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서 남자화장실을 출입하시는 권사님

얼마 전 90회 생신을 맞으신 S 권사님이 계시다. 그 연세가 되면 신체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젊을 때와 같지 않으나 S 권사님은 그렇지 않다. 아직도 건강하시고 자유롭게 활동하시며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고 계시다.

무엇보다도 권사님을 뵈올 때마다 우리에게 큰 위로와 감동이 되는 것은 권사님의 아름다운 교회 봉사 때문이다. S 권사님은 나의 자랑이기도하며 우리 교회의 자랑이기도하다.

S 권사님은 모태 교인으로서 서울의 종교 감리교회를 담임하셨던 고 신공숙 목사님의 딸이시다. 미국에 이민을 오신 1983년부터 지금까지 필자가 섬기는 교회를 섬기고 계시다. 지난 28년 동안 교회를 섬겨오면서 한 번도 말이나 행동에 실수가 없으셨다. 뿐만 아니라 한 번도 화를 내시거나 큰 소리로 남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동안 교회에 크고 작은 시험이 있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으시고 자리를 굳게 지키셨다.

S 권사님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항상 믿음의 본을 몸으로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언제나 예배 시작 한 시간 20-30분 전에 교회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 있으시다. 남자 , 여자 화장실을 청소하시는 것이다. 교회 봉사 중 아마도 가장 하기 싫고 힘든 것이 있다면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이리라 생각을 한다.

그런데 S 권사님은 그 일을 일 년 이년 하신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계속해서 해오고 계시다. 이제는 누구도 화장실 청소를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S 권사님의 영역으로 모두가 공인하기 때문이다. S 권사님의 손길이 지나간 화장실은 언제나 상쾌하고 아름답다. 정성으로 닦고 또 닦으시기 때문이다.

청소에 필요한 도구나 재료까지도 손수 구입을 하셔서 사용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 남자 화장실을 무시로 출입하는 분은 S 권사님뿐이시다. 누가 부탁을 해서 하시는 일이 아니다. 자원하셔서 하시는 것이다. S 권사님이 청소하시는 모습을 보는 사람마다 감동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성심을 다하여 하시기 때문이다. 대충하거나 눈가림으로 하시지 않으시는 것이다. 화장실 바닥에 떨어진 조그만 먼지 조각이라도 보이면 그대로 지나치지 않으시고 두 번 세 번 허리를 굽혀 손으로 집어내시는 것이다.

몸이 늘 건강하신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허리가 아프셔서 고생을 하시고 계시다. 때로는 며칠 씩 누워 계실 때도 있으셨지만 그래도 주일 예배에 빠지는 일이 없으셨다. 불편하신 몸을 이끄시고 기어 나오듯 하시면서도 교회당에 들어오시기만 하시면 습관적으로 화장실로 향하시는 것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S 권사님이 주님을 섬기는 자세가 이 정도시니 권사님의 신앙인격과 성품이 어느 정도일까를 가늠에 보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 시대에 이런 신실한 믿음의 성도님과 한 교회를 섬기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교회를 섬길 때 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게 되면 실증을 느끼게 되는 때도 있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이 해주길 바라는 때도 있을 것이다. 권사님이라고 왜 그런 생각이 없으셨겠는가? 그런데도 S 권사님은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않으신 것이다. 사명으로 알고서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시는 것이다. 그런 권사님을 뵈올 때마다 머리가 절로 숙여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00세를 향하시는 권사님의 걸음이나 믿음의 자세가 흔들리지 아니하고 변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는 딸 권사가 말하길 “우리 어머니는 100까지도 문제가 없으실 것입니다”라고 말한 대로 지금처럼 우리 곁에 늘 충성스러운 종으로 자리를 지켜주시길 기도하는 것이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8619

