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거장 사무엘 휴 마펫 선교사님을 추모하며!

남가주의 강렬한 더위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8월 29일 토요일 오후 2 시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서북방향으로 80여 마일 거리에 있는 태평양해변의 작은 도시 카핀테리아의 공동묘지에서 사무엘 휴 마펫 선교사님(한국이름으로는 마삼락 박사)의 한미합동 이장예배가 있었습니다.

이장예배 준비위원으로 수고하신 미국장로교 전국한인교회 증경 총회장 정시우 목사님의 초청으로 필자가 소속한 남가주목사장로부부합창단이 특별찬양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12인승 밴으로 이동하던 중 Freeway 교통사고로 장지에 도착하기까지는 3시간이 소요되어야 했습니다. 긴 시간이었지만 함께 동승하신 전 장신대총장 김인수 박사님의 마펫 선교사님의 가족사에 대한 말씀을 듣고서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하여 그토록 복음에 충성하신 믿음의 거장 마펫 선교사님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무엘 휴 마펫 선교사님은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아버지 새뮤얼 오스틴 마펫 선교사님은 1890년 26살의 젊은 나이에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하셨습니다. 3년 후인 1899년 의사선교사인 앨리스 피시와 결혼하여 제임스와 찰스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1912년 의사인 앨리스는 이질로 한국 땅에서 보름동안 심한 설사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 새뮤엘 오스틴 마펫 선교사님은 1915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의 동생 루시아 피시와 결혼하여 3아들을 더 낳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첫째와 둘째 아들이 한국 땅에서 풍토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중 가슴이 조여 오는 답답함과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만일 새뮤엘 오스틴 마펫 선교사님이 한국에 오지 아니하시고 미국 땅에 남아 계셨더라면 이 같은 가족의 비극 사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두 아들과 의사 부인의 죽음은 질병과 가난이 극심한 흑암의 땅 한국을 선교지로 택하신 아버지 선교사님의 고난의 열매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받은 복음이 거저 받은 것이 아니라 그토록 헌신하신 위대한 믿음의 거장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곁에 있던 친구목사님은 마펫 선교사님을 우리 한국교회의 은인이시라고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섯 아들 중 세 번째가 이장예배를 드린 새뮤엘 휴 마펫 선교사이십니다.

평양에서 출생하시어 고등학교까지를 졸업하고 대학은 미국에서 공부하셨습니다. 휘튼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시고 1942년 프린스턴에서 신학학사 학위를 그리고 1945년에 예일 대학교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1947년에 중국 베이징의 옌칭 대학교에서 교수로 섬기셨으며 1955년에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셨습니다. 1959년부터 1981년까지 서울의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섬기시는 동안 대학원장과 공동학장으로 봉사하셨습니다. 1981년부터 1987년까지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선교학교수로 사역하셨습니다. 프린스턴신학교 이사이며 서울 장로회 신학교 교수인 임성빈 박사는 “마펫이 한국에 남긴 학문적, 교육적 유산은 오래도록 계승될 것이라고 하면서 마펫 박사는 한국교회를 세계교회의 지평으로 이끈 선교적 학자이자, 한국 교회의 역사를 아시아 전반의 맥락 속에서 조명하게끔 한 교회 역사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펫 선교사님은 금년 2월 9일 프린스턴 원드로스에서 98세의 나이로 별세하셨습니다.

이번에 이장 예배를 드린 곳은 가족묘지가 있는 곳입니다. 김인수교 수님의 말에 의하면 고인이 마지막으로 한국 땅에 묻히길 소원하시어 유골함을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한국으로 이송하여 서울의 외국인 선교사 묘지인 양화진에 묻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곳엔 새뮤엘 휴 마펫 선교사님의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곳으로 우리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시므로 죽어서도 그가 태어난 한국 땅에 묻히길 그토록 소원하셨던 믿음의 거장 마펫 선교사님이 남기신 위대한 믿음의 유산을 우리는 잘 지켜 나가야 하며 고귀한 저들의 희생과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185

성경교육 그만하시고 이제부터는 인성교육 시키세요!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는 아니면서도 가까이 지내는 부부가 있습니다. 이민 초기에 한 동리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때의 인연으로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교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필요에 의해서 가끔 만나는 것은 그 분이 하는 일 때문입니다. 서울의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한국계 미국 회사에 채용되어 이민을 오셨습니다.

