 암으로 70세에 돌아가신 사모님이 짙은 빨간 색의 옷을 입으시고 두 손으로는 흰 꽃(부활을 상징하는)을 아름답게 피운 난 화분을 바쳐들고서 환한 미소를 크게 짓고 계셨다. 장례식장에 참석한 우리를 향하여 내가 죽은 것이 아니고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슬퍼하지 마세요! 라고 당부의 말씀을 하고 계신듯 했다.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장례식장을 방문할 때마다 마음의 무거움과 답답함 그리고 안쓰러움을 당하는 것은 그 어떤 죽음도 이유 없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가신 사모님의 이런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장례식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어둡고 침통한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정사진으로 순서지에 사용되는 것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검은 색의 사진을 사용하는데 반하여 사모님의 경우는 순서지 뒷면에 지면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연출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고인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미리 준비하여 된 것임을 느끼게 하는 것은 고인의 지나온 삶을 20년 가까이 곁에서 지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나시면서 남은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세심한 손길을 느끼며 죽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죽음은 무엇인가! 우리 가운데 죽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는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삶과 죽음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인 것이다.

삶의 연장이 죽음이며 죽음은 더 나은 삶,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에 아무것도 준비하고 오지 아니하였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예비하신 것처럼 삶 저편 주님이 계신 우리가 장차 가야할 본향도 영원토록 부족함이 없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은 저주가 아닌 것이다. 더 나은 곳, 우리 모두가 그토록 사모하는 영원한 곳으로 들어가는 축복의 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죽음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무리 이 땅에서 성공해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 필자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사진 아래에 장례식장을 찾아준 조객들을 향하여 남기신 고인의 인사의 말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000 사모입니다. 저의 짧지 않은 삶을 돌아보면 때론 후회스럽고 때론 슬프고 때론 고통스러웠지만 그때마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셔서 저의 무릎을 일으키시고 제 삶속에서 주님의 선을 이루셨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기쁨을 누리다가 이제 먼저 주님 품으로 갑니다. 오늘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자매님들과 이 세상에서 작별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요, 조금은 슬퍼해 주시면 좋겠어요!

하지만 모두 저를 위해 또한 기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 속에서 즐거운 영원의 삶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을 받는 축하의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경주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 경주가 다 끝났을 때 그 때 예수님과 같이 축하하러 마중 나가겠습니다. 그때까지 충성된 삶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럼 다시 만날 때 까지….”

왜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시고 떠나가시는 사모님을 뒤로하고 다시 만날 소망으로 장례식장을 떠나는 모두의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7317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지난 해 나성영락교회당에서 어느 권사님의 장례식이 있었다. 권사님은 6∙25전쟁으로 이북의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셨다가 오래전에 미국으로 가족이민을 오셨다. 권사님의 사망 원인은 교통 사고였다.

장례식에는 많은 조객들이 넓은 교회당을 가득 채웠다. 사람의 평가는 얼마나 잘 살고 얼마나 크게 성공했느냐를 말하지 않는다. 장례식을 보아서 그 사람이 생전에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권사님의 지난 삶은 아브라함처럼 고향을 떠나 낮선 타향살이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도 평탄치 않으셨다. 그럴 때마다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했다. 이런 권사님의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권사님이 가는 곳마다, 행하는 사업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어려서부터 전쟁으로 겪어야 했던 가난과 피난살이의 삶은 평생 동안 권사님이 절약하고 검소하게 사는 방법을 갖게 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으나 불행한 이웃을 위해서는 늘 베푸는 삶을 살아오셨다. 특별히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많은 희생과 헌신을 하셨다.

유가족을 대표해서 고인의 아들이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가 홀로 되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53세 되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사고를 당하시고 나서 누님과 함께 어머니의 살림을 정리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세 번이나 필사한 수십 권의 노트를 발견한 것입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바르고 깨끗하게 써내려간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어머니에 대하여 불효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제 나이가 55세인데 만일 내가 이 나이에 혼자되었다면 그 긴 세월을 혼자서 지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 여년이 지나도록 어머니에 대하여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어머니는 그렇게 사셔도 되는분으로 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어머니는 언제나 교회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예배 중심의 삶을 사셨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찬송하셨으며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한 번도 자녀들 앞에서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왜 어머니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으셨겠습니까?