K 장로님의 은밀한 봉사

Y 집사님은 치과 병원에서 사용되는 모든 장비와 시설을 설치, 수리하는 사업을 20여년 이상 해오고 있습니다. 필자는 Y 집사님과의 대화를 통해 치과 의사들의 희비 애환을 듣고 배우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의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며 의사만 되면 행복이 보장이 되는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어려운 공부와 오랜 과정을 통하여 그토록 소원하던 의사가 되었지만 다 성공이 보장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심장마비로 42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는 분이 있는가하면 다른 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병원 운영은 잘 하시지만 부부간의 문제로, 자녀 문제로 어려운 당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도박으로 병원을 날려 버린 분도 있으며 중독성 물질로 망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지난 6 개월 사이에 남가주에서 한 때 활발하게 영업을 하던 치과 병원 3 곳이 문을 닫았습니다. 계속되는 경기 불황이 병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병원 렌트비를 감당할 수 없어 고가의 장비들조차 포기하고 빈손으로 병원을 떠나는 것입니다. 필자의 둘째 사위가 의대다닐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의과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면 첫해에 10%의 학생을 잘라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다시 그중 10%를 또 퇴학 조치합니다. 이들은 평생 의사의 꿈을 접어야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의대 1년 동안의 학비가 십 수만 불이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일 학년 때 퇴교를 당하면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2학년을 마치고 퇴학당하면 최소 20여만 불의 빚을 지게 되는데 그것을 평생 갚으려면 큰 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에 뒤지지 않기 위하여 죽기 살기로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의료계가 세계를 리드하며 크게 발전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을 하며 미국에서 공부하여 의사가 된 이들에 대하여 깊은 존경과 신뢰를 하게 되기에 우리의 몸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Y 집사가 특별히 존경하는 몇 분 있습니다. 영업이 아닌 봉사를 목적으로 일 하는 의사입니다. 예를 들자면 수십 년 동안 치과를 운영하면서도 아직도 자기 이름의 집을 소유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지난 주간에 Y 집사님의 소개로 필자도 그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진료실에서 나온 70여세 되어 보이는 환자분이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냥 가도 되시겠습니다” 할머니가 의사를 향하여 말합니다. “돈을 받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괜찮습니다. 특별히 치료한 것이 없습니다” 병원을 나서는 할머니는 이런 독백을 하십니다. “이런 병원은 처음이야! 세상에 이런 의사도 계시네”

Y 집사님은 타운에서 40년 가까이 치과 병원을 운영하시는 K 장로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 장로님은 지난 10여 년 동안 L.A.시 중심가의 홈리스들을 상대로 무료 진료봉사를 해오고 있으십니다. 원래 은밀하게 봉사하기에 동료 의사들은 물론 가까운 사람들도 K 장로님의 이런 봉사를 알지 못합니다. Y 집사님도 K 장로님으로부터 몇 번의 부탁을 받으셨습니다. 자신의 활동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것과 봉사하는 것을 촬영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K 장로님의 이 같은 노력으로 인하여 그의 선행이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8580

교회설립 30주년을 기념하며

지난 1 월 2 일로 필자가 섬기는 평강교회는 교회설립 30주년을 맞았다. 특별한 행사 없이 기념 주일을 보냈다. 이날 여전도회가 필자에게 예배중 선물을 했다. 여전도회 회장 K 권사님이 작은 선물을 필자에게 전해주면서 이런 인사말을 했다. “목사님!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30년만 더 수고해 주세요!”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받은 말이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 귓가에 K 권사님의 인사말이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는 것이다.

지금 60에 들어섰는데 앞으로 30년을 더 목회한다면 90살이 되는데 과연 그 때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10년은 모르지만 30년은 너무 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K 권사님의 말이 마음에 부담이 되며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었다.