그러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하고 계십니다. 10여 년 째 집사님이 하시는 일은 플러밍이었습니다. 매사에 성실하시고 맡은 일을 책임 있게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시기 때문에 항상 바쁘게 살아가고 계십니다. 처음 직장 일을 그만두고 플러밍을 배우러 다니는 동안 왜 좋은 직장을 포기하고 힘들게 살려고 하느냐고 말을 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미국에 이민을 와서도 육체노동을 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전공한 분야와는 너무나 격이 다른 육체적 노동을 하려는 것을 아무리 좋게 이해를 하려고 해도 쉽게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마다 할 수만 있다면 편한 직장을 구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만한 자격이나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며 남보다 편한 삶을 살기 위해서 어려운 공부를 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집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사의 사장이 한인 타운에서 이름이 크게 알려진 큰 교회의 장로님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존경 받는 장로님인데 직장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지 아니하는 사람보다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더욱 집사님을 견디기 어렵게 한 것은 사장 장로님의 인도로 같은 교회를 다니게 되고 나서 부터였습니다. 일터에서 매일 만나는 사장님과 교회에서 대표기도하시는 장로님은 같은 분인데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선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분으로 말과 행동에 조금도 흠과 티가 없는데 회사에선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회사 사장 장로님의 그런 이중적인 삶과 모습이 너무도 자신을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고민을 계속하다가 고용된 기간이 지나고 나서 회사를 그만둠과 동시에 사장 장로님이 시무하는 교회를 떠나 지금의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수일 전 그 집사님의 부인이 필자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부인 집사님도 한가한 분이 아닙니다. 직장을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화로 집사람과 가끔 안부를 전하다가 그 날은 작정을 하고 모처럼 토요일 하루를 집 사람과 보내기 위해서 저희 집을 방문 한 것입니다. 맛난 음식도 대접을 받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듣던 중 어느 순간에 집 사람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던 중 두 사람의 곁을 지나다가 필자의 귀가 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어느 날 남편 집사님이 같은 교회 성도님 가정의 일을 하고 돌아왔는데 평소와 달리 얼굴에 화가 크게 나 있었던 것입니다. 일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 것입니다.

“여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차분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분이기에 평소에는 여간해서 화를 내는 일이 없어 말소리가 작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말소리의 톤이 평소와 달리 매우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부인 집사님을 향하여 하는 말이 ”나 목사님 만나서! 우리 교회에서 성경공부 그만 시키고 교인들 인성교육이나 시키라고 말해야겠어요!”

그러면서 들려주는 말은 이러했습니다. 성경공부 모임에 빠지지 않고 오랫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성경을 많이 아는 분인데 성경을 아는 것만큼 삶에서 말씀의 실천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행동이 같지 않은 것입니다. 교회 오래 다니고 직분이 올라가고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신앙인격도 그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가을 벌판에 황금물결로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며 익은 벼처럼 머리가 겸손하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숙여져야하는데 교회안의 직분 자들의 자세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집사님의 눈에 보이는 먼저 믿은 분들의 이런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은 잘하는데 마음은 곱지가 않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나 섬김이 없습니다. 일을 마치면 교회에서 계속 만나야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관계를 하지 않았을 때는 몰랐는데 맡은 일을 하면서 같은 교회를 섬기는 교인, 같은 믿음의 사람이 타인처럼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먼저 믿은 분이면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자기보다 교회에서 직분이 높고 오래 되었다는 것만으로 아랫사람을 부리듯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치 주인이 종을 대하듯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인을 오늘의 교회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 교회의 현실이 아닌가를 생각하며 답답한 마음을 쓸어 내려야 했습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143

프리웨이 교통사고를 당하고서 생각한 것!

지난 7 월 22일 수요일 저녁에 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Freeway에서 5 중 충돌 교통사고를 당했다. 당시의 도로는 심한 교통 체증으로 정상적인 속도를 내지 못하고 서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앞에서 20여대의 차가 멈추고 있었기에 앞 차를 따라 차를 세우고 나서 5-6 초가 지났을 때였다.

뒤에서 요란한 굉음과 함께 타고 가던 차가 심하게 흔들림과 동시에 그 충격으로 타고 있던 차가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에서 앞으로 밀려가 앞 차의 뒤 범퍼를 밀게 되었다. 사고 후 뒤를 돌아보니 3대의 차가 뒤에서 엉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당시 가고 있던 길은 6개의 차선이 있는 다이아몬드길 옆길로 일명 fast lane이라 불리는 1차선 도로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가 났어도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좌우로는 차들이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신고를 했는지 사고가 난후 10 분 쯤 지났을 때 Highway Patrol 두 대가 달려와 Free way 전체를 막고서 사고 차량 5 대를 Local 안전한 길로 인도한 후 각 차의 운전자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