왜 낙심되는 일이 없었겠습니까? 왜 화나는 일이 없으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자녀나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사람이나 하나님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감사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항상 밝은 미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위로하시고 칭찬하시며 용기를 주시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고독할 틈도 시간도 없는 줄 생각한 것입니다. 밤 시간이 얼마다 길고 지루하셨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성경을 필사하셨던 것입니다. 어머님에게 예수님은 위로자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예수님은 동행자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예수님은 행복 그 자체셨습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을 말씀 안에서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그 어머님의 믿음을 우리 자손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 드립니다.”

유 권사님의 아들은 벨리서 목회하는 나성북부교회 유영기 목사입니다. 또 고인은 저의 큰 딸의 시어머니의 어머니로 나성영락교회 창립교인이었습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7240

어느 특별한 생일잔치

지난 3월5일 이종선 여사님의 80회 생일잔치가 용산에 위치한 국방부내 태극홀에서 성대하게 개최됐다. 단상에는 태극기가 자리하고 있었고 국기에 대한 경례에 이어 우렁찬 애국가 제창 후 필자의 기도로 생일잔치가 시작되었다.

고국의 친척 20여분과 현역 군인 영관급 고급장교 30여분과 6∙25 참전 용사 중 퇴역 장군 10여분 그리고 이 여사님의 간호장교 후배와 대학 후배 40∙50명이 함께 하였다. 이 여사님의 생일잔치가 이렇게 특별한 이유는 6∙25 참전 간호장교였기 때문이다. 이 여사님은 반세기 전부터 미국에 살고 계시다.

간호장교 소령 출신으로 이 땅에 사시면서도 항상 조국의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시며 한국의 여인으로 태어나 직업 군인으로 사셨던 것을 평생 자랑하셨다. 이 여사님을 미국에서 처음 만난 것은 35년 전이다. 이 여사님을 가까이 할수록 삶이 무엇임을 생각하게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임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마취의사로 50년 가까이 살아오셨기에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게 살아 오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1불 쓰는 것도 아까워 하시는 분이시다.

10여년 전 필자의 집에서 머무실 때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이 여사님의 양발이 누더기처럼 여기 저기 서툰 솜씨로 기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보고 우리 내외는 충격을 받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불행한 이웃을 위해서는 큰돈을 아낌없이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여사님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여인으로서 그 흔한 향수나 변변한 기초 화장품도 가지고 다니지 않으신다.

‘이제부터는 자신을 위해서 사세요! 그렇게 사셨으면 훌륭하게 사신 것입니다. 남은 인생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사세요!’이 말에 이 여사님께서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봐! 누군가를 도와주지 않고는 기쁨을 느낄 수가 없고 무엇인가 남을 위하여 일하지 않고는 행복을 가질 수가 없어!”

사람마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만 이 여사님은 평생을 남을 위해 사셨다. 이런 희생정신과 군인정신 때문인지 가정을 가지지 못하시고 지금까지 혼자 살아오고 계신 것이다. 12년전에는 함께 아마존 의료선교를 다녀오기도 하셨다. 최근에는 한국 간호 사관학교 운동장에 잔디를 깔아 주기도 했다.

금번에 고국을 방문하시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6∙25참전 동지들과 친지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큰 잔치를 베푸신 것은 지금까지 지내온 자신의 삶을 조용하게 정리하고 싶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마치 먼 길 떠남을 준비하시는 듯 했다.

현재는 와이오밍 주 프레스턴 대학에서 외국인 학생을 위한 상임고문으로 활동을 하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통령 자문기관인 평화통일정책회의 위원으로 80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시고 국내외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 것이다.

이 여사님의 아름다운 삶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느껴지며 우리 주님의 선하신 마음이 읽혀지는 것이다. 격동의 세월속에서 지금까지 이 여사님을 선한 길로 이끌어 주시어 많은 사람을 위로하고 행복을 나누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남은 생애 동안에도 변함없이 함께 하시길 기도한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7046

아마존의 여의사 Y 선교사

지난 해 가을 오래 간만에 아마존에서 사역하는 Y 선교사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7년 전 남가주목사회 총무로 있을 때, 임원회의 결의로 열악한 환경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의 사역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시작이 되어 4번에 걸쳐 아마존을 방문했고, 이후로도 많은 전문 의료인들과 목사님들이 그곳을 방문하여 사역을 도울 수 있었다. Y 선교사님이 사역의 본부로 삼으신 곳은 아마존 강의 하류로써, 페루와 콜롬비아 그리고 브라질이 만나는 삼각지역으로 세 나라가 국경 없이 오가는 마을이었다.