이민 교회를 섬겨오면서 한 순간도 긴장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지나왔는데 그 길을 그렇게 멀리 또 가라고 하시는것 같아 고마운 생각보다는 섭섭한 마음까지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말이 다르게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필자를 위해서 계속 사랑하고 기도해 주시겠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면서 하나님이 힘주시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30년 동안 설립교인으로서 필자의 설교를 들으며 단 한 번도 공적인 예배에 빠진 일이 없으셨던 약사출신의 K 권사님의 말씀이기에 결코 가벼운 말로 받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목회자에게 가장 힘들고 큰 고민은 설교에 대한 부담일것이다. 때로는 5 분 설교를 위해서 2-3일 동안 자기와의 씨름을 해야 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한곳에서 강단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두 번째로는 어떻게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던 목사님이 계셨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필자가 소속한 노회에서 가장 성공적인 목회를 하셨던 목사님이 계셨다. 고 윤철주 목사님이셨다. 교회를 설립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노회산하 교회에서 안수집사 임직식이 있어서 참석을 했다가 권면 순서를 맡으셨던 윤철주목사님이 교회와 임직자들을 향해 “나는 이렇게 설교합니다”라는 말씀으로 권면을 하셨다.

같은 강단에서 7년 동안 같은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말이 화살처럼 필자의 마음에 박힌 것이다. 그래 바로 그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존경 받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나도 이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만 해! 하는 결심을 갖게 된 것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쉽게 준비하고 싶은 유혹도 있고 이전에 했던 것을 다시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설교를 준비하다보니 성경의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골고루 전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비로서 설교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것이다.

세상의 많은 직장 중 한눈팔지 아니하고 외길로 달려가면서 한 곳에서 30년간 같은 일을 반복했다면 그 분야에서는 부족할 것이 없는 큰 장인이 되었을 터인데 설교는 그렇지않다. 지금도 매주일 반복되는 설교 시간마다 긴장이 되고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내 실력으로 되지 아니하기에 더욱 주님께 기도로 매어 달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 지금까지 필자가 경험한 것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설교가 선포되는 예배라고 생각을 한다. 이 귀한 사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을 바르게 증거하는 종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8455

고 박철주 목사님을 생각하며

고 박철주 목사님을 처음 만난 곳은 고 차남진 목사님 댁에서였다. 1974년 어느 가을이었다. 당시 엘에이 한인타운에는 한인이 3-4천명 밖에 되지 않아 올림픽 길을 따라 걷다가 한인을 만나면 반가워서 통성명을 했다.

방미중 인 박 목사님은 차 목사님이 시무하던 웨스트민스터장로교회에서 신앙간증을 하셨다. 장로교 합동측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교회와 더불어 성장하였지만 아버지를 존경하지 못한 것은 목회자의 생활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학 졸업 후 개인사업을 시작하면서 교회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사업이 빠르게 번창했다. 사업차 일본 방문이 잦아졌고 사업상 대접을 하고, 받는 생활이 반복되면서 서서히 세상 쾌락에 물들어 갔다. 그러나 계속 번창할 줄 알았던 사업이 어느 순간에 기울기 시작,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벼랑으로 떨어진 것이다.

발더둥쳐 보았지만 회생은 커녕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결국 큰 집을 팔아 작은 집으로, 다시 전셋집으로 그리고 다시 월세방으로 이사할 때는 온 가족의 살림살이가 리어카 한 대에 실릴 뿐이었다.

잘나가던 시절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실패하고 나서는 찾아갈 친구가 없었다. 마땅한 일자리도 없었다. 그러던 중 친구가 서울서 피아노와 풍금하게를 하고 있어 그곳서 외판원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월급은 없고 팔릴때 마다 수당을 받기로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주인이 박 목사에게 편지를 한 장 주면서 충청도의 시골교회를 다녀오라고 했다. 당시 차비조차 없어서 주인에게 가는 차비를 빌려 길을 떠났다. 차를 몇 번 갈아타고 물어 물어서 종착역에 도착하고 나니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정류장에서 2시간을 더 걸어야 했다. 종일 목지도 못하고 지친 몸이지만 풍금을 팔 생각에 산을 넘고 또 넘었다. 드리어 해가 질 무렵 교회를 찾았으나 말이 교회지 오두막 집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교회서 새 풍금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서울로 돌아가려니 이미 밤이 되었고 서울행 버스는 없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 밤을 교회당에서 머물게 되었다. 돌아갈 차비가 없어 누구에게 어떻게 무슨 면목으로 빌려야 하나 생각하니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하고 한심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교회당 벽으로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 슬라이드가 비쳐지고 있는 것이었다.아무런 생각 없이 벽에 비쳐지는 화면을 보다가 너무 놀라고 말았다.벽면에 비쳐진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지나온 일생의 사진들이 영화 속의 필름처럼 지나가는데 아무도 모르고 은밀하게 죄를 범했던 내용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 잘 나가던 시절에 접대 받으며 접대하던 부끄러운 장면들이 가감 없이 비쳐지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회개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화면에 비쳐진 것을 보면서 “예! 맞습니다.저게 나 입니다.예!제가 지은 죄입니다” 하면서 무릎을 손바닥으로 치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그러기를 얼마나 계속했는지 작은 교회당 안에서 엉엉 울며 콧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을 새벽기도회를 위해 교회당 문을 연 시골교회 전도사가 보고 크게 놀란 것이다.