5-6 명의 Highway patrol 대원이 사고 수습을 시작하였다. 각 차의 운전자에게 면허증과 보험증서 그리고 차량 등록증을 수거한 후 다른 경관들은 각 차의 운전자들에게 사고 경위를 청취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할 일을 경찰이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까지 각 차의 운전자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 동안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앞차 운전을 하던 여자 분에게 다가가 안부를 물을 수 있었고, 내 뒤를 받은 차의 운전자는 필자에게 다가와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20여 분간의 기초 조사를 하고나서 우리에게 수거해간 서류를 돌려주면서 1번 차와 2 번차는(필자가 타고 있던 차가 2 번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집으로 가라고 해서 현장을 떠날 수 있었다.

나머지 3 대는 추가 조사를 하여야 한다며 계속해서 조사를 하는 것을 보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길은 지난 30여 년간 거의 매일 어떤 때는 하루에도 두 세 번씩 오고 가던 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고가 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사고를 당하고 나서야 그동안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40여년을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교통사고를 여러 번 경험했지만 이번과 같이 고속도로에서의 연쇄 충돌 사고는 처음이었다. 일반 교통사고의 경우는 사고당한 차의 운전자간에 보험증서와 운전면허 그리고 차량 등록증과 전화번호만을 주고받았지만 이번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부터 모든 과정을 경찰이 대신한 것이다. 미국을 자동차 천국의 나라라고 말하는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사고를 당한 우리는 서로의 정보를 교환할 필요도 없었다. 경찰은 말하길 각 보험회사에 사고 보고를 하면 보험회사는 Highway patrol에 사고 보고서를 요청하기에 절차에 따라 조사 보고서를 보험사로 통보하겠다는 것이었다.

사고 후 운전자 간에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시시비비를 가릴 법도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당신 때문에 사고가 났다며 화를 내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한 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서로 간에 몸은 괜찮은지 안부를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는 미국에서의 교통사고 후 다 같이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사고의 경우는 연쇄 충돌 사고이기에 앞으로의 추이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고가 나고 2 주일 만에 이 같은 염려와 걱정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후속 조치는 보험사가 완벽하게 처리를 담당하고 차 수리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충분하게 보상 받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30년간 한 회사의 자동차 보험을 들어오면서 약간의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무사고 운전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보험료가 생각한 것처럼 저렴하거나 할인 혜택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불하지 않아도 될 것을 공연한 곳에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고로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잘못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만일 사고 당시 자동차보험이 없었다면 지금쯤 큰 염려와 고민으로 밤잠을 설치며 고생을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당하고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크게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삶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 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혜로운 자 같아도 잠시 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지키시고 인도하신 주님의 선하신 이끄심이 앞으로도 함께 하실 것이기에 매일 매 순간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삶을 오늘도 기쁨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상기 목사

크피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123

어떻게 해야 주의 일을 잘 할 수 있을까요?

20여 년 동안 한 지역에서 알고 지내는 여자 집사님이 있습니다. 이혼을 하고서 어린 두 아들과 힘겹게 살아가는 분이십니다. 오랫동안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자로 봉사하고 계십니다. 평소에는 서로 지나칠 때 목례만 할 정도였는데 어느 날 필자에게 정중하게 다가와 인사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목사님! 내가 어떻게 해야 주의 일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집사님은 평소에 말이 별로 없으십니다. 자신의 말도 하지 않지만 남의 말도 하지 않습니다. 저희 집을 방문할 때마다 집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만 한 번도 저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정을 하고서 용기 내어 필자에게 말을 한 것입니다.

평소와 달리 마음에 담아둔 생각을 거침없이 말로 표현하는 것을 보고서 듣고 있던 저는 약간 놀랬습니다. 그렇게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분 인줄 몰랐었기 때문입니다. 늘 조용한 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집사님을 볼 때마다 힘든 삶 때문인지 얼굴에는 항상 수심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별로 웃는 얼굴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 분을 대할 때마다 삶이 얼마나 힘들면 저렇게 항상 풀이 죽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잘 양육하여 큰 아들은 결혼을 해 가정을 이뤘습니다. 이제는 제한된 삶의 틀을 벗어나 큰일을 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남들처럼 주의 일에 크게 충성하지 못함에 대하여 주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의 일에 동참하고 싶어도 그 동안은 생활 때문에, 남들처럼 오지에서 고생하시는 선교사님들을 돕기 위하여 봉사자로 떠날 때마다 함께 하지 못함에 죄스러워했던 분이셨습니다.