당시 그곳을 방문하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 아마존은 현대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곳이다. 아마도 지구상에서 마지막 관광지가 있다면 그곳은 아마존이 될 것이다. 지구가 창조된 원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곳은 아마존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디오 마을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가 없다. 인디오들은 조상 대대로부터 받은 피해 때문인지 외부인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배타적이다. 그래서 각 마을의 추장에게 허락을 받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저들의 땅을 밟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불모지에 한국인 선교사가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Y 선교사 때문이었다.

Y 선교사는 브라질 교포 1.5세로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자라나 브라질리아 의대를 졸업한 여의사이다. 평생 동안 예방 주사를 한 번도 맞아보지 못한 아마존의 인디오들에게 의사는 신비로운 존재요, 저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도움의 대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마을이고 Y 선교사님은 무시로 방문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젊은 처녀 의사를 오지에 보낸 부모는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 목사님이 딸이 사역하는 곳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병든 몸을 치료 받기 위하여 찾아오는 인디오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이 발전하여 교회가 되었고 더 발전하여 신학교를 경영하기에 이른 것이다.

각 마을로 의료 진료를 다니면서 장래성이 보이는 젊은이들을 불러내어 신학교육을 시키어 저들의 마을에 교회당을 지어주어 복음이 그 땅에서 열매 맺게 한 것이다. 이 같은 사역은 20여 년째 계속되어 오고 있다. 그러다가 수년 전 뜻하지 아니한 아마존의 인디오들에 의한 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그 일로 선교지에서 집이 있는 상파울로로 돌아와 오랜 기간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한 후 다시 아마존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난 해 봄에 복음을 영접한 인디오 청년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온 마음과 자기 몸을 다 바쳐 그 땅에서 마지막 까지 복음을 위해서 살기로 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집 사람과 함께 나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 순결하며 너무 아까운 선교사님의 생애를 알기 때문이다. 필자는 Y 선교사님을 만났을 때 수년만 그곳에서 봉사하고 큰 도시로 나가서 좋은 남편을 만나 다른 모습으로 행복한 삶을 살면서 주님을 섬길 것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6847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지난 12월12일 토요일 오후1시에 베버리힐스에 살고 계시는 Mrs. Lee 여사님 댁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남가주에는 모든 사람들이 살기를 소망하는 아름다운 지역이 있습니다. 베버리힐스와 헹콕팍 그리고 아케디아 등의 지역입니다. 웬만한 부자가 아니고서는 그런 곳에서 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끔 부자촌을 자동차로 지날 때마다 저렇게 아름답고 큰 집에 사시는 분들은 어떤 사람들일까를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정직하며 부지런하여 자기의 업종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좋은 부모님을 만나서 조상님들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여사님이 사시는 곳은 6 에이커의 넓은 대지 중앙에 3층으로 9년여 전에 건립된 건평 3만4,000 스퀘어피트의 대 저택이었습니다. 베버리힐스 산 중턱에 남향으로 향한 전망이 좋은 집으로 철제 문 세 곳을 지나야 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얼마짜리 집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좋은 시절에는 5000만 불 이라고 하셨습니다.

집을 방문하고서 아래층부터 3층까지 안내를 받으며 구경을 하는데 30여분의 시간이 걸려야 했습니다. 베버리힐스에 10여 분의 교포들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큰 집에서 사시는 분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 여사님은 4년 전부터 그 곳에서 살고 계십니다.

이 여사님에 대해 호기심이 가지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2시간여 동안 담소를 나누면서 이 여사님이 그 자리에 서기까지의 이야기를 청하여 듣게 된 것입니다. 이 여사님은 서울에서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 LA로 이민을 오셨습니다. 서울을 떠날 때 단돈 200불을 가지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처음 몇 년은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간호사 라이선스를 획득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면허를 취득하신 후 일하신 곳이 유대인이 경영하는 양로병원이었습니다. 일을 하실 때에 한 번도 직장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천직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함으로 일을 했습니다.