그날 새벽부터 이 교회는 침례교회 오관석 목사님을 강사로 부흥회를 하려는데 첫 시간부터 미친 사람이 교회당을 장악하고 미친 듯 소리 소리 지르며 울부짖는 광경을 보고서 전도사는 강사목사에게 급히 달려가 사태를 알렸다.오목사는 은사체험이 있는 분이기에 교인들에게 “놀라지 마세요. 무서워하지 마세요!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 교회에 나타났습니다”라고 말한 후 박 목사를 앞으로 불러 간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간증하라고 했단다.

그간의 경위와 이 교회를 찾아오게 된 이유 그리고 지난 밤에 그가 체험한 내용들을 간증하면서 박 목사님의 삶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오관석 목사님이 부흥회 강사로 가는 곳마다 간증과 찬양사역을 시작하게 되어 결국엔 미국에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한국에는 자동 슬라이드가 없었는데 미국에 오니 화면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슬라이드가 있어 기념으로 샀다고 하셨다.

그 후 박 목사님은 한인타운에서 부름침례교회를 개척하셨고 세상을 떠나시기전까지 씨에라기도원 원장으로 사역하셨다.이민교회에 큰 자취를 남기고 가신 박 목사님의 찬양이 내 영혼에 메아리치게 하심에 감사드린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8300

윤석전 목사의 집회 계획 포기한 남가주목사회 결단에 찬사를…

남가주에는 한인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40여년 전통의 두 개의 단체가 있다.

목사회와 교회협의회다.누구보다도 목회자들에게 신임과 사랑 받아야 할 이 두 단체가 한 동안 그렇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난 수년 전부터 목사회와 교회협의회에 신선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중∙대형 교회 목사들이 계속해서 회장단으로 등장하면서 그 동안 잃었던 신뢰와 명성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더구나 이 두 단체가 서로 반목하지 않고 함께 손을 잡고 아름다운 사역을 이루어가는 모습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지난 11월28일 오후에 제44대 남가주한인목사회 회장 취임식이 있었다.필자도 주일 오후 피곤한 시간이었지만 참석을 했었다.교회당은 많은 축하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2시간 동안 진행되는 취임식 중 윤석전 목사의 축하 메시지가 전달이 되는가하면 광고를 담당한 목사께서 목사회의 행사 계획을 발표할 때 필자는 귀를 의심해야 했었다.내년에 목사회 중요 행사 중 하나로 서울의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를 초청하여 목회자들을 위한 영성 세미나와 일반 성도들을 위한 집회를 하겠다는 것을 발표하고 있는 것이었다.그 발표를 듣는 순간 아!이래선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힘들여 쌓아온 목사회의 신뢰와 공든 탑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릴 터인데 이를 어찌할꼬 하면서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그 발표를 듣는 순간 앞 자리에 앉아 있던 필자는 더 이상 자리에 머물 수가 없어서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행사장을 빠져 나오면서 44대 목사회의 앞날을 걱정하기 시작한 것이다.더우기 아주 오래전 윤 목사를 강사로 남가주에서 연합집회를 갖을때도 집회 반대 여론이 거셌지만 당시 교협 리더가 이를 강행한바 있고, 그때 남가주교협회관 구입을 위해 작정된 헌금으로 인해 남가주교계에서는 전후 후무한 재정논란에 휘말리는 아픔과 수치를 겪지 않았던가.