이제 남은 생애 동안 주님만을 위해서 무언가 큰일을 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 동안 행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목사인 제가 시키는 일이라면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실행하겠다는 다짐으로 답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분에게 작은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집사님! 주의 일은 멀리 가서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주의 일은 꼭 선교사로 나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주의 일은 지금 집사님이 잘하고 계십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두 아들이 실족하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도록 어머니로서 크게 희생하신 것이야말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큰일을 하신 겁니다.

그 동안 교회의 반주자로서 예배를 도운 것이야 말로 주님의 일을 잘 수행하신 겁니다. 주의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원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무시하거나 등한히 하고 다른 일에 매달린다면 잘못하는 것입니다.

건강을 돌보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어린 아이가 배가 고파서 울고 있을 때 허기진 아이의 배를 채우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병든 자녀를 돌보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이웃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반대로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치는 것은 주님을 화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0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 노상에서 죽게 되었을 때 제사장이 그를 보고 지나갔습니다. 누구보다도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할 사람이 외면한 것입니다. 레위인도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사라마리인은 강도만난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었습니다.

자기가 타던 짐승에게 강도를 태우고 주막에 데리고 갔습니다. 비용을 담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세 사람 중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할 때 너도 가서 이같이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에 대해서 잘못 알고 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의 말을 듣고 있던 집사님이 말합니다. 목사님! 그렇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이들에게 울타리가 되어주고 저들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말이지요! 알겠습니다. 멀리 가서 주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고 가까운 곳에서 충성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29절에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질문할 때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그래서 바르게 믿는 사람은 소금과 빛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3057

가슴으로 말하고 심장으로 듣는다!

크리스찬투데이 창간 18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지난 목요일 저녁 6시부터 약 2시간에 걸쳐서 한인 타운에 위치한 마가교회에서 “마음으로 말하고 심장으로 듣는다”라는 주제로 3 인의 크리스천 명사를 초청한 토크 콘서트가 있었습니다.

한인 타운에서 이 같은 행사를 하는 것을 필자는 처음 경험했습니다. 음악회나 부흥회도 아닌 이 같은 행사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으며 어떤 결과가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약간의 염려를 하면서도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두 분 장로님 부부와 함께 참석을 하게 된 것은 강사로 초청된 세분의 특별한 경력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지역에서 동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 세분의 명성을 들어 알면서도 가까이서 직접 만나 인사를 나누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첫 시간 강사로 나선 분은 라팔마 시의회 의원 스티브 황보 장로님이셨습니다. 황보 장로님은 재선 시 의원으로서 활발하게 일하고 계십니다.

사회자가 정치인에 대한 비판의 소리로 송곳 같은 찔림을 주는 예리한 질문에 대하여 포장하거나 숨기지 아니하고 평소 마음에 가지고 있던 내용들을 가감 없이 솔직 담백하게 토해내시는 말씀 중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시 의원직을 감당하고 계시다는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번 콘서트를 통하여 크리스천 정치인에 대한 비 호감적인 생각을 다시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귀하고 훌륭하시며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믿음이 좋으신 정치인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했으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스티브 황보 장로님이 라팔마 시 의원으로서만 아니라 가까운 시일에 더 큰 정치 무대로 나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큰일을 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두 번째 강사로 나선 분은 극동방송미주지사장 김애설 박사님이었습니다. 사회자가 강사를 소개할 때 김장환 목사님의 외동딸이라는 말에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곁에는 김 박사님의 어머니 즉 김장환 목사님의 사모님도 행사를 빛내기 위해 서울에서 오시어 함께 하셨습니다. 필자가 미국에 오기 전 고향 수원에서 45년 전에 먼발치에서 뵈웠던 존경하는 사모님이셨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온 가족이 그토록 복음에 충성하시는 모습이 너무 자랑스럽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김 박사님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시면, 또 주님이 얼마나 김애설 박사님을 사랑하시면 이 시대 이렇게 막중하고 귀한 사역을 맡기셨을까하는 마음을 가져 보았습니다.

세 번째 강사님은 월드미션대학교 음악학과장 윤임상 교수님이었습니다. ‘찬양 안에 복음이 회복 되어야 합니다’란 주제로 열강하실 때에는 청중들의 뜨거운 박수가 터지기도 했습니다. 주옥같은 귀한 내용의 말씀을 시간상 더 듣지 못함을 아쉬워하면서 명 강의가 이어지는 동안 아! 하는 감탄사가 마음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과연 ‘마음으로 말하고 심장으로 듣는 다’는 표현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귀하고 아름다운 토크 콘서트를 사전에 경험하고 알았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같은 은혜를 받게 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을 가져 보았습니다.