십 수 년을 변함없이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본 유대인 주인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주인인 나보다도 환자와 병원을 더 사랑하고 모든 물자를 절약했습니다. 1991년 12월 어느 날 유대인 주인이 놀라운 제안을 했습니다. 은퇴를 하는데 이 양로병원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양로병원을 인수할 만 한 돈이 없습니다. 그리고 운영할 자신도 없습니다. 그 때 유대인 주인은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그리고 돈은 필요 없습니다. 이번 달 이곳에서 일한 사람들에게 지불해야 할 임금이 5000불인데 그것만 가지고 시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5000불은 이 여사님이 가지고 있는 돈의 전부였습니다. 약간의 망서림과 떨림이 있었습니다만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결심을 하고서 전문 경영인으로 태어나기를 시작했습니다. 종업원으로 일을 할 때는 주어진 시간만 충실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영을 책임 맡고 나서는 평소 생각지 못한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그럴 때마다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정면 돌파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의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갔습니다. 한 개로 시작한 양로병원이 두 개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다음에는 네 개의 양로 병원으로 발전하면서 점점 속도가 배가 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12개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지금 이 여사님의 양로병원에서 일하는 종업원은 2000명인데 앞으로 2년 안으로 2만 명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함으로 주인을 감동케 한 것이 큰 부를 이루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6661

당신은 천사였습니다!

한인타운에서 치과병원을 개업하시던 김영기 박사님이 향년 47세의 젊은 나이로 지난 10월 28일 저녁에 글렌데일의 한 병원에서 사랑하는 부인과 두 아들 그리고 누님, 형 부부와 함께 필자가 임종 찬송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명을 달리한 남편을 향하여 부인은 눈물로 마지막 인사의 말을 이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가세요! 당신은 천사였습니다. 고마웠어요 당신을 잊지 않을 거예요!”

필자가 김 박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1년 반 전 이었습니다. 환자와 의사로 만난 것입니다. 본래 다니던 치과병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뽑고 새 이를 해 넣어야 하는데 비용이 너무 크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참고로 다른 의사의 소견을 받아 보기 위해서 김영기 박사님이 일하시는 병원을 찾은 것입니다.

김 박사님은 제가 목회자라는 것을 아시고 진료비에 대한 부담은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의 뜻은 한 번에 진료비를 청구하지 아니하고 분할해서 지불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치료가 되는 동안 진료비를 청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치료가 끝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고 말씀을 드릴 때 김 박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기도해 주시는 것이 더 크게 받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인연이 되어 지난 1년 반 동안 저만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집사람까지 치료를 받아왔습니다. 세상을 떠난 남편을 향하여 “당신은 천사였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병원을 드나들 때마다 김 박사님은 단 한 번도 저희 부부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게 세심히 대해 주셨습니다.

30년 가까이 한 지역에서 목회하면서 늘은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수없이 병원을 방문하는 동안 단 한번이라도 섭섭한 마음이나 서운한 눈치를 보았다면 다시 그 병원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김 박사님은 정 반대이셨습니다.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상전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너무도 편하고 사랑스럽게 대해 주셨습니다. 마치 한 형제처럼 대해주신 것입니다. 김 박사님을 만나고 나면 마음에 평안이 있었고 행복했습니다. 이런 마음은 환자에게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 어느 남편이 부인으로 하여금 “당신은 천사입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같은 하늘 아래 이렇게 훌륭한 인격과 사랑을 가지신 분과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 박사님이 떠나시고 나서 슬픔과 아픔을 느껴야 했습니다.

김 박사님이 중병을 앓고 계시다는 것을 안 것은 돌아가시기 6일전 병원 매니저의 전화를 받고서였습니다. 일주일을 넘기시지 못하실 것 같은데 목사님께서 장례식을 도와주실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매일 병상을 찾으면서 기도했습니다.

임종하시는 수요일에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 번 방문을 했습니다. 하나님 김 박사님을 살려 주세요!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분이십니다.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분이십니다. 꼭 살려 주시어 병으로 고통받는 많은 분들을 구원하실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이제 나는 김 박사님이 남기고 가신 대학에 다니는 두 아들과  9살 된 아들, 그리고 부인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후손을 축복하시고 잘 되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사랑하는 남편과 아버지를 갑자기 읽고 큰 슬픔에 처한 가족들 위에 항상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2009년 11월1일 오후 2시30분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6389

“빌라도의 저주를 아시나요?”