필자는 윤석전 목사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한번도 만난 적도, 본적도 없다.그러나 분명하게 아는 것은 한국의 주요 교단에서 오래전에 이단으로 분류되어 있는 목사다.그런데 지난 7일 저녁 내년도 행사중 윤석전 목사의 세미나와 집회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을 미주기독교이단대책위원회 회장으로 수고하시는 한선희 목사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러한 결정은 쉬운 것이 아니다.그런 결단을 하기 까지 많은 진통이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번 결정으로 인해 목사회에 드리어졌던 검은 구름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제44대 목사회 일 년 행사 중 그 어떤 행사보다도 윤석전 목사의 세미나 계획을 취소한 결정이야말로 칭찬과 박수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교계와 목사회를 위하여 어려운 결단을 내려준 박효우 회장과 임원 모두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리며 성탄과 연말을 맞게되어 참 감사하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8138

“나 기도 응답 받았어요!”

1980년 7월과 8월, 목사안수를 앞두고 팜데일기도원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생전 처음 뵙는 노년의 박대희 목사 내외분이 필자가 머문 33호실 맞은 편 건너 방에 거하시면서 일주일간 금식기도를 하셨다. 팜데일은 지대가 높은 사막에 있어 여름이면 몹시 더운 곳이다.

지금은 크리스찬투데이 발행인이신 서종천 목사님(당시는 전도사)도 그 때 기도원에서 함께 금식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같은 처마 밑에서 기도 하는 동안 여러 번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됐다. 대부분 금식기도원에 올라오시는 분들이 당면한 육신의 문제로 오는데 반하여 박 목사님은 다르셨다.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아니하시고 지난 40년 동안 교회를 섬기시면서 늘 마음에 부족하셨던 것을 채움 받고자 오셨다고 하셨다.

당시의 박 목사님은 우리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에 거목과 같은 분이셨다. 그런 성공한 목사님이 어린 저희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뜨거운 기도의 체험과 성령의 은사를 받고 싶어 왔다. 은퇴하면 이런 시간을 갖지 못할 것 같아서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결심으로 왔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 부르짖어도 응답을 받지 못하신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날 이른 새벽에 제 방을 두드리셨다. “이전도사 나 박 목사인데 오늘 새벽에 응답 받았어요!”

문을 열자 기뻐하시며 이런 간증을 하셨다. “기도하는데 비몽사몽간에 예수님이 나타나시어 네가 평생 소원하던 것이 이것이니 받으라고 하시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주님께서 응답을 직접 주시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놀랍고 기뻐 받은 선물을 펴 보는 순간, 실망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선물은 녹이 슬어 휘어지고 토막 나 공사판에 버려진 몇 개의 쓰지 못하는 못이었습니다.

내가 원한 것이 이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순복음교회 C목사님처럼 기도할 때에 신유가 나타나는 것이며, 내가 설교할 때에 아멘 할렐루야 소리로 화답 받는 것이며, 능력 있는 설교자가 되기 위한 말씀의 권능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동안 구한 것이 바로 이것들이다. 이미 너는 복을 받았느니라! 네가 구하던 것들은 지금까지 전하고 설교한 내용들에 비하면 다 이처럼 쓸모없는 것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잘못 구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주님을 만난 기쁨이 크게 교차하면서 마음속에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충만한 기쁨이 임했습니다”