이번 행사는 단순한 토크 콘서트가 아니라 영적 대 각성을 일으키는 큰 부흥회에 참석해서 은혜 받은 것 같은 영적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하여 귀한 행사를 기획해서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준 크리스찬투데이 임직원 모두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서 간곡하게 부탁을 하고 싶은 것은 이번 행사가 단회적인 행사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정기적인 행사로 지역 사회에 자리매김을 해서 더 다양한 주제로 우리 모두의 눈과 귀가 열리고 마음이 뜨거워져 거듭난 믿음의 사람으로서 이웃과 세상을 향하여 소금과 빛의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는 기독언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민교회가 내 머리카락 다 뽑아갔습니다

필자보다는 나이가 10여살 아래이지만 믿음의 동역자로서 같은 지역에서 목회하는 친구 목사로 근 30여 년째 교제를 나누고 있는 C 목사님이 계십니다. 목회 경력이 필자보다는 적지만 주변의 많은 목회자 중에 C 목사님을 특별히 아끼고 존경하는 것은 주님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목사님이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같은 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도 성도가 아닙니다. 같은 교회를 섬기는 교인보다도 그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을 잘 아는 것은 주변의 목사님들입니다. C 목사님은 같은 지역에서 같은 교단을 섬기는 목사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 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C 목사님은 목사 중 목사이십니다. 누가 뭐래도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참 목사님이십니다. 목사님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하십니다. 정결하십니다. 순수하십니다. 진실하십니다. 겸손하십니다. 섬기길 좋아하십니다.

목회자로서 조금의 흠도 티도 없으신 반듯한 목사님이십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아시는 목사님이십니다. 목사님 중에는 말과 행동이 다른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는 인정받지만 목사 세계에선 인정받지 못하는 목사님도 있습니다. 이름과 명성이 크게 알려졌지만 정작 목사님들의 울타리 안에선 인정받지 못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그런데 C 목사님은 필자만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단 내 모든 목사님들이 존경합니다. 주변에 이런 목사님이 계심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을 만나거나 전화로 인사를 주고받기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C 목사님은 목사님 중에서는 으뜸이라고 할 정도로 머리에 광채를 발하는 목사님입니다.

얼마 전 카톡으로 청년시절의 오래된 흑백 사진을 보내주셨습니다. 사진에 나타난 C 목사님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사진을 받고나서 곧 바로 전화 했습니다. 목사님도 그런 시절이 있으셨군요! 그런데 그렇게 많으셨던 머리카락을 누가 다 뽑아 갔습니까? 웃으면서 웃고자 말했습니다. 그러자 C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민 교회가 내 머리를 다 뽑아갔습니다. 말 하시는 친구 목사님도 호탕하고 웃었고 듣는 필자도 함께 웃었지만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우리만이 아는 이민교회 목회를 경험한 목사들만이 느끼는 아픔이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이민 목회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나이에 비해 흰머리가 너무 빨리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머리카락이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쉽게 그리고 많이 빠진다는 것입니다. 이민목회자의 건강이 어찌 머리카락뿐이겠습니까? 목사님들 중에는 병이 없는 분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심신이 매우 지쳐 계신 분들이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목사님뿐 아니라 사모님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필자의 선배 목사님 중 한 분은 다우니 지역에서 40년 가까이 S 교회를 섬기고 있는데 20여 년 전에 어느 모임에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어느 주일에 교회에서 설교하다가 교인들을 향하여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내 주변머리와 속알머리 앞머리와 뒷 머리카락이 여러분들 때문에 다 빠졌는데 변상하라고 한 것입니다” C 목사님은 30여 년 전에 이민 와서 어려운 과정의 공부를 마치고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서 23년 전에 지금의 H 교회를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 설립했습니다. 그러던 중 11년 전에 지금의 교회당을 하나님의 은혜로 구입했지만 당시의 감동과 감격은 잠시였습니다. 10여 년 동안의 셋방살이 교회에서 그토록 원하던 예배처소를 구입케 하셨을 때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지난 11년 동안은 너무 무거운 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 재정이 교회를 너무 힘들고 지치게 했습니다. 매월 건물 페이먼트 및 관리비로만 약 4천 달러의 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이민교회 살림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던 것입니다. 필자도 한 때는 교회당을 구입하고서 같은 어려움을 경험했었기에 그 느낌을 충분히 이해하고 알 수가 있었습니다. C 목사님 힘내세요! 주님이 계시잖아요!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게 해주시기에 가까운 시일에 머리의 광채 이상으로 빛나는 목사님의 미래가 다가올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2922