지난 9월에 10여일 일정으로 유럽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태리에서 머무는 3일 동안 K 선생의 안내를 받았습니다. K선생은 유학생 신분으로 유럽에 들어와서 지난 20여년 간 그 땅에 살아오면서 우여곡절 끝에 로마의 시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공인된 법정통역과 가이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은 ‘빌라도의 저주’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기독인들의 입에서 항상 떠나지 아니하는 이름이 있다면 본디오 빌라도일 것입니다. 매 예배 시간마다 신앙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빌라도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빌라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유럽은 다 부유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태리 남부지역은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이태리 남부는 유럽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법과 질서가 통하지 아니하는 곳이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 같은 이유에 대해서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빌라도의 저주’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루살렘 총독으로 있을 때에 로마의 황제가 난치병에 걸렸습니다. 좋은 약과 이름 있는 명의들이 다 동원되어도 황제의 병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신하 중 한 사람이 황제에게 예수를 소개합니다. 우리가 정복한 땅에 예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은 죽은 사람도 살리셨고 각종 병자들을 고치시는데 소경의 눈도 뜨게 하시고 38년 된 중풍병자도 고치셨습니다.

이제 황제의 병을 고쳐주실 분은 이 땅에 그 분 밖에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다는 말이 있습니다. 황제는 즉시 예루살렘으로 사신을 보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신들이 빌라도 총독을 방문하고 예수를 즉시 데려올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 때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처형한 후였습니다. 황제가 죽음에서 살아날 유일한 소망이 물거품이 된 것입니다. 그 즉시 빌라도는 로마로 호송이 되어 죄없는 예수를 사형한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감옥에서 살아 나오지 못하고 옥사를 하게 됩니다. 당시의 로마법에는 죄수들이 죽으면 무덤에 장사를 지낼 수 없게 되어 있어 빌라도의 고향인 이태리 남부의 물이 마른 냇가에 시신을 버렸는데, 그 후 그 땅에 천재지변이 반복해서 일어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폼페이도 그 지역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마피아도 그 지역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이태리 남부는 유명한 해안 도시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소렌토(노래‘돌아오라 쏘렌토로’와 ‘오 쏠레미오’)와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인 나폴리 등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 관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폴리와 소렌토 사이에는 폼페이가 있습니다. 폼페이는 주후 79년에 베스비우스산의 화산으로 당시 인구 2만의 휴양도시가 순식간에 화씨 900도의 8미터 높이의 화산재로 도시 전체가 사라진 곳입니다. 그후 1748년에 세상에 드러나 알려졌습니다. 이 모두가 빌라도의 고향으로 빌라도의 저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가 한 사람 때문에 세상에 들어왔고 한 사람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6313

울타리선교회 창립기념 음악회를 보고

지난 12일 주일밤 7시 나성영락교회 본당에서 울타리선교회 창립 10주년 기념음악회가 성대하게 개최됐다. 순서가 계속되는 동안 그렇게 은혜와 감동이 넘치는 집회일 것이라고 생각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필자는 교회를 담임하고 있기에 주일 오후는 가장 피곤에 지쳐 있을 때이다. 이른 새벽시간부터 시작되는 기도회와 주일 낮과 오후로 이어지는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울타리선교회 기념음악회에 초청을 받았기에 몸을 움직여야했다.

대부분의 선교회 행사는 늘 판에 박힌 것처럼 지루하고 형식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아, 이번에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금번 울타리선교회의 창립기념 음악회는 나의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시작부터 마치는 시간까지 어느 한 부분도 놓칠 수 없는 은혜의 연속이었다. 정말로 집회에 참석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이런 은혜스러운 집회를 사전에 알지 못해 가까운 친지와 성도들에게 소개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해야 했다.

울타리선교회를 사역하시는 목사님은 나주옥 목사님이다. 이민목회 사역 중 가장 힘들고 어렵다는 LA 다운타운 홈리스를 상대로 사역하시는 목사님이 건장한 체격의 남자 목사님이 아니고 연약하고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신 여성 목사님이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울타리선교회 창립 10주년을 기념하면서 개최한 음악회가 모든 사람들의 큰 박수와 사랑 속에 마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준비해 크게 성공한 저력을 보여주었다. 울타리선교회의 밝은 미래를 보는 것같아 그동안 땀 흘려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5731

동양선교교회 강준민 목사님께 드리는 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면을 통하여 글을 드리는 것은 평소에 강 목사님과 교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지난 29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기고 있는 동역자임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목사님을 멀리서 대할 때마다 하나님께 남다른 사랑을 받은 특별한 종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가끔 지면을 통하여 보도되는 목사님의 칼럼을 대할 때마다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다운 문장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하면서 감탄을 하기도 했습니다.

큰 종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목사님을 진심으로 존경도 하고, 또 같은 지역에서 목회하는 동역자로 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와 열매들을 인하여 크게 부러워하기도 했었습니다.