하산 하시는 박 목사님을 배웅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도 금식을 하는 이유가 은혜를 사모했기 때문이다. 정확이 말하자면 능력을 받기 원해서였다. 나의 실력과 노력이 아닌, 그 어떤 보이지 아니하는 부흥사들처럼 능력을 나타내는 전도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내 기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비록 내가 방언을 못해도, 신유 은사를 나타내지 못해도, 이런 목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첫째로, 있으나 마나 한 목사가 되지 않게 해 주시길 기도했다. 비록 유명하지는 않아도 사람과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종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내가 사는 동안 복음만 전하며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세상일 하지 아니하고 교회만 섬기며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금식 기도를 마친 이후 지난 31년 동안 다른 직장 가지지 아니하고 교회만을 섬기면서 살게 하셨다. 기도원에서 헤어진 이후 한 번도 뵙지 못한 박 목사님을 언제 다시 뵈올지 그 날을 기대해본다.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18046

고 차남진 목사님을 생각하며

고 차남진 목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필자가 불치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미선교기관의 초청으로 미국에 온 1973년 11월 LA 공항에서였다. 2년여 가까이 차목사님의 인도로 UCLA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차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세례를 받았다. 74년 어느 주일에 차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때까지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 목사님이 한국의 총신에서 교수로 있던 어느 해 여름이었다. 40여 명의 학생들과 여름 수련회를 위해 계룡산으로 갔다. 물가 그늘 진 곳을 찾아 텐트를 친 곳은 갑사라고 하는 큰 절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우물가를 찾은 신학생들이 그곳에서 수도중인 중들과 만나 논쟁이 시작되었다.

기독교가 참 종교인가? 불교가 참 종교인가? 시간이 갈수록 종교 논쟁은 커지기 시작했다. 양편에서 수십 명씩 떼 지어 큰 소리로 발전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쪽도 수긍할 수 없는 평행선을 그을 뿐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제안을 했다. 우리가 서울에서 교수님을 모시고 왔는데, 이 절에도 큰 주지 스님이 계실 터이니 지금 곧 두 분을 모시고 어느 종교가 진짜인지 대결을 하자고 한 것이었다. 누구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소는 갑사 절 안 마당이었고 시간은 오후5시였다. 학생회 대표가 차 목사님께 이런 내용을 고하고 곧바로 절로 향했다. 절 안마당에는 수도승 수십 명이 한 편에 자리하고 있었고 반대편으로는 신학생들이 자리를 했다.

연단에 먼저 오른 분은 갑사의 주지승이었다. 놀란 것은 스님이 두 시간 동안 기독교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하여 교회가 잘못한 사건들을 조목조목 들이대며 비판했다. 나중에 안 것은 그 스님이 비교종교학을 연구하시는 분으로 신학교에 3년 동안 다녔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갑사 주지 스님은‘예수는 세계 3대 성자와 함께 성인이시다’라고 선언을 한 것이다.

차 목사님 차례가 되어 강단에 섰지만, 20대의 젊은 나이에 고국을 떠나 유학했기에 불교에 대해 별로 연구한 것이 없어 비판할 수가 없었다. 차 목사님은 단 5분 동안 말씀을 하셨다. 지금까지 주지 스님께서 기독교에 대해 비판하신 모든 내용은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그러나 스님께 한 가지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 결론으로 말씀하시길, 예수는 세계 3대 성자와 함께 성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성자이십니까? 이에 대하여 스님은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면 다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성자이신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실까요? 다시 스님이 말을 했다. 성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성자가 아니며 성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 묻겠습니다.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 외에는 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차 목사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님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여 그 자리에서 법당 안으로 급하게 피하셨다고 합니다.

순간! 두 손을 높이 치켜든 신학생들이“할렐루야”를 힘차게 외치며 기뻐했다. 그 때의 함성과 감동이 오랜 시간이 지난 이곳 미국에까지 나의 귓전에 종종 메아리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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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모 목사님을 생각하며

나는 가끔 장원모 목사님을 생각한다. 인천에서 목회하신 목사님으로만 알고 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년이 지나도록 장 목사님을 나의 삶에서 지우지 못하는 사연이 있다.

매주 월요일이면 7명의 목회자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며 교제의 시간을 갖던중 S교회를 담임하시는 O목사님이 부흥회 강사로 모셨던 장 목사님의 간증을 모인 동역자들에게 전한 것이다.