목회자에게 큰 감동을 주는 성도

지난 1월 30일 저녁 6시 친구 목사님이 사역하시는 U&I장로교회당에서 김순녀 권사님의 100회 생신 감사예배가 있었습니다. 필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토요일 저녁의 외부 행사는 여간해서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주일 새벽이면 2-3시에 교회에 나가는 습관이 있어서 토요일 저녁 8시면 잠이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예외였습니다. 한 시간 이상 운전을 하고서 달려간 것은 김순녀 권사님의 만수 생일잔치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김 권사님에 대한 말을 친구 목사님으로부터 자주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고도 싶었고 정말로 그 연세에 그런 활동이 가능한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통하여 가끔 백수 잔치하는 것을 보기는 했어도 직접 100세 되신 어르신을 만나 뵙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믿어지지 아니할 정도로 앉으신 자세나 선 자세가 곧곧 하셨습니다. 허리가 조금도 굽지 않으셨습니다. 잔치 중 참석한 내빈을 향하여 감사의 인사를 하기위해 앞으로 걸어 나오시는 데 지팡이를 잡으신 것 외에는 건강에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보청기를 쓰신 것 외에는 백세라 믿기 어려운 모습이었습니다. 인사 말미에 성구 몇 절을 암송하실 때의 목소리는 백세 되신 어르신의 음성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연로하신 교우님들이 혼자 힘으로 미니 벤에 오르지 못하시는데 반하여 김순녀 권사님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 민첩한 동작으로 혼자서 차에 오르고 내리신다는 겁니다.

예배 중 목사님이 소개한 김 권사님에 대한 일화는 이렇습니다. 김 권사님은 76세 되신 딸 권사와 함께 사시며 매일 새벽기도회를 20년 동안 참석하십니다. 주일 예배시 항상 일찍 자리에 앉으셔서 그 날의 성경 본문을 미리 정독하시고 목사님이 설교하는 내용을 항상 기록하십니다.

우리의 귀를 의심케 하는 것은 지난 20년 동안 폐지와 빈병을 수거하여 매달 200불 이상의 선교헌금을 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빈병과 폐지를 모아서 한 달에 200불의 돈을 모으려면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도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100세 되신 어머니와 딸 권사가 하나 되어 매일 쉬지 않고 밖으로 움직이시는 겁니다.

잠시도 몸을 쉬지 아니하시고 활동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온유하시고 겸손하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시므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하는 동기를 불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년 전에는 친구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권사님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경제적으로 힘들 때 권사님의 헌금이 큰 몫을 하여서 행여나 권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시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에서 100세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김순녀 권사님을 향한 기도의 제목이 바뀌었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처럼 110세의 복을 주시길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로 남는 것에 대한 서글픔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순녀 권사님의 삶과 믿음의 자세를 보면서 우리의 노년의 삶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아서 큰 교훈과 감동을 받게 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노년의 삶은 절망적인 사건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 안에서 우리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하고 하나님께 더 큰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0세가 넘으심에도 중단하지 아니하고 계속 천성을 향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달려가시는 김 권사님 아름다운 사심을 축복합니다.

매일 매일 건강하셔서 아름다운 헌신의 향기, 희생의 향기, 봉사의 향기, 믿음의 향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멀리 전해 주시는 권사님으로 우리 곁에 계셔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2838

결혼 40주년을 기념하면서!

5월10일은 결혼 40주년 기념일이다. 로스앤젤레스 중심에 있는 동양선교회당에서 1975년에 임동선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한 것이다. 주례 목사님과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약속한 것이 있었다. 결혼기념 10주기를 단위로 매10년 마다 주례 목사님을 모시고 식사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에 온지 2년이 채 되지 아니했기에 당시의 형편으로 결혼식을 치를 마음의 여유도 없었지만 결혼식 비용도 걱정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런 사정을 아시는 임동선 목사님과 사모님이 강권하시어 결혼식 준비를 해 주시므로 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서 생각하니 주례 목사님에게 사례비도 드리지 못했고, 교회 앞에 변변한 감사헌금도 드리지 못한 일이 부끄러움으로 기억이 되는 것이다.