남가주에 거주하는 한인 목회자가 3000여명이 됩니다. 그 많은 주의 종들 가운데 목사님은 스타(Star) 목사님이십니다. 작은 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목사님을 대표하는 목사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든 목사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기 전 기도하면서 목사님의 입장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만일 내가 목사님의 자리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왜 아프지 않으시겠습니까? 왜 억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왜 화나지 않으시겠습니까? 깊은 벼랑으로 떨어짐에 왜 두렵지 않으시겠습니까?

큰 위기를 당하신 목사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어 드리지 못하고 위로도 하지 못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드리는 것은 목사님에 대한 기대와 믿음 때문입니다. 실추된 이민교회와 목사들의 명예를 회복해주시길 기대합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고소할 때에 예수님은 스스로를 변론하지 않으셨습니다. 심문하는 빌라도가 이를 이상히 여겨 ‘왜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죽임 당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죽음의 길을 택하신 것은 모든 인류를 살리시고 또 예수님 스스로도 다시 사시기 위해서 죽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육체의 고통만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고통과 번민, 영혼의 아픔까지 당하셨습니다. 존경하는 강 목사님! 감히 용기 내어 권합니다. 예수님 처럼 앞에 있는 형벌의 십자가를 잡으십시오. 그리고 골고다로 가십시오.

부활은 죽음을 전제한 것입니다. 죽지 아니하면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나는 강 목사님이 이전보다 더 빛나는 이룸으로 이 땅에서 큰 종으로 사역하시길 원합니다. 목사님에겐 그런 은사가 있으십니다. 과연 강 목사님답다고 하는 칭송을 받으시는 목사님이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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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떻게 해”

가정적인 일로 지난달 초 한국을 잠시 방문했습니다.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늘 만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1월에 고국을 방문하기는 36년만에 처음이었습니다. 저녁 식사자리에 보여야할 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83세 되신 친구 어머니가 아주대학병원에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입원실 안에는 장남인 친구와 형제자매 가족 등 15·16명이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담당의사의 말로는 그 밤이 마지막 밤이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는 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시골교회 집사님으로 교회를 섬겼지만 죽음을 앞두고 몹시 불안해하고 계셨습니다. 왼쪽 눈에서 시작한 흑생종 암이 간과 폐 등 장기 전체에 퍼져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고단위 진통제만 의지한 채 임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인사만 하고 돌아서려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밤 9시부터 찬송으로 시작한 임종 예배가 3시간여 지나 늦은 밤 12시반에 끝났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아니하던 어머니가 간간히 찬송가를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은 무엇인가? 믿음의 사람들에게 임하는 죽음은 절망과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마치 해산을 앞둔 산모가 아기를 낳기 위하여 육체적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천국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인내하고 참아야만 하는 것임을 설명했습니다.

예배를 마치니 그렇게 절망으로 어둡던 어머니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제는 내가 살았다”며 “나를 살리기 위해 미국에서 목사님을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보니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불안해 하셨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불안과 초조함에서 벗어나 마음에 평안을 회복한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본 친구 오 교장이 어머니의 가족들, 그리고 나의 앞에서 이런 선언을 했습니다.

“어머님! 나도 어머니가 믿는 예수를 이제부터 믿겠습니다.” 40여년 동안 친구로 지내던 그였습니다. 특별히 종교문제에 대해선 조금도 틈을 주지 않던 친구였습니다. 그런 친구가 나를 놀라게 했으며 그를 가장 잘 아는 어머니를 놀라게 했습니다.

나와 어머니께 큰 기쁨의 선물을 준 것입니다. 은혜의 시간은 계속됐습니다. 온 밤을 지새우며 찬송을 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찬송을 합니다. 늦은 밤 고요한 시간에 입원실에서 터져 나오는 찬양소리는 간호사들을 놀라게 해 저들의 요구대로 찬송소리를 줄여야 했습니다.

이제까지 목회자로 살아오면서 밤 시간에 이렇게 많은 찬송과 설교를 연속적으로 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물론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게 긴 밤이 지났습니다. 어머니는 다음 날부터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머무는 9일 동안 매일 병상을 찾아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처음에는 가족의 부축으로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수일이 지나면서는 부드러운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담당의사는 다시 치료 계획을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9일 만에 돌아오기까지 어머니는 한 순간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친구 오 교장은 늦게 되었지만 누구보다도 빠르게 믿음이 성장할 것을 나는 압니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 날, 친구는 어머니의 장례를 의논했습니다.

집안에서 기독교식으로 장례식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유언이기에 기독교식으로 한다고 선언하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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