인천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재정 자립이 충분치 못할 때였다. 넉넉지 못한 목회비로 생활이 어려웠다. 당연히 목사님 가정이 기거하는 사택도 형편이 좋지 못했다. 점점 커가는 아이들로 인하여 어려움은 커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장 목사님은 특별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 기도회가 끝나면 교인들이 다 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기도의 제목은 이러했다. 왜 주의 종이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까? 자녀들에게 넉넉한 주거공간이 필요합니다. 종의 가정에 집을 주시옵소서!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인의 울음소리가 강단 아래서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순간 장 목사님은 부끄러운 생각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교인들이 간 줄 알고 기도 했는데, 한 여자 교인도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여자는 여전도회 회장 권사였으며 더 충격적인 것은 교회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장로님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도둑질하다가 현장에서 잡인 것처럼 창피했다고 하셨다.

사표를 준비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수일 후에 장로님의 전화가 있었다. 내일 예배 후 당회를 소집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조용할 수가 없지, 교회를 떠날 각오를 하고 다음 날 당회에 임했다. 그런데 당회 소집을 요청한 장로님이 목사님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리고 용서를 구했다. “목사님! 잘못했습니다. 목사님은 가난하게 사셔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그러면서 사택 구입비의 절반을 그 장로님이 내어 놓으셨고 나머지는 당회의 결의로 목사님의 사택을 구해 드리기로 한 것이다.

그 간증을 듣고 있는데 뜨거운 감동이 왔다. 그렇지. 왜 나도 진작에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는가? 주의 종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부끄러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 필자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즉시 그 날부터 장 목사님이 하셨던 기도를 하기로 한 것이다. “가족이 다섯이 아닙니까? 그러니 세 아이들이 사용할 각자의 방과 우리 내외가 사용할 방이 있어야겠습니다.

장 목사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나의 기도도 들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부끄러운 생각에 집 사람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만 2년여동안 집을 주실 것을 반복해서 기도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방 네 개짜리 2층 집을 주신 것이다. 나도, 가족 모두 놀랬다. 교회 교인들도 놀랐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다 놀랬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신 것이다.

그 때의 기도를 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안다. 아직도 작은 셋방살이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동기 부여를 하게 한 인천의 장원모 목사님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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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필도 목사님께 받은 은혜

교회를 설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평소 알고 지내던 박계로 장로님이 전화를 주셨다. 박 장로님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동양선교교회 협동장로로 봉사하고 계셨다. 부산서 목회하는 사위가 LA를 방문했는데 설교할 교회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LA 한인타운에는 지금처럼 교회들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는 정 목사님의 인지도가 지금처럼 세계적 목회자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박 장로님이 섬기는 교회에서도 예배 초청을 받지 못하셨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분을 교회에 모신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처음 받은 청이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주일예배 강사로 모셨다. 정 목사님은 부산에서 수영로교회를 개척하면서 경험하신 내용을 간증하셨다. 매일 새벽기도를 마친 후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돈 것처럼 교회당 주변의 땅을 밞으며 기도하신대로 성전의 터를 넓혀 갔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민 교회가 교회당 건물 구입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엄두도 내기 어려운 때였다. 정 목사님이 다녀가신 후, 우리도 빌려보던 흑인 교회당 건물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일 새벽기도회를 마치면 참석한 모든 교인들이 목사인 저의 뒤를 따라 교회당 건물을 한 바퀴 돌았던 것이다.

그러기를 4년여 동안 계속했다. 미국인 성도들이 우리가 하는 행동을 보고서 이상하게 여겨서 질문을 해왔다. 교회당을 우리에게 주시길 기도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그렇게 시작이 되어 양 교회가 건축위원회를 구성하고 매입 절차를 6개월간 협상하게 되었다.

약간의 다운페이먼트를 지불하고 에스크로를 오픈하는 과정에서 우리 교회 내에 문제가 발생했다. 작은 교회가 어떻게 큰 건물을 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30만 불의 다운페이먼트를 누가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교회는 건축헌금을 작정하는 과정에서 큰 위기를 맞았다. 교인의 절대 다수가 교회당 구입을 반대하고 교회를 떠나게 되므로 존망의 귀로에 서게 됐다. 여기저기서 평강교회가 문을 닫았다는 소문도 들려오고 있었다.