그 은혜를 잊지 못하는 마음에 처음 10주년 기념 때에는 기억을 살려서 주례 목사님과 사모님을 식당으로 초대해 감사의 자리를 마련했었다. 그러나 이후 지금까지 그 때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90이 넘으신 주례 목사님이 아직도 생존해 계신데 나의 게으름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참으로 세월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때는 생각지도 못한 먼 훗날의 일이 벌써 눈앞에 40주년을 맞이하다니, 앞만 보고 달려온 그 동안의 이민 목회자의 길을 돌아보니 지난 세월이 정말로 꿈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기념일에 대한 추억이 내게는 별로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까지 결혼기념일 행사를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집 사람에게 정말로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수일 전 집 사람의 몇 안 되는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받고나서 전화 받은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친구가 금번에 결혼 40주년 기념으로 부부가 한국 여행을 가는데 자녀들이 경비를 부담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친구는 매년 결혼기념일 마다 여행을 한다는 것이었다.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화살처럼 날아와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민교회 목회자로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해 준 것이 너무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집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어린 시절이었다. 같은 지역에 살면서 친구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청년시절에 불치병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으로 치료를 받으러 오게 되었던 것이다. 73년부터 74년까지 UCLA대학병원 혈액학 주임교수 Dr. Nicolas Costea 로부터 치료를 받고 완치 진단을 받은 후, 당시 Los Angeles 시장 Tom Bradley의 도움으로 집사람이 미국에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소유한 비자는 방문 비자였기에 친구를 초청할 수가 없었는데 Bradley 시장이 당시 주한 미국 대사에게 친서를 보내어 이 군의 친구를 미국에 보내 줄 것을 요청해서 오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집 사람이 미국에 온지 두 달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혼 후 1 년 만에 현재 39살인 첫 딸을 낳았고 뒤이어 37살의 둘째 딸을 낳았으며 둘째로부터 10년 후 셋째인 아들을 낳은 것이다. 두 딸들은 지금 각각 3명의 자녀들을 가지고 있으며 아들은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결혼 기념 40주년을 돌아보니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 만입으로도 다 감사치 못할 정도가 된 것이다. 한 가지 안쓰러운 것은 이제는 집 사람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도 있고 함께 여행을 할 수도 있는 여유가 생겼지만 집 사람의 건강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 때문이다. 집 사람은 그 동안 몇 번의 생사의 위기를 벗어나 이제는 놀라울 정도로 건강해졌다.

하지만 아직 집을 떠나는 여행을 할 정도는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말을 해 보았다. 여보! 한국에 가본지가 너무 오래지 않았소! 이 정도의 건강이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번 가을에는 고국의 가족들을 만나러 가지 않겠소! 아내는 이렇게 말을 했다. “아직은 자신이 없어요”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렇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부인을 향하여 입으로는 말하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여보! 아무래도 좋으니 지금처럼 매일 더 건강하여 내년 기념일에는 그 동안 못한 결혼기념 여행을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멋진 여행을 해 봅시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2791

감동의 눈물을 선물한 어린 손녀

지난 해 연말 알라스카에 살고 있는 둘째 딸 가족이 2주간 동안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이었습니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딸과 사위는 돌아갈 준비를 위해서 짐 가방을 챙기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밝고 잘 놀았던 세 명의 손자·녀 중 막내인 5살짜리 손녀의 얼굴에 수심이 쌓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딸에게 살며시 그 이유를 살며시 물어야만 했습니다. 이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별다른 생각이 없이 아마도 추운 곳에서 살다가 왔기에 따뜻한 캘리포니아의 날씨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잘 놀다가도 가족이 밖으로 나갈 때는 먼저 달려 나가던 손녀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 반대였던 것입니다. 자동차에 짐 가방을 하나 둘 싣기 시작하자 결국 어린 손녀는 소리 내어 울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엄마 아빠에게는 언니와 오빠가 있으니까 자기는 이곳에 남아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남기고 어떻게 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 몰랐던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다른 손자·녀들에 비하여 특별히 잘 해 준 것도 없었고 더구나 두세 살 위인 언니나 오빠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5살 밖에 되지 아니하는 어린 막내 손녀가 언니 오빠도 생각지 못한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토록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놀라움과 함께 깊은 감동으로 우리 내외를 가슴 뭉클하게 한 것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면 평소에 더 살갑게 대해주고 더 잘 해주었을 것을 하는 마음이 스쳐가기도 했던 것입니다.

딸과 언니 오빠가 울고 있는 어린 동생을 향하여 그래서는 안 된다며 이렇게 권하고 있었습니다. 3살 위인 언니가 먼저 말하길 “네가 이곳에서 할아버지와 살면 오래지 않아서 너는 뚱보가 될 거야! 왜인지 알아? 할아버지 할머니가 네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네 몸 생각은 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다 사다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도 좋겠느냐고 다짐을 하지만 어린 손녀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딸이 말을 했습니다. 이번에 올라가면 네가 유치원에도 가야하고 엄마 아빠가 너를 두고 가면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자, 엄마 아빠에게는 언니 오빠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가족과 함께 갔다가 여름방학이 되면 다시 보낼 터이니 가자고 권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린 손녀는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있다가 여름 방학이 되면 엄마 아빠 언니 오빠를 보러 올라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엄마가 말하길 그러면 이번 여름 방학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알라스카에 오시게 하겠다고 타협을 하지만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온 가족이 어린 손녀를 향하여 달래도 보고 설득도 했지만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자동차를 타고 집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울고 있는 손녀를 강제로 차에 태울 때에 어린 손녀는 몸부림을 치며 큰 소리로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린 손녀가 그토록 서럽게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아야 했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우리도 울어야 했고 다른 가족들의 눈시울도 붉어지게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차가 멀리 떠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리 내외는 자리에 선채로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이 무엇임을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자손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세상 어느 누가 우리를 향하여 그토록 서럽게 울어줄 사람이 있단 말인가? 세상 어느 누가 우리의 고독하고 외로운 삶에 대해서 저렇게 마음 아파하고 염려하며 근심하여 돕기를 자원한단 말인가? 우리는 생각하길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자녀들이 부모에게 대하여 무관심한 것에 서운함을 가진다는 말을 가끔씩 듣고 있는데, 한 치 건너 두 치라고 우리도 미처 생각지 못하는 어린 손녀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토록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 가운데 하나인 자손의 복이 이렇게 아름답고 귀한 것임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건강하고 지혜로우며 착한 성품을 손자·녀들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하나님을 높이 찬양합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2722

목사님! 내 딸을 살려 주세요!

20여 년 전 어느 날 이었습니다. 다급한 목소리로 C 권사님이 전화 했습니다. 십여 년간 한 교회를 섬겨오면서 권사님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권사님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직감적으로 건강하던 딸이 어려운 중병에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권사님은 아들 하나와 두 딸을 두고 있습니다.

두 딸 모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딸 가정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큰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딸이 IRS로부터 강도 높은 세무 감사를 받게 된 것입니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교회에 헌금한 명세서를 가짜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액수에 해당하는 금액을 현찰로 헌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권사님의 딸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교회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것을 알기에 당연히 어머니의 청을 목사님이 거절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무리한 부탁인줄 알면서도 어머니를 통하여 그런 요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가지만 해도 교회를 섬기면서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음 같아선 도와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재정부장 장로님과 상의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곧 바로 장로님께 전화 했습니다. 재정부장 장로님의 대답은 가짜 헌금증명서를 IRS 앞으로 발급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액수도 작은 것이 아니고 더구나 세무 감사에 걸린 상태에서 위조 서류를 발급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요! 그렇다고 C 권사님에게 “나는 해 주고 싶은데 재정부에서 거절하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권사님에게 전화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권사님의 요청을 도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재정부에 이런 내용을 요청해도 허락 받기가 어려울 것 같아 재정부장 장로님께 말을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내용의 전화를 드려서 정말로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권사님은 매우 섭섭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화로 다시 애끓는 사정을 하셨습니다. 한번만 도와달라고 간청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이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지만 이런 내용으로는 도움을 드릴 수가 없기에 끝까지 권사님의 요청을 거절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필자의 마음도 편치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다음 주일부터 권사님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토록 교회를 사랑하고 목사님을 좋아하셨던 권사님이신데 왜 교회를 말없이 떠나 가셨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교회를 떠나도 권사님은 끝까지 지킬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교회를 사랑하셨던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을 알지 못하는 친구 권사님들과 교인들은 목사인 저를 향하여 권사님 댁을 찾아가 모셔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권사님에게 무슨 잘못이나 섭섭한 일을 하셨기에 그렇게 충성하시던 권사님이 단번에 돌아서셨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권사님에게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기를 당한 사랑하는 딸을 살려 달라”는 권사님의 처음이자 마지막 간절한 청을 당연히 들어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토록 믿었던 목사님에게 거절당하므로 크게 실망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내용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습니다. 알고 싶어 하는 교인들에게 설명할 수 없어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대화를 나누었던 재정부장 장로님과 필자만 알고서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 친하던 교우님들이 권사님에게 전화를 해도 C 권사님은 교회를 떠난 이유에 대해서 끝까지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척의 거리에서 20여 년째 살아가면서 아직도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지 않고 마치 원수 같은 타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때 이후로 굳게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다시 이런 요청이 있더라도 그때처럼 이 원칙을 지키기로 한 것입니다.

이상기 목사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22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