그 때의 절망감은 표현할 길이 없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목회를 더 이상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미국교회에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교회건물 구입으로 인한 광풍으로 남은 교인들의 마음이 모두 상처를 크게 받고 있을 때였다. 그런 일이 몇 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신 것이다. 우리가 구한 것보다 더 좋은 환경과 조건의 건물을 강권적으로 허락하신 것이다.

큰 환란을 당한 지 두 달 만에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성전으로 입당을 하게 될 때,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역시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믿고 구한 것은 다 받은 줄 알라고 하신 말씀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웃서 교회를 담임하시는 어느 목사님은 평강교회가 건물을 받은 것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은 기적이라고 했다.

이제 5개월 후면 평강교회 설립 30주년을 기념하게 되며 교회당을 구입한지 25주년이 된다. 3년 후면 건물 페이먼트도 끝이 나게 되어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 봉헌 드리는 감격을 꿈꾸게 하셨다. 목회 초창기에 정필도 목사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이 같은 은혜와 축복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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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헌금

1970년대 중반 LA 한인타운에서 성업중인 북경식당을 경영하는 K씨 성의 여자분이 계셨다. 서울에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다가 1960년대 후반, 남미농업이민단 모집에 지원해 두 아들과 함께 배로 아르헨티나에 도착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평소 영화를 좋아했던 K여사는 누구든지 미국 땅에 들어가면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화려한 삶을 사는 줄로 믿었던 것이다.

남미 농업이민단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서 “남미” 라는 끝에 “미”자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미국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미국인줄 알고 도착한 곳이 미국이 아니었다. 외국생활의 경험이 없는 K여사와 어린 두 아들이 살아가기에 너무 힘이 드는 것이었다.

이주 정착금으로 가져온 돈은 오래가지 않아 동이 나고 말았다. 생계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엇이든지 살기위해서 해야만 했던 것이다. 언어도 통하지 아니하고 자본도 없었던 것이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리에서 좌판을 벌이고 과일을 파는 행상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K여사는 미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연구하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미국행 비자를 얻게 된 것이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Los Angeles 공항에 도착했다.

미국에 가면 모든 것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연하였던 것이다. 공항에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까지 걷다가 걸음을 멈춘 곳이 모텔이었다.

어린 두 아들은 피곤에 지쳐 곧바로 깊은 잠에 들었지만 어머니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모텔비를 주고 남은 돈을 세어보니 84불이 남았다. 이 돈으로 2주일 먹고 죽을 것이라면 차라리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좋은 일이나 한번 하고 죽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 밤에 밖으로 나가 교회당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돈을 교회당 편지함 속에 집어넣고 돌아왔다. 내일 아침부터 세 식구가 굶어야 하고 결국에는 함께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큰 설움이 통곡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잠들었던 두 아들이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깨어나 사연을 듣게 되었다.

더 이상 너희들을 먹여 살릴 자신이 없어 죽기를 결심하고 남은 마지막 84불을 하나님께 바치고 돌아왔다고 말하자 두 아들이 엄마를 부둥켜 앉고 울음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 어린 줄만 알았던 큰 아들이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더니 주유소에서 기름 넣어주는 일을 얻은 것이었다.

얼마 후 작은 아들도 같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모은 돈으로 식당을 하게 되었다. 이상한 것은 시작한 날부터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16 그릇을 팔면 한 그릇이 재료비고 나머지는 남는 것이라고 하였다.

K여사는 한국에서 식모를 둘이나 두고 살아 부엌일을 잘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아무래 생각해도 자기가 만든 음식을 맛있어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어느 날 어떻게 큰돈을 벌수 있었는가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바친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복을 주셨다고 고백했다. 후에 그 교회당을 찾으려고 몇 번 시도하다가 찾지 못했